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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2-05-08 (일) 10:09
분 류 누가복음
첨부#1 2022년_누가복음_제8강-1.hwp (109KB) (Down: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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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8강]원수까지도 사랑하라
2022년 누가복음 제8강                                                       최동진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말씀 / 누가복음 6:17-49
요절 / 누가복음 6: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예수님은 안식일 문제로 종교지도자들과 논쟁하신 후 제자 중 열두 명을 사도로 택하시고 새로운 역사를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사도로 택함 받은 자들이 가져야 할 가치관과 내면성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자세에 대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 나라 백성 된 자들로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I. 복 있는 자, 화 있는 자 (17-26)
  예수님은 산에서 밤새도록 기도하신 후 열두 사도를 세우시고 그들과 함께 평지로 내려오셨습니다. 그곳에는 제자의 많은 무리와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에 사로잡혀 고난 받는 자들과 온갖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내용은 천국 백성 된 사람들이 지켜야 할 하나님 나라의 법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수준이 보통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지키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고차원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왜 이렇게 높은 수준을 요구하시는 것입니까? 이는 그만큼 제자들에게 두신 기대와 소망이 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자가 되고, 제자가 된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피조물로서 세상 가치관과는 완전히 다른 인생 목적과 방향과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을 닮아감으로 작은 예수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많은 무리들 중에서 특별히 제자들을 주목하여 보시고 네 가지 복과 네 가지 화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정반대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좀 더 풍요롭게 살기 위한 것이 아닙니까? 웃고 즐기는 삶을 살면서 사람들에게 칭찬받는다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난한 자, 주린 자, 우는 자, 박해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첫째로, 이런 자가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20-2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가난한 자’는 경제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런 자들은 부족함을 느끼기 때문에 마음이 겸손해집니다. ‘지금 주린 자’, ‘지금 우는 자’는 가난 때문에 겪는 굶주림과 슬픔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장차 하나님이 차려주시는 잔칫상에 앉아 먹고 마시며 즐거워할 것입니다. 이들이 배부름을 얻고 웃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신실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께 헌신하는 제자들은 ‘미워하고’, ‘멀리하고’, ‘욕하고’, ‘악하다 하여 버림’을 받습니다. 사도행전의 사도들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가난과 주림과 울음과 박해 자체가 복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이들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의지합니다. 목이 터지라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주의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 나는 경건하오니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 내 주 하나님이여 주를 의지하는 종을 구원하소서 주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종일 주께 부르짖나이다.”(시86:1-3) 하나님은 부르짖어 기도하는 자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의 하나님이 되셔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십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시12:5) 그러므로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십니다. 예수님은 바로 지금 기뻐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을 위해서 고난 받을 때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받는 것으로 기뻐하였습니다(행5:41). 기뻐해야 할 이유는 하늘에서 주어지는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예수님도 그런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말구유에서 시작해서 일생 머리 둘 곳 없는 가난한 삶을 사셨습니다. 죄와 죽음으로 고통당하는 인생들을 보시고 슬피 우셨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비난과 조롱을 받으셨고 결국에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에는 당연히 가난과 주림과 울음과 박해가 수반됩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마음대로 놀러 다닐 수도 없습니다. 신앙생활로 인해 많은 불편과 고난을 겪기도 합니다. 어떤 고난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보고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며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참된 제자의 삶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하늘의 상이 있습니다(23). 이 세상에서 주와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것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고전15:58).
그러나 ‘부요한 자’, ‘지금 배부른 자’, ‘지금 웃는 자’, ‘모든 사람에게 칭찬 받는 자’는 어떻게 됩니까? 이런 사람에게는 화가 있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모든 부자가 화를 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자들이 비판을 받는 것은 잘못된 가치관과 삶의 태도 때문입니다. 부자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보다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데에만 관심을 둡니다. ‘지금 배부른 자’, ‘지금 웃는 자’는 이 세상에서 부족함 없이 먹고 마시며 현재의 삶에 만족하며 살아갑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원하는 것을 얻음으로 이미 위로를 받았기 때문에 장차 하늘에서 주어질 상급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머지않아 자신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영원히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주릴 것입니다. 그들의 웃음은 애통과 울음으로 바뀔 것입니다. 에콰도르 아우카족에게 죽임당한 선교사 짐 엘리엇은 “영원한 것을 얻으려고 영원할 수 없는 것을 버리는 자는 결코 바보가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26절을 보십시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부요한 자들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 주시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만일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면서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을 얻고자 한다면 복음의 내용을 변질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제자들은 거짓 선지자들과 같이 될 것입니다. 복음의 일꾼들은 사람들의 인기와 명성을 탐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달하는 신실한 대언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의 삶을 살고자 할 때 고난이 따릅니다. 사명인의 삶을 사느라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지 못할 수 있습니다. 양들을 돌보다가 마음이 상하여 눈물을 흘릴 때도 있습니다. 캠퍼스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이상한 사람 취급당하기도 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크리스찬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배우며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의 삶이야말로 참으로 복된 삶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 위해 세상에서 손해 본 것이 있다면 백 배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복음 역사를 섬기느라 흘린 모든 눈물을 친히 닦아 주실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진정으로 웃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가난하고 주리고 울고 박해를 받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참된 제자로 인정받는 일이기 때문에 그 어떤 일보다 자랑스럽고 기뻐하며 뛰놀 일입니다. 우리 모두 장차 받을 하늘나라의 상을 바라보고 이 땅에서 고난을 기쁨으로 감당하는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II.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27-38)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가져야 할 실천 윤리에 대해 말씀 하십니다. 27-29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요구하시는 사랑은 보통의 사랑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만이 감당할 수 있는 최상의 사랑입니다. 율법에서는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레19:18)”고 하였습니다. 이웃은 동료입니다. 나를 미워하고 저주하고 모욕하는 사람들은 이웃이 아닙니다. 악의를 품고 나를 해치고 무너뜨리려는 사람은 원수입니다.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마음의 상처 때문에 상대방을 영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평생에 원수로 사는 것도 모자라 자녀에게 원수를 갚아달라는 유언을 남기기도 합니다. 신명기19:21절에서는 “네 눈이 긍휼이 여기지 말라 생명에는 생명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이니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받은 만큼 보복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야 사회의 정의가 바로 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고 저주하는 자를 축복해주라고 하십니다. 축복해주는 것은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시도록 간구하는 것입니다. 모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하십니다. 하나님께 중보기도 하는 것은 최고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라” 하십니다. 이는 원수 사랑의 실례입니다. 유대인들은 뺨을 맞는 것을 가장 큰 수치로 여겼습니다. 그럴지라도 기꺼이 용서하고 보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군병들을 위해서 축복기도를 해주셨습니다.(눅23:34) 예수님의 제자는 모든 사람을 선대하며 축복기도를 해주는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으면서 돌로 치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행7:60) 스데반은 예수님의 뜻대로 행한 참된 제자입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31절을 보십시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 말씀은 황금률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과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는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호의를 받았다면, 우리가 그 호의를 기꺼이 받아들였던 방법으로 그 사람들에게 베풀라”고 했습니다. 공자는 “네 자신에게 원하지 않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행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남에게 대접받은 대로 대접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상대방의 반응이나 행위에 상관없이 다른 사람에게 대접받기를 원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가르침이야말로 가장 적극적인 사랑의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32-34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제자들의 사랑은 죄인들의 사랑과는 달라야 합니다.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합니다. 선대하는 자를 선대합니다. 받기를 바라고 꾸어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를 실천하려고 하면 나만 손해보는 것 같아서 힘든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왜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선대해야 합니까?
35a절을 보십시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첫째로, 사랑으로 미움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미움과 적대감을 갖는 이유는 상대방이 자신을 미워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으로 인해 손해를 당하거나 해를 입고 상처 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원수로 생각하고 공격하고 비방합니다. 그러나 나에게 유익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는 미움이나 적대감을 갖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미움을 없애는 방법은 아무런 조건 없이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신자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을 느낍니다. 원수일지라도 사랑하고 호의를 베풀면 굳게 닫힌 마음 문이 열리고 냉담하던 반응이 조금씩 따뜻해지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세상에 영원한 원수는 없습니다. 지금은 웬수지만 장차 언젠가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소중한 동역자가 되어야 할 사람도 있습니다. 이를 알 때 뺨을 때리고 옷을 강탈해갈지라도 관대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제자들로 인해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나게 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칭찬과 큰 상급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재판관이 되셔서 각 사람이 행한대로 반드시 보응하십니다. 행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을 믿을 때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자녀는 아버지를 닮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입증합니다. 초대교회에서 사랑은 하나님의 자녀 됨의 표시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것 같이 사랑 가운데서 행해야 합니다.(엡5:1,2a)
  35b,36절을 보십시오.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하나님은 선하고 인자하신 분이십니다(시136:1).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많으셔서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를 베풀어주십니다(출34:6). 이스라엘 백성은 끊임없이 반역하여 하나님을 진노케 했습니다. 행실대로라면 심판을 받아서 인류역사에서 사라졌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죄악 중에도 언제나 자비로운 마음으로 대해주셨습니다.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 회개하면 용서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이방 족속들과 악을 행하는 원수들에게까지도 햇빛과 비를 내려주십니다(마5:45).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들을 신실하게 공급해주십니다. 거저 주시고 다시 달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은 예수님을 통해서 잘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이로써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롬5:8)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롬5:10)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자비로운 자들이 되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세상에 나타내야 합니다. 사랑과 자비의 표준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사랑 때문에 우리를 미워하고 모욕하는 사람들까지도 용납하고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사랑하는 두 아들을 모두 공산당에 의해 잃었습니다. 그 슬픔과 절망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이란 사람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목사님은 밤을 새워 통곡하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내 아들들은 죽어서 천국에 갔지만 안재선은 죽으면 지옥에 갈텐데, 저 영혼이 불쌍해서 어쩌나” 하시며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그리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그를 용서해주었습니다. 당국에 간절히 탄원하여 사형집행 직전에 있던 범인을 살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양아들로 삼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입니까?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 때문입니다. 원수 되었던 나를 용서하시고 자녀 삼으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우리에게 상처 주고 아픔을 준 모든 사람들을 다 품고 용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자로서 하나님의 자비를 나타내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37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예수님의 제자가 타인에 대해 범하기 쉬운 죄가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비판은 다른 사람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여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이고 정죄는 죄가 있다고 단정하는 것입니다. 비판과 정죄에는 사랑과 긍휼이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세밀한 율법의 잣대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대로 살아가는 의인과 율법을 거슬러 살아가는 죄인으로 구분했습니다. 율법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은 마땅히 심판을 받아야 할 죄인이라고 단정하고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사람이 근본적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이 메마르게 하고 두려움과 죄책감, 반발심, 적대감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자라나 영적으로 질식시킵니다. 사람을 살리고 변화시키는 것은 사랑과 긍휼과 선대와 호의와 용서와 용납입니다. 우리의 눈은 다른 사람의 장점을 보고 칭찬해주기보다 약점과 허물을 보고 비판하고 정죄하기를 잘합니다. 그럴 때 그 비판과 정죄의 잣대로 자기도 비판과 정죄를 받게 됩니다. 이를 ‘부메랑효과’라고 합니다. 부메랑은 호주 원주민들이 사냥에 사용하던 도구로서 목표지점까지 가서 목적을 달성한 후에는 던진 사람에게로 무사히 다시 돌아오도록 제작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상대방을 비판하면 그것이 그대로 나에게 돌아와 나를 때립니다. 그러므로 비판과 정죄는 자해행위입니다. 그러면 비판과 정죄 대신에 무엇을 해야 합니까? 37b,38절을 보십시오.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용서하면 용서가 돌아옵니다. 주면 다시 돌아옵니다. 돌아올 때 꾹꾹 눌러서 차고 넘치도록 돌아옵니다. 용서하고 베풀면 사람들과의 관계성도 좋아지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긍휼을 베푼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십니다. 우리는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우리 자신도 헤아림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용서하고 베푸는 것은 결국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을 덧입은 자로서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마음을 회개하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품고 섬기며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 나타내는 제자들로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III. 말씀을 듣고 행하라(39-49)
  예수님은 제자들이 조심해야 할 점들을 네 가지 비유로 가르쳐주십니다.
첫째,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없습니다.
39절을 보십시오.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여기서 맹인은 바리새인들이나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거짓 교사들을 가리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율법의 잣대로만 판단함으로 영적 맹인이 되어 백성들을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없었습니다. 좋은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스승 되신 예수님을 잘 배워야 합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선생과 제자가 같이 살면서 선생의 입을 통해서 배웠습니다. 스승의 가르침을 잘 받은 자는 온전하게 되어 그 선생의 수준에 도달하게 됩니다.(40)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스승 되신 예수님을 배우고 훈련을 잘 받아 온전한 자로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이 시대 양무리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선생이요 영적 지도자의 역할을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주기 전에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먼저 빼야 합니다.
41절을 보십시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남을 비판하는 자의 문제는 자기에게 더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더 큰 문제가 있음을 아는 사람은 남을 쉽게 비판하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주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를 외식하는 자라고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고 하십니다. 제자는 남의 허물을 고쳐주기 전에 자신의 더 큰 허물을 돌아보고 고침 받아야 합니다.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를 제거할 때 다른 사람의 문제를 명확하게 보고 잘 도와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말씀의 거울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아 들보와 같은 나의 추한 죄를 발견하고 예수님의 보혈로 씻음 받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없애주는 일에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좋은 나무, 못된 나무
43,44절을 보십시오.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좋은 나무와 못된 나무는 열매로 구분됩니다. 우리가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반드시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죄 가운데 거하는 한 좋은 나무가 될 수 없고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마음에 쌓인 것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어떤 모양으로든지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쌓으면 입을 열 때마다 말씀이 흘러나올 것이지만 불평불만을 쌓으면 아무리 조심해도 불평불만이 튀어나옵니다. 그러므로 좋은 열매 맺는 나무가 되려면 평소에 마음에 선을 쌓는 내적 투쟁을 해야 합니다. 진실된 회개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나아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마음 깊이 담고 그 말씀대로 살고자 힘써야 합니다.

이제까지 예수님은 제자의 삶의 윤리와 가치관에 대해 주옥같은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고서 “주여, 주여” 부르짖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말씀은 그대로 행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47-49절을 보십시오.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치되 잘 지었기 때문에 능히 요동하지 못하게 하였거니와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추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히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건축에 비유하여 가르쳐주셨습니다. 집을 지을 때 가장 중요한 과정이 기초공사입니다. 듣고 행하는 자는 집을 짓되 땅을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습니다. 이런 집은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칠 때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반면에 듣기만 하고 행함이 없는 사람은 주추 없이 흙 위에 지은 집과 같습니다. 이런 자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 생각과 세상 경험에 기초해서 살다가 환난에 부딪치면 기초부터 흔들려 곧 무너지고 맙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인생의 집의 기초를 두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인생의 집을 짓고 있습니까? 말씀을 듣고 지식이 늘어가는 것으로만 만족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튼튼한 인생의 집을 지어나가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저를 구원하시고 신명기6장5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말씀을 인생 요절로 주시고 이 말씀 위에 아름다운 인생의 집을 짓게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살 때 크고 작은 어려움을 만날 때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말씀 위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고 이겨내도록 도와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많은 복을 누리도록 하셨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성경다독을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말씀을 깨닫는 기쁨을 맛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말씀 앞에 자기를 돌아볼 때 신앙 연륜과 함께 자기의와 율법도 쌓여 다른 사람의 허물과 약점을 감당해줄 마음의 여유가 없고 자기 주장을 내세우고 판단과 정죄를 많이 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말씀 앞에서 자기를 돌아보고 대접받고자 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겸손히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더욱 힘쓰는 투쟁이 필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아무 자격 없는 저를 예수님의 제자요 성경선생으로 삼으시고 구원 역사를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소원을 바라보고 한마디 말씀에 구체적으로 순종하는 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제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용서의 사랑을 덧입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한 영혼을 깊이 사랑하고 섬기는 가운데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드러내는 삶 살기를 기도합니다. 날마다 한마디 말씀에 순종하는 가운데 말씀에 기초하여 어떤 외풍에도 흔들리지 않는 튼튼한 인생의 집을 지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우리를 예수님의 제자요 시대를 섬기는 사도로 불러주셨습니다. 저희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배우고 순종함으로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저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서 실제 삶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고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 맺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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