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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0-02-23 (일) 13:47
분 류 로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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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로마서 제17강] 서로 받으라

2020년 로마서 제 17강  
말씀 / 로마서 14:1-15:13절
요절 / 로마서 15:7절
서로 받으라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로마교회안에는 이방인 그리스도인과 유대인 그리스도인 사이 갈등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방향은 같은데, ‘무엇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가?’ 그것이 달랐습니다. 마치 맛있는 것을 먹자는 의견은 같은데, 무엇이 맛있는 것인가? 그것이 다른 것처럼 말입니다. 남편은 소고기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고기인데, 아내는 소고기 냄새만 맡아도 비위가 상할 수 있습니다. 좋은 것이 다른 것인데, 다른 것이 부족한 것, 잘못된 것, 나쁜 것처럼 다가올 수 있습니다.
14장을 보면 음식과 날에 대해 각기 다르게 반응한 것도 나름 이유가 있었습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고기를 먹지 않고 채식을 했는데, 이는 당시 로마시장에서 팔리는 고기들은 우상의 신전에 제물로 바쳐졌다가 나온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고단백이라면 무엇이든지 땡큐 오케이였습니다. 유대인 크리스찬들의 주일 서빙은 푸른 초장이었고, 이방인 크리스찬의 서빙은 동물의 왕국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여우와 두루미가 서로 초대한 꼴이 되었습니다. 유대인 성도들에게 이방인 성도들은 식욕을 좇아 우상숭배를 허용하는 불경건한 자들로 보여졌고, 이방인 성도들에게 유대인 성도들은 율법에 갇혀있는 답답한 자들로 보여졌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논쟁에 대해 ‘먹어라, 먹지 말라’ 확실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대신 4절을 말씀하십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담당교수도 아니면서 학생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평가하고 성적을 매기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우스운 일입니다. 각 사람의 상전은 하나님이십니다.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그 사람을 무시하고 판단하는 것은 겁도 없이 하나님의 자리에 서는 것과 같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진리가 아닌 것들을 무너뜨리시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들을 친히 세워 가시는 분이십니다.
로마 성도들은 음식문제뿐만 기념일 문제로도 논쟁을 벌였습니다. ‘어떤 날을 기념해야 하는가?’ 당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이나 여러 절기들을 특별하게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날을 동등하게 여겼습니다. 주일예배 후에는 식사도 하고 탁구도 치며 자유롭게 교제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더 이상 구약시대의 묵은 전통을 지킬 필요가 없어졌다는 믿음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안식일에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유대인 성도들은 이방인 성도들의  불경한 짓(?)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형식이라는 그릇은 저마다의 정신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기가 주장하는 형식을 따르지 않는 사람을 정신을 훼손하는 사람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문제를 놓고 비난과 공격이 오가는 이유입니다. 우리 모임도 한때 십자가를 걸지 않아서 교회가 아닌 이단으로 공격받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걸지 않는 것을 보니 예수님을 제대로 믿지 않는 모임, 이상한 모임이 분명하다!’ 공격하는 자들의 주장입니다.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칼빈은 십자가를 걸지 않은 것을 더 성경적으로 여겼는데도 말입니다. 찬양곡을 선정하는 문제로 갈등하기도 합니다. 소위 올드한 찬양을 선호하는 분들은 최신 찬양곡에는 영감이 없는 것처럼 볼 수 있고, 최근 찬양곡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올드한 찬양을 시대의 흐름에 공감할 수 없는 찬양처럼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판단 기준을 삼아야 합니까?

5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각기 마음에 확정할찌니라” 언뜻 생각하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는 말씀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마음에 확정하라는 말씀은 마음에 있는 믿음을 따라가라는 말씀입니다. 먹는 것이 좋다는 믿음이면 먹는 것이며, 믿음을 위해 먹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면 먹지 않는 것입니다. 날을 특별히 중히 여기는 자도 그러하고 날을 같게 여기는 자도 그러합니다.(6) 무엇을 하든지 주님을 위하는 마음으로 한다면, 그것이 아름다운 것이며 하나님께 감사한 것입니다. 그러한 시각으로 자기에게만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도 적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가 없습니다.(7) 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다 주의 것이로다” 어떤 모양을 취하느냐보다 ‘무엇을 위해서인가’라는 동기와 목적이 중요합니다. 신자는 살든지 죽든지 주를 위하는 사람입니다. 주를 위하여 사자같이 싸울 수도 있고 주를 위하여 죽은 개처럼 인내하고 참을 수도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유익을 남기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손해보고 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목표입니다. 죽는 길을 나쁘게 보고 피할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써 주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라면,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죽으셨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다시 살아나셨습니다.(9) 이를 통해 죽은 자들의 주가 되시며 산자들의 주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을 굴복시키거나 상대방을 비판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10) 사람의 마음 깊은 곳을 볼 수 없기에, 상대방의 숨은 의도에 대해 자연스럽게 의심이 파고들 때가 있습니다. ‘저 사람은 주님을 위하여라고 말하지만 다른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아!‘ 판단할 때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자기 영광을 취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을지라도 형제를 의심하거나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차라리 의심하다가 잘못을 저지르는 위험에 빠지는 것보다 속임 당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 45:23절은 모든 무릎이 주님 앞에 꿇을 것이며,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할 것이라 말씀했습니다.(11) 1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그때 남의 이야기를 하고 남을 고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저기 저 사람, 짝퉁 신자가 맞습니다. 남몰래 헛짓하는 것을 제가 봤어요!’ 이렇게 고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옆 사람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일을 있는 그대로 자백하게 됩니다. 위선과 이중생활을 물리치고 믿음으로 살기 위해 애를 쓴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고백할 것입니다. ‘주님,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경건하게 살기 위해 애썼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반대로 위선과 이중생활을 했다면, 그것을 그대로 자백할 것입니다. ‘제가 입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랬다고 말했지만, 실은 저의 욕심과 정욕을 위해 그리했습니다.’ 그 날에 하나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위로와 상급을 받는다면, 그것은 세상 어디에서 받는 위로와 상급과 비교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부끄러움과 수치를 당하게 된다면, 세상의 어떤 수치와 부끄러움과 비교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를 비판하는 거기에 에너지를 쓸 것이 아닙니다.(13) 오히려 형제에게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을 두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바울은 거칠 것을 두지 말라고 말씀하면서 다시 음식문제를 이야기합니다.(14) 먹는 것 자체가 속된 것이 아니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결과적으로 속되게 하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15) 예를 들면 술과 담배입니다. 한국에서는 아직까지도 ‘그리스도인은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이지미가 강합니다. 이렇게 된 것은 1901년 대한 장로교 공의회에서 금주 금연을 신자들의 의무로 규정한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초창기 선교사들이 한국에 와보니, 많은 남편들이 낮에 술 마시고 싸우고 아내 때리고 그릇 부수는 것이었습니다. 폐병으로 목숨을 잃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금주와 금연 없이는 건강한 가정과 사회를 이룰 수 없겠다’, 판단하여 신자의 의무로 규정한 것이었습니다. 이때부터 그리스도인들은 술과 담배를 멀리하는 좋은 전통을 갖게 되었으며, 한국의 전통적인 악습을 바꾸는데 많은 도전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 시대와 지금 시대의 분위기는 많이 다릅니다. 또한 술과 담배 자체가 악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비행기를 타고 여행하는 사람에게 한 잔의 포도주는 혈액순환에 도움을 줍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포도주 정도는 한두 잔 정도 마셔도 된다고 말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는 것이 참으로 조심스럽습니다. ‘베드로목자님이 술 마셔도 된다고 했데. 죄가 아니래. 그래? 그럼 나도 마셔야지’ 혹시라도 이런 사람들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사람 말에 따라 마시고 마시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사람 눈치 보아야 하는 상황이 오면 끌려갈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 앞에 뜻을 정하지 않으면 사람들의 요구를 뿌리치기 어렵습니다. ‘어? 너 술 마실 줄 아네. 그럼 나랑 같이 마시러가자!’ 그렇게 술을 주고받으며 술 취하는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지 않으면 안되겠구나!’ 터닝하면 은혜가 됩니다. 하지만 믿음의 자리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나는 영적 생활에 어울리지 않아! 나는 너무 세상적이야! 이런 생활에서 돌이킬 수 없어!’ 자책에 빠질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목자의 자유가 양들의 영적 생명을 잃어버리게 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영적 지도자일수록 조심해야 할 이유입니다.

1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먹어야 하느냐 먹지 말아야 하느냐, 마셔도 되는 것이냐? 마시지 말아야 하는 것이냐? 그 문제로 다툴 것이 아닙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령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에 포커스를 맞추어야 합니다. 의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입니다. 평강은 성령과 함께 함으로써 아무 거리낌 없는 안식입니다. 희락은 영혼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먹든지 먹지 않든지, 성령의 인도하심을 좇아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게 되었다면, 그것이 제일 좋은 것입니다. 마시든지 마시지 않든지 두려움 없는 영혼의 안식과 즐거움을 누리게 되었다면, 그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19) ‘세운다’는 것은 건축용어입니다. 집을 허무는 것은 하루나 이틀이면 됩니다. 그와 같이 화평했던 모임을 무너뜨리고 원망하고 갈등하는 모임으로 만들기는 쉽습니다. 영향력있는 목자가 마음대로 내뱉고 기분대로 질러버리면 빨리 무너집니다. 서로를 향해 마음을 닫고 차가운 모임으로 전락하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반면 집을 건축하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화평의 관계성을 맺고 서로 덕을 세우는 모임으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과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관계를 파괴하는 여러 고비고비를 넘기며 신뢰를 쌓아가야 합니다. 바울은 그것을 위해 형제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멀리했습니다.(20) 21절을 보십시오.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했으며 형제들을 시험에 빠지게 할 만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멀리하는 것을 아름답게 여겼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자유를 누리든지, 자유를 누리지 않든지 하나님앞에서 스스로의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는 것을 기뻐하실거야!’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그 믿음으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할 수 있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무엇을 하든지 믿음으로 행동하고 믿음으로 결단하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반대로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받습니다.(23)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혹시 비난받지 않을까? 이렇게 하다가 결과가 안 좋으면 어떻게 하지?’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기보다 사람 눈치 보며 눈앞의 유익을 해 움직이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입니다.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5:1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세상에서 강한 자는 상대방을 이기는 자입니다. 주먹으로 이기든지, 돈으로 이기든지, 혹은 말로 이기든지 상대방을 꺾고 누르는 사람입니다. 세상은 강한 자 중심입니다. 강한 자가 원하는 대로 결정하고 강한 자를 기준으로 정합니다. 그런데 믿음의 세계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이라면 마땅히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해야 합니다. 자기를 낮추지 못하고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지 못하고 섬길 수 없다면 믿음이 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위대한 믿음의 사도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을 섬기기 위해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야만인에게는 야만인처럼, 헬라인에게는 헬라인처럼 되어 섬겼습니다. 연약한 모습을 발견할수록, 그들의 약점을 담당하기 위해 짐을 지고자 애를 썼습니다. 만약 바울이 그저 신학적인 이론만 펼쳤다면 바울은 그저 탁월한 학자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생명구원역사는 인간적인 능력으로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서로를 높이고 서로의 약점을 메워주기 위해 담당하는 거기에서 일어납니다. 예수님 안에서 구원과 영생을 얻은 우리는 이제 이웃을 기쁘게 하며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기에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2)

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셨고 아무 죄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런데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허물과 약점을 대신 담당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모든 비방을 받으셨습니다. 마태복음 8:17절은 말씀합니다.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마태복음 12:20,21절은 말씀합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또한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 우리가 연약한 자들의 약점을 담당한다고 하여 사람들의 환영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때로 칭찬은 커녕 오해도 받고 욕도 먹을 수 있습니다. 나의 진심은 외면당하고 별것 아닌 것처럼 취급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말 상처가 되고 낙심이 되고 모든 것을 팽개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4)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 때, 우리는 인내하게 되고 성경의 위로와 소망을 덧입게 됩니다.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본받아 서로 뜻이 같아지도록 도와주십니다.(5)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십니다.(6)

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서로 받으라’, 받는다는 것은 단순하게 참고 용납하는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받아주신 것은 우리의 허물과 약점을 눈감아주신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허물과 약점을 용서하시고 매순간 은혜를 공급하셨고 온전한 사람이 되도록 이끄셨습니다. 그와 같이 받는다는 것은 관용하고 함께할 뿐만 아니라 온전한 사람으로 서도록 돕는 것입니다. 엄마들이 자녀를 돕는 것이 그와 같습니다. 아이가 6시에 일어나면 엄마는 5시에 일어나서 먹을 거 준비하고 옷 챙기고 깨웁니다. 당연히 한번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제 깨웠으니 네가 알아서 가!’ 알아서 하라는 엄마는 없습니다. 깨우고 또 깨우면 피곤한 아이는 온갖 신경질을 부리며 조금이라도 더 자고 싶어 짜증을 부립니다. 그러면 어찌합니까? 엄마는 달래고 협박하고 아부하여 일으켜 세워 아침을 먹이고 하루를 시작하도록 돕습니다. 그와 같이 누군가를 받는다는 것은 자기부인과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게 합니다.
바울은 ‘서로 받으라’고 말씀했습니다. ‘서로’가 강조되었습니다. 일방통행은 무엇이든지 행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일방통행이 아니라 쌍방향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만 있고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없다면, 반쪽 사랑은 마귀의 공격을 물리칠 수 없습니다. 목자가 양을 받는 것처럼, 양도 목자를 받아야 합니다. “나는 약한 자, 목자님은 강한 자, 나는 양이니까 마음대로 해도 되고 목자님은 목자이니까 참고 인내해야 합니다.” 이런 마인드로 맺어지는 관계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하지 못합니다. 양에게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것처럼, 목자에게도 존경과 지지가 필요합니다. 목자와 목자사이도 그러하고 부모와 자녀의 관계도 그러합니다. 부모는 자녀의 보호와 사랑이 되어 주고 자녀는 부모에게 존경과 지지의 근원이 되어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 교수와 학생, 사장과 근로자의 관계도 그러합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사람과 가까이하는 것이 부담이요 민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가까이할수록 즐거워야 하는데 부담감을 갖게 합니다. 함께 할수록 힘이 되어야 하는데 병이 될 수 있어  피하고 무관심하고 나 홀로 있는 것이 차라리 안전하고 편하게 만듭니다. 코로나19를 생각하면, ‘죄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코로나19가 내 안에 파고들지 못하도록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까! 마스크를 하고 손 소독제를 바르고 바깥에 갔다 오면 전례 없이 샤워를 하고 청결위생에 신경을 씁니다. 또한 코로나 19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라는 멤버쉽으로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있습니다. 그와 같이 사람을 향한 갈등과 미움의 죄가 파고들지 못하도록 우리는 철저하게 싸워야 합니다. 마스크를 한 것처럼 입에 재갈을 물리고 손 소독제를 바르는 것처럼 혹시라도 내 손으로 분열과 다툼거리를 만들고 있지는 않는지 부지런히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도록 진실하게 회개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무엇보다 서로가 서로에게 부담스럽고 힘든 모습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라는 멤버쉽을 갖고 동역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고 본이 되고 동역이 되기까지 서로 받기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생명구원역사를 힘있게 이루어가십니다.

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이루기 위하여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는데도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습니다. 그를 통해 이스라엘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들을 견고하게 하셨습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기꺼이 낮아지시고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근본 본체가 하나님이시지만 종의 형체가 되어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를 통해 모든 열방이 주께 감사하고 주를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구약시대부터 예언된 그리스도의 모습이었습니다.(9-12) 성자는 성부의 뜻을 따라 죽기까지 낮아지셨고 성부는 지옥에까지 낮아지신 성자를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높이셨습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서로 받으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서로 받으라’ 말씀하신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서로 받으며 모든 기쁨과 평강을 주시고 믿음안에서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넘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고 서로 받기에 힘쓰는 것이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해지는 비결입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이 믿음 주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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