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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0-02-16 (일) 12:31
분 류 로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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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로마서 제16강] 빛의 갑옷을 입자

2020년 로마서 제 16 강
말씀 / 로마서 13:1-14
요절 / 로마서 13:12

빛의 갑옷을 입자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우리 믿는 자들은 천국시민이면서 이 땅의 시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면서 아울러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살아야 합니다. 그를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이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은 세가지 중요한 자세를 말씀하십니다.

첫째.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는 생활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해야 합니다. 학생은 스승에 복종해야 하고 자녀는 부모에 복종해야 하고 직장인은 상사의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 국민은 국가 지도자의 권세에 복종해야 합니다. 당연한 말씀처럼 보이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쉽지 않은 방향입니다. 누구나에게 허물과 약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선생이라고 하여 학생보다 범사에 탁월하지 않으며, 부모라도 자녀의 요구 수준만큼 성숙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권모술수에 능하고 말 바꾸기 달인들입니다. 그럴지라도 복종하라는 말씀하십니다. 힘없는 자이기에, 손해 보지 않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복종하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음으로 복종하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법을 대적하는 권세에 대해서까지 복종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것이 아니라면 자기 마음에 들지 않고 자존심이 상할지라도 복종해야 합니다. 권위에 불복종하는 생활은 결과적으로 심판을 불러옵니다.(2)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속담처럼, 불순종은 진노를 불러오고 두려움의 영을 끌어옵니다. 반면 복종하는 거기에는 평안이 임하고 축복의 영이 임합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위에 있는 사람에게 복종하며 유익을 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사람 봐가며 그리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리해야 합니다. 그것이 자기도 성장하고 사회도 성장하며 다같이 복을 받는 비결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다스리는 사람들이 필요한 이유는 ‘인간의 죄악된 본성’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기회만 생기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정욕과 탐욕을 좇아가려고 합니다. 다스리는 자들이 있음으로써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있는 악한 본성을 제어하여 질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엄마의 잔소리가 있어야 아들이 게으름의 침대에서 탈출할 수 있습니다. 목자의 푸쉬를 통해 안일을 회개하고 소감을 쓰게 되고 사명을 향한 발걸음을 옮기게 됩니다. 물론 선을 행하기에 힘쓰는 사람들은 다스리는 사람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교통법규를 지키며 운전하면 교통경찰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랜드 회장은 ‘공무원들은 정직한 사람들을 가장 무서워한다’고 했습니다. 정직한 사람에 대해 할 말이 없으며, 불법을 행하는 자들에게 큰 소리를 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스리는 자들을 하나님의 사역자들로 여기고 힘써 순종해야 합니다.(4)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할 것이라” 두려움으로 복종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윗사람이 보고 있을 때에는 복종하는 척하다가 보는 눈이 사라지면 본성대로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윗사람을 비방하고 그 권위를 폄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들은 진노가 아닌 양심을 따라 복종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보든 안보든 신앙양심을 지키기 위해 복종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CCTV가 없다고 하여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면 않는 것입니다. 분리수거도 잘 지켜야 하고 교통질서도 지켜야 합니다. 교수님이 출석체크를 하든지 하지 않든지 충실하게 수업에 참석하여 열공해야 합니다. 양심을 따라 질서를 지키는 사람이 모임과 사회에 좋은 본이 되고 질서와 활력을 불어넣습니다.

바울은 양심을 거론하면서 6절부터 세금문제를 거론합니다. 아마 돈문제에서 가장 확실하게 드러나기 때문일 것입니다. 7절에 나오는 조세는 사람에 부과하는 세금을, 관세는 물건에 부과하는 세금을 대표합니다. 로마를 비롯하여 세상 모든 나라들은 할 수 있는 대로 세금을 많이 걷고자 이런저런 명목을 갖다 붙입니다. 반면 세금을 내는 사람들은 생돈을 뜯기는 심정입니다. ‘나라가 내게 해준 것이 뭐가 있어!, 아이고 아까운 내 돈!’, 그럴지라도 탈세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돈은 사람의 양심을 무너뜨리는 가장 강력한 세력중의 하나입니다. 신자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재미있는 예화가 있습니다. 미국의 어떤 청년이 설교를 듣고 은혜 받아 십일조를 내겠다고 서원했습니다. 당시 한 달 수입이 10불이어서 1불을 냈는데, 얼마 후 100불을 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0불을 냈습니다. 그 사람이 더 열심히 일하자 한 달 수입이 1,000불이 되었고 100불 십일조를 냈습니다. 그런데 정말 장사가 잘되어 10,000불 수입을 거두게 되어 1,000불 십일조를 내게 되자, 그때부터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1,000불이 너무 많아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목사님에게 찾아가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목사님, 저는 지금까지 꾸준히 십일조를 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100불까지는 낼 수 있겠는데, 1,000불은 너무 어렵습니다. 목사님, 하나님과의 약속을 취소할 수는 길이 없을까요?’ 목사님이 청년에게 답을 내놓았습니다. “형제여, 취소는 어렵네. 그러니 이렇게 기도하면 어떻겠나! 자네가 다시 월 1,000불이나 100불 수입을 거두는 사람이 되도록 말일세!” 많은 성공에는 그 만큼의 책임이 따릅니다. 많이 받았기에 많이 공헌하는 것입니다. 많은 의무를 감당하고 있다는 것은 많은 축복을 받은 증거입니다.  그러한 믿음이 국가와 사회의 발전을 가져오고 복음역사 번영의 기초가 됩니다.

둘째. 피차 사랑의 빚을 지는 것입니다. 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빚을 꾸어달라는 요청을 거절하는 요절 말씀으로 삼습니다. 그런데 정말 어려운 상황에 빠지면 빌려야 하고 빌려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42절에서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의 첫 번째 의미는 빚을 남겨두지 말고 갚으라는 말씀입니다. 보통 돈을 빌리는 사람은 없는 사람이며, 돈을 빌려주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빚을 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은 돈이 많으니까, 나보다 여유 있으니까, 나보다 목자이니까’, 빚을 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일방통행만 있으면 사랑의 관계가 맺히지 않습니다. 시편 37:21절은 악인은 꾸고 갚지 않는다고 말씀했습니다. 빚을 갚을 않으면 어둠이 역사하는 꼬투리가 되고, 빚을 갚아야 신뢰와 사랑이 발전합니다. 돈 문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은혜의 빚을 졌으면 잊지 말고 갚아야 합니다. 관심의 빚도 그러하고 신세를 졌으면 갚아야 합니다.
두 번째 의미는 빚을 주고받는 이유가 사랑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영혼이 건강하지 못할 때에는 사랑을 주는 것도 어렵고 사랑으로 알고 받아들이기도 어렵습니다. 사랑을 표현하지 못하거나 사랑으로 받지 못하고 오해하고 상처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피차 사랑의 빚을 지는 것이 어려워서 아예 ‘안주고 안받자’는 철학으로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선물도 안주고 안 받고 관심도 안주고 안 받고 그저 나 홀로 사는 것을 편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혹은 사랑이 아닌 다른 이유로 주고받기도 합니다. 인맥이나 현실적인 이익을 위해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이 아닌 다른 이유로 주고받는 것들은 근본적으로 건강한 관계로 발전하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이만큼 해 주었으니, 너도 이 정도는 해야지?” 의무감의 빚을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무거운 족쇄가 되기도 하고 손해의식과 갈등을 불러오기도 합니다. 지난 해 로또 1등에 당첨되었던 형이 동생을 살인했던 뉴스가 크게 보도되었습니다. 몇 년 전 로또 1등에 당첨된 형은 가족들에게 2억을 나누어주고 나머지로 사업을 시작했는데, 사업에서 실패했습니다. 그러자 형은 2억을 나누어준 가족들에게 계속하여 돈을 빌려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동생은 형의 요구를 부담스러워 거절하였고, 이에 화가 난 형이 칼로 동생을 살인한 사건이었습니다. 사랑으로 주고 사랑으로 받지 않은 빚은 갈등을 만들고 부담을 만들고 심지어 원수 사이로 변질시키기도 합니다. 피차 사랑의 빚을 지는 거기에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비결이 있습니다. 목자와 양 사이도 그러합니다. 목자가 사랑으로 가르치고 양은 사랑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거기에 기쁨이 있고 말씀역사가 있으며 성령의 함께 하심이 있습니다. 그러한 교제는 사람의 허물과 약점으로 인한 빈틈을 메우고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어갑니다. 특별한 영성 프로그램이 없을지라도 은혜 풍성함을 경험케 합니다.

우리같은 죄인들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게 된 것도 사랑의 빚을 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은 단지 사명감 혹은 의무감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랬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세상을 향해 온갖 원망과 쓴뿌리를 뿜어내었을 것입니다. 우리를 향해서도 채권자의 심정으로 요구하셨을 것입니다. “너희들도 나처럼 목숨을 내어놓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할 줄 알아!”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으로 자기 목숨을 내어놓으셨습니다. 자신을 못박는 자들까지도 용서하시고 일만 달란트 죄의 빚을 탕감해 주셨습니다. 성령의 은혜를 한없이 부어 주사 허물과 죄로 인해 황량해진 우리 영혼을 때마다 살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십니다. 예수님 사랑의 빚으로 말미암아 죄로 죽었던 자들이 살아나서 피차 사랑의 빚을 지며 수고하는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점점 황량해지는 것은 사랑의 빚이 아닌 다른 빚들이 점점 늘어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계명의 본질 또한 사랑입니다.(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다른 계명들이 결국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가운데 다 들어 있습니다. 사랑하기에 간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에 간음하지 말아야 합니다. 심판받지 않으려고 살인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랑해야 하기에 살인하지 않는 것입니다. 도둑질하지 말고 탐내지 않는 것도 그러합니다. 청교도 윌리엄 틴데일은 말했습니다. “이웃이라는 말은 사랑이라는 말과 똑같은 말이다.”(10)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주고 받든지 사랑으로 하고 사랑으로 받아들이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는 생활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자다가 깰 때가 언제입니까! 사람들은 특별한 문제가 생겼을 때, 질병문제, 취업문제, 결혼문제가 생겼을 때, 그 때를 새벽기도 하고 성경 읽고 영적으로 깨어나야 할 때로 인식합니다. 그런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람이라도 지금이 깨어나야 할 때입니다. 지각하는 아이들을 보면 지금 깨어나지 못하고 ‘5분만’ 뒤로 미룹니다. 그렇게 30분, 1시간 미루다가 지각합니다. 그와 같이 영적으로 지금 깨어나지 아니하고 뒤로 미루는 사람은 세상 어둠에 발목 잡히게 됩니다. 바울은 번영을 구가하고 있는 로마를 향해 주님 오실 날이 가까웠으니 지금 깨어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바울이 왜 이토록 절박하게 깨우는 것입니까!
12절을 읽겠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밤이 깊다’는 말씀은 악의 세력, 죄의 문화가 점점 크게 번성하는 것을 말합니다. 당시 로마는 식민지에서 들어오는 엄청한 세금으로 말미암아 한없는 풍요를 누렸습니다. 로마의 밤거리는 날마다 파티를 벌이는 소리와 휘황찬란한 불빛으로 잠들 줄을 몰랐습니다. 시내를 흐르는 테베강은 술 마시고 토하고 또다시 가서 술 마시고 토하는 사람들로 인해 붉게 물들 정도였습니다. 한 해 로마의 거리에 버려지는 사생아들이 2만여명에 이를 정도로 쾌락과 정욕의 도시였습니다. 로마는 겉으로는 빛나는 제국이었지만, 영적으로는 깊은 밤으로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우리시대도 로마제국처럼 영적으로 깊은 밤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인류가 이처럼 풍요를 누리던 시대는 일찍이 없었습니다. 아울러 환경오염, 자원고갈, 기상이변처럼 전 지구적으로 생존을 위협하는 문제들이 점점 피부로 와 닿고 있습니다. 코로나19같은 전염병이 발병하자, 암울한 미래를 전망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고 있습니다. 생존위기보다 더 심각한 것이 윤리의 붕괴와 인간성 상실의 위기입니다. 이는 과학으로 치유할 수 없는 단계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아카데미상을 휩쓴 영화 기생충은 우리나 미국이나 할 것 없이 인간성을 상실하고 병들어가고 있는 현대사회의 문제를 리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밤이 깊으면 보통 잠을 깊이 잡니다. 그와 같이 세상의 어둠이 깊어지면, 사람들 대부분 본성을 따라 움직입니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염려가 커져갈수록 이기적이 되고 쾌락을 향해 달려갑니다. 세상이 음란해질수록 음란하게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세상이 살벌해질수록 돈과 욕심을 좇아 사는 것을 지혜로운 것처럼 생각합니다. 어둠은 또다른 어둠을 불러오며 더 깊은 절망을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밤이 깊고 낮은 멀다’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다’ 말씀합니다. 밤이 깊다고 해서 어둡게만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캄캄한 밤일수록 작은 불빛이 큰 가치를 드러나듯이, 말씀을 따라사는 것, 믿음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죄의 세력이 깊어갈수록, 예수 그리스도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자들은 세상의 어둠이 깊다고 하여 절망할 것이 아닙니다. 절망을 반전시켜 희망의 역사를 시작하실 하나님을 믿고 어둠의 일을 벗어야 합니다.
어둠의 일을 벗는 것은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지 않는 것입니다.(13) 술 취함으로 스트레스를 풀 것이 아닙니다. 음란하거나 호색하며 쾌락을 따라갈 것도 아닙니다. 화풀이할 만한 사람을 찾아 다투거나 나보다 잘나가는 사람을 보며 시기할 것도 아닙니다. 대신 빛의 갑옷을 입기에 힘써야 합니다. 군인이 전쟁터에 나서라면 갑옷, 방탄복을 입어야 합니다. 불멸의 영웅 이순신 장군도 갑옷을 입지 않고 노량해전에 나갔다가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했습니다. 밤이 깊을수록 빛으로 된 갑옷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빛의 갑옷은 희망의 생각과 긍정의 말과 아름다운 선행으로 나를 무장하는 것입니다. 내가 서 있는 삶의 현장이 힘들지라도 비전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경건한 생활, 본이 되는 생활을 하기에 힘쓰는 것이며,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최선의 수고를 감당하는 것입니다.

칼럼니스트이자 상담목회자인 조지 크레인 박사가 체험했던 사건입니다. 어떤 주부가 찾아와서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박사님, 남편을 죽이고 싶도록 미워합니다. 이혼하기 전에 최대한 괴롭힐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크레인 박사는 그녀에게 한가지 묘한 제안을 했습니다. “집에 가서 당신이 정말 남편을 사랑하는 것처럼 행동하십시오. 남편이 당신에게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를 말해주고 힘껏 친절하고 관대하고 사려깊게 행동하세요. 그래서 당신이 남편을 사랑한다는 것을 믿게 만드세요. 그렇게 하여 남편이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 그때 이혼 폭탄을 던지세요. 그것이 남편을 가장 괴롭히는 방법입니다.” 그러자 주부는 박사의 제안에 대단히 만족하여 돌아갔습니다. 두 달이 지나 크레인 박사가 여인에게 전화하여 물었습니다. “이제 이혼하실 준비가 되었습니까?” 주부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화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이혼이라뇨! 절대로 안해요. 저는 정말 남편을 사랑해요!” 여인이 두 달 동안 ‘사랑의 갑옷’을 입었더니, 남편에 대한 미움이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여인이 입은 사랑의 옷은 빛의 갑옷이 되어 그녀를 상처와 미움의 공격에서 건져주었습니다.
2009년 MBC에서 ‘말의 힘’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했습니다. 두 개의 유리병에 밥을 담아 한쪽에는 ‘감사합니다’라고 붙이고 다른 병에는 ‘짜증나’를 붙였습니다. 아나운서들에게 한 달동안 날마다 붙여진 글을 따라 한쪽에는 빛의 말을, 다른 쪽에는 어둠의 말을 하도록 했습니다. 놀랍게도 한쪽에서는 하얗고 예쁜 곰팡이가, 다른 병에서는 시커멓고 보기 흉한 곰팡이가 피어났습니다. 밥에 귀가 달린 것입니까! 하물며 사람과 세상을 향한 말의 힘이 어떠하겠습니까! 그와 같이 우리 입술이 빛을 발하면 어두운 생각이 자리잡을 곳이 없습니다. 우리의 손과 발이 긍정과 섭리의 역사를 향해 움직일 때, 우리 삶의 현장에 어둠이 자리잡을 곳이 없어집니다.
초대교회가 거센 로마제국의 박해를 견디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도 빛의 갑옷을 입고자 힘썼기 때문입니다. 논리로서 이긴 것이 아닙니다. 실제 생활에서 빛의 갑옷을 입고자 힘쓴 것입니다. 로마는  세상을 정복했지만 죄와 죽음의 어둠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로마사회는 더욱 음란해지고 사나와졌으며 죽음앞에 모든 가치를 상실했습니다. 반면 교회의 성도들은 빛의 갑옷을 입고 어둠에 휩쓸리지 않았습니다. 음란사회에서 경건하게 살았고 탐욕세상에서 희생적으로 살았습니다. 썩어질 세상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몸부림을 쳤습니다. 어둠이 깊을수록 빛이 강렬하게 드러납니다. 로마시민들이 머나먼 변방 유대의 복음에 마음을 열고 나온 이유입니다. 로마 성도들이 빛의 갑옷을 입고자 힘썼을 때, 쇠갑옷을 입은 로마를 이긴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영적으로 만만치 않습니다. 복음역사가 갈수록 어려워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 어둠이 깊어지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 아닙니다. 어둠이 깊을수록 오히려 빛의 가치가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우리안에 빛의 갑옷을 준비하고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머리에서 빛된 생각을 하고 우리의 입술로 빛을 발하며 우리의 발이 빛 가운데 걸어가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빛의 갑옷을 준비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안에서 다시 한번 힘있게 복음의 능력을 드러내실 것을 믿습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14절을 말씀하십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하나님이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듯이, 죄악된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혀주셨습니다. 나의 본성은 빛의 자녀다운 모습과 거리가 멉니다. 그럴지라도 나는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을 입어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입니다. 나는 여전히 헤매고 문제 있을지라도, 나는 여전히 예수님의 비전과 희망을 담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여전히 부족한 모습이 있을지라도 다시금 믿음으로 빛의 갑옷을 입는 것입니다. 모든 고소와 정죄를 물리치고 하나님의 소망을 또다시 붙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예수님은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으로 정욕을 물리치고 육신의 일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연약해질 때마다 말씀을 붙들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이며, 한 영혼을 돕는 목자의 길에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어둠이 깊어가는 시대에서도 변함없이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는 자들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복음의 능력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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