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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0-01-26 (일) 13:01
분 류 로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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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로마서 제13강] 말씀을 통한 구원의 역사

2020년 로마서 제 13 강        
말씀 / 로마서 10:1-21
요절 / 로마서 10:13

말씀을 통한 구원의 역사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으리라”
바울은 동족 이스라엘의 구원을 간절히 원했습니다.(1) 1차 전도여행을 보면 어느 곳을 가든지 제일 먼저 유대인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가는 곳마다 박해를 받았으면서도 마케도냐 이방인 성도들을 설득하여 심각한 기근에 부딪힌 예루살렘을 위해 구제헌금을 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바울을 욕하고 박해했으며, 금식 특공대까지 결성하여 바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들이 왜 복음에 대해 마음을 열지 못한 것입니까! 오늘날은 성경의 예언대로 기독교 복음이 땅 끝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2000여년전 예수님과 사도들의 하셨던 말씀들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복음에 대해 마음을 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왜 복음에 대해 마음을 열지 못하는 것입니까!

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 열심을 가졌으나 지식을 좇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열심은 놀라웠습니다. 할례하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고통입니까! 그런데도 대대로 할례를 행했습니다. 모세오경을 암송하고 금식과 구제를 했습니다.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39가지 항목을 정하고 그것을 일일이 실제 생활에 적용했습니다. 안식일에 음식 만들고 탁구 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불경한 짓이었습니다. 열심으로 따진다면 대한민국 또한 열심공화국입니다. 어린 아이 때부터 학원을 돌며 어학과 한두 가지 예체능을 익히고 선행학습을 하며 부지런히 달려갑니다. 대학생들에게 인생 목표에 대해 물어보면 ‘열심히 살아야죠’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무엇을 위해 열심히 살겠다는 것인지 다시 물어보면 그것은 앞으로 찾아봐야 할 것 같다고 말합니다. 아무튼 열심히 놀고 열심히 공부하고, 뭐든 열심히 해보겠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열심’은 자동차의 엔진처럼 중요합니다. 열심을 가져야 양들도 돕고 공부도 잘하고 새 역사를 만들어냅니다. 설렁설렁, 대충으로는 아무 것도 이루어내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열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지식입니다.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동차가 길을 제대로 모르면서 속도만 올린다면 큰 사고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열심을 가졌으나 올바른 지식을 갖추지 못했을 때 구원을 얻지 못했습니다. 이 지식은 세상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에 대한 지식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노예로 살아가던 이스라엘을 바로의 압제에서 구원하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특별한 선행을 하였거나 완벽하게 율법을 지켰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셨고 그들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셨던 말씀대로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향해 감사하는 마음, 순종하는 마음으로 충만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웠습니다. 하나님의 긍휼보다 자기들의 특별함을 자랑했습니다. 특별한 조상을 둔 것을 자랑하고 특별하게 할례를 행하고 특별하게 안식일을 지킨 것을 자랑했습니다. 세상의 어떤 민족도 하지 않은 것을 하였기에 특별히 의롭고 경건한 민족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스스로 의롭다 생각하였기에 하나님 앞에 교만해졌습니다. 죄인들을 구원하러 오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결국에는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립니다. 자기 의를 내세우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합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십니다.(4) ‘마침’이란 end, 최종목적지입니다. 율법은 그리스도에게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율법을 제대로 지키려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찾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율법의 정신인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완전히 드러내셨습니다. 율법을 지켰다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지 않은 사람은 실은 율법의 본질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5-10절에서 바울은 율법으로 말마임은 의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비교 설명하고 있습니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는 레위기 18:5절 말씀처럼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온전히 지키는 것입니다.(5) 모든 율법을 하나도 빈틈없이 지키는 것, 율법을 통해 의로와지는 길입니다. 미션 임파서블입니다. 카이스트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 어떤 형제와 말씀공부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불교쪽에 관심을 두고 있었던 그에게 왜 성경공부를 하고자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해탈은 너무 어려워 보이고 믿음을 말하는 기독교는 훨씬 쉬울 것 같아서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사는 것이 어려운 것처럼,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가 그러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구약시대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구원의 원리로 제시하였다가, 현실적으로 어려움에 부딪히다보니 신약시대에 와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로 터닝하신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말씀했습니다. 6-8절 말씀은 신명기 30:11-14절 말씀을 변형시켜 인용한 것입니다. 신명기 30:11-14절은 하나님의 명령은 어렵지도 않고 까마득히 멀리 있는 것도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늘을 올라가서 내려올 필요도 없고 바다 밖으로 건너가서 가져와야 할 만큼 율법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와 매우 가까워서 우리 입과 마음에 있으니 행할 수 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모세는 신명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을 예고했습니다. 31,32장에 가면 율법에 불순종하여 징계를 받아 포로로 끌려갈 터인데, 그때 하나님의 긍휼을 믿고 회개하여 돌이키도록 노래를 만들어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신명기 30장에서 율법이 쉽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이 성취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신명기의 모든 복이 이루어질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7,8절에서 율법대신 그리스도로 바꾸어 인용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어떠한 행위나 공로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마치 하늘에 올라가서 그리스도를 모시고 내려오는 특별한 행위나 무저갱에 내려가서 그리스도를 모시고 올라오는 공로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내려오셨기 때문이요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다만 아무 조건 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믿음으로 받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이 바울이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입니다.(8)

하나님 나라는 모든 이들을 향해 활짝 열려 있습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들의 것이라 말씀했습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하나님의 구원은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시다. Jesus is the Lord!' 이 고백은 1세기 로마제국과 충돌했습니다. 로마제국의 Lord는 가이사였기 때문입니다. 로마제국은 황제를 구원자로 인정하고 황제에게 경배하기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거부했습니다. 로마황제 가이사가 아무리 커다란 부와 권력을 가졌을지라도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해줄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참된 왕이시며 참된 주가 되심을 믿고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시다!’,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사람은 구원을 얻습니다.
구원이 얼마나 쉽고 간단합니까!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율법을 암송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을 할 수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마음으로 믿지 아니하고 입으로 시인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오랫동안 기독교 신앙 전통가운데 살아왔으면서도 이것을 어려워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강력한 말씀의 감동이 없어서, 확실한 기도의 체험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변명합니다. 지금 현재의 처지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만한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신앙인답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들로 인해 회의에 빠져서 그렇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마음으로 믿지 못하고 입으로 고백하지 못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약속하신 말씀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신실함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와 세상에 대한 지식은 많은데,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보다 인간적인 생각이 머릿속을 채우고 있습니다. “부끄러운 허물과 죄악이 단지 믿음으로 고백한다고 용서받을 수 있는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했다가 발목잡히는 것은 아닐까’ 자기 생각과 염려와 두려움에 붙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성경에 이르기를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사야서 28:16절 말씀에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이 보증하신 구원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결코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신 분이십니다.(12) 예수님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든 사람에게 차별을 두지 않습니다. 이는 인종, 신분, 계급, 외모, 부와 권력, 어떠한 차별을 두지 않고 구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144,000명 선착순! 그런 분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특정 민족, 유대인들의 민족신도 아닙니다. 불행하게도 이스라엘은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신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마치 한 지붕아래 있는 자녀가 부모의 마음을 오해하며 살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저들은 몇 가지 이유를 앞세워서 자기들만 구원받아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지 2,000여년이 지났건만, 여전히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디 그들만 그렇습니까! 이단에 사로잡힌 자들도 그러합니다. 자기들만 특별한 열심, 특별한 모습을 보였으니 자기들만 특별하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며 구원의 도리를 어그러뜨립니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으나 실은 부요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한 자들입니다.

누가 구원을 얻습니까! 1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어떤 이들은 ‘이렇게 구원이 쉬워도 되는가?’ 의문점을 제기합니다. 기독교의 구원을 값싼 구원처럼 보이게 하는 말씀이라며 거부감을 갖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만큼 하나님의 부요하심을 증거하는 말씀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풍성하신 긍휼과 끝없는 사랑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 말씀에 누구든지 이름을 넣어보십시오. ‘북한의 김정은이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으리라’, 누구든지에 누구를 넣을 수 있을까요! 혹시 ‘이 사람만큼은 절대로 구원받지 못할꺼야! 절대로 변화될 수 없어!’ 확신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로인해 소망을 끊어버렸거나 판단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 사람 이름을 ‘누구든지’에 넣어 읽어보십시오. 하나님의 긍휼과 희망을 담은 말씀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기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함께 하기를 힘들어합니다. 유대인들은 유대인대로, 헬라인들은 헬라인대로 자기 기준과 다른 상대를 향해 비판하고 정죄합니다. 세상이 갈수록 삭막해지는 것은 사악한 죄인들이 점점 많아지기 때문이 아닙니다. 조금 다르고 조금 앞서있다는 이유로 자기의를 주장하며 긍휼 베풀기를 거부하는 의인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허랑방탕하게 살던 탕자가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 첫째는 돌아온 둘째를 위해 잔치를 베푸는 아버지를 향해 분노합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어떻게 살진 송아지를 잡을 수 있나요!”(눅15:29,30) 아버지가 그를 향해 말씀합니다. “애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눅15:31,32) 형의 마음과 아버지의 마음이 다르듯이, 유대인들의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이 다릅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도 멸망하지 않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 당신의 나라에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를 위해 하나뿐인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도록 하심이었습니다.(요3:16) 세리같은 죄인에게도 문을 열어주시고 사마리아 여인에게도 문을 열어주십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사 부요하게 하시는 하나님, 그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부요하신 하나님, 의로우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받기에 참된 희망이 시작됩니다. 우리 영혼에 생명력과 스피릿이 충만한 때를 보면 이 구원의 도리가 살아있을 때입니다. 나를 향한 구원의 도리를 기억할 때, 이기심과 세상 욕심을 넘어 긍휼을 품은 자리에 설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소망을 품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은혜의 샘물, 긍휼의 샘물을 세워주심으로써 죄와 죽음으로 말라버린 세상을 희망으로 섬기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그런즉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14,1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이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순서대로 말씀을 다시 정리해보면 보내심을 받은 자가 전파하고, 전파하는 자가 있어야 듣게 되고 듣는 자가 믿음을 갖게 되고 믿음을 갖는 자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불러 구원을 얻습니다. 결국 보내심을 받은 자가 있어야 구원이 있습니다. 누가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까!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캠퍼스로, 직장으로, 양들과 가족과 친구들에게 보냄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우리 앞서 보냄받은 사람들이 침묵하지 아니하고 전파하였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복음을 전파해야만 또다른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구원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그저 나 홀로 죄의식 없이 마음 편히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시작입니다. 나로부터 시작하여 또다른 구원의 역사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역사의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15절 말씀은 마지막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왜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입이여’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엉덩이로 한다는 말처럼, 복음전파는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발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찾아오는 사람에게 전하겠다는 사람은 복음을 전파하기가 어렵습니다. 내가 찾아가서 전하겠다는 사람이 복음을 전파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환영받는 곳으로 보내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적으로 힘든 사람들에게 보내시는 때가 대부분입니다. 그로인해 때로는 좋은 소식을 전하는 발이 배척을 받아 아픈 상처를 겪는 발걸음이 되기도 합니다. 때로는 바람맞아 오랫동안 기다리다 지쳐 피곤한 발이 되기도 합니다. 사탄은 어찌하든지 보냄받은 자의 발을 묶어두고자 여러 가지로 속삭입니다. ‘내가 전해도 듣지 않을 거야, 들어도 믿지 않을 거야. 믿어도 결국 다시 불신에 빠질 거야’ 자기 영광과 세상 욕심을 향해서는 그렇게 빨리 움직이는 발이 복음전파에 대해서는 slow video보다 더욱 느리게 움직이도록 만들고자 합니다. 그런 두려움과 염려를 매순간 부인하며 부지런히 움직이는 사람들을 통해 구원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들의 발을 통해 한 사람에게 성령의 불이 붙고, 그렇게 일어난 작은 불씨를 시작으로 또 다른 구원역사가 시작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박지성의 발보다 캠퍼스를 오르내리며 전도하는 우리 청년들의 발이 아름답습니다.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보다 우리 사모들의 발이 훨씬 아름답습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아름다운 발이 있기에 우리가 구원받았으며, 우리의 발 또한 그렇게 아름다운 발이 되기를 원합니다. 봄학기 우리가운데 아름다운 발들을 통해 2020 새로운 양들을 얻게 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세상은 아름다운 발들을 환영하지 않습니다.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이사야 당대에는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듣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누가 들었습니까! 믿음으로 사는 자들이 들었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인 우리가 듣고 있습니다.(17)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왜 듣지 않았고 믿지 않았습니까! 보냄받은 자들이 너무 적어서 듣지 못했던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18) 전파하는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이스라엘 땅 끝까지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변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을 수 있음을 예고하셨습니다.(19)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심으로 유대인들을 시기나게 하고 저들을 격동시키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매우 담대하게 유대인들을 향해 말씀을 전했습니다. “내가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바 되고 내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그것은 이제 이스라엘을 포기하고 버리시겠다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끝없이 배반하고 반역하는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이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에 대해서도 동일합니다. 2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훌륭한 믿음의 조상들도 두었고 율법도 알았습니다. 역사 속에서 도우시는 수많은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고 복음역사를 거슬렀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종일 손을 벌리고 애타게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비웃고 조롱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두 팔 벌려 기도하며 죽으셨습니다. 그들이 탁월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을 긍휼히 여기는 것처럼,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하늘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지식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세상에 보냄 받은 자로써 힘있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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