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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휴화산
작성일 2020-04-05 (일) 13:06
분 류 마태복음
첨부#1 2020년_마태복음_제6강-1.hwp (29KB) (Down: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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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제6강]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2020년 마태복음 제 6 강
말씀 / 마태복음 5:1-16
요절 / 마태복음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5장부터 7장까지를 산상수훈이라고 합니다. ‘산상수훈, 예수님이 산 위에서 주신 가르침’은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십계명과 율례를 주신 모습과 연결됩니다. 산상수훈은 계명의 본질을 드러내며 율례의 온전한 적용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오늘 말씀은 산상수훈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먼저 복 있는 자에 대해 말씀하여 주십니다.(1,2) 성경은 창세기 1장에서부터 복을 말씀했습니다.(창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아브람을 부르셨을 때에도 가장 먼저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너는 복이 될지라”(창12:2) 시편에서도 가장 먼저 복있는 사람에 대해 말씀합니다. “복있는 사람은...”(시1:1) 사람들이 복 있는 자가 되기를 원하면서도 그 길을 알지 못하여 방황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누구이며, 그 길은 무엇입니까!

첫째,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보통 상식으로는 ‘부자에게 복이 있나니 세상이 그들의 것임이라’ 입니다. 최소한 마음만이라도 부자여야 행복합니다. ‘돈이 없어도 가오가 있으면’ 그나마 사는 맛이 있습니다. ‘나 때에는 말이야’, 나떼를 들이키며 자기 의와 우월감으로 사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을 수도 있습니다. 반면 가난은 고통스럽습니다. 가난이 무엇입니까? 노트북이나 자동차처럼 있으면 좋은 것이 없다고 하여  가난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먹고 살 양식과 입을 옷을 걱정해야 될 정도로 절대적인 도움이 필요한 상태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것은 ‘나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자’임을 아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고 나의 능력과 의지로는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인내심도 없고 심정도 부족하고 지혜도 딸리는 그런 자신을 아는 상태입니다. 그것은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천국은 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역설이지만 진리입니다. 우리가 언제 구원의 은혜를 받습니까! 우리가 언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체험하게 됩니까! 심령이 가난했을 때입니다. 이어령 박사는 가난한 마음을 제비에 비유했습니다. 제비들은 처마 밑에 집을 짓고 사는데, 한 번에 여러 마리의 새끼를 낳아서 기릅니다. 어미는 새끼를 키우기 위해 부지런히 벌레를 잡아 새끼들의 입에 넣어줍니다. 새끼들은 충분한 음식을 먹지 못해 항상 배가 고픕니다. 어미 제비가 먹이를 물어오면, 새끼들은 서로 먹겠다고 입을 짝 벌리고 “짹짹, 짹짹” 소리를 칩니다. 어미는 벌레를 먹지 못한 새끼를 정확히 구별하여 먹을 것을 넣어줍니다. 이는 진짜 먹지 못한 새끼는 입이 찢어지게 벌리며 먹을 것을 달라고 소리치기 때문입니다. 반면 방금 전 입에 먹을 것을 넣어준 새끼는 그만큼 입을 크게 벌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은 영적 굶주림으로 부르짖는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죄사함의 은혜가 그러하고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도 그러합니다. 큰 죄이든 작은 죄이든 입이 찢어지도록 간절히 구하는 자에게 죄사함의 은혜가 주어집니다. 자기의 약함을 인정하고 겸손히 은혜를 구하는 사람이 말씀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덧입게 됩니다. 믿음의 체험, 기도의 응답이 그러합니다. 그들은 아주 작은 것에도 감사를 누립니다. 나 같은 자에게 구원을 주시고 말씀을 주시고 나 같은 자에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은혜를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반면 내 힘으로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자기의와 자부심으로 마음 가득히 채운 사람은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죄사함의 은혜를 누리기 어렵습니다.

신앙생활의 영원한 숙제는 가난한 심령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연수가 쌓여갈수록 우리 삶은 이전과 달라집니다. 예수님 믿기 전에는 죄문제로 고통했는데, 예수님 믿은 후에는 경건하게 살아갑니다. 성경도 많이 알게 되고 영적 분별력도 생깁니다. 인생의 경륜도 쌓이고 양도 돕고 이것저것 십자가와 직분을 맡아 봉사합니다. 이전과 다른 모습들이 많아질수록 이전보다 부자스런 마음을 갖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사람만 생각한다면, 우리 심령은 부자가 되는 길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때가 바로 영적 위기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에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고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는 부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자신들의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앞에 서게 될 때, 누구든지 가난한 영혼임을 깨닫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부자일 수 없습니다.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아 있어 죽음과 심판을 기다리는 불쌍한 영혼입니다. 구원자가 없다면 망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세상 만물의 주인이시며, 우리는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들입니다. 돈. 지식, 명예, 동역자, 자식, 양, 어느 것 하나 영원히 손에 움켜쥘 수 없으며,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갑니다. 천년만년 사는 것도 아니며 때가 되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앞에 설수록 우리는 가난한 심령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누구보다 많은 수고를 했던 사도 바울이 항상 가난한 마음을 가졌던 이유입니다. ‘나는 사도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세상은 부자가 되지 않으면 천국이 없다고 외치지만, 사람들이 천국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부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가난하지 못하고 이것저것 자기 자랑할 것이 많아진 부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니어도 의지할 것들이 많아졌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을 깨우시고 하나님 앞에 서게 하십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우리는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고통과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우울감을 호소하고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전에 당연하게 누렸던 시간들, 마스크 없이 마음껏 이야기하고 자유롭게 모이고 흩어졌던 그런 시간들이 그립습니다. 청년수양회가 그립고 주일예배 찬양이 그립고 당연하게 먹어주었던 주일 점심 서빙이 그립습니다. 이전에 비하면 정말 가난한 신앙생활임에 틀림없습니다. 어서 빨리 이런 시간이 지나고 풍성한 신앙생활을 누리고 싶은데, 주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 말씀으로 우리 삶을 뒤돌아보면, 힘든 이 시간은 우리 심령을 가난하게 만들고 천국을 소유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점점 길어지는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우리는 강제적인 홀로서기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홀로 서기, 교회에서 홀로 서기입니다. 하나님앞에서 진지하게 세상과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입니다. 세상을 흔드는 코로나와 우왕좌왕하는 인간의 모습에서 겸손히 하나님앞에 무릎을 꿇어야 할 시간입니다. 인간의 위대함을 노래했던 수많은 소리들이 잠잠해지고 하나님을 향해 주목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죽음과 심판을 생각해보아야 하고 인생의 길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해야 합니다. 저 또한 그동안 감사할 수 있었던 수많은 것들을 놓치고 살아온 둔한 영혼, 천박한 영혼의 소유자였음을 발견합니다. 마음껏 숨을 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옆에 있는 사람들을 당연하게 여겼던 무디고 부요했던 심령을 회개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어려운 시간을 통해 저와 우리 경성의 동역자들에게 가난한 심령을 주시고 천국의 비밀을 풍성히 얻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애통하는 자입니다. 4절도 같이 읽겠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애통’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슬피 우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슬픈 일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하지만 슬퍼하는 사람들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웃고 떠들며 놀 수 있는 그런 이야기에 몰려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슬퍼하는 자들을 위로하십니다. 죄와 죽음아래 놓여있는 세상을 보며 슬퍼하는 사람을 위로하십니다. 한 사람도 품지 못하고 진실하게 살지 못하는 빈약한 자기 영혼을 보며 슬퍼하는 자들을 위로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눈물을 흘리며 마음 고생하는 것이 싫어 목자로 살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눈물이 말라버린 사람은 메마른 고목나무처럼 생명력을 잃어버립니다. 우리가 눈물을 흘리는 그 자리에 하나님의 위로가 주어집니다. 나도 위로 받고 동역자들도 위로를 받습니다. 양들이 위로를 받고 하늘의 위로가 부어집니다. 주님, 우리를 도우사 애통할 줄 아는 사람들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셋째는 온유한 사람입니다. 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온유의 히브리어 ‘아나브’는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무슨 일을 만나든지 자기 감정이나 혈기를 부리기보다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을 찾고 거기에 순종합니다. 창세기의 이삭은 그랄 사람들과 다투기보다 새로운 우물을 찾아 파고 또 팠습니다. 우물을 파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체질이었거나 싸울 줄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온유는 기질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 문제입니다. 온유하게 살기를 원하면서도 온유하지 못하는 것은 염려에 쫓겨 조급해졌기 때문입니다. 각박한 세상은 목소리 높이고 싸우는 것을 지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온유하게 순종하는 사람은 사람을 얻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갑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1:29절에서 말씀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온유한 자들이 예수님을 배우며 하늘의 평안과 도우심을 얻습니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겸손히 하나님을 믿고 그 뜻에 순종하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넷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입니다. 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예수님 살던 시대는 하루 한 끼 먹기도 힘든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빵에 주리고 목마른 시대였습니다. 한번은 예수님이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여주자, 무리들의 눈이 뒤집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임금 삼아 평생 동안 빵문제 걱정 없이 살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나의 살을 먹고 나의 피를 마시라’며 복음을 전했지만, 오로지 빵에 주린 그들은 예수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빵에 주린 그들은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그럴지라도 예수님은 그들과 타협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삶의 첫 자리에 세우지 않으면 어느 자리에 있든지 참된 만족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취업문제가 해결된다고 해서, 88만원 세대가 88억 세대가 된다고 해서 참된 만족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의를 앞세우지 않으면 끊임없는 비교의식과 상대적 빈곤감으로 주리고 목마르게 됩니다. 세리 마태의 인생이 그러했습니다. 먹고 살기 힘든 시대일수록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기에 집중해야 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하나님은 그들에게 참된 만족을 주시며 그 삶을 풍성하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이 믿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다섯째, 긍휼히 여기는 자입니다. 7절을 읽겠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긍휼의 히브리어 ‘엘레오스’의 어원은 ‘아기를 잉태한 자궁’입니다. 긍휼이란 생명의 씨앗처럼 작은 사람,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보호하는 것입니다. 긍휼을 베풀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보상받지 못한다는 생각입니다. 힘 있고 능력있는 사람들을 도와주면 좋은 인맥을 만들 수 있지만, 힘 없고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 것은 허비하는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긍휼을 베푸는 사람이 긍휼히 여김 받을 것이라, 보상받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누구로부터 보상받는지 나와 있지는 않습니다. 긍휼을 베푼 사람에게 되돌려 받을 수도 있지만 생각하지도 못한 다른 곳에서 보상받을 수 있습니다. 악은 악순환을 만들고 선은 선순환을 만들어냅니다. 우리 속담에 자식을 키워 보아야 부모의 마음을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자식을 사랑해보니까 나를 향한 부모의 사랑을 알겠다는 것입니다. 목자가 양을 사랑하면서 우리를 향한 목자 예수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사랑을 주면서 사랑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되고 그래서 더 큰 사랑을 하게 되고 더 큰 사랑에 눈을 뜨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선순환을 기뻐하시고 예기치 못한 손길로 축복하십니다. 어려운 때일수록 긍휼을 베푸는 것이 자신을 풍성하게 하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여섯째, 마음이 청결한 자입니다. 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모든 인간은 더러운 죄성을 갖고 있습니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퍼펙트맨perfect man'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편단심, pure man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중마음이나 양다리 걸치는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살아계심.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좋은 날이나 힘든 날이나, 축복의 때이든지 고난의 때이든지 변함없이 이전 섬기던 대로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 하나님을 체험합니다. 반면 상황에 따라 오락가락 이중마음을 가지면 말씀과 기적을 수없이 체험할지라도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가룟 유다가 그러했습니다. 그는 3년동안 예수님과 함께 하며 엄청난 체험을 했습니다. 하지만 두마음을 회개하지 않았을 때, 예수님을 배반하고 사탄 마귀의 도구로 전락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일곱 번째, 화평케 하는 자입니다. 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당시 갈릴리 지방에는 폭력을 통해 로마를 몰아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자는 열심당원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폭력을 불사할 정도로 용감하다는 자부심으로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호칭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전쟁을 하는 자들이 아니라 평화를 가져오는 사람이라 말씀하십니다. 화평케 하려고 노력하다보면, ‘너는 도대체 누구편이야?,’ 중간에서 욕을 먹으며 양쪽에서 오해받고 공격당할 수 있습니다. 싸움을 붙이기는 쉬워도 화평을 가져오려면 오랜 시간 자기희생을 각오해야 합니다. 우리 각 사람이 어디에 있든지 peace maker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여덟째,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입니다. 1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첫 번째 복도 역설이었는데, 마지막도 역설입니다. 의를 위하여 살았는데, 칭찬은 커녕 박해라니요!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그런데 주님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욕도 먹고 박해도 받고 거짓으로 소송도 당할 수 있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의 분위기가 점점 그렇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조금만 꼬투리를 잡아 모든 책임을 교회에 뒤집어 씌우려고 합니다. 한국사회에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평균적으로 보다 건전하게 살고 있습니다. 사회 구제사업만 보더라도 기독교 계통에서 담당하는 비율이 70%에 이릅니다. 21세기 들어 교회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가 좋지 않자, 소위 날라리 신자들이 많이 빠져 나갔습니다. 앞으로 10년 정도 더 고생하면, 지금보다 훨씬 순수한 교회로 성숙해지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점점 성숙해져가고 있는데, 세상은 한두 가지 자기 입맛에 맞지 않는 점을 들어 계속하여 욕하고 비웃고 공격하는 목소리를 낮추지 않습니다. 아니, 점점 더 높여가고 있습니다. 세상에! 기가 막히고 열 받고 주먹이 불끈 쥐어지는 그런 상황입니다. 예수님 당시 초대교회는 우리와 비교할 수 없는 힘들고 억울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오히려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12절에서는 더욱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를 하였느니라” 꾹 참는 것은 그래도 해보겠는데, 어떻게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습니까! 아니, 왜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까! 박해는 상처와 고통만 남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박해는 우리를 성장하게 합니다. 우리 스스로 내 안의 불순물을 제거할 수 없는데, 박해는 불순물을 빼어내고 선지자 수준의 믿음으로 성장할 통로가 되어줍니다. 딤후3:12절은 말씀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은 박해를 받으리라” 그러므로 어두운 생각만 하지 말고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억울한 고난을 견디고 감당할수록 그 사람을 수준높은 세계로 이끌어 갑니다.

예수님은 계속하여 제자들에게 놀라운 비전을 말씀하십니다. 1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처음부터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십니다. ‘1년 인턴 시켜보고 싹수가 되면 소금으로 삼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로 부르신 그때부터 짠돌이 짠순이로 부르셨습니다. 소금은 짜기 때문에 그 자체로 인기는 없습니다. 소금 한 숟갈 입에 넣으면 구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금이 음식에 들어가면 음식 맛을 제대로 살려줍니다. 삶은 계란을 그냥 먹으면 목이 메이지만, 소금에 찍어 먹으면 아주 잘 넘어갑니다. 소금이 짠 맛을 낼 때 음식맛이 좋아지고 음식을 먹는 사람들이 행복해집니다. 그와 같이 예수님은 제자들을 통해 세상을 맛나게 하고 행복하게 만들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짠 맛을 잃어버리면 예수님의 소망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맛을 잃어버린 신자들이 있습니다. 사기치는 신자, 거짓말하는 신자, 술과 쾌락과 돈 욕심에 사로잡힌 신자, ... 맛을 잃어버리고 세상에 동화된 신자입니다. 제자가 맛을 잃어버리면 어느 자리, 어떤 능력을 가질지라도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 받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 밟히지 않고 하나님께 쓰임받고 싶다면 제자 고유의 맛을 지키기에 힘써야 합니다. 가난한 심령을 잃지 않고자  말씀앞에 서야 합니다. 애통하며 온유하며 긍휼히 여기는 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 각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님 제자의 맛을 가진 자들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세상의 빛이라고 하십니다. 고대 팔레스틴 지방의 건축 재료는 석회암이었습니다. 그래서 산 위에 있는 동네는 햇빛이 비치면 눈부실 정도로 환하게 드러났다고 합니다. 그와 같이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에서 빛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위에 둡니다.(15) 그를 통해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게 합니다. 그와 같이 제자들은 마음으로만 믿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나, 예수님 믿어요, 마음으로 잘 믿어요’, 착한 행실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1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아나운서처럼 유창한 말로 전도할지라도 착한 행실이 따르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비결은 이론이 아니라 행실입니다. 세상의 어둠이 깊을수록 더욱 착한 행실을 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팔복 말씀처럼 복 있는 사람으로 살고자 전심전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그들을 통해 세상의 부패를 막고 어둠을 물리치시며 천국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 믿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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