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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2-08-07 (일) 15:06
분 류 누가복음
첨부#1 2022년_누가복음_제21강-1.hwp (180KB) (Down: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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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21강]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라
2022년 누가복음 제21강                                                      오정훈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라

말씀/ 누가복음 11:37-12:12
요절/ 누가복음 12:5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가끔 살다보면 ‘나는 무서운게 없는 사람이야’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정말 무서운게 없을까요? 가끔 이런 사람도 집에 가면 아내에게는 꼼짝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알고보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들은 중년의 여성들이죠!>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누군가를 두려워하며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 인생들에게 마땅히 두려워할 분이 누구인지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사람이 아니요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사람들 눈치보며 위선적인 삶을 살게 되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담대하고 진실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죽은 후에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므로 하나님 앞에 진실되고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삶을 살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1. 화 있을진저(11:37-54)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였습니다. 아마 이 바리새인은 예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호의 가운데 식사에 초대한 것 같습니다. 당연히 식사하기 전 손을 씻고 밥을 먹어야 하는데 예수님은 손을 씻지도 않고 식사하셨습니다. 이를 본 바리새인은 아니 어떻게 손도 안 씻고 밥을 먹을 수 있는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식사할 때 반드시 손을 씻었고 사람들이 많은 시장에서 돌아오면 샤워까지 하므로 자신을 정결케 하였습니다. 이를 다 아시는 예수님이 손을 씻지 않으신 것은 아마도 겉만 깨끗이 하는 바라새인들의 외식을 책망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39절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바리새인들은 손과 몸을 열심히 씻을 뿐 아니라 평소 그릇을 열심히 닦았습니다. 잔과 대접에 먼지 하나 없도록 닦고 또 닦았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깨끗하고 거룩하게 살고자 노력하는 것 이것은 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겉은 열심히 씻었지만 속은 씻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겉과 속이 달랐고 탐욕과 악독이 마음에 가득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남의 것을 넘보고 악한 생각 곧 독을 품고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죽일까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무엇이라 하십니까?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40) 하나님이 겉만 만드셨다면 겉만 열심히 씻으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속도 만드셨기에 속도 깨끗이 씻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삼상16:7) 그러므로 우리는 겉보다 속을 더 깨끗하게 씻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속을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까? 41절을 다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그 안에 있는 것이란 그들이 열심히 씻는 그릇 안에 있는 음식을 말합니다. 또 우리 육신은 우리 영혼을 담고 있는 그릇이므로 그 안은 사람의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는 말씀은 먼저 마음속으로부터 구제하라는 뜻이요 그릇 안에 있는 음식과 물질로 구제하라는 뜻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한다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과 음식을 주어서 구제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어떻게 속을 깨끗하게 하는 길이 될까요? 물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고인 물은 썩지만 흐르는 물은 맑고 깨끗해지듯이 계속해서 내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여 줄 때 깨끗해져 탐욕이 사라지고 감사와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만 찢지 말고 지갑도 찢어서 다른 사람을 도와야 합니다. 예수님은 손만 열심히 씻고 속을 씻지 않는 그들에게 화가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첫 번째 화. 42절입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박하’는 우리가 흔히 먹는 박하사탕의 원료로 민트라 불리는 특유의 청량감을 주는 작은 풀입니다. ‘운향’은 지중해의 바위틈에서 자라던 식물로 강하고 독특한 향기가 있어 예수님 당시 향료로 널리 쓰였고 미친 개나 전갈에 물렸을 때 해독제로도 쓰였다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런 소량의 약재를 얻을 때도 그것에 대해 십일조를 드리기 위해 필요 이상의 열심을 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가장 기본적인 신앙덕목인 공의(justice)와 사랑은 버렸습니다. 미가서 6장8절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율법의 근본정신인 공의와 사랑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하나님 백성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 조문을 지키는 것에 급급할 것이 아니라 율법의 근본정시을 지키는데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여 믿음으로 십일조 드리는 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 화. 43절.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바리새인들은 회당의 가장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였습니다. 흔히 모세의 자리라고 하는 곳에 앉아서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을 즐겼습니다. 또 장을 볼 것도 아니면서 시장 문여는 시간이 되면 괜히 시장을 한 바퀴 돌므로 사람들에게 문안인사를 받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기를 높여서 자기 영광을 구하는 자들로 이런 자들에게 화가 있습니다. 에스더서에 나오는 하만이란 자가 바로 그러한 자로서 높은 자리에 앉아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인사 받는 것을 기쁨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모르드개 한 사람이 절을 하지 않자 분노하여 그를 죽이고자 마음먹습니다. 그러나 그 교만이 절정에 달했을 때 오히려 모르드개를 죽이고자 했던 나무에 자신이 달려서 죽게 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함은 넘어짐의 앞잡이입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고 절정의 고수는 자기를 숨기고 범인처럼 살아가는 것이 극강의 진리입니다. 우리가 자기를 높여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헛된 영광과 자만심을 버리고 하나님께 믿음과 순종으로 인정받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세 번째 화 44절입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나라 무덤은 봉분이 있어서 사람을 어디에 묻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반면 평토장한 무덤은 평평해서 어디에 사람이 묻혔는지 알 수 없어 자기도 모르게 그 위를 밟기 쉽습니다. 이렇게 자신도 모르게 무덤을 밝으면 부정하게 되는데(민19:16)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열심히 지키고 손과 발을 열심히 씻으므로 자신들을 정결함의 수호자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실 때 그들은 무덤 속에서 시체가 썩고 부패하듯이 그 외식함으로 내면이 부패하여 악취가 나는 평토장한 무덤과 같았습니다. 이로써 사람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하게 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 무서운 죄를 짓고 있었습니다.
45절입니다. “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가재는 게 편이라고 당시 율법교사들 가운데 바리새인들이 많았는데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의 말씀에 자기들까지 모욕하는 것이라고 불만을 토로하였습니다. 가만히 있었으면 아무일 없었을 텐데 괜히 나서는 바람에 예수님은 율법교사들에게도 화를 선포하십니다.
네 번째 화. 46절입니다.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여기서 지기 어려운 짐이란 율법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하늘 위에 올라가야 하거나 음부에 내려가야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가까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율법과 장로들의 유전에 대한 율법교사들의 해석을 가리킵니다. 이들의 해석은 너무나 어렵고 복잡하여(613가지 세부규칙) 사람들이 일일이 기억하고 지키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더 문제는 그렇게 복잡하고 까다로운 규칙을 만들어 놓고 자신들은 한 손가락도 움직이지 않고 전혀 지키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마23:3) 자신은 소감 쓰지 않으면서 양들에게 소감 쓰라고 푸쉬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무거운 멍에만 메우고 이를 지키도록 강요하며 본을 보이지 않는 목자에게 화가 있습니다.
다섯 번째 화 47,48절 “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드는도다. 그들을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이와 같이 그들은 죽이고 너희는 무덤을 만드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도다.” 그들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다시 쌓고 비석을 세움으로 선지자들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처럼 선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자신들의 악함을 미화하고 은폐하기 위함입니다.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을 죽인 것은 회개하기 싫은 그 마음의 완악함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손들인 이들도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선지자를 존경해서 무덤을 꾸미고 있지만 여전히 하나님이 보내신 종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특히 선지자 중의 선지자이신 예수님을 적대시하고 죽이는데 주동이 됩니다. 이렇게 조상의 악함을 회개하지 않고 선지자를 죽이는 그들에게 무서운 화가 있습니다.
49-5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며 또 박해하리라 하였느니라.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하나님의 지혜는 사람의 정신을 강제적으로 개조하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와 사도를 보내 회개의 메시지를 전함으로 돌이키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더러는 죽이고 박해하였습니다. 이로서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게 됩니다. 사가랴는 역대하 24장 20-25절에 기록된 마지막 순교자로 회개하지 않는 완악한 유대인들에게 성전 뜰에서 돌로 쳐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들의 죽음은 모두 그들 조상이 저지른 악함으로 인함인데 왜 이 세대가 다 담당하게 되는 것일까요? 앞선 세대들이 저지른 잘못은 후대 사람들에게 좋은 교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똑같은 악을 행하면 전 세대로부터 누적된 심판을 이 세대가 한 번에 다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 조상들이 선지자들을 죽이고 박해한 것처럼 예수님과 사도들을 박해하여 죽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인 그들의 죄에 대한 심판은 1차적으로 A.D. 70년 로마군대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멸망함으로 성취되어 집니다. 그리고 그들은 뿔뿔이 흩어져 타국에서 멸시받고 학살당하는(holocost) 심판을 받게 되고 맙니다.
여섯 번째 화. 52절입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그들은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자였기 때문에 지식의 열쇠 곧 구원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성경해석으로 예수님을 배척하였고 대적하게 만들었습니다.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고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죄인들의 친구라고 비난하였습니다. 이로써 구원의 문이 되신 예수님에게로 나아가지 않았고 다른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잘못된 자기 확신으로 자기도 그릇된 길로 가고 남도 멸망 길로 가게 하는 사람입니다.
53,54절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을 비난하자 하이에나들처럼 거세게 달려들어 여러 가지로 따져 물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들을 돌아보고 회개해야 했지만 조상들처럼 완악하여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결국 그 조상들의 길을 가며 복음의 원수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상을 통해 겉만 씻고 속을 씻지 않는 사람에게 화가 있음을 배우게 됩니다. 이런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코람 데오’신앙입니다. 이는 라틴어로 ‘하나님 앞에서’란 뜻으로 신앙생활은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할 때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진실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우리가 잘 꾸민 겉모습이 아니라 우리 속이요 중심입니다. 우리 속에 얼마나 진실된 회개와 결단이 있는지 믿음과 순종이 살아있는지 보십니다. 이 시대는 겉을 화려하게 꾸며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자기영광을 추구하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 겉만 꾸미며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외식하기 쉽습니다. 우리가 이런 외식을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진실된 삶을 살므로 믿음과 순종 공의와 사랑이 살아있는 거룩한 하나님 백성들이 될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2.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12:1-12)
  12:1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바리새인 율법교사들과의 논쟁하는 동안 무리 수만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원래 갈릴리 촌부들로서 아무도 관심 가져 주지 않았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니 자신들도 모르게 사람을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평소 옷에 1도 신경 쓰지 않던 베드로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억양이 심한 사투리를 쓰던 안드레는 표준어를 쓰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이러다 보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좋게 보이려고 위선적인 행동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위험을 아시고 바리새인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말씀하십니다. 성경에서 누룩은 대체적으로 악한 영향력을 상징합니다. 특히 외식은 위선으로서 사람의 겉과 속을 다르게 하여 사람을 타락하게 하는 영적 누룩입니다. 고린도전서 5장 6절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외식은 자기 자신만 부패하게 할 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 전체를 부패하게 하는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유월절이 되면 집안의 모든 누룩을 제거하고 누룩을 넣지 않은 무교병을 먹었습니다. 누룩을 제거하는 것은 애굽에서 행하던 죄악된 구습을 제거하는 뜻이 있습니다. 부도덕하고 세속적인 욕망을 제거하고 경건한 삶을 살라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세상의 풍습은 잠재된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는데 이는 쉽게 번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검소하고 경건한 모임에 한 사모님이 비싼 귀걸이를 하고 명품 가방을 들고 나타났습니다. 형제들은 어차피 이런 것을 봐도 구찐지 프라단지 모르고 관심도 없지만 자매들은 본능적으로 그것들을 알아보고 그 귀걸이와 명품 가방에 관심이 온통 쏠렸습니다. 자신도 비싼 귀걸이와 명품 가방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생겨났습니다. 이후 그 모임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세속적인 문화가 교회 내로 들어오면 금방 퍼집니다. 반면에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복음을 전하는 경건한 분위기는 잘 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지만 마음은 멀어집니다. 우리는 이런 바리새인의 누룩인 외식을 주의해야 합니다.
2,3절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 감추인 것과 숨긴 것은 사람들에게 드러나지 않고 보여주지 않은 자신의 본 모습을 가리킵니다. 사람들은 남에게 좋은 모습만 보이려고 자신의 본 모습을 감춥니다. 그러면서 은밀한 곳에서 죄를 짓습니다. 어두운데서 음모를 꾸미고 골방에서 남의 험담을 합니다. 그러나 그런 행위뿐만 아니라 그 말한 것까지 반드시 광명한데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서29:15은 말씀합니다. “자기의 계획을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의 일을 어두운 데에서 행하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 하니” 정말 모를까요? SNS를 통해서 학창시절 친구를 괴롭히고 폭력을 일삼은 것이 드러나 잘 나가던 연예인 운동선수들이 곤혹을 치르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직도 그런 일들이 여전히 많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계속해서 드러나게 될 것이고 최후에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드러나 각자 행한 대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선은 아무 쓸모가 없고 늘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게 살아야 합니다.  
12:4입니다.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내 친구라고 하십니다. 친구에게는 모든 것을 말하고 싶고 모든 것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친구에게 좋은 얘기를 해야 하는데 예수님은 자신이 박해받으시는 것처럼 친구인 제자들에게도 박해가 있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승천 후 제자들이 복음역사를 섬길 때 이런 무서운 박해가 있을 것을 아시고 미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몸은 죽이지만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라 하십니다. 몸을 죽인다는 것은 하나 밖에 없는 나의 생명을 앗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참으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비굴해지고 원치 않게 사람 눈치보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5절을 다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우리가 진짜 두려워해야 할 분은 죽은 후에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가 있으신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으십니다. 천국으로 인도하실 수도 있고 지옥불에 던져넣을 수도 있으십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잠언29장25절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느브갓네살이 만든 금신상에게 절하지 않으므로 평소보다 7배 뜨거운 풀무불에 던져질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 절체절명의 순간 자신들의 운명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믿음으로 타협치 않고 끝까지 우상에게 절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풀무 불에서 건져내실 것을 믿었고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금신상에게 절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정말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세상을 무서워하지 않는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의 믿음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맹렬한 불 가운데서 보호하심으로 그 능력과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사람을 두려워하며 살기 쉽습니다. 직장상사나 교수님이 나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 앞에서 쩔쩔매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나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계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생사화복과 영혼까지도 주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고 담대히 승리하는 종들이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6절입니다.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당시에 참새는 가장 값싸고 흔한 것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것이었습니다. 두 마리에 한 앗사리온(1/16데나리온) 정도 했는데 네 마리를 사면 4+1으로 한 마리를 덤으로 주었다고 합니다. 이런 참새가 시장에서 팔리는 작은 일까지도 하나님은 잊어버리지 않으시고 모두 살펴보고 계십니다. 이렇게 참새도 살피시니 택하신 자녀들은 얼마나 살피시고 돌보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어디가 아픈지 다 아시고 세심하게 돌봐주십니다. 필요한 것들을 때를 따라 공급하여 주십니다. 어느 정도까지 우리를 아시고 도와주십니까? 7절을 다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시는 분이십니다. 하루에 머리카락이 얼마나 빠지는지 다 알고 계십니다. 이는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신다는 것으로 우리를 많은 참새보다 귀하게 여기시고 돌보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위험에 처하더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8,9절을 보십시오.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 여기서 사람 앞에서란 말씀은 교회에서가 아니라 일반대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면 감옥에 갇혔고 사자밥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두려워하여 침묵하거나 예수님은 부인하고 믿음을 저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부인하실 것이라 하십니다. 그러나 죽음의 고난을 받을지언정 예수님을 시인하면 예수님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하실 것입니다. “이는 나의 사랑하는 자요 내가 기뻐하는 자라”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접하든가 아니면 예수님을 부인하든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중립은 없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끝까지 믿음을 지킨 위대한 순교자이십니다. 일본경찰은 이분을 어떻게든지 협박하여 예수님을 한번만 부인하도록 회유하고자 온갖 고문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순교하는 순간까지 주기철 목사님은 믿음을 지켰습니다. 일본 제국주의는 주기철 목사님의 목숨은 가져갈 수 있었지만 이분의 영혼과 그 믿음은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진정한 승리자는 자신의 믿음을 지킨 주기철 목사님이었습니다.
10절.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를 염두에 두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몰라서 무지 때문에 거역한 사람은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두려움 때문에 말로 예수님을 부인하거나 바울처럼 무지한 열심으로 신자들을 박해한 자들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합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단순한 일회적인 거부가 아니라 성령을 통한 역사를 보고도 일관되게 거부하는 것을 말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이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고도 귀신의 역사라고 왜곡하고 폄훼했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보고도 고의적으로 모독하는 사람은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11,12절입니다. “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에게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확신하도록 말씀하십니다. 세상 권세 자들에게 끌려가면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말 한마디에 목숨이 왔다갔다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대제사장 집에 들어가 횡설수설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땅히 할 말을 성령께서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4장에서 베드로는 성령이 그 시에 주시는 말씀을 담대히 선포함으로 저들의 기이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승리하게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본문의 바리새인처럼 그릇과 대접을 자주 씻었습니다. 일주일에 열 번 넘게 설거지하며 싱크대를 깨끗이 하고자 애썼습니다. 또 땀이 비 오듯 쏟아지는 요즘 자주 몸을 씻음으로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렇게 겉은 열심히 씻으므로 정결해지는 느낌이었으나 실상 내면은 물질에 대한 탐욕과 안목의 정욕으로 가득하였습니다. 특히 유투브를 아무 생각 없이 한 시간 두 시간보다 보니 세상 죄악이 아무런 여과 없이 눈을 통해 마음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부도덕하고 세속적인 욕망을 제거하고 누룩 없는 거룩한 떡이 되어야 하는데 세상 정욕으로 물든 누룩 덩어리가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센터에서는 경건한 척 영적인 척 외식하길 잘하였습니다. 거기다가 실제 생활에서도 아는 척 잘난 척하길 좋아하였습니다. 팀장 목자님들이 매주 주일보고를 카톡으로 보내면 독일어를 거의 모르면서 굉장히 잘하는 척 항상 ‘당케’라고 답장을 보냈습니다. <가끔 함바나바 목자님이 말씀공부노트를 메일로 보내주면 특별히 ‘당케 쉔’이라고 답장을 보냈습니다.> 이런 저에게 이번에 방문한 방그레이스 선교사님은 아들 요엘이에게 ‘저 삼촌 독일어 엄청 잘해’ 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저는 이 말을 듣고 심히 부끄러움을 느끼고 독일어 잘하는 척 외식하고 있었던 것을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동영상으로 시간을 허비하며 세상 정욕에 빠져 지내던 것을 회개하고 독일어 동영상 한 가지만 보고자 결단하게 되었습니다. 쓸데없이 유투브 보지 않으니 마음이 정함이 생기고 방향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여름수양회에서 백바나바 선교사님의 메시지를 통해 크게 은혜받고 세상의 화려함에 마음을 빼앗겨 지낼 것이 아니라 정신을 차리고 말세를 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힘써 말씀을 전파하며 사람들을 제자로 세우는 것입니다. 조그만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외식하여 겉만 번지르르한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저의 모든 것을 살펴보고 계십니다. 제가 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므로 하나님 앞에 진실된 삶을 살며 말씀을 전파하고 제자들을 세우는 말세를 대배하는 삶 살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사람을 두려워하면 사람의 눈치를 보고 겉과 속이 다른 외식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진실되고 담대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은 죽은 후에도 우리를 지옥에 던져넣으실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므로 사람과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고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 살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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