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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0-02-02 (일) 12:42
분 류 로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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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로마서 제14강] 하나님의 구원 계획

2020년 로마서 제 14강    
말씀 / 로마서 11:1-36절
요절 / 로마서 11:25절
하나님의 구원 계획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바울은 동족의 구원을 위해 온 힘을 쏟아 부었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만 있다면 그리스도에게 끊어지는 고통도 받을 수 있다고 고백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열심으로 수고할수록 유대인들의 박해는 더욱 심해졌습니다. 결국 바울은 유대인 구원역사에서 이방인 구원역사로 방향을 터닝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실 것을 여전히 믿고 있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희망의 눈, 섭리의 눈을 잃지 않은 것입니까!

첫째로, 자기 한 사람의 변화를 크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내가 변화되었으니 어떤 이스라엘 사람이든지 변화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본래 바울은 골수 유대인으로서 유대교의 전통을 흔드는 교회를 박해하고 성도들을 죽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랬던 사람이 이제는 이방인의 사도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나 같은 사람도 달라질 수 있구나!’ 그는 자기에게 임한 구원의 은혜를 크게 생각했으며 그를 통해 자기 같은 동족에 대해 희망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나 같은 자도 구원하신 하나님이시기에 나와 같은 중풍족속, 나 같은 사마리아족속, 나 같은 세리 족속에게도 희망을 가질 수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안돼! 절대로 변화될 수 없어!’, 절망을 물리치는 비결은 나를 구원하여주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구원의 은혜를 깊이 아는 것만큼 세상을 향한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둘째로, 어느 시대이든지 하나님께서 남겨놓은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절대로 버리지 않는 분이십니다.(2) 다만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구약성경이 엘리야에 대해 기록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살던 시대는 국가적으로 바알신을 숭배했던 영적 암흑기였습니다. 그로인해 엘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했습니다.(3) “주여 그들이 선지자들을 죽이고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이제 나만 남았는데, 나까지도 죽이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더 이상 희망을 발견할 수 없다는 탄식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엘리야는 자기만 남았다고 말했는데, 하나님은 칠천 명을 남겨두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열왕기서를 보면 실제로는 엘리야만 남은 것이 아님을 엘리야도 알고 있었습니다. 오바댜라는 사람이 선지자 100명을 오십 명씩 굴에 숨겨 두고 먹을 것을 공급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왕상18:13) 그런데도 자기만 남았다며 탄식했습니다. 선지자라면 최소한 자기처럼 목숨을 내걸고 바알의 세력에 정면으로 들이박아야 하는데, 저들은 숨어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엘리야의 눈에는 오바댜나 그가 숨겨준 선지자 100명이 하찮게 보였던 것입니다. 가장 본질적인 이유는 우상숭배의 세력을 너무 크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는 기적을 보여주었는데도 변화될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이제 해도 안된다는 절망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엘리야가 알지 못하는 7,000명을 남겨두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7,000명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전체 이스라엘에 비하면 7,000명은 아주 소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에게는 결코 작은 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소수의 남은 자들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에도 그리하셨고 바울 시대에도 그러했으며 오늘 우리시대에도 그러합니다. 아무리 힘들고 험한 곳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남기신 자들을 통해 구원역사가 계속됩니다.
북한은 지구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살기 힘든 나라중의 하나입니다. 평양은 한때 동양의 예루살렘이라 불릴 정도로 경건한 도시였습니다. 대부흥운동으로 기생집이 사라지고 도둑이 사라져서 문을 잠그지 않고 살아도 되는 그런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공산당이 북한을 점령한 후, 북한의 기독교는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기독교인으로 발견되면 즉시 체포되어 고문당하고 감옥에 갇히거나 공개처형을 당합니다. 모통이돌 선교회가 10여 년전 발표한 기록에 의하면, 해방이후부터 1996년까지 17,000여명의 순교자가 있었으며, 현재 6,000명에 달하는 기독교인들이 정치범 수용소에 구금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중국을 통해 북한 선교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294명의 순교자들이 나올 정도로 복음역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힘든 곳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남은 자들을 통해 생명구원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택하심의 은혜를 따라 남은 자들을 통해 일하십니다.(5) 남은 자들의 특징은 스스로 부족함과 연약함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붙드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제자가 된 것을 크나큰 축복으로 알고 부르심을 놓치지 않고자 애를 쓰는 사람들입니다.(6) 하나님은 그들에게 때마다 말씀의 감동을 주시고 기도의 능력을 체험하게 하십니다. 약한 자 같으나 강하게 하시고 작은 자 같으나 큰 자로 드러나게 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세상에 나가면 저마다 소수의 남은 자로 서게 됩니다. 캠퍼스에서, 직장에서 영적으로 교제할 사람 하나 없이 나 홀로 믿음 생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점점 강해지는 육신주의, 물질주의의 세력을 생각하면 나 홀로 믿음을 지키고 복음역사를 위해 수고하는 것이 아무 의미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괜히 나만 남아 고생하다가 끝나는 것은 아닌가? 두려움이 들기도 합니다.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면 두려움은 끝이 없습니다. 그럴지라도 주님의 은혜를 붙들고 부르심에 남아 묵묵히 충성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줄기차게 생명구원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남은 자들을 통해 또다른 남은 자들을 남기시고,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까지 이르게 하실 것입니다. 세상의 악한 문화, 불신세력에 짓눌리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살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복음에서 멀어지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들만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습니다.(7) ‘우둔’하다는 것은 ‘딱딱하여 감각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의 눈은 혼미하여 분별력을 잃어버리고 그들의 귀는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아무 감동을 받지도 못했습니다.(8) 결과적으로 그들을 위해 차려진 은혜의 밥상, 구원의 밥상이 오히려 심판을 받게 하는 올무와 덫이 되어 버렸습니다.(9) 축복을 축복으로 보지 못하면 축복 때문에 넘어집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의 축복을 지키도록 주어진 선악과를 욕심과 교만의 눈으로 보니까, 선악과가 결과적으로 마귀의 올무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가인을 사랑하사 그와 그 제물을 훈련하였는데,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귀가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연단이 살인자의 덫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와 같이 이스라엘은 수많은 은혜와 감사의 밥상을 뒤엎고 자기 의와 교만과 쓴뿌리의 올무와 덫으로 삼았습니다. 다윗이 살던 구약시대에서부터 지금까지,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며 굽은 등을 가진 사람처럼 비뚤어진 영혼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참으로 많습니다.(10) 저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이유도 그러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는데, 저들은 정치적인 능력이 없다며 조롱하고 배척하고 죽였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복음을 영접하지 못하고 넘어졌으니 영원히 하나님의 나라에서 끊어져 실족해버린 것입니까!(11) 그럴 수 없습니다. 그들이 넘어짐으로써 복음역사의 흐름이 이방인에게로 넘어가서 본격적으로 세계선교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 로마와 유럽과 온 세상을 향해 힘차게 뻗어나가 이스라엘을 시기나게 할 것입니다. 마치 구원의 물줄기가 이스라엘을 향하였는데, 이스라엘 민족이 그것을 거부하자, 그 물줄기를 이방세계로 돌리심으로써 이방세계를 풍성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구원의 물, 영생의 물, 지혜의 물을 마시고 풍성해지면, 그때에는 유대인들이 충격을 받고 복음에 대해 관심을 갖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의 실패를 통해 이방세계를 부요하게 하고 이방세계의 부요함을 통해 다시금 이스라엘을 구원하십니다.(12) 이것이 1세기 바울의 가졌던 믿음이었는데, 정말 그 믿음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이를 볼 때 당장의 실패는 실패가 아니며, 하나님의 큰 그림의 일부가 되는 놀라운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당장에는 실패처럼 보이는 그것을 뒤집어 새 일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바울 사도의 말씀이 언뜻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의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는 이유가 자신의 골육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기나게 하여 그들 가운데 얼마를 구원하는 길이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이방인들을 잘 돕는 것이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과 연결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바울은 시기심까지 이용하여 구원역사를 이루실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구약의 요나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괴롭힌 앗수르가 망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 나라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욘3:5) 그러자 앗수르왕부터 시작하여 종에 이르기까지 베옷을 입고 금식을 하며 회개합니다. 목자의 심정이 아닌 분노의 심정이 통했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은 인간의 예측을 뛰어넘어 실로 기이합니다. 그와 같이 잠시 유대인들을 버림으로써 하나님과 세상을 복음으로 화목케 하셨습니다.(15) 하나님이 그러하신 분이라면, 유대인들 또한 기이하게 돌이키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에서 다시 살리신 것처럼 죽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유대인들을 다시 살아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게 보내신 사람들을 열심히 돕는 것이 결과적으로 내가 원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돕는 비결입니다. 사도 바울이 가졌던 목자철학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여기에서 처음 익은 곡식가루와 뿌리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같은 믿음의 조상들을 상징합니다. 떡덩이와 가지는 아직 믿지 않는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훌륭한 믿음의 조상들을 가짐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물론 현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뿌리에서 꺾여져 나간 가지처럼 되어 버렸습니다.(17) 대신 돌감람나무였던 이방인들이 복음을 영접하고 그들 대신 접붙임 받은 가지처럼 되었습니다. 가지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가지를 보전합니다.(18) 바울이 이런 비유를 한 것은 현재 헤매고 있는 이스라엘을 무시하거나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을 판단하거나 상대적으로 우월한 마음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당분간 이스라엘을 넘어지는 가운데 두신 것입니다.(19) 결코 이방인들이 유대인들보다 훌륭하기에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2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이스라엘은 높은 마음 때문에 꺾였습니다. 원가지 이스라엘 백성이라도 높은 마음을 품는다면, 하나님은 아끼지 아니하시고 훈련하십니다. 하물며 이방인 우리들은 더더욱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21) 높은 마음을 가지는 사람들은 누구나 믿음의 길에서 넘어집니다. 의롭게 살아온 자기, 수고하며 살아온 자기, 세상과 뭔가 다르게 살아온 자기를 높이고 싶은 마음을 조심해야 합니다. 사람의 본성은 할 수 있는 대로 자기영광을 위해 달려가고 싶어 합니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인간이 성취하기 가장 어려운 덕목을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첫 번째 인간이 에덴을 잃어버린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가인도 그러하고 사울도 그러했습니다. 높은 마음은 원망과 다툼을 만들어내고 진실하게 회개하지 못하게 하며 은혜와 감사를 빼앗습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시면서도 준엄하신 분이십니다.(22) 하나님은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겸손히 은혜를 구하는 모든 자들에게 인자하십니다. 지금까지 완악했던 유대인들이라도 겸손히 믿음으로 나오기만 하면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금 구원역사에 접붙여 사용하실 것입니다.(23) 돌감람나무 같은 이방인들도 믿음으로 택함 받아 구원역사에 쓰임 받은 것처럼 말입니다.(24)
반면 하나님은 자기를 높이고 자랑하고 교만하고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 준엄하십니다. 유대인들이 끝까지 자기 의를 고집하며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하나님은 그들을 준엄하게 훈련하사 낮추고 깨며 자기발견 하도록 훈련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축복을 받을수록, 신앙의 경륜을 더할수록 더욱 겸손히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문제를 만날수록 자기 경험이나 계산대로 움직이지 말고 말씀을 의지하고 순종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 구원역사의 비밀을 증거합니다. 2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바울은 ‘신비’라고 말씀합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는 도대체 얼마를 말씀하는 것입니까! 요한계시록에서는 144,000명이라고 했습니다. 12×12×1,000 = 144,000 앞의 12는 구약의 12지파를, 뒤의 12는 신약의 12지파를, 그리고 1,000은 충분히 많은 수를 상징합니다.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를 걸쳐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한 상태로 남아있게 됩니다. 그 후에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올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씀한 이후로 복음은 유대와 사마리아와 소아시아를 거쳐 유럽과 영국으로, 그리고 미국과 아시아와 중남미를 향해 퍼져 나갔고 우리에게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중앙아시아와 인도와 이슬람을 지나 이스라엘로 들어가면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다 이루어집니다.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시겠다는 말씀도 이루어지고 온 이스라엘이 구원받을 것이라는 말씀도 이루어집니다.(26) 이스라엘 민족은 실패한 민족, 죄악된 민족으로 끝나지 않으며 만민구원역사에 쓰임 받는 이방의 빛이 됩니다.(27) 복음으로 하면 이스라엘은 이방인 구원역사를 위해 잠시 하나님의 원수처럼 되었지만 택하심으로 하면 믿음의 조상들로 말미암아 여전히 사랑을 받은 자들입니다.(28)
2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우리는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가까이할수록 후회하는 경우를 많이 체험합니다. 특별한 선물을 주고 나서 아까와 하기도 하고 특별한 소망을 두었다가 크게 상처받기도 합니다. 멀리서 볼 때는 천사표였는데, 가까이할수록 짐승 같은 모습을 보았을 때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왜 이런 자들에게 나의 아들을 보내었을까? 왜 이리 엉터리 같은 자들을 복음의 일군으로 불렀을까! 알수록 엉망이네!’ 이렇게 후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후회하지 않는데, 내가 후회해서 문제입니다. 목자가 포기해서 문제입니다. ‘나 같은 자를 왜 부르셨습니까! 저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정말 어울리지 않습니다. 괜히 하나님도 고생하지 마시고 저도 고생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합리적이며 겸손한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 무지한 생각입니다. 인간은 자꾸 변하지만 하나님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처음 사랑, 처음 믿음, 처음 소망을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30절을 보십시오. 원래 이방인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축복을 받을 수 없는 자들이었는데, 유대인의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습니다.(30) 지금 유대인들이 이전의 이방인들처럼 순종하지 않고 있습니다.(31) 역지사지라는 말씀처럼,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들을 향해 가져야 할 목자의 시각입니다. 하나님이 누군가에게 긍휼을 베풀 때에는 아직 긍휼을 덧입지 못한 자들에 대한 소망을 담고 있습니다. 유대인이 긍휼을 입었으면 이방인을 긍휼의 마음으로 보아야 하고, 이방인이 긍휼을 입었으면 유대인을 긍휼의 마음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를 통해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긍휼을 누려야 합니다.(32) 그것이 하나님이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불순종의 죄를 뒤집어서 모든 이들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3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요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우리는 자주 하나님을 측량하려는 어리석음을 범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수시로 평가하고 나름대로 점수를 매기는 일에 익숙합니다. ‘하나님, 왜 이리 냉정하십니까! 하나님, 어찌 이리 무능하십니까!’ 때로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셔야만 한다며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머리로는 감히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을 측량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눈에는 실패로만 보였던 거기에서 새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죽었다고 생각하는 그 곳에서 살 길을 여시고 망했다고 생각했던 거기에서 빛나는 길을 시작하십니다. 요셉이 그러했고 모세가 그러했고 다윗이 그러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을 때, 그것이 세상 만민구원역사의 완성이 될 줄을 누가 알았습니까! 죽음이 끝이 아니라 부활로 연결됨으로 죽음을 이기는 영생의 첫 열매가 될 줄을 누가 알았습니까! 누가 죄인들을 향한 주의 마음을 알았습니까!(34) 누가 인간의 허물까지도 구원역사에 사용하는 그 분의 모사가 될 수 있습니까!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을 수 있습니까!(35)
우리는 다만 믿음으로 고백해야겠습니다. 3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만물이 주에게서 나옵니다. 천지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습니다. 모든 생명구원역사도 주님으로부터 나왔습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성공도 나오고 축복도 나옵니다. 아울러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아 고난이 오고 시련이 옵니다. 연단도 오고 회복도 오고 구원도 오고 심판도 옵니다. 그러므로 모든 만물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성공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시련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중국발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에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유행하는 독감도 코로나만큼 무섭습니다. 여행, 극장, 식당, 공연 예약이 줄줄이 취소되고 있습니다. 대학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각종 동아리 행사나 신입생 OT 계획을 미루거나 취소하고 있습니다. 가득이나 어려운 경제상황을 생각하면, 국가의 발전을 생각하면 어서 빨리 바이러스 감염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라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목자가 말했습니다. ‘목자님, 힘들게만 생각할 것이 아닌 것 같아요. 인간적으로는 힘들지만 캠퍼스 복음역사에서 보면 새내기들의 마음을 낮추시는 손길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리엔테이션이나 동아리 선배들의 손길을 거치지 않아 어느 해보다 가난하고 겸손한 양들을 많이 만날 것 같습니다.’ 당장의 어려움을 새 역사의 시작으로 삼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 그의 믿음의 해석에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우리 믿는 자들은 어떤 가운데에서도 희망의 생각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한이 없으시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구원과 영원한 생명의 세계로 이끌어 가십니다. 완전하신 하나님, 세상의 주관자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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