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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2-12-25 (일) 17:17
분 류 누가복음
첨부#1 2022년_성탄_2강-1.hwp (98KB) (Down: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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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성탄 2강]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2022년 성탄 2강                                                                           김베드로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말씀 / 누가복음 2:1-20
요절 / 누가복음 2: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Merry Christmas!
구주 예수님의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 드립니다.  예수님의 탄생 소식은 죄와 죽음의 세력에 눌려 사는 이 세상에 하늘의 평화와 큰 소망을 주십니다. 천지창조 이후 아기 예수님의 탄생만큼 놀라운 출생은 없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일이었고 BC와 AD의 역사를 가르는 인류 최대의 사건이었습니다. 오늘 성탄 말씀을 통하여 구유에 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왜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인가? 그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의 심령에 성탄으로 인한 영원한 기쁨과 평화가 임하는 이 시간 되시길 기도 합니다.
I. 하나님께 쓰임 받는 구속사의 주인공들(1-8)
1,2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그 때란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가 천하를 다스리며 호령하던 때였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는 BC 27- AD 14년까지 41년을 로마의 황제로 군림했습니다.  그의 통치기간 로마는 역사상 가장 부강하고 번성하였습니다. 그의 본래 이름은 옥타비아누스였는데 원로원은 숭고한 자란 의미에서 그를 가이사 아구스도라고 불렀습니다.  8월(August)은 그를 기릴 목적으로 붙혀진 것입니다.  그리고 황제는 주(Lord)란 의미의 큐리오스(Kyrios)로 불리어졌습니다.  세상은 표면적으로는 로마의 황제를 정점으로 한 힘과 무력에 의한 ‘로마를 통한 평화’(Pax Romana) 곧 인류의 정의와 평화가 이루어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역사가인 누가는 예리한 영적 통찰력으로 이러한 로마의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닌 수많은 민족과 백성들의 굴욕과 피의 값으로 이루어진 거짓 평화요, 세상 타락한 권력과 힘에 의한 위장된 정의임을 알았습니다.  이런 가운데 천사는 만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탄생으로 참된 기쁨이 임한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천하로 다 호적하라” 천하 만민의 주(Lord)로서 황제의 말 한마디는 거역할 수 없는 로마의 법령이 되어서 로마 제국 방방곡곡에 전달되었습니다. 호적 명령은 인두세를 징수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화려함과 영광을 유지하기 위한 막대한 그 모든 비용을 식민지 백성들에게 부과한 것이었습니다. 호적 명령에 따라서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만삭이 된 여인도 고향으로 가서 호적해야만 했습니다.  3-5절을 보십시오.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가난한 목수 요셉도 호적 명령에 따라 만삭이 된 마리아를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는 140킬로 거리로서 만삭의 여자의 몸으로 나귀 등에 태워져 여행을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위험했겠습니까?  세상의 그 어떤 어머니도 임산부의 몸일 때는 극도의 관심과 보호를 받습니다. 그러나 만삭의 때에 마리아는 조금도 그럴 여유가 없었습니다. 어리신 예수님은 이미 그 태아에서부터 어머니와 함께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6절과 7절을 보십시오.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7)  베들레헴에 도착하자마자 마리아의 산통이 시작되었습니다. 힘들어 하는 마리아의 모습을 보면서 당황한 요셉은 어떻게 했을까요? 이리 저리 뛰어다니며 방을 구했을 것입니다.  제발, 산모가 아기를 낳을 수 있도록 구석진  공간이라도  허락해 달라고 모든 방문을 두드리며 호소하고 또 호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모두 고개를 저었습니다. 내 방을 내어 줄 공간과 여유가 없다하며 냉정히 거절 하였습니다.  베들레헴은 ‘떡집’이란 뜻입니다. 인정이 많은 곳입니다. 그런데 ‘팍스 로마나’라는 시대에 가이사의 통치 아래 사는 백성들은 산모에게 방 한 칸 내어줄 마음의 공간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마리아가 산통으로 울부짖을 때 귀를 틀어막고 못들은 체 했습니다. 결국 요셉과 마리아는 어디로 가야만 하였습니까? 할 수 없이 짐승들이 거하는 마구간으로 갔습니다. 가축들이 사는 곳입니다.구유는 집에서 기르는 가축의 길다란 밥그릇입니다. 마리아는 이 가축의 우리에서 해산을 하고 아기 예수는 그 구유에 누이게 됩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의 냉대와 세상의 무지와 무관심속에서 탄생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만도 상상할 수 없는 경이로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인류의 구원자가 이런 모습으로 말구유에  탄생 하시다니! 이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 아무리 비천한 자라 할지라도 탄생 만큼은 특별한 보호를 받습니다. 그 누구도 가축의 구유에서 태어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와같은  예수님의 이 땅위에 오심과 태어나심 자체가 죄인들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은혜요 복음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성육신(Incarnation)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더 이상 낮아질래야 낮아질 수 없는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이를 가리켜 말구유 정신(Manger spirit)이라고 합니다.  구주 예수님의 비우심과 겸손은 하나님이 그 어떤 낮고 비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세상 만민의 구원자 되신 예수님께 나와 구원받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이셨지만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 하셨느니라”(빌2:8)  예수님은 본체가 하나님이셨지만 우리 죄인들을 너무나도 사랑하신 나머지 자신을 낮추어 이러한 말구유에 태어 나셨던 것입니다. 이 예수님을 통해 그 어떠한 바닥에 떨어진 인생이라 할지라도 예수님 안에서 위로 받고 힘을 얻고 새 생명을 얻도록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것은 가이사의 명령에 의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BC 700년경 미가 선지자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다윗의 동네인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실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미가 5:2) 하나님은 이 예언대로 언약을 성취하신것임을 보여줍니다. 또한 하나님은 절대 주권자로서 세상역사를 쓰셔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루게 하신 만유의 주권자가 되심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러한 성탄의 소식은 가장 먼저 누구에게 전해집니까?  8절을 보십시오.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성탄의 기쁜 소식은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는 목자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영적으로 깨어있지 못하고 잠들었던 베들레헴 주민이나 또는 화려한 예루살렘 종교지도자들에게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목자들에게 그 기쁜 성탄 소식을 제일 먼저 천사들이 알렸다는 것은 목자의 삶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큰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밖에서’는 농경지 들판을 의미합니다. 비가 오지 않는 건기에는 목자들이 가축을 이끌고 농경지에 들어가서 밀 추수가 끝나고 남아 있는 밀 밑동을 양들에게 먹이었습니다.  성전에 바쳐지는 양들도 이곳에서 양육되어졌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왜 성탄의 복음이 가장 먼저 전해졌을까요? 물론, 정확히는 알수 없지만 목자들이 밤에도 깨어 양 떼들을 지키는 신실한 자들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한밤에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은 세상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자들이었으나 하나님은 이러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충성하는 목자들에게 주목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아기 탄생의 소식을 가장 먼저 알렸습니다. 저는 이번주 2남 1녀의 어머니로서 전쟁의 포화속에서 충성스럽게 양떼들을 돌보고 있는 캔두 이리나 목자로부터 다음과 같은 메일을 받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목자님, 오늘 밤은 추웠습니다. 왜냐하면 변압기가 폭격 당했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이 캄캄했지만 우리는 밤 하늘에 유난히 많은 빛나는 별들을 보았습니다. 모든게 어두움에 잠겼지만 그러나 하늘에는 마치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말씀 하시는 것처럼 별들이 반짝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새벽의 하늘은 주위를 너무나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습니다. 주님의 오심과 승리를 보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날 밤 가장 깜깜한 밤에 가장 기쁜 소식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그들 목자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말해 주는 바가 무엇일까요?  세상은 로마의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를 중심으로 돌아갔고 그의 일거수 일투족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자 누가는 가이사를 역사적 배경으로 삼고 예수님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천하의 가이사라 할지라도 단 1단 기사로 간단히 처리하고 하나님 나라 카메라의 렌즈를 이 구속사에 쓰임받는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들녘에서 양치는 삶을 살던 목자들에게 포커스를 맞춥니다.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상세하게 기록하며 구속사에 쓰임 받는 자들의 삶을 스토리 텔링합니다.  역사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의 눈에는 이 세상의 세속사는 로마의 황제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만민 구속역사를 이루는데 쓰이는 배경(Background)에 불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온통 하나님의 구속사에 연관되어 쓰임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인류 구원의 장엄한 새역사 즉 BC에서 AD로의 새로운 구속사의 시대를 여는데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이름없이 빛도없이 충성하는 들녘의 양치는목자들을 쓰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하나님의 구속사에 쓰임 받고자 하는 소수의 믿음의 사람들을  찾으시고 그들을 천하보다 귀하게 사용 하십니다. 우리 경성의 동역자님들을 2022년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구속사에 쓰임 받고자 한 영혼을 위한 목자요 성경선생으로 헌신과 사랑의 수고를 감당케 하심을 감사 드립니다. 우리의 힘든 형편을 아시고 동행하여 주신 우리 주님께서 올 한해도 우리의 삶을 구속역사의 아름다운 스토리 텔링이 넘치는 삶으로 축복 하셨음을 믿고 감사 드립니다.  사명인의 삶에 다소 고난도 따르지만 그러나 가장 축복되고 가치 있는 삶임을 믿습니다.  복된 성탄을 맞이하여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들녘의 양치는 목자들에게 임한 성탄의 기쁜 소식이 오늘 예배에 함께 하시는 모든 분들, 목자님들 그리고 선교사님들 위에 충만하게 임하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II.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9-20)
9절을 보십시오.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9)  무관심한 세상과는 달리 하늘 나라는 예수님의 탄생에 온통 관심을 쏟고 있었습니다.  주의 사자가 나타났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비추었습니다. ‘영광’은 하나님의 임재 때 나타나는 위엄과 광채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천사의 출현으로 인해서 목자들은 크게 무서워했습니다.  10절과 1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천사들이 가져온 소식은 온 백성에게 미치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Good news of great joy)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온 백성을 위하여 구주로 탄생 하셨다는 소식입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다윗의 동네’는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으로 나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구약의 언약을 따라 약속된 메시아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과거의 한 시점이지만 오늘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자의 마음속에 현재적으로 탄생하십니다. 즉, 오늘 나를 위하여 구주(Savior)가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영원한 현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이 땅에 구원자로 오셨습니다.  인류에게 공통된 가장 큰 슬픔의 나쁜 소식은 인간은 죄로 인해서 모두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을 때마다 슬퍼하고 통곡합니다. 죽음은 인류의 공동의 적이며 예외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요 그 이후에는 영원한 심판이 기다립니다.(히 9:27) 누가 이런 죄로 인한 죽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누가 죄로 인한 사망과 운명과 정죄와 심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 되신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가 되셔서 우리의 죄와 죽음과 심판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세우신 분 즉,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주(Lord)’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구유의 한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으나 그분은 온 인류를 구원할 구원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탄생소식이 가장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어두움과 죽음이 가득한 역사속에서 감격에 겨워 선포합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9:6). 이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 된 자에게는 자유를 눈먼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고 눌린 자를 자유케 해주고 주의 은혜를 전파”(눅4:18-19)하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마침내는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생명의 구주가 되십니다.

이런 구원자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셨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인가요? 얼마나 큰 은혜인가요?  은혜란 바로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먼저 찾아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감격하여 외쳤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도다” 하셨습니다(딤전 1장 14절)  우리를 모든 죄짐에서 해방 시켜주시고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와 같이 뛰며 새생명과 새소망을 가지고 살게 하신 우리의 구주 예수님을 인하여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립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주 됨의 표적이 무엇입니까? 12절에서 14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12-14)  구유 위에 뉘어 있는 아기가 ‘그리스도의 표적’이라고 말합니다. ‘표적(sign)’은 표시, 신호, 상징이란 뜻입니다. 로마 군대의 상징은 독수리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표적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입니다. 십자가입니다. 겸손과 섬김과 희생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생명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참된 구원과 평화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예수님의 탄생과 구속의 사건으로 완성되므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고 구속받은 이 땅의 사람들에게는 참 평화가 임하였습니다. 죄와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우리 모두에게 놀라운 하늘나라 평강과 평화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예수님의 모습은 구원자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초라하고 힘없는 예수님의 모습에 정치적인 메시아를 기대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배척하고 무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천사는 이것이 표적이라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영적 메시아로 오셨다는 표적입니다.  이 예수님은 구원자가 되셔서 죄로 죽었던 나를 살리셨고 병들고 약한 나를 강하게 하셨고 가난한 나를 부하게 하셨습니다.  운명에 울고 웃던 나를 축복하사 섬기는 하나님의 종의 인생으로 섭리의 삶을 살도록 우리 모두에게 은혜 주신 줄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저에게도 큰 은혜를 주셨습니다.  사라 선교사와 저는 1990년 구 소련 선교라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폴란드, 러시아 그리고 우크라이나에서 지난 32년동안 제자양성 역사 및 선교역사를 섬기게 하셨습니다. 저희 부부의 선교 철학은 “우리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우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복음으로 섬긴다. ‘지금 그리고 여기에-Now & Here’의 삶을 산다” 였습니다. 이 방향을 따라서 공산권의 종주국이었던 러시아 그리고 체르노빌 방사능의 위험이 기다리고 있던 우크라이나라 할지라도 두려움 없이 나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험난한 선교지에서 선교하고 공부하며 직장생활을 하면서 말 그대로 산전수전을 다 겪도록 하시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전쟁으로 인한 미사일, 드론 공격에 대응하는 공중전도 체험하게 하십니다. 이제 육해공을 체험한 전천후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최고 가치인 예수 그리스도를 추구할 때 그 어떤 고난이나 환란의 파도에도 침몰되지 않고 오히려 그 파도를 뛰어넘어 그 물길을 걸을 수 있는  믿음의 법칙을 배우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방식으로 ‘맨땅에 헤딩하는 스피릿으로 제자양성의 교두보를 구축’하며 광야와 사막 같은 곳이라 할지라도 복음의 옥토로 일구는 삶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성육신과 말구유 정신을 가지고 눈물과 겸손과 희생으로 슬라브 민족의 교만과 불신의 뿔을 꺾으며 캠퍼스 지성인들을 제자 삼는 사명인의 삶을 감당하도록 도우셨습니다. 많은 가정교회가 일어나고 여러 기둥같은 목자들을 선교사로 미국, 터키, 체코등에 파송 할 수 있었습니다.  센타 건물도 지었고 이제는 또 다른 센타 건립이라는 큰 프로젝트도 맡아 성공적으로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현지 제자들에게 키이우 UBF 역사도 안정적으로 이양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요, 그 긴 세월을 수 많은 고난과 맞서며 말구유 정신으로 섬긴 사라 선교사와 최 한나 선교사 그리고 이런저런 모습으로 동역과 섬김의 삶을 감당하다 귀국한 여러 선교사님들의 헌신과 희생의 열매였습니다. 그리고 경성센타 동역자님들 및 고 이 사무엘 선교사님의 사랑과 기도를 하나님께서 축복 하신 것이었습니다. 저에게 고 이사무엘 선교사님과 전 요한 선교사님의 영적 리더십과 멘토링은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시카고 센타의 Mother Sarah Barry 선교사님과 정 요셉 선교사님 그리고 경성 센타의 서 제임스 목자님과 서 경희 목자님은 성육신 신앙과 말구유 정신의 모델로 저의 삶에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습니다.  사라 선교사와 저는 예수님을 구원자로 만나고 또한 이 시대 빼어난 하나님의 종들을 배우며 동역하는 그야말로 축복 받은 은혜의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축복의 때에 하나님과 사명 앞에서의 저의 자세였습니다. 역사를 이양한 후 그동안 고생 많았으니 이제는 모든 것 다 내려놓고 푹 쉬면서 비즈니스를 크게 일으켜 노후도 좀 즐기고 어려운 선교지들도 돌아보면서 살자는 생각이 들어 왔습니다.  끊임없이 낮아져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하는 힘든 제자양성 사역에서 한발 물러나 곡물 사업을 통한 비즈니스 선교라는 새로운 방향을 잡았습니다. 제자양성에 비하면 별것 아니다 싶은 생각에 열심히 일하니 곡물사업 비즈니스의 대로가 열리는 듯 하였습니다. 이렇게 본격적으로 진행하면 3-4년 내에 한국에 집도 사고 사무실도 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저의 마음이 하나님과 말씀 그리고 사명으로부터 멀어져 자꾸 콩밭으로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멋진 승용차를 몰고 광활한 해바라기 밭을 질주하면 영화 ‘해바라기’의 주인공이 된 듯 착각하기도 하고 돈이 되는 해바라기와 밀과 콩과 옥수수는 자꾸 손짓하며 달려 오는데 하나님과 사명은 자꾸 부담스러워 저 멀리 멀어지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과 사명을 조금씩 등지기 시작하는 영적인 위기가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저 자신 ‘목자요 선교사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거야?’ 자문 하던차에 ‘그래, 그렇게 살면 안되지!’ 하시며 하나님은 이런 저의 삶을 돌이키게 하시고자 전쟁이라는 강력한 해머로 저의 삶을 내리치셨습니다. 전쟁이라는 불가항력 상황속에서 모든 것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 한분 만을 바라보는 훈련을 다시 하시기 시작 하셨습니다.

지난 2월 24일 전쟁 발발후 사라 선교사와 저 그리고 우크라이나 UBF 및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전쟁으로 인하여 많은 것들을 잃었습니다.  너무 슬프고 가슴 아픈 일들이 많아 무어라 표현조차 할 수 없는 한해였습니다.  제 전 인생을 통틀어 보더래도 너무 힘든 한해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와 양무리들을 향한 애통해하는 마음이 없이 회개의 눈물이 메말라 가던 저에게 있어서는 이 시간은 회개의 기간이었습니다.  양무리들과 선교지를 향하여서는 목자의 심정을 회복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사명과의 관계 그리고 말구유의 정신과 오병이어의 믿음의 자세를 새롭게 하는 시간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동안 특별한 사귐의 기회가 부족하였던 경성센타, 연희센타, 관악 3부, 안암 2부 센타 동역자님들과 깊은 사랑의 교제와 제자양성을 위한 동역의 그릇을 이루는 축복된 시간이기도 하였습니다. 우크라이나 구호를 중심으로 한국사회의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단기간에 네트워크를 이룰 수 있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경성 동역자님들의 사랑과 기도 그리고 섬김을 받으며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와 위로를 체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사라 동역자는 한차례 그리고 저는 두차례에 걸쳐 전쟁중의 우크라이나를 다녀 왔습니다. 두 번째 방문은 너무 위험 하였지만 하나님과 선교지 양무리들로부터 멀어진 삶의 자세를 회개하는 마음으로 80여일 동안 우크라이나를 심방하여 ‘샬롬 우크라이나’를 선포하며 기도 하였습니다.  공습과 정전 그리고 단수등의 위험과 어려움속에서  피난에서 돌아온 일부 UBF 동역자들과 사무엘상 말씀과 출애굽기 말씀 전체를 요약식으로  함께 공부하며 어려움의 때에 전능하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말씀을 붙들고 일어서도록 격려 하였습니다.  어느날 저는 한국의 신문 기자와 함께 전쟁하에서의 고통당하는 어린이들을 취재하며 그 실태를  조사하고자 아침 일찍 만남의 장소로 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지근거리에서 7발의 미사일이 떨어져 화염을 내뿜으며 폭발 하였습니다. 하루 하루 공습에 대한 긴장과 정전으로 인한 추위 그리고 단수의 어려움속에 있는 형제 자매들과 어린이들을 남겨놓고 다시 출국하게 되니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폴란드를 거쳐 돌아오면서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일어 났던 나치 히틀러의 죄악이 이 시대에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 때문에 돌와오는 내내 잠이 오질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 자유와 민주 그리고 인륜과 양심의 이름으로 이러한 가치를 파괴하고자 하는 사단의 세력으로부터 그 가치를 지켜 내고자 하는 처절한 가치싸움과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하여서는 얼마나 말씀에 깨어 시대를 분별해야 하고 기도에 깨어 있어야 하는가를 깊이 묵상하는 심방 길이 되었습니다.

이 시대의 베들레헴의 구유는 우크라이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한국을 비롯하여 전 세계 모든 기독 신앙인들이 이번 성탄을 맞이하여 ‘샬롬(평강) 우크라이나!’를 위하여 기도하고 그곳의 고난에 적극 동참케 된 것을 감사 드립니다. 전쟁과 흑암의 땅 우크라이나!  러시아! 그 땅의 국민들에게도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생명의 복음이 울려 퍼지게 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그 땅에도  평화가 오게 하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오늘날 각박한 세상살이와 전쟁 그리고 온갖 질병들로 영육간의 시달림을 받고 살아가는 이 시대 영혼들을 위하여 오늘날 예수님이 말구유의 한 아기로 탄생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기쁜 소식을 찾고자 하다가 모두가 절망하고 있는 이때 우리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을 만나 큰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이 기쁜 구원의 소식을 이웃들과 나누는 삶을 사시며 이 복음으로 인한 영원한 기쁨과 평강이 이번 성탄과 나아가 2023년 내내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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