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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휴화산
작성일 2021-04-03 (토) 12:34
분 류 요한복음
첨부#1 2021년_부활절수양회_제2강-1.hwp (34KB) (Down: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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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부활절수양회 제2강]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2021년 부활절수양회 제2강                                                    이 인구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말씀/요한복음 11;1-57
요절/요한복음 11;25,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게 믿느냐

  ‘메멘토 모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죽음을 기억하라’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뜻의 라틴어입니다. 예전 로마에서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개선장군이 시가행진을 할 때 노예에게 ‘메멘토 모리’를 외치도록 시켰다고 합니다. ‘지금은 승전가를 부르고 있지만 언젠가 너도 죽을 것이니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라’는 경고였습니다.  
산업혁명이후 놀라운 과학과 의학의 발달로 인류는 수명을 연장하며 죽음까지도 정복할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작년 한마을에서 시작된 코로나 전염병이 온 세상을 덮어 수많은 이들을 죽음의 공포로 몰아갔습니다. 올해 가까스로 백신이 나왔지만 그 부작용이 심해 사망까지 이르고, 변이 바이러스까지 생겨 어떤 분은 그냥 병에 걸리는 게 낫겠다며 두려워합니다. 또 코로나로 경제가 위축되어 많은 이들이 병에 걸려 죽기 전에 굶어죽겠다고 아우성입니다. 이런 시대 부활이요 생명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진정한 소망을 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부활이요 생명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죽음을 이기는 부활의 생명을 얻고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길 기도합니다.

제 1장,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1-16)
  어떤 병자가 있는데 그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였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 근처에 위치한 작은 마을입니다. 후에 이곳에서 마리아는 예수님께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으며 사랑을 표시했습니다. 베다니에서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 세 남매가 일찍 부모를 잃고 서로를 의지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부지런한 여인으로 열심히 일하며 주님역사를 섬겼고 마리아는 조용히 사색하며 예수님말씀 듣기를 좋아했던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자주 그 집을 방문하여 말씀을 가르쳐주시기도 하고 음식을 잡수시기도 하셨습니다.(눅 10;38-42) 부모가 없었지만 이들은 예수님을 부모처럼 사랑하며 의지하며 험한 세상을 힘차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집안의 기둥이었던 나사로가 병에 걸렸습니다. 동쪽 큰 나라에서 왔다는 키작은 상인을 만난 후 갈수록 심한 기침이 코로 나오며 이젠 숨쉬기조차 힘들어했습니다. 나사로의 얼굴에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지면서 자매들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그들은 예수님께 빨리 와달라고 재촉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을 확신했던 그들은 병든 사실만 알리기만 해도 예수님께서 만사를 제쳐놓고 가장 빨리, 가장 좋은 치료를 해줄 것을 믿고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도 병들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은 늘 건강하고 공부도 잘하고 사업도 잘되고 만사형통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자도 병들 수 있고 갑작스런 사고를 당하기도 하고 취직과 결혼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만성적인 자녀문제에 시달릴 수도 있습니다. 햇빛이 의인과 악인에게 골고루 비추고 비바람도 똑 같이 몰아치듯이 고난도 신자와 불신자를 가리지 않습니다. 그럼 예수님 믿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인생이 원래 고통의 바다이니 타고난 팔자가 그러려니 하고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게 정신건강에 좋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신자에게는 모든 고난가운데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습니다.
  나사로의 병든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마르다와 마리아가 볼 때 나사로의 병은 절망적이었습니다. 상황은 어둡고 절박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실 때는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좋은 기회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병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음을 아시고 사랑하는 이들에게 부활의 믿음을 심고자 하셨습니다. 우리가 인생에 일어나는 고난의 의미를 다 알 수 없지만 고난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희생하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 하나님을 믿을 때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신자는 고난 중에서도 기뻐할 수 있다 말했습니다. 왜냐면 신자는 고난을 통해 인내를 얻을 수 있고 인내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소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롬 5;3,4) 진주조개는 10년 이상을 이물질로 속살이 상하는 고통을 인내로 이겨낸 후에야 한 알의 빛나고 아름다운 진주를 만들어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를 정금과 같이 순수한 믿음의 사람으로 연단하시고 인도해가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의 고난이 오면 하나님께서 나를 더 귀하게 쓰시기 위해 연단하시는구나 감사하고 고난을 이길 믿음을 주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사랑하신다면 소식을 듣자마자 당장 달려가 고쳐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면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주신 것 같이 말씀으로 당장에 고쳐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소식을 들으시고 오히려 계시던 곳에 이틀이나 더 머무셨습니다. 저자 요한은 사랑하셨기 때문에 특별히 이틀을 더 머무셨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이틀을 더 머무셨다’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유행가 가사처럼 왠지 심오한 뜻이 있을 것 같으면서도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결국 나사로는 죽게 됐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큰 고통과 슬픔을 주었고 사람들로부터 오해와 불신과 원망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왜 예수님께서는 이틀이나 더 지체하셨습니까? 예수님이 이틀을 머물고 하루 동안 베다니에 갔을 때는 이미 나사로가 죽은지 4일이나 된 때였습니다. 즉 예수님이 그 소식을 들었을 때는 이미 나사로는 죽었을 때였습니다. 유대풍습에는 죽은지 3일이 지나야 완전한 죽음으로 봤습니다. 왜냐면 죽은 줄 알았는데 기절했다 깨어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선 완전한 죽음으로 여겨지는 4일후에 나사로에게 가셨습니다. 그것은 나사로가정을 사랑하기 때문에 가장 좋은 때, 가장 좋은 부활신앙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를 위해서 완전하고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가나안땅으로 온 후 간절히 바라던 이삭을 얻기까지 25년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선 그 기간 동안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빚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 금방 기도를 응답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하루 이틀뿐 아니라 때로는 1-2년 심지어 10-20년을 지체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받을 만한 믿음을 준비시키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은 신자들에게 큰 고난으로 때로는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의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자가 믿음으로 인내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때 결국 가장 좋은 것을 받게 됨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표현은 그 사람의 믿음에 따라 달라집니다. 믿음이 어릴 때는 기도하면 바로 이뤄주시는 문제해결 방식으로 표현하십니다. 하지만 아이를 사랑한다고 해서 아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즉시 주고 모든 고난을 막아준다면 그것은 올바른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선 믿음이 성장하는 이들에게는 인생의 고난을 없애주시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고난을 이길 능력 즉 믿음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그 믿음의 최종점은 죽음도 이기는 부활신앙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이틀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유대로 다시 가자”말씀하셨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때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때 제자들의 내면에는 돌로 치려하는 유대인들 때문에 깊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제자들의 두려움의 뿌리는 죽음입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그들의 생각과 행동을 마비시켜 소심하고 비겁한 인간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9절) 그들의 두려움의 원인은 돌로 쳐 죽이려는 유대인들이 아니라 내면에 빛되신 예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어둠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하신 세상의 빛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어떤 세상의 어둠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실족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면 모든 세상역사는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자신의 생명이 돌을 던지는 유대인들의 손에 달려 있지 않고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리빙스턴은 아프리카를 전도여행할 때 수많은 죽음의 위협과 마주쳐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완수하기 전에는 결코 죽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결국 그는 그 사명을 다 완수하고 나서야 소천하였습니다. 9절 말씀에서 ‘낮’은 하나님이 사명을 감당하도록 주신 인생의 때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낮 시간은 12시간으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면서 또한 어떤 이에겐 심히 부족한 시간입니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하는 어린아이에겐 너무나 긴 시간이지만 시한부인생을 사는 이들에겐 일분일초가 생명 같은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늦은 시간은 없지만 인생의 밤이 오기 전에 하나님 일을 해야 합니다. 많은 이들이 일생을 끝내고 죽음 앞에서 껄껄껄한다고 합니다. “좀 더 사랑하며 살껄! 좀 더 베풀며 살껄! 좀 더 용서하며 살껄!”
  예수님은 이제 “우리친구 나사로가 잠들었으니 깨우러 가자.”(11)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보셨습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잠을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이는 없습니다. 왜냐면 깨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푹 쉬고 깨어나 새로운 아침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죽음은 깨어날 수 없기 때문에 두려워합니다. 또 깨어나도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더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을 인생의 끝으로 봅니다. 끝장났다고 보고 실패로 봅니다.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평생 죽음을 향해 가며 평생 죽음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선 죽음을 잠이라고 하셨습니다. 왜냐면 죽음에서 깨워줄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죽음을 다시 깨어나는 잠으로 볼 때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마냥 좋아하면 안됩니다. 인간은 매일 잠을 통해, 인생의 1/3을 자면서 죽음을 연습합니다. 매일 중요한 것을 위해 열심히 일을 할 때 밤에 더 깊은 잠을 잘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의 낮 시간에 예수님을 따르며 하나님영광을 위해 삶으로 가치 있는 죽음을 맞을 수 있습니다. 아직 부활신앙이 없는 제자들은 ‘죽은 나사로에게 가자’ 하시는 예수님의 요청에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도마가 비장한 각오로 말했습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도마는 의심의 사람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의리의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도 가만히 있는데 의심 많은 도마가 이렇게 큰소리치는 바람에 결국 다른 제자들은 눈치 보며 예수님을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도마의 의리신앙은 부활신앙이 없는 자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충성입니다. 하지만 그의 내면에는 기쁨이 없었고 소망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제자들의 믿음은 한계적이었습니다. 그들이 앞으로 큰일을 하기 위해서는 죽음의 한계를 뛰어넘는 부활신앙이 필요했습니다.

제 2장,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17-44)
  1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한 때는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지 이미 나흘이 되는 때였습니다. 시신은 벌써 썩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절망의 때가 예수님께는 희망의 때요 역사를 시작할 때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신다는 말을 듣고 급히 나가 맞으며 원망의 말부터 하였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마르다는 늦게 온 예수님께 대한 깊은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대한 막연한 바람 또한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22) 예수님은 죽음의 세력에 사로잡혀 있는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선포하셨습니다. 그러자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24) 하며 믿음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한 말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 오셨는데 왜 마르다는 믿음이 없는 것입니까?
첫째. 과거의 상처: 마르다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하며 과거에 얽매였습니다. 그녀는 과거의 일에 매여 현재 슬퍼하고 절망하며 믿음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애타게 예수님을 찾았지만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고 결국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상처와 실패의 기억에 빠져 현재를 어둡게 살아갑니다. 과거 중학교 사춘기때 받은 폭력은 피해자 뿐 아니라 가해자 또한 치유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깁니다. 피해자는 인간으로서의 자존감과 믿음이 깨어지고 또 가해자도 내면이 분노에 지배당하다 언젠가 인터넷에 과거가 드러나면 평생 학폭자로 낙인찍힐 수 있습니다. 과거 시험을 앞두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결국 시험은 떨어지고 취직은 실패했습니다. 특히 과거에 문제 앞에서 하나님께 기도했는데도 해결되지 않았을 때 불신에 빠지고 현재 문제 앞에서 하나님께 나아갈 믿음을 갖지 못합니다. 이미 과거는 지나갔지만 그때 받은 상처 때문에 현재를 불신 가운데 살면서 다가올 미래까지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과거의 죄악과 실패와 상처까지도 합력하여 미래에 선을 이루실수 있는 분이십니다. 한국인 최초의 맹인박사인 강영우 교수는 중학교 때 축구공에 맞아 실명됐습니다. 아버지는 병으로 또 어머니는 아들의 실명의 충격으로 죽었고 동생들을 위해 일하던 누나마저 과로로 죽었습니다. 동생들은 고아원으로 그는 맹인학교로 흩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했어도 치유되지 않자 더욱 절망의 수렁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바울도 병치유의 기도에 응답받지 못했지만 약점 그대로 위대한 사도로 쓰임 받은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소경인 자신도 귀하게 쓰실 것을 믿게 됐습니다. 진짜 장애는 육체적장애가 아니라 믿음의 장애라는 것을 깨닫고 바울을 인생 멘토로 따르게 됐습니다. 그 후 고난과 편견 속에서도 믿음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박사를 받은 후 시각장애인과 동양인이라는 핸디캡을 딛고 미국 백악관 정책차관보까지 지내며 평생 장애인인권을 위해 큰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인생말기 췌장암판정을 받은 후에도 “두 눈을 잃고 한평생 너무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간증하며 전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고 잠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이미 지나간 과거를 바꿀 수 없지만 지금 생명의 주관자요 세상역사의 주관자되신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은 그 믿음으로 새로운 부활역사를 시작하십니다.
둘째. 믿음에 이르지 못한 지식: 마르다는 많은 성경적 지식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역경 속에서도 “구하면 하나님이 주실줄을 아나이다.”(22) “마지막 날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24) 질문마다 정답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믿는다고 하지 않고 안다고 했습니다. 말씀을 아는 것은 믿는 것과 다릅니다. 많은 신자들이 나사로와 예수님의 부활의 말씀을 알면서도 막상 죽을 것같은 현실 앞에서 믿음을 갖지 못합니다. 알면서도 믿음이 없어 두려워하므로 더욱 고통스럽습니다. 우리가 아는 세상적 지식은 과학적, 이성적, 상식적이라는 한계를 만들어 한계를 초과하면 예수님도 안 될 것이라는 불신을 갖게 합니다. 또 많은 지식은 오히려 인생의 선택 앞에서 갈등과 혼란을 가져옵니다. 많은 말씀을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말씀이 예수님께서 나에게 주신 말씀인가 깨닫는 분별력이고 예수님께서 주신 그 말씀을 절대적으로 붙드는 믿음입니다. 부활신앙은 아는 것을 넘어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언제가 될지 모르는 마지막 날이 아닌 현재의 부활에 대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선 죽음의 상처에 매어있는 마르다에게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갖도록 도전하셨습니다. 25,2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마르다가 지금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을 믿음으로 붙들도록 도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과거에 갇혀있거나 지식에 매어 있지 않고 지금 말씀가운데 살아 역사하십니다. 믿음은 언제나 지금 선택과 결단을 요구합니다. 믿음은 지금 예수님의 주신 한마디 말씀을 붙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부활이요 생명’은 죽음을 이긴 생명,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게 됩니다. 아니 주님께서 살려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죽게 하는 원인인 죄를 사해주시기 때문에 나중 죽는다 해도 부활하게 됩니다. 또 지금 살아서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게 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 자는 살아있을 때도 죽음권세에 지배받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부활할 수 있기 때문에 죽음은 잠시 쉬어가는 잠일 뿐 더 이상 우리의 삶을 지배할 수 없습니다. 결국 신자는 나중 죽은 후 뿐 아니라 지금 살아 있을 때도 죽음에서 해방된, 죽음을 이긴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는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부활과 생명을 줄 수 있다”고 하지 않으시고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으로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길 원하십니다. 진정한 사랑은 원하는 것을 주는 것이 아닌 항상 함께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부족하고 추한 죄인일지라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원히 함께 하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부활이요 생명되신 예수님을 온전히 자신의 생명의 주인으로 영접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이 내 안에 있는 것을 믿을 때 죽음이 지배하는 어떤 어둠속에서도 두려워하거나 절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 스스로가 죽음을 이길 수 없지만 내 안에 있는 예수님이 부활이요 영원한 생명으로 모든 죽음과 절망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절망에 빠지고 열등감이 커지면 어디에서도 기회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디에도 없다’는 nowhere에 띄어쓰기만 하면 ‘지금 여기에’ now here가 되듯이 잠시 멀리 떨어져서 믿음으로 보면 기회는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긍정과 부정은 스페이스 하나 차이, 믿음의 차이입니다. 부활신앙이 있으면 문제 속에서도 불안하거나 조급하지 않고 믿음의 눈으로 보며 인내하며 하나님의 때를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부활의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우리의 생사관이 바뀌고 소망이 바뀝니다. 죽음을 이긴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이 내 안에 있는데, 최후 승리가 보장되고 영생이 보장됐는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또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부활신앙이 있으면 더 이상 죽음이 주는 두려움과 슬픔과 절망의 다스림에서 벗어나 생명이 주는 희망과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부활신앙이 있으면 나를 절망케 했던 과거의 실패와 상처에 매이지 않고 그 경험을 발판삼아 미래를 위해 도전하는 자가 되게 합니다. 부활신앙이 있으면 미래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을 극복함으로 지금 사는 인생을 잘 먹고 잘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 가치 있는 하나님나라를 소망하며 기쁨으로 섬기며 희생할 수 있게 합니다.  
  많은 신자들이 부활신앙으로 병을 이기고 시험에서 합격하고 실패와 한계를 극복했습니다. 또 많은 신자들이 부활신앙으로 불치병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영광을 위해 살았고, 시험에서 떨어지고 취업에 실패해도 절망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나와 함께 하신 예수님이 결국 더 좋은 때에 더 좋은 것을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부활신앙으로 하나님영광을 위해 고난을 받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순교하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부활과 생명되신 예수님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고 죽음의 문을 통과한 후 더 큰 영광과 열매를 믿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에게는 심각한 육체의 가시, 즉 질병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질병이 떠나가길 예수님께 3번이나 간구했지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많은 계시를 받은 자신이 자만하지 않도록 하심을 깨달았습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12;9) 그는 부활신앙으로 자신의 약한 것들이 오히려 예수님의 능력을 얻게 하는 비결임을 깨달았습니다. 그가 네로의 극심한 박해로 2번째 옥에 갇혔을 때 그와 함께 했던 많은 동역자들이 그를 떠났습니다. 그는 춥고 외로운 감옥에서 결국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부활신앙으로 마지막 편지에서 간증했습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디모데후서4;6-8) 그는 예수님의 부활을 배우기 위해 일평생 달려왔고 이제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짐으로 부활의 영광을 보게 됐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이것을 네가 믿느냐 는 예수님의 말씀에 마르다는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신앙고백했습니다. 마르다는 부활과 생명되신 예수님을 믿었을 때 구원자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깨닫게 됐습니다. 그리고 집에서 슬퍼하는 마리아를 불렀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나아가 그 발아래 엎드려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함께 온 유대인들이 같이 울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보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Jesus wept)’(35) 이 말씀은 성경에서 가장 짧은 구절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많은 것을 담고 있습니다. 마리아와 유대인들은 죽음을 슬퍼하며 자기 연민에 젖어 울었습니다.  같이 슬퍼하며 위로했지만 같은 죽음의 종이라는 동질감 외에 실제적인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에 굴복당하여 우는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셔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고난을 대신 감당하시고자 하셨습니다.
  3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무덤으로 가서 무덤을 막은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방금 신앙고백을 한 마르다가 말했습니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마르다는 믿음으로 고백을 했지만 온전한 부활의 믿음을 체험하기 위해선 돌을 옮기는 순종이 필요합니다. 사실 마르다가 돌을 옮기는 것과 관계없이 나사로를 살리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선 마르다가 돌을 옮기는 순종을 통해 부활의 믿음을 체험하길 원하셨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순종할 수 있지만 또한 순종을 통해 믿음을 온전히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려면 마음속에 있는 불신의 돌, 의심의 돌을 믿음으로 옮겨놓아야 합니다. 무덤의 돌을 옮겨 놓자 예수님은 하나님께 기도한 후 무덤을 향하여 큰 소리로 나사로를 부르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43) 예수님의 음성은 태초에 말씀으로 생명을 지으신 권능으로 죽은 나사로의 썩어가는 육신에 들어가 생명을 불어넣었습니다. 말씀의 생명력이 들어가자 나사로는 수족이 붕대로 묶인 채 무덤에서 나와 가족들의 품에 안길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증명하셨습니다. 하지만 모든 이들을 죽음에서 구원하고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했습니다. 나사로 사건은 당시 유대사회에 큰 충격을 줬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됐습니다. 하지만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치솟는 인기에 결국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했습니다.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은 예수님께서 죽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위해 오셨고 이제 그 길을 가셨습니다. 그 며칠 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죽음의 세력에 사로잡힌 모든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게 못 박히셨습니다. 그리고 3일 만에 부활하신 후 지금도 모든 믿는 자들과 죽음을 이긴 영원한 생명으로 함께 하십니다.
  최근 예수님께서는 제 인생가운데 온전한 부활신앙을 갖도록 여러 고난을 주셨습니다. 자녀들의 잇따른 기흉수술 후 동생이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쓰러져 어떤 치료에도 계속 나빠졌습니다. 작년 처음 쓰러졌을 때는 단지 치과일이 힘들 정도였지만 이제 다른 이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의 기도에도 상황은 호전되지 않아 강한 죽음의 세력에 억매이게 됐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 했는데 왜 이런 일이 생기는가 예수님의 사랑을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상황 속에서도 저는 예수님의 사랑을 부인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30년 전 교통사고로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섰지만 예수님의 은혜로 부활과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 후 학과공부의 광야를 건너면서 수도 없이 절망과 포기를 반복했지만 결국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며 승리하게 도와주셨고 그 후 결혼과 개업 등 많은 문제 속에서도 부활이요 생명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극복하게 도와주셨습니다. 제가 지금 눈에 보이는 현실만을 바라보면 깊은 죽음의 어둠속에 빠질 수밖에 없지만 지금까지 나와 함께 하시고 인도하신 부활이요 생명되신 예수님을 믿을 때 결국 승리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제가 어두운 현실을 바라보지 않고 믿음으로 부활이요 생명되신 예수님이 주신 말씀을 붙들 수 있길 기도합니다. 믿음으로 내 마음속 염려와 불신의 돌을 옮기고 예수님의 생명구원역사가운데 쓰임 받는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모든 인생들에게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부활이요 생명되신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스펄젼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금괴를 현재 통화되는 돈으로 바꿀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선 신자들에게 부활생명이라는 금덩어리,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많은 신자들이 부활생명을 소유하고도 현실의 죽음 앞에서 무릎을 꿇고 벼락거지처럼 삽니다. 우리가 나와 함께 하신 부활이요 생명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지금 현실에서 나와 세상을 얽매이는 죽음의 세력들과 싸울 수 있길 기도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이미 승리가 정해진 죽음과의 싸움에서 승리함으로 부활의 증인으로 살 수 있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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