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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2-06-19 (일) 12:36
분 류 누가복음
첨부#1 2022년_누가복음_제15강-1.hwp (108KB) (Down: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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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15강]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2022년 누가복음 제15강                                        이 인구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말씀/누가복음9;18-36
요절/누가복음9;2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시니이다 하니

신자에게 가장 중요한 믿음 2가지를 뽑는다면 첫째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믿는 믿음이고 둘째 예수님께서 나의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의 중간시점에서 제자들에게 놀라운 진리(비밀)를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동안 함께 했던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이심을 밝히시고 그리스도로서 가야 될 십자가와 부활의 길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자기부인 자기십자가의 길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나의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자기부인, 자기십자가의 길을 갈수 있길 기도합니다.

제 1장, 베드로의 신앙고백

예수님께서 하나님말씀을 증거하시며 많은 병자들과 귀신 들린자들을 고치시고 또 오병이어로 5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먹이신후 사람들에게 그 인기가 하늘로 치솟게 됐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따로 기도하신 후 제자들을 불러 물으셨습니다.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얼마전 전도여행 갔다 온 제자들은 예수님께 대한 사람들의 인기를 피부로 실감하고 있었습니다. “세례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옛 선지자중의 한 사람이 살아났다 하나이다.” 세례요한은 제사장의 아들이었지만 광야에서 소리처럼 살면서 백성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헤롯왕의 불의의 죄와 싸운 마지막 선지자이고 엘리야는 오래전 홀로 거짓 바알선지자 850명과 싸워 승리하고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린 위대한 선지자입니다. 로마 통치하에서 거짓되고 탐욕스런 정치, 종교지도자들 밑에서 항상 춥고 배고픈 무리들은 많은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위대한 선지자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20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사람들의 생각은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각자 처해진 상황 속에서 다른 시각을 가지지만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어두운 시대의 등불같은 사람 중 한명으로 보고 있습니다. 참 빛이 왔지만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그림자속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신약시대가 시작되었지만 여전히 구약세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궁금하신 것은 단지 무리들의 반응(인기설문조사)이 아닌 지금까지 함께 동고동락했던 제자들의 생각이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은 비슷하지만 잘못된 무리들의 오답을 참고해서 제자들이 출제자의 정확한 의도를 깨닫고 정답을 말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사실 이 질문은 우리의 인생과 생명을 좌우할 천국입시문제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가 수제자답게 벌떡 일어나 외쳤습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베드로의 대답은 짧지만 정답입니다. ‘그리스도’란 헬라어이고 ‘메시아’는 히브리어인데 그 뜻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기름은 성령을 상징합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에서 왕이나 제사장, 선지자는 하나님께 택함 받은 자 즉 기름 부은 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셔서 사명을 감당할 지혜와 능력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연약하고 죄악된 인간들로써, 하나님은 다윗을 계승할 영원한 왕이요 아론을 대신할 영원한 대제사장이시며 모세보다 탁월한 참 선지자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마침내 그리스도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선지자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도와주시고, 제사장으로 우리죄를 중보하시며 대속의 십자가를 지셨고 왕으로 우리 인생들을 사랑과 공의로 다스리십니다.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있는가는 자신의 인생의 구원과 영생에 직결된 문제입니다.(요17;3) 그에 따라 인생의 목적과 방향이 달라지고 결과와 열매가 달라집니다. 그런데 당시 많은 뛰어난 종교지도자들도 있고 메시아를 기다렸던 많은 이들이 있었는데 어떻게 무식한 어부출신 베드로가 그런 놀라운 비밀을 깨닫게 된 것입니까? 인간의 지혜로 예수님의 본체를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7)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 성령을 주실 때만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알 수 있습니다.(엡1;17) 그럼 우리가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열심히 노력해도 스스로 예수님을 깨달을 수 없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말씀가운데 길을 제시하시고 비밀을 숨겨놓으셨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말씀가운데 그 길을 찾고 비밀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인간의 한계 속에서 하나님의 크신 구원역사의 비밀을 다 알 수 없지만 제가 아는 작은 비유를 통해 힌트를 얻고자 합니다. 어떤 수험생이 어떻게 시험(수능)을 잘 볼 수 있는가 공부의 신(강성태)이라고 불리우는 사람에게 질문했습니다. 공부의 신이라는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시험을 잘 보는 사람은 머리 좋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노력하는 이를 이길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도 공부를 즐기는 이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정말 시험을 잘 보는 이는 방금 전에 본(방금전까지 공부한)사람입니다. 아무리 유치원 때부터 공부를 잘 했다 해도 고3때 죽기 살기로 공부하는 이가 시험(수능)을 잘 봅니다.
타고난 종교지도자들(바리새인)이나 직업적으로 말씀을 연구하는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지만 지식적인 수준에 머물 때 예수님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말씀을 많이 안다는 교만과 말씀과 삶이 어긋나는 외식가운데 예수님을 대적할 수 있습니다.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의 축복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붙들었지만 구복신앙에 머물 때 예수님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처럼 매일 예수님의 말씀을 붙들고 묵상하며 지금 삶속에서 그 뜻을 찾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되신 예수님을 깨닫게 도와주십니다.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간절하고 가난한 심정으로 말씀 속에서 길을 찾을 때 하나님께서 만나게 도와주십니다.

신앙고백은 “예수님은 나를 죄로 인한 영원한 심판에서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는 고백이고 “예수님은 나의 보호자요 인도자이시며 내가 영원토록 섬겨야 될 나의 왕이시오 내 인생의 주인이십니다” 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기초로 그를 교회의 반석으로 인도하시고 세워주셨습니다. 비록 베드로가 예수님의 모든 것을 알고 신앙고백을 한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은 그 고백을 기초로 그를 인도하셨습니다. 이처럼 신자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며 고백한 순간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고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와 인도하심을 받게 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제자로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 안에 거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사실 우리가 고백하기 이전부터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시고(미리 정하심) 하나님의 때에 성령을 통해 깨닫게 하시지만(부르심) 우리의 고백의 순간부터 실제적인 믿음의 관계성가운데 우리를 인도하십니다.(롬8;29,30) 과거 눈먼 자였던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순간 영적 눈이 떠지고 나의 구원자 되신 예수님을 깨닫고 따를 수 있게 됩니다. 베드로가 신앙고백 한 장소는 가이샤라 빌립보 지방으로 우상숭배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토착민들은 바알신을 섬기고, 헬라인들은 야수의 신인 판(pan)을 섬겼고 헤롯은 황제 아구스도에게 아부하기 위해 이곳에 황제신전을 세웠습니다. 이런 곳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신앙고백 한 것처럼 아무리 어둡고 죄악된 세상에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 속에서 길을 찾을 때 예수님을 나의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따를 수 있습니다. 신앙고백을 통해 신자는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큰 은혜와 특권을 가지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감당해야 될 의무가 주어집니다.

제 2장, 그리스도의 길, 제자의 길

예수님은 이제 그리스도로서 반드시 가야될 길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냐야 하리라 하시고”(22)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하고 기다렸던 메시아는 다윗과 같은 힘 있는 정치적인 메시아입니다. 자신들을 억압하는 광포한 로마와 거짓된 헤롯에게서 구원받아야 진정한 자유 속에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현재도 사람들은 자신을 억매이고 고통 주는 정치 사회문제, 질병과 먹는 문제, 환경문제에서 구원해줄 수 있는 구원자를 찾습니다. 마치 악당들을 한 방에 물리칠 수 있는 슈퍼맨같은 힘과 능력을 가진 구원자를 찾고 기다립니다. 하지만 세상의 근본문제는 눈에 보이는 현실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인 인간을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한 죄문제입니다. 내가 구원받아야 할 가장 큰 악은 내 안에 있는 죄입니다. 모든 인간들 안에 있는 죄를 없애기 위해 모든 인간들을 심판할 수 없어 하나님은 예수님을 나대신 희생하심으로 구원하시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자로 모든 이들의 죄를 지고 고난 받고 결국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다시 살아나심으로 모든 이들을 죄에서 구원할 길을 여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로서 자신이 가야될 길을 말씀하신 후 이제 제자들이 따라야 될 길을 말씀하셨습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것이니라”(23)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며 자기부인하고 자기십자가를 짐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구원받은 자들이 자기부인, 자기십자가의 길을 갈수 있습니다.

첫째, 자기부인.

자기부인은 결코 자기말살이나 자기비하가 아닙니다. 자기부인은 죄악된 자신의 본성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악된 본성을 부인하는 것은 스스로 완벽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며 그 뜻을 깨닫고 따르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따를 때 가장 방해되는 것은 내 안의 자기중심적 본성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과학기술과 자본주의를 구원자로 따르며 많은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 받았습니다. 그러나 과거 원시시대나 조선시대에 비해 누구나 더 잘 먹고 잘 살지만 행복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사람들이 구하는 행복은 상대적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비해 잘 먹고 잘 사는 것에서 행복을 얻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비해 특히 옆의 사람들에 비해 내가 더 잘 먹고 잘 살 때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폴비츠라는 학자는 현대의 가장 무서운 종교가 ‘자기숭배’라고 지적했습니다. 많은 거짓 그리스도에 실망한 사람들이 이제는 그 어디서도 구원을 찾지 않고 자신 안에서 찾고 있습니다. 믿을 것은 나 밖에 없다. 나의 판단. 나의 감정, 나의 욕구에 충실한 것이 진정한 구원이라 믿습니다. 세상은 수시로 변하지만 내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하다 믿으며 자신과 자아를 조절하며 높이는 심리학책과 명상 책들이 범람하고 있습니다. 내 안에 구원이 있고 부처가 있다는 사상이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최근 과학의 힘으로 인간복제의 가능성이 보이면서 이런 인간숭배는 극에 달해 인간의 능력으로 부활과 영생까지 꿈꾸게 됐습니다. 하지만 어떤 과학자는 세포의 핵을 건드는 것은 원자핵을 건드리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재앙을 가져올 수 있다고 경고하였습니다. 자기 숭배의 유혹은 사단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사단은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 먹으라 접근하면서 “네 자신이 하나님이 되라” 미혹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신자도 이기적 본성, 자기중심성을 극복하는 것이 어렵고도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수제자 베드로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듣자 단번에 돌변해 예수님을 붙들고 안 된다고 항변했습니다.(막8;32) 그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자기 배를 버리고 자기 아내와 가족까지 떠났습니다. 이런 그가 십자가의 길을 가시려는 예수님을 온몸으로 만류한 것은 예수님께 대한 사랑 때문이기도 하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신의 꿈과 계획이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해서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버렸다고 생각했지만 가장 중요한 자신의 꿈과 계획을 버릴 수(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수제자 베드로도 그러한데 우리가 어떻게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까? 우리가 따르는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구원자로 오셨지만 육신을 입고 있어 십자가의 치욕과 고통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이라도 십자가의 길을 피하고 싶었지만 게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될 때까지 기도하시며 자기를 부인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영접하신 후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이 그 길은 예수님이야 가능하지 나 같은 소심하고 두려움 많은 자가 어떻게 목숨까지도 희생하는 자기부인의 길을 갈수 있는가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자기부인은 억지로 끌려가는 길이 아니라 기쁨으로 자발적으로 가는 길입니다.

사도바울은 이스라엘의 첫 왕(사울)이 태어난 베냐민 지파사람이요, 당시 이스라엘에서 6000명밖에 없었던 지도층인 바리새인이자 유명한 율법학자 가말리엘의 제자이고 또 로마 시민권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을 만난 후 자신에게 자랑이었던 것들을 다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보화되신 예수님을 얻고 배우는데 방해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3;8,9a) 그는 예수님의 죽음을 이기는 부활의 능력과 생명을 살리는 사랑, 섬김을 배우기 위해 예수님을 따라 자기부인하며 십자가의 길을 갔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신자라도 내면 속에서 자신의 본성을 따르고자 하는 원초적 욕망과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거룩한 자아가 끊임없이 갈등하며 부딪힙니다. 신자의 사랑과 겸손이 그냥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좇으며 죄악된 자기를 부인하는 끊임없는 투쟁의 산물입니다. 자기부인은 나를 잃어버리는 과정이 아니라 잃어버린 나를 되찾는 과정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며 죄악된 본성을 부인할 때 본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아름답고 거룩한 존재로 나를 회복될 수 있습니다. 자기부인을 통해 더럽고 죄악된 본성이 사라지고 예수님을 닮아 가는 신자가 될 수 있습니다.

둘째, 자기 십자가.

한 신도가 어느 목사님(유기성)을 찾아와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는 자기 팔의 치아에 물린 자국을 보여주면서 자기부인과 같이 사는 것이 가장 큰 자기부인이요 자기 십자가라고 했습니다. 그때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부인이 팔을 물어뜯을 정도로 성격이 거칠어도 부인이 십자가는 아닙니다. 그런 부인을 ‘여전히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자기 십자가’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십자가에서 자신도 함께 죽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예쁘고 작은 십자가를 목에 걸고 다니기 좋아하지만 자기보다 큰 십자가를 등에 지는 것은 부담스러워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았지만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를 지는 것은 부담스러워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습니다.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자유로울 것 같지만 사실 자신의 죄 때문에 더 큰 죄의 십자가를 지고 결국 심판받습니다. 또 신자든 불신자든 모든 인생은 삶의 십자가(Ego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사람들이 삶의 십자가를 지면서 ‘에고!, 에고!’ 고통해서 Ego의 십자가라고 합니다.) 학생은 학과공부의 십자가를 져야 하고 부모는 자녀양육의 십자가를 또 많은 이들이 가시덤불이 가득한 세상에서 먹고 살기 위해 생업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많은 학생들이 학과공부의 십자가에 깔려 죽겠다고 아우성치고 많은 부모가 웬수같은 자녀의 십자가를 지고 고통하지만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져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에게 또 사명의 십자가를 주십니다. 그 십자가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 지지 않아도 되는 십자가입니다. 신자가 사명의 십자가를 져도 Ego의 십자가가 면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많은 생명이 살아납니다. 또 신자는 사명의 십자가를 질 때 죄의 십자가에서 자유로울 수 있고 Ego의 십자가도 능히 감당할 지혜와 능력을 덧입게 됩니다. 사명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역사를 위한 기도의 십자가, 말씀전도와 소감의 십자가, 섬김과 희생의 십자가뿐 아니라 ego의 십자가라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하나님 영광을 위해 질 때 사명의 십자가가 됩니다. 공부를 하고 자녀를 양육하며 일을 할 때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영광을 위해 충성되고 진실한 종으로 감당할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명의 십자가가 될 수 있습니다.

자기십자가는 고통과 희생이 따릅니다. 그래서 많은 이가 십자가에 깔려죽겠다고 부담스러워하고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신자가 예수님을 따라 자기십자가를 지는 이유는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처럼 부활하기 위해서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잘 알지만 받아들이기 불편한 진실은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는 부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24) 세상에서도 이 말씀은 진리입니다. 하지만 무너지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다 허무한 죽음을 당하는 이들이 많고 조직폭력배 두목을 위해 목숨을 바치다 어리석고 비참한 죽음을 맞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가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면 예수님처럼 부활할 수 있고 육신의 생명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부활의 생명 진정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생명은 장차 죽은 후 뿐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 예수님을 따라 자기부인하고 자기십자가를 질 때 체험할 수 있는 죽음을 이긴 부활생명입니다.
자기십자가는 인생의 진정한 열매가 됩니다. 십자가 없이 자기 마음대로 육체의 정욕과 탐심을 좇아 사는 이들은 부끄러운 인생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26) 얼마 전 우리나라 중년들의 은퇴 후 삶을 조명하는 방송을 봤습니다. 최근 우리나라 평균 은퇴연령이 49.3세로 나이 50도 안되어 직장에서 은퇴해야 합니다. 하지만 평균 수명인 80세까지 살기 위해 본인의 노후나 자녀 교육비와 또 늙지 않기 위해 다시 일자리를 찾는데 만족스런 일자리가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많은 노년들이 자신의 적성에도 맞지 않고 적은 금액으로 힘든 일을 하며 살아가는데 가장 큰 고통은 그 힘든 일보다도 꿈과 비전이 없는데다,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일평생 다른 이들과의 피 말리는 경쟁 속에서 열심히 뛰어온 것 같은데 인생의 막바지에 그 열매는 보이지 않고 후회와 아쉬움 속에서 깊은 허무와 고독과 무기력에 시달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라가는 신자에게 예수님께서 주시는 자기 십자가는 하나님영광을 위해 지기 때문에 그 인생이 방탕하지 않고 허무하지 않고 고독하지 않게 도와줍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의미와 기쁨 속에서 영광스러운 인생, 열매 맺는 인생이 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자기십자가라면 설사 노년에 교회 화장실 청소를 하고 주차장관리를 해도 예수님의 섬김과 사랑을 배우고 하나님영광을 위해 함으로 의미가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신자에게 하나님의 때에 자기 십자가를 주십니다. 자기 십자가는 자기가 원하는 때 아무 때나 질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골고다언덕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짐으로 큰 복을 받은 시몬처럼 하나님의 때에 준비된 자가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젊음이 지나가고 하나님의 때가 지나가고 할 일 없을 때 질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요9;4) 우리가 지금 예수님의 은혜를 체험할 때 또 은혜를 감당할 수 있는 시간과 체력이 있을 때 자기십자가를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마치 소가 밭을 잘 갈기 위해 메는 멍에처럼 각 제자에게 가장 잘맞는(합당한) 크기의 십자가를 주십니다. 만약 자기십자가가 작다면 예수님께서 그를 긍휼히 여기신 것이고 만약 너무 크다면 그만큼 그를 크게 쓰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크게 쓰시기 위해 큰 자기십자가를 주실때에는 감당할 만한 능력과 지혜와 동역자를 같이 주시기 때문에 오히려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주시는 자기십자가가 힘들고 피곤해도 예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감당함으로 풍성한 인생열매와 부활의 영광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제 3장,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자신도 자기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는 생각에 등에 태산 같은 무게의 십자가를 진 것처럼 심령이 답답해서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의 고백 8일후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산에 오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용모가 변화되어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니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났습니다.(마17;2) 그런 예수님 옆에 구약시대 율법의 대표자 모세와 선지자의 대표자 엘리야가 영광 중에 나타나 예수님과 함께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산위에서 좋은 공기마시며 그동안 십자가의 가위에 눌려 못잔 잠을 자다 깬 베드로는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무의식적으로 외쳤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짓고 영원히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산 밑에서 장차 감당해야 될 자기부인 자기십자가의 무게와 압박감이 두려웠습니다. 설사 산위에서 자신은 초막도 없이 나무 밑에서 살아도 존경하는 분들과 십자가 없이 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광대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35) 자기부인과 자기십자가는 결국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자신의 본성과 부딪히고 자신의 꿈과 어긋나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영접함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변화산의 영광을 보여주심으로 신자가 자기부인하고 자기십자가를 질 때 얻을 영광을 시청각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세상에서 자기 십자가는 어리석은 것이요, 부끄러운 것이요,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결국 승리하고 영광을 얻게 되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약 1년 반 정도의 예수님의 공생애사역이 지나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십니다. 십자가에서의 3일의 고통은 베드로에게 천년보다 길게 느껴지지만 결국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심으로 영원한 승리와 영광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그치고 구름이 거친 후 모세와 엘리야는 사라지고 오직 예수님만 보였습니다.(36) 우리 인생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수많은 사건사고(희노애락)가 내 옆을 지나가지만 결국 최후에 내 옆에 남는 분은 오직 나와 함께 하신 예수님뿐입니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나의 그리스도 되신 예수님을 따라 자기를 부인함으로 예수님을 닮아 가고 자기 십자가를 짐으로 가장 값진 인생열매와 부활의 영광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는 중 막내 동생의 장례를 맞게 됐습니다. 동생은 학생 때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인생을 시작했지만 오랜 기간 무거운 삶의 십자가에 짓눌려 살다 불치병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2년 동안 투병하는 중 많은 동역자들의 간절한 중보기도를 받게 도와주셨고 기도와 말씀 속에서 억눌렸던 삶의 십자가를 벗고 예수님 앞에 온전히 나올 수 있었습니다. 처음 예수님을 만날 때 같은 간절하고 가난한 심정으로 다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붙들면서 이 땅에서의 마지막 삶을 마무리하고 부활의 새 생명으로 넘어가게 하셨습니다. 세상적으로 불치병을 만나 아쉽고 안타까운 인생이 되었지만 하나님 편에서 볼 때 그의 인생 막바지에서 불치병이 예수님을 만나는 좁은 길이요, 생명길이 되었습니다. 저도 동생의 장례 속에서 자칫 죽음권세에 매일 수 있었지만 말씀을 통해 극복하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죽음권세가 주는 허무와 불신을 자기부인하며 말씀의 자기 십자가를 질 때 부활의 소망가운데 가족들을 섬길 수 있었습니다. 동생은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께로 돌아갔지만 남은 2자녀가 예수님의 제자로 인도되고 남은 부모님도 천국의 소망가운데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로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주셨고 제자들에게 자기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도록 하셨습니다. 우리가 자기부인을 통해 자신의 죄성을 벗고 예수님을 닮아가며 자기 십자가를 통해 영광의 인생 열매 맺는 인생을 살 수 있길 기도합니다.
목회자 사무엘 러더포드는 간증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내가 져 본 짐 중에서 가장 달콤한 짐이다. 그것은 마치 새에 달린 날개와 같고 배에 달려 있는 돛과 같아서 나를 내 목적지에 이르게 한다.” 무거워 보이는 새의 날개가 새를 날게 하고, 거추장스럽게 보이는 돛이 배를 나아가게 하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며 지는 자기 부인, 자기십자가로 영광스러운 인생 열매 맺는 인생으로 날아올라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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