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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2-04-10 (일) 13:05
분 류 누가복음
첨부#1 2022년_누가복음_제5강-1.hwp (113KB) (Down: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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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5강]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2022년 누가복음 제5강                                                      이 인구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말씀/ 누가복음 5;12-26
요절/ 누가복음 5;20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나병환자와 중풍병자를 치유하시는 사건입니다. 나병과 중풍병은 부정하고 추한 병이지만 그들은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며 긍휼히 여기시어 고쳐주시며 죄 사함을 선포하셨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를 치유하시고 죄 사함을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과 권능을 배우고 각자 가진 죄와 질병을 들고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길 기도합니다.

첫째, 나병환자를 깨끗케 하신 예수님(12-16)
  온 몸에 나병 들린 사람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원문 성경에는 ‘보라(ivdou)’라는 말이 먼저 나옵니다. 나병 들린 사람이 예수님께 나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그것은 “보라! 나병환자분도 나오셨네요. 환영합니다!” 그런 느낌이 아니라 “보라! 어떻게 저주받은 나병 걸린 인간이 나올 수 있지? 나는 마스크도 안 썼는데!” 나병은 나균에 감염되어 생기는 만성질환으로 조직과 신경을 파괴시키는 무서운 병입니다. 신경손상으로 처음에는 고통스럽다가 곧 무감각해지고 피부뿐 아니라 연골조직까지 침범해 손가락,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고 코가 문들어집니다. 부패한 시체(좀비)같은 형상으로 랍비들은 나병환자가 치유 받는 것은 죽은 자를 살리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여겼습니다. 나병은 전염성이 강해 사회와 가족들에서 추방되어 혼자 동굴 속에서 살며 인간의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고 인간폐업을 해야 했습니다. 율법에서도 부정한 병으로 규정되어 길을 갈 때도 옷을 찢고 머리를 풀어헤치고 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 소리치며 사람들을 피해야 했습니다.(레13장) 무엇보다 나병은 하나님의 징계로 생긴 저주받은 병이라 여겨지고 오직 하나님만이 고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한 나병환자가 좀비를 본 것처럼 놀라는 사람들을 뚫고 예수님 앞에 나와 엎드렸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이 나병환자는 모든 소망이 사라진 지옥 같은 어둠속에서 우연히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병자뿐 아니라 귀신들린 자까지 고쳐주신다는 소문에 절망 가운데서 희망을 가지게 됐습니다. 예수님의 귀신을 내쫓는 능력으로 자신도 치유 받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지만 과연 자신 같은 저주받은 자를 고쳐주시길 원할까 확신이 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가다 돌에 맞아 죽는 한이 있어도 하루만이라도 사람처럼 살다 죽고 싶었습니다. 끊임없이 자신의 발목을 잡는 자의식과 두려움을 물리치며 그는 하늘에 사무치는 간절함으로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갈 때 가장 중요한 것이 간절한 소원입니다. 예수님은 베데스다 못가에 누워있던 중풍병자를 보시고 가장 먼저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셨습니다. 낫고 싶지 않은 병자가 있을까 생각되지만 오랜 실패와 좌절가운데 포기하는 이가 많습니다. ‘희망고문’이란 말이 있습니다. “희망은 모든 악 중에서도 가장 나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고통을 연장시키기 때문이다.”(프리드리히 니체) 절망적인 상황에서 희망이 아예 없다면 포기할 수 있지만 1%의 작은 희망이 있을 때는 포기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괴로운 상황이 됩니다. 모든 노력과 바램에도 결국 실패하면, 간절히 바란 만큼 더 큰 절망과 상실감에 시달리는 희망이라는 고문이 됩니다. 희망고문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빠른 체념과 포기이고 그러면 더 이상 상처받는 일도 없습니다. 하지만 믿음은 간절한 소원으로 희망을 붙드는데서 시작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히11;1a) 그러나 나병환자는 간절함으로 나왔지만 적극적으로 예수님께 자신의 병을 고쳐달라 매달릴 수 없었습니다. 애타는 심정으로 사람들을 뚫고 예수님께 나왔지만 예수님 앞에 엎드려 고개를 들지 못하고 가까스로 간구했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어떤 사람은 ‘원하시면’이란 말속에서 이 병자가 믿음이 부족한 것 같다고 말합니다. 정말 믿음으로 나왔다면 맹인 소경거지 바디매오처럼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막10;47) 외치며 간청했을 것이라 말합니다. 하지만 나병환자의 믿음은 그가 붙들 수 있는 최선의 믿음입니다. 하나님께 저주받은 병에 걸린 자신이 드러내놓고, 당당하게 자신의 병을 고쳐달라 요구할 수 없었습니다. 설사 예수님께서 치유가 아니라 더 큰 저주를 하셔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귀신들린 자까지 고쳐주시는 예수님께서 부족한 자신에게도 단 한번만 더 긍휼을 내려달라 간구하였습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문제앞에서 간절한 심정으로 예수님께 나옵니다. 그런데 계속 간구하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불신하고 원망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내가 두드리기만 하면 원하는 모든 것을 주는 도깨비 방망이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9;15,16)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 멸망할 수밖에 없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간절히 찾고 구하는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택하시고 구원해주십니다. 구원받은 죄인에게 감당할 수 없는 큰 은혜지만 또한 구원받지 못한 죄인이 왜 나는 구원하지 않는가 요구할 수 없습니다. 나병환자는 자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 저주받은 사실을 깊이 깨닫고 오직 긍휼만을 간절히 구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죄인들이 예수님께 나와 따집니다. “왜 나에게만 이런 저주를 내리십니까? 나보다 더 큰 죄인들도 세상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고 큰소리치며 사는데 왜 나에게 축복을 주시지 않으십니까? 더 늦기 전에 나에게도 빨리 축복을 주십시오!” 따지듯이 청구하며 매달립니다. 하지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악된 인간이 구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 긍휼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격 없고 추악한 죄인임을 깨달을 때 예수님의 긍휼의 손길을 붙들 수 있습니다. 자격 없고 부족한 죄인이지만 간절히 예수님의 긍휼을 구할 때 긍휼을 베푸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마음으로 애통하는 자의 간구에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예수님은 긍휼을 구하는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13) 예수님은 멀리서 권능의 말씀만으로 나병환자를 고칠 수 있었지만 손을 내밀어 그의 몸을 만지시며 치유하셨습니다. 부정한 나병환자에게 손을 내는 것은 율법에서 금하는 것이지만 예수님은 긍휼의 사랑으로 율법을 넘었습니다. 소록도의 나병환자들은 방문한 사람들이 자신들과 거리낌 없이 악수만 해도 큰 감동을 받는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셔서 그의 추악한 몸에 손을 대심으로 그 육체와 함께 상처받은 영혼이 치유되길 바라셨습니다. 예수님의 긍휼의 사랑을 받아드림으로 일생 그를 억매였던 열등감, 수치심, 분노와 슬픔이 치유되어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기를 소망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에게 치유된 몸을 보이게 함으로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인생을 살도록 인도하셨습니다.

둘째, 중풍병자를 온전하게 하신 예수님(17-26)
  예수님께서 여느 때처럼 말씀을 가르치실 때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의 침상을 메고 예수님 앞으로 나왔습니다. 18절의 원문에도 “보라”라는 말이 있는데 중풍병자가 나오는 것이 놀랍다기보다 그가 예수님께 나오는 방법이 “보라!” 놀랄 정도로 기상천외하기 때문입니다. 중풍병자와 친구들은 나병을 고치신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취급도 못 받는 나병환자를 고쳐주셨는데, 사람구실도 못하는 중풍병자도 고침 받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하지만 서둘러 달려가 보니 작은 집안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주변으로 빽빽하게 둘러싸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보통 병원처럼 5분 간격으로 환자를 진단하고 치료해도 오늘 하루가 다 갈텐데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말씀이 끝없이 이어지면서 언제 치료가 시작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돌아가느냐 기다리느냐 갈등 끝에 그들은 결국 합심해서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 무릎 끓고 엎드려 기도해도 길이 보이지 않자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다 지붕에서 길을 찾았습니다. 지붕을 뚫어 중풍병자의 침상을 예수님 앞으로 달아내리자 모든 이들이 보고 충격의 도가니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그런 소동 가운데서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집주인은 수리비로 얼마를 청구할지 구멍 난 지붕을 봤습니다. 서기관들은 불꽃같은 눈으로 질서를 무너뜨리는 이기심의 죄를 보았고, 무리들은 얼마나 큰 빽을 가진 병자이기에 이렇게 낙하산 인사로 예수님 앞에 직접 내려올 수 있는가 봤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행동과 나타난 결과를 보고 판단하지만 사실 대부분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행동 뒤의 근본동기, 믿음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믿는 자들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와 친구들의 어떤 믿음을 보신 것입니까? 그들의 믿음은 중풍병을 고침 받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에서 시작되었고 또 나병환자를 고치신 소문을 들음으로 믿게 됐습니다. 그들은 나병환자처럼 어찌하든지 예수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병 고침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능력과 사랑에 대한 믿음으로 단순하지만 강했습니다. 그들은 그 믿음으로 막힌 한계 앞에서 지붕으로 향한 길을 찾을 수 있었고 또 믿음으로 지붕을 뚫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만들었습니다. 믿음은 예수님께 나아갈 길을 찾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심을 믿어야 합니다.(히11;6) 성경에는 그런 믿음을 가진 이들이 많이 소개됐습니다. 예수님의 옷깃만 스쳐도 나음 받을 수 있을 것이라 믿은 혈류증 앓던 여인도 있고 예수님께서 말씀만 하시면 종의 중풍병을 고침 받을 수 있다고 믿은 로마 백부장도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많은 신자들이 그런 믿음을 갖고자 하지만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믿겨져야 믿을 수 있습니다. 믿음은 부족한 자신을 깨닫고 간절한 소원에서 시작되지만 단지 자신으로부터 오는 의지만은 아닙니다. 중풍병자는 자신 같은 자도 예수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고침 받을 수 있다고 믿었는데 그것은 나병환자의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소문을 듣게 된 것은 우연히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믿음의 시작은 나를 택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현재 우리는 성경을 통해 예수님께서 이루신 수많은 믿음의 증인들의 역사를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가운데 역사하십니다. 말씀 속에 길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성경말씀을 붙들고 말씀에 기초해 기도함으로 가능합니다. 코로나 시대가 되면서 신자들은 믿음의 도전을 받습니다. 얼마 전 신입생성경학교를 하면서 저는 이렇게 코로나 환자가 폭증하는데 어떻게 성경학교를 할 수 있는가 믿음을 갖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믿음은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나아가는 길에서 만약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막으실 것입니다. 한계 앞에서 불도저처럼 도전하는 것도 믿음이고 한계 앞에서 멈추며 때를 기다리는 것도 믿음입니다. 믿음 있는 목자님들의 헌신과 섬김을 통해 코로나 상황 속에서도 확진자 없이 흥왕한 신입생성경학교 말씀역사를 이룰 수 있어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나온 중풍병자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중풍병자는 중풍병을 낫기 위한 간절한 소원가운데 예수님께 왔기 때문에 중풍병의 치료처럼 보입니다. 중풍병에서 일어설 때 사람답게 살 수 있고 사람구실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예수님께 나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건강입니까? 돈입니까? 아니면 좋은 직장과 나만을 사랑해줄 사람입니까? 우리에게 이런 것들이 필요하지만 가장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간절히 필요한 것을 찾고 얻는다 해도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찾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왜냐면 필요한 것이 채워지지 못해서가 아니라 지금 내가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중풍병자에게 중풍병의 치료보다 더 중요하고 급한 것이 있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최근 코로나 전염병으로 온 인류가 고통하며 수많은 이들이 죽었습니다. 그동안 인류는 놀라운 과학기술과 의학의 발달로 많은 병을 정복했고 어떤 이는 머지않아 암과 죽음까지도 정복할 것이라 자신했습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가 수많은 이들을 고통과 죽음으로 몰아가면서 인간의 교만을 깨닫게 했습니다. 그럼 인간을 괴롭히며 죽음으로 몰아가는 질병은 왜(어떻게) 생겼습니까? 과학자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자신의 책 ‘총균쇠’에서 인류를 두려움과 위협에 빠뜨렸던 많은 전염병(감염병)이 인류가 수렵채집생활을 하다 농경시대로 들어와 가축들을 키우면서 시작되었다고 했습니다. 나병(한센병), 천연두, 결핵, 홍역, 독감 등의 전염병이 소와 돼지, 염소, 낙타 등 인간이 농경생활을 시작하면서 가축으로부터 전염된 것입니다. 혈관이 막혀 생기는 중풍병을 비롯한 현대의 성인병도 수렵채집시기 짐승을 잡기 위해 열심히 뛰어다녔던 때는 드물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시 사냥하기 위해 뛰어다니는 수렵채집시대의 원시인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세균과 바이러스를 피하고 모든 외적 사고로부터 보호한다해도 자신으로부터 생기는 질병은 피할 수 없습니다. 갈수록 많은 유전병이 발견되는데 그것은 병이 늘어났기보다 병을 발견할 수 있는 진단기술이 발전됐기 때문입니다. 암은 전염성은 없지만 섬뜩하게도 자신을 죽이려고 공격하는 자기 자신입니다. 인간의 유전자와 세포는 태어날 때부터 일정시간이 지나면 노화되고 소멸될 운명으로 결정(프로그래밍) 되었습니다. 질병은 죽음을 향해 가는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숙명입니다. 인간의 질병과 죽음은 죄로부터 왔습니다. 아담의 첫 범죄이후 인간은 죄를 지음으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파괴되고 하나님을 떠남으로 마치 포도나무줄기에서 떨어진 가지처럼 당장 죽지는 않지만 서서히 말라가며 결국 죽을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통찰하시는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근본문제가 중풍병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죄 문제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하루종일 손발도 움직이지 못하고 불쌍하게 누워만 있는 병자가 얼마나 많은 죄를 지을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파괴된 것입니다. 하루 종일 누워 끝없는 불평과 저주의 생각의 죄에 빠져 지옥을 헤맬 수 있습니다. 처음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을 판단하고 하나님을 불신하다가 중풍병에 걸린 후 문병오지 않는 친구들을 원망하고 제대로 치료 못하는 의사를 원망하고 이렇게 낳은 부모를 원망했습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며 저주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파괴되고 하나님을 떠나 잃어버린 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인생이 슬프고 고통스러운 것은 중풍병 때문이 아닌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만약 엄마를 잃어버린 아이가 있다면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 아이는 엄마를 잃어버려 굶주리고 몸에 상처도 생기고 신발도 잃어버렸습니다. 물론 밥을 먹이고 상처를 치료하고 잃어버린 신발을 찾아주는 것이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잃어버린 엄마를 찾아주는 것입니다. 엄마 없이 아무리 맛있는 것을 먹이고 좋은 신발을 사주어도 그 아이에게 진정한 행복이 될 수 없습니다. 중풍병이 뇌로 가는 혈관이 막힘으로 몸의 마비가 오는 것처럼 죄에 빠지면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막혀 아무런 소망없이 무기력하고 패배적인 인생을 사는 존재가 됩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가장 치명적이고 벗어날 수 없는 죄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하신 주요사역이 3가지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전하며 질병을 치유하신 것으로 그것은 결국 인간의 죄 사함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무리 속에 숨어 예수님말씀을 듣고 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마음속으로 격렬하게 반발했습니다. “이 신성 모독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사실 그들의 말은 맞습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파괴된 것이고 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는 알았지만 둘은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죄를 사할 수 있는 분,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심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면서도 예수님을 깨닫지 못한 그들의 죄는 무지가 아니라 시기심의 죄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악한 생각을 꿰뚫어보시며 직접 죄 사함의 권능을 보여주셨습니다. 사실 죄 사함은 영적인 것이라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예수님은 불치병인 중풍병을 고치심으로 죄 사함의 권능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24) 그냥 말씀으로만 고쳐주실 수 있었지만 예수님은 중풍병자가 믿음으로 순종해 일어서도록 하셨습니다. 지금까지는 친구들의 믿음으로 여기까지 왔지만 죄 사함과 구원까지 남의 도움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죄 사함을 통한 구원역사는 직접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 얻을 수 있습니다. 중풍병자는 스스로 일어설 수 없지만 오직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함으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중풍병자가 자기 침상을 들고 일어서자 모든 사람들이 놀라고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들이 놀란 것은 불치병인 중풍병자가 말씀한마디로 치유 받은 것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실 더욱 놀라운 사건은 그가 예수님을 통해 죄 사함 받은 사건입니다. 죄 사함은 단지 과거 하나님께 저질렀던 죄를 용서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은혜로 감옥에서 사면되더라도 전과자라는 딱지가 붙어 있으면 제대로 사회에 적응 못하고 다시 죄를 지어 감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은 죄 사함을 통해 죄를 용서하신 것 뿐 아니라 죄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지위를 회복하시고자 하셨습니다. 죄 사함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불치병에서 치유 받는 것과는 비교되지 않는 은혜입니다. 불치병에서 치유되더라도 젊을 때의 건강을 회복할 수 없고 나이가 들수록 다시 질병에 억매이다 결국 죽게 됩니다. 하지만 죄사함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죽음의 문을 통과한 후 영원히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부활의 새 몸을 얻게 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죄 사함을 통해 죄를 용서하심으로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죄인들과 함께 하시기 위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죄 사함 받아 구원받은 신자들도 세상에서 얼마든지 질병에 걸릴 수 있고, 세상 고난을 겪을 수 있습니다. 코로나도 세상고난도 신자와 불신자를 가리지 않습니다. 그럼 신자들이 간절한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신자가 인생의 문제 앞에서 예수님께 나아가 간절히 기도했는데도 응답을 받지 못한 경우가 2가지 있습니다. 첫째, 아직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아서입니다. 둘째, 내가 바라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눅11;13) 바울은 육체의 가시, 질병으로 고통 받으며 예수님께 3번이나 간구했지만 병은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나중 더 큰 예수님의 섭리와 은혜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12;9) 바울은 자신이 약할 때 오히려 예수님을 의지함으로 예수님의 능력을 덧입고 강해질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심령이 가난해져야 비로소 하나님나라를 바라봅니다. 우리가 질병에서 자유롭다면 우리는 하늘나라에서의 영생(영원한 생명)보다 이 땅에서의 장생(오래 사는 것)을 꿈꿀 것입니다. 우리는 질병(고난)가운데 연약하기 때문에 인생의 한계를 깨닫고 겸손히 예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약할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무는 신비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끝없는 육신의 질병과 세상의 환난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오히려 더 간절하고 깊은 믿음으로 하나님영광을 위해 헌신하다 죽었습니다. 그것은 죄 사함의 은혜 속에서 예수님과 항상 함께 하기 때문이고 부활의 영광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는 코로나 전염병을 비롯한 많은 세상 환난 앞에서 인생의 연약함과 한계를 깊이 깨닫습니다. 그러나 이 위기를 통해 신자는 가난한 심령과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감으로 예수님의 죄사함의 은혜가운데 하나님의 자녀로 살 수 있길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대학교 2학년 때 하나님 없이 살던 죄인을 교통사고 환난가운데 찾아오셨습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중풍병자를 데려온 4친구들 같은 센타 믿음의 목자님들을 통해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었고 극적으로 구원받고 치유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고 때 할머니가 저의 사고소식을 듣고 충격으로 쓰러져 중풍병자로 3년을 투병하시게 됐습니다. 저를 특별히 아끼던 할머니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지만 할머니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할머니는 가난한 심령가운데 동네할머니들의 전도를 받아들여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돌아가시기 전 다른 이들을 전도하면서 세례 받고 부활의 소망가운데 소천하셨습니다. 저는 이 체험을 통해 부족하지만 죄 사함주시고 치유하시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인생을 살게 됐습니다. 최근 동생이 불치병으로 쓰러졌습니다. 어떤 검사와 치료에도 원인도 찾지 못하며 계속 나빠져 현재는 전신마비 중풍병자처럼 누워있습니다. 저뿐 아니라 많은 분들의 간절한 기도에도 상황이 안 좋아져 깊은 사망권세에 시달리게 됐습니다. 하지만 이번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동생의 인생가운데 찾아오심을 깨닫습니다. 구원 받은 후에도 끊임없이 세상의 질고에 억매였던 동생을 질병의 고난가운데 찾아오셔서 죄 사함주시며 함께 하시기 위해서임을 깨닫게 됐습니다. 앞으로 동생이 의식이 머무는 동안 온전한 부활신앙으로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길 기도합니다. 부활의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께서 이 인생을 통해 하나님의 선한 뜻을 드러낼 수 있길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는 간절한 믿음으로 나온 나병환자와 중풍병자를 긍휼히 여기셔서 병치유와 죄 사함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육신의 중풍병이 치유된 증거는 스스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 사함 받았다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수양회 때 소감발표 후 사모님들이 “소감이 너무 재미있어서 정말 은혜 받았어요!” 하면 죄 사함의 증거가 됩니까? 물론 그렇게 증거를 받을 수도 있지만 죄 사함의 증거는 본인의 내면에서부터 옵니다. 내면에서 오는 기쁨과 평안입니다. 나와 함께 하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내면으로부터 잔잔하게 샘솟는 기쁨과 평안입니다. 또 죄가 주는 두려움과 걱정과 수치가 사라지고 자신감과 적극성이 생깁니다. 죄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인생의 목적이 달라집니다. 자신만을 위해 살던 자가 하나님의 자녀로써 하나님영광을 위해 살게 됩니다. 한 미국 신학자가 신앙이 성숙해감에 따라 기도도 세 단계로 성숙해진다고 말했습니다. 첫째 단계 ‘나에게 주십시오.'(give me), 둘째 단계 '나를 바꿔 주십시오.’(change me), 셋째 단계 ‘나를 사용해 주십시오.’(use me) 우리가 간절한 인생문제 앞에서 예수님께 나아감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되어 하나님영광을 위해 쓰임 받는 자가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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