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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9-10-06 (일) 12:40
분 류 로마서
첨부#1 2019년_로마서_제2강-1.hwp (28KB) (Down:7)
ㆍ추천: 10  ㆍ조회: 91      
IP: 175.xxx.122
[2019년 로마서 제2강]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세상

2019년 로마서 제2강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세상                

말씀 / 로마서 1:18-32
요절 / 로마서 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지난 주 월요일 NASA 짐 그린 박사는 ‘2021년이 되면 화성에서 생명체의 존재에 대한 확답을 얻을 것인데, 만약 외계생명체가 있다면 코페르니쿠스에 맞먹는 혁명적인 의미의 변화가 올 터인데, 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뉴스에는 항상 올라오는 댓글이 있습니다. “외계생명체가 발견된다면 기독교의 진리는 설 자리를 잃고 사라질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대댓글이 달렸습니다. ‘만약 생명체가 발견되지 않는다면, 기독교의 진리가 사실임을 증명하는 것인가?’ 생명체가 있든지 없든지, 그것이 성경 말씀의 참과 거짓을 가르는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fact의 문제가 아니라 해석의 문제입니다.

‘외계생명체가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보다 훨씬 중요한 질문이 ‘하나님의 진노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면 당연히 불의에 대한 진노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없다면 복음은 필요 없는 것입니다. 1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경건하지 않음’이란 godlessness로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살아가는 모든 생활을 말합니다. ‘불의’ ‘wickedness'는 공공연히 행하는 죄를 말합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거나 함부로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나타날 것이다’, ‘장차 지옥에서 심판을 받을 것이다’라는 미래형이 아니라 현재형 ‘나타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늘로부터 나타나고 있으니,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질병이나 사고나 재난을 통해 하나님의 진노를 봅니다. 노아시대의 홍수나 소돔과 고모라에 임한 불재앙이 대표적인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작은 사건을 통해서도 봅니다. 목자의 권면을 듣지 않고 엄청 속 썩이던 양이 오토바이 사고가 나서 병원에 실려 가면, 죄인들을 그냥 두지 않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길을 봅니다. 오래전 저는 일대일 성경공부 따위는 더 이상 하지 않겠다며 바이바이 하고 시위하러 나갔는데, 경찰서에 끌려가서 밤새도록 괴롭힘 당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구나’, 여름수양회에 갈 터이니, 제발 풀어달라고 빌었습니다. 악을 행할 때마다 매번 보여 지는 사건들이 있다면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확신할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와 반대로 흐를 때가 많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이 득세하고 의인들이 몰락하기도 합니다. 1세기 로마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의 고민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믿고 경건하게 사는 자들은 박해를 받고 세상에서 낙오했습니다. 반면 황제숭배자, 우상숭배자들은 겁나게 잘나갔습니다. 끼리끼리 인맥 쌓고 진급 하고 매일같이 파티를 열고 거침없이 몸이 원하는 대로 즐기며 사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무엇을 보고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고 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까!

19,20절을 보십시오.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그들 가운데 주셨기 때문입니다. 신학자 벌코프는 말했습니다. “인간은 치유하기 힘들 정도로 종교적인 존재이다.” 인간은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빈 공간, 영혼의 소유자입니다. 또한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습니다.(20) 그러므로 ‘저는 하나님 계신 줄 몰랐는데요’라고 핑계할 수 없습니다. 자연의 신비는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분명히 증거합니다. 의학이나 자연과학을 연구하다가 창조주 하나님을 믿게 되는 이유가 그러합니다. 천문학자 프레드 호일은 항성에 있는 이산화탄소가 저절로 산소로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 후 무신론을 포기했습니다. CO₂가 ‘우리 지겹도록 오래 함께 했으니 이제 헤어집시다’하며 C와 O₂로 저절로 쪼개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조선대 의대 교수였던 박다윗 목자는 달팽이관을 연구하면서 하나님을 영접했습니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아이폰을 보며, ‘와, 신기하다. 이거 누가 만들었을까?’ 생각을 떠올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모세혈관 하나만 따져보아도 정말 신비롭습니다. 성인 한 사람 모세혈관의 총 길이가 100,000km에 달한다고 합니다. 10월 24일부터 양양에서 연어축제가 열리는데요, 5년 전 풀어놓은 치어들이 매일 14km, 매년 5,000km 이상을 여행하여 태평양을 한번 휘돌고 돌아옵니다. 엄마물고기도 없이, 내비게이션도 없이, 자기들끼리만 여행을 떠나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그 길을 정확히 돌아옵니다. 학습능력이 아닌 원래부터 그리 설계된 것을 보여줍니다. 금세기 최고의 무신론 철학자 앤터니 플루는 우주의 미세조정이나 생명의 기원을 생각할 때,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며 철학적으로 회심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지으신 세계를 있는 그대로 그리고 충분히 관찰하면 당연히 하나님을 알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하지도 아니하며 살아가고 있다면(21), 그것은 마치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것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누구나 볼 수 있는 빛의 세계를 보지 못하고 캄캄한 지하세계에 갇혀 살아가고 있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그와 같이 은혜의 세계, 섭리의 세계, 하나님의 영광의 세계를 보지 못하고 불신과 허무와 운명의 세계에 갇혀 살고 있다면, 그는 진노아래 살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나 마음껏 공기를 마시며 건강하게 살 수 있는데, 호흡곤란으로 병든 생활을 하고 있다면 비참한 것입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과 함께 호흡하면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으로 열매 맺는 인생을 살 수 있는데, 이기심과 염려와 두려움으로 메마른 인생을 살고 있다면 그 자체가 비극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으면, 그 생각은 허망하여지고 미련한 마음은 어두워집니다. 22,2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소위 똑똑하다고 소문난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 대신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곳에 앉아 멀리 보고 싶은 욕망으로 독수리 모양의 우상을 만들어 섬겼습니다. 치명적으로 강한 자가 되고 싶어 뱀신을 섬겼고, 모든 사람위에 군림하고 싶어 사자 우상을 섬겼습니다. 수많은 자손을 퍼뜨리고 싶어 개구리 우상을 섬기고 부자가 되고 싶어 맘몬신을 섬겼습니다.  
우상은 사람들이 만든 것이며, 언젠가 녹슬고 부서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와 같이 우상숭배자의  인생의 결국은 썩어질 인생, 후회스런 인생이 되고 맙니다. 이는 로마인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돈이나 권력, 사람들의 인정을 인생목적 삼아 달려가는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가난한 인생, 소위 흙 수저의 인생이 저주받은 인생이 아닙니다. 가난한 가운데에서도 별처럼 빛나는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반면 다 가진 위치에 있으면서도 부끄러운 영혼으로 사는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흙에 속한 인생목적, 썩어질 인생목적을 붙들고 사는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는 비참한 인생입니다. 우리 인생에는 반드시 결산이 있습니다. 열심히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을 위해 사느냐입니다. 썩어질 것을 위해 사는 자들은 망하는 길을 가고 있는 것이며,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들이 승리의 인생, 복 받은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사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며 살게 하시는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둘째로, 마음의 정욕을 따라 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2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욕되게 하셨으니” ‘정욕’이란 하나님의 법을 넘어서는 욕망입니다.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셨다는 말씀은 더러운 욕망을 따라 살고 있는데도 아무 재앙이나 불이익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아프지도 않고 교통사고도 없고 악몽을 꾸지도 않고 들통 나서 수치를 당하지도 않고 말씀을 들어도 전혀 찔림으로 와 닿지 않는 것입니다. 죄 짓는 사람은 환상적인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하나님 편에서 보면 가장 무서운 진노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머리끝까지 화나면 어떻게 합니까? 불을 뿜어내고 죽일 듯이 달려들 때에는 애정이 살아있고 희망을 가질 때입니다. 애정과 기대가 완전히 식어버리면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관심을 끊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은 자식을 원수로 여기고  20년 넘게 연락 안하고 살고 있습니다. 목자가 양에 대해 화가 머리끝까지 나면 나타나는 증상이 말도 안하고 찾아가지도 않습니다. 모임이 있어도 초청하지도 않고 소감 쓰라고 푸쉬하지도 않습니다. 카톡으로라도 싫은 소리 하고 이리저리 달라붙어 힘들게 십자가를 지우려는 그 때가 나에 대한 애정과 희망이 살아있을 때입니다.
은혜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왜 그들을 내어 버려두는 것입니까? 25절을 보십시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질서가 뒤바뀌어져 있으면,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인정이나 기타 다른 것이 중요하게 생각되면, 하나님의 어떠한 손길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마음을 풍성케 하려고 축복을 주면 자기가 잘해서 얻은 것인 양 자기 의와 교만거리로 삼습니다. 겸손케 하려고 조금 연단하면 자기를 미워한다며 이를 갈며 원망합니다. 축복을 받아도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알지 못하고 고난을 받아도 깨어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습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고, 저들은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정욕의 죄를 지을 때, 자신의 행동을 부끄럽게 생각하기보다 짜릿하고 아름답게 생각합니다. 분위기 있는 호텔이나 아름다운 휴양지에서 죄를 짓는 사람들은 멋진 로맨스로 생각합니다. 당시 로마에서의 동성애는 로마 특권층의 표시였습니다. 당시의 동성애는 ‘나는 여기까지 즐길 수 있는 사람이다’는 가진 자의 쾌락의 상징이었습니다. 15명의 로마황제 중에서 14명의 로마황제가 동성애를 했으며, 고대의 철학자들이 데리고 다니는 미동, 잘 생긴 청년들 대부분은 낮에는 학생, 밤에는 동성연애 파트너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동성애를 즐기는 사람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나도 저렇게 갈 데까지 가서 즐겨봤으면 좋겠다!’ 요즘 일부 연예인이나 고위층 자녀의 마약소지가 뉴스에 등장하는데, 그들을 향해 부러운 눈으로 보는 시선들이 상당히 많다고 합니다. ‘나도 저들처럼 외국으로 돌아다니면서 해볼 것 다 해봤으면 좋겠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부러운 욕심’이 아니라 ‘부끄러운 욕심’이라고 정죄합니다. 정욕은 양심을 부끄럽게 하고 가정을 부끄럽게 하는 더러운 욕망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더럽히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게 만드는 부끄러운 욕망입니다. 27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받습니다. 치명적인 성병에 걸리기도 하고 건강이 망가지기도 합니다. 몸, 곧 생활이 무너집니다. 청년의 때에 정욕의 죄에 빠지면 가지고 있던 비전과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영적인 소원도 잃어버리고 노아시대 사람들처럼 육체가 되어버립니다. 마음의 정욕에 자신을 방치하면 경건한 가정의 주는 축복과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본래 성은 육체와 기질이 다른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하고 연합하도록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연합을 통해 생명을 낳고 키움으로써,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이라는 여러 관계의 끈이 생김으로써 가정을 견고히 묶어주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를 통해 인격도 성숙해지고 깊이 있는 사랑의 세계로 들어가게 합니다. 성은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는 인간에게는 부끄러운 욕망의 분출구이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경건한 가정을 이루는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음란의 세력이 넘쳐갈수록 경건한 가정은 복음의 능력을 힘있게 드러내는 통로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저희를 축복하사 경건한 믿음의 가정들을 계속하여 세워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셋째로, 상실한 마음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는 것입니다. 2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도스또엡스키는 말했습니다. “만일 사람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저지르지 못할 죄는 없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면 상실한 마음대로 살게 됩니다. ‘상실한 마음’이란 죄를 죄로 느끼지 못하는 타락한 마음을 말합니다. 29-31절을 보십시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모든 불의’란 하나님의 주권을 망각하고 자기 좋을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추악은 악을 행하는 것이며, 악의는 마음으로 품는 것입니다. 탐욕은 끊임없이 더 많이 가지려는 욕망입니다.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을 탄식케 할 정도로 끈질긴 죄문제였습니다. 시기, 분쟁, 살인은 연속적으로 연결된 죄문제입니다. 시기심을 회개하지 않으면 분쟁으로 번지고, 분쟁이 커지면 살인으로 발전합니다. 창세기의 가인이나 사무엘서의 사울이 대표자입니다. 사기는 낚시꾼이 물고기를 잡기 위해 쓰는 미끼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자기 유익을 위해 상대방을 교묘히 속이는 것입니다. 악독은 고의적으로 악한 일을 꾸미는 것입니다. 수군수군하는 것은 약점이 될 만한 정보를 퍼뜨려서 흠집을 내는 것이고, 비방은 가짜뉴스를 만들어 흠집을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는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자들입니다. 능욕하는 자는 무례한 말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입니다. 교만은 스스로를 남다르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만 진실과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고, 자기만 고상하게 사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자랑하는 자는 약장수가 과장광고를 하듯이 자신을 부풀리는 사람입니다. 악을 도모하는 것은 악한 계획을 여러 사람들과 함께 모의하는 것입니다. 부모를 거역하는 자는 부모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불손한 언행을 내뱉는 자입니다. 우매한 자는 선인지, 악인지, 한마디로 똥인지 된장인지 분별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자기에게 유익이 되면 선, 자기에게 손해가 되면 악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배약하는 자는 상황에 따라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입니다. 무정한 자는 마땅히 돌볼 의무가 있는 사람들을 돕지 않는 사람이며 무자비한 자는 불쌍히 여겨야 할 사람을 돕지 않는 사람입니다.

21가지의 모습은 당시 로마사회의 영적 현주소였습니다. 로마는 겉보기에는 풍요롭고 활기 넘치는 문명사회처럼 보였으나,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상실한 마음을 따라 병든 인생을 사는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자기 유익과 영광을 위해 어제는 끼리끼리 모이는 동지였다가 오늘은 수군거리며 비방하는 그런 세계였습니다. 무정하고 무자비한 정글 같은 도시였습니다. 선과 악의 개념이 뒤죽박죽되어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헷갈리는 혼돈의 도시였습니다.
이는 로마의 문제만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모든 세계의 문제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 문제의 뿌리이기도합니다. 탐욕을 제어하지 못하는 거기에 자본주의의 위기가 있습니다. 교만하고 수군수군하고 비방하는 거기에서 정보통신시대의 어둠이 있습니다. 자기주장을 정당화시키려고 만들어내는 너무 많은 정보들은 무엇이 참이며 무엇이 거짓인지를 헷갈리게 하고 불신과 피곤증에 빠지게 합니다. 지식과 능력이 없어서 위기를 맞이하는 것이 아닙니다. 환경의 위기가 얼마나 심각하며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10대 소녀도 다 알고 있습니다. 북한의 핵문제가 모두에게 얼마나 치명적인지 모두가 다 압니다. 그럼에도 어려운 것은 인간 안에 있는 상실한 마음,  탐욕, 두려움, 악의, 교만, 무정, 무자비, 온갖 어두움 문제를 직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런 말씀을 우리 스스로에게 냉정하게 적용해보면 불편한 심정이 듭니다. 외부세계를 향해 들이댈 때에는 신나지만, 우리 스스로에게 들이대는 것은 피하고 싶어집니다. 시기, 교만, 자랑, 수군수군, 배약, 무자비..., 걸리는 것이 한 둘이 아닙니다. ‘사람 사는 것이 다 그런 거야, 그게 인간이야!’ 얼렁뚱땅 적당히 넘기고 싶어집니다. 불편한 진실을 만날 때, 복음을 믿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달려갈 길이 갈라집니다. 믿는 자들은 더욱 복음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죽으신 그 사실을 또다시 감사하고 더욱 깊이 의지하게 됩니다. 자기 의와 자기 고집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아들을 의지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기도합니다. 거기에서 죄사함을 받고 성령의 음성을 듣고 죄성을 거슬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거룩한 소원을 얻습니다.

반면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는 자들은 어떠한 길을 갑니까? 3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저들은 하나님이 싫어하는 줄 뻔히 알면서도 그 일을 행하고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고 여깁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솔직한 거야 낭만이야 특권이야!’ 죄를 죄로 인정하면 자기의 악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삶의 기준, 삶의 스타일과 인생목표, 다 바꾸어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하는데, 저들은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짓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말합니다. 그들은 아무리 죄를 많이 짓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을지라도 하나님께로 돌아갈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이미 진노아래 있는 자들이며, 최후의 심판 날 영원토록 타오르는 지옥불에 던져지는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인정하던, 인정하지 않던,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과학기술의 발전이나 제도의 개혁이나 경제부흥이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복음만이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합니다. 복음은 마음의 정욕대로 살던 자를 구원하고 상실한 마음을 가진 영혼을 회복시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로마를 부러워하지 아니하고 불쌍히 여기는 사도 바울의 시각으로 우리 시대를 바라보고 상한 마음을 가지기를 기도합니다. 복음을 의지하고 복음을 증거하는 하나님 백성들로 살게 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름아이콘 주에스더
2019-10-09 21:38
은혜로운 메세지 읽고 힘을 얻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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