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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2-10-16 (일) 10:56
분 류 누가복음
첨부#1 2022년_누가복음_제31강-1.hwp (35KB) (Down: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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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31강]영생을 얻는 길
2022년 누가복음 제31강                                                    이 인구
영생을 얻는 길
말씀/누가복음18;9-30
요절/누가복음 18;29,30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은 3가지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가르쳐주십니다. 영생은 나중 부활 후 뿐 아니라 현재 우리가 기도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고 또 예수님을 따르므로 얻을 수 있는 진정한 생명입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영생을 얻는 길에 들어설 수 있길 기도합니다.

첫째,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예수님께서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는데 한 사람은 당시 하나님의 율법의 수호자요 해석자로 자처하는 바리새인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유대사회의 신발에 묻은 똥 같은 존재(켄 가이거)로 여겨지며 죄인 취급받던 세리였습니다. 당시 성전에서 공식적인 기도는 하루에 2번(오전9시와 오후3시)인데 물과 기름처럼 서로 섞일 수 없는 두 사람이 우연히 같은 시간대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게 됐습니다. 바리새인은 성소 가까이 서서 마치 코로나 환자처럼 세리를 멀리 경계하며 당당하고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하늘과 백성들을 번갈아 보면서) 모든 이들이 들을 수 있도록 크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일주일에 2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11,12) 반면 세리는 성소에서 멀리 서서 아마도 성전의 이방인의 뜰 끝부분에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애타고 간절한 목소리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13) 우렁차고 장황한 바리새인의 기도에 비해 세리의 기도는 작고 또 짧았습니다. 성전내 사람들은 그 둘의 기도를 비교하며 많은 이들이 나도 저 바리새인처럼 자신감 있고 당당하게 살고 싶다고 부러워했습니다. 반면 세리는 더럽고 한심한 죄인이라 경멸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예수님은 두 사람 중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은 기도는 바리새인이 아니라 바로 세리의 기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교만한 바리새인들이 싫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공인된 죄인 세리의 기도를 받아주신 것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간증했습니다. “하나님은 옳은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언제나 옳습니다!” 우리의 한계적인 이성과 경험 안에서 하나님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옳고 그름의 기준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14b) 하나님은 교만한 바리새인의 기도가 아닌 겸손한 세리의 기도를 받으셨습니다.    
보통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죄에 대한 고백과 감사와 하나님께 대한 간구로 이루어집니다. 언뜻 보면 바리새인의 기도는 감사로 충만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감사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아니라 자신에 대한 자랑이고 다른 사람에 대한 멸시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에서 ‘나는’ 이란 말이 우리말 성경엔 2번 나오는데 본래 원문에는 5번이나 나옵니다. 또 11절에 바리새인이 서서 따로 기도하는 말씀에서 ‘따로’는 구별된다는 의미가 아닌 원문(프로스 헤아우톤)에서는 ‘자기 자신에게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영어성경prayed about himself) 그는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의와 자기만족에 사로잡혀 자기 자신에게 기도했습니다. 그는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만나고자 금식한 것이 아니라 일주일에 두 번 예루살렘에 장이 서는 그 날에 얼굴을 희게 하고 헝크러진 머리로 큰 거리에 나와 가능하면 많은 이들에게 금식하는 자신의 경건을 자랑하였습니다(마6;16-18) 또 그는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조용히 십일조를 드리지 않고 모든 이들에게 드러냄으로 마치 채무자처럼 요구하듯이 하나님께 축복을 요구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동족의 돈을 갈취하는 세리에 비해 바리새인은 하나님 율법을 지키며 산 것은 객관적으로 사실인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바리새인이 아닌 세리의 기도를 받아주신 것입니까? 물론 그가 세리와 다르게 토색하거나 불의하거나 간음하지 않고 금식하며 십일조를 드린 것은 칭찬받을 일입니다. 하지만 그런 신앙적 삶은 오직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 로마식민지밑에서의 어두운 시대 그가 세리와 똑같은 인생의 출발선에서 시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드물게 개천에서 용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조상이나 부모가 만들어준 환경 속에서 무엇보다도 함께 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율법을 배우고 율법의 인도함 받게 된 것입니다. 세리에 비해 자신이 받은 특권과 은혜를 깨닫는다면 함부로 교만에 빠져 다른 이들을 멸시하며 자만하는 죄를 범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많은 특권(축복)을 주신 자에게 많이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으면 마땅히 받은 특권으로 하나님영광을 위해 헌신하며 이웃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바리새인은 받은 특권으로 자기 의를 드러내며 자기영광을 위해 다른 이웃을 멸시했습니다. 그의 교만은 그의 눈을 가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생명을 받지 못하며 영적으로 죽은 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세리는 겸손으로 하나님 앞에서 죄악된 자신의 실존을 깊이 깨닫고 오직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만을 구했습니다. 겸손은 자기비하나 자신감이 결여된 마음이 아닙니다. “겸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는 것처럼 자신을 평가하는 것입니다.”(타이론 에드워즈) 사람들 앞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 말씀 앞에서 자신을 바라볼 때 죄악된 자신을 깨닫고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시 많은 세리들이 세리로 사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분노와 연민으로 하나님을 원망하며 더욱 완악하게 자신의 죄를 합리화하며 끝까지 돌이키지 않았지만 이 세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애통하였습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나님은 이 죄인을 긍휼히 여기셔서 그의 기도를 받아주시고 그의 죄를 사해주셨습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34;18) 다윗이 메시아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골리앗을 물리치고 수많은 적군들과 싸워 승리한 믿음과 용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돌이킬 수 없는 죄 가운데서 하나님의 긍휼을 붙들고 회개함으로 돌이켰기 때문입니다. 어떤 죄인이든지 하나님의 긍휼의 사랑을 붙들 때 용서받을 수 있고 그 때 그 내면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의 생명이 임하게 됩니다.

둘째, 어린 아기와 하나님의 나라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려왔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중요한 일을 하시는데 왜 애들을 데려와 방해하느냐 하며 꾸짖고 그들이 오는 것을 금지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17) 아이들은 부모가 주는 모든 것을 순수한 선물로 받아들입니다. 믿음은 선물을 받기 위해 벌린 어린아이의 빈손과 같습니다. 아이는 부모의 보살핌과 도움없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부모의 말을 그대로 믿고 신뢰합니다. 가끔 부모의 뜻을 받아들이지 못해 땡깡을 부리거나 자기화에 받혀 울기도 하지만 결국 부모만을 바라보고 부모와 함께 기뻐합니다. 사실 아이가 부모를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것은 부족한 아이가 살아남기 위한 생존본능입니다. 영적으로 어린아이는 전적으로 자기의 무능함을 인정하고 믿음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시고 생명으로 인도하십니다.

셋째, 부자관원과 영생
  어떤 관리가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 관리는 젊은 청년이고(마19;22) 아마도 회당장이나 산헤드린 공회원인 유대사회의 지도자층에 속한 자였습니다. 더구나 그는 큰 부자였고 당시 유대에서 젊은 나이에 관원이요 큰 부자가 된 것은 그 집안도 대단한 부와 권력의 집안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젊은 나이에 모든 것을 가진 이가 영적소원까지 있어 예수님께 나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질문한 것입니다. 요즘기준으로 ‘사기캐릭터’를 가진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언제부터인가 항상 채워지지 않는 내면 한구석 뻥 뚫린 듯한 빈공간(허무감)을 느꼈습니다. 어릴 때부터 바쁘게 살면서 열심히 최선을 대하며 많은 것을 습득하고 채워넣었어도 내면의 빈 공간으로 평안과 기쁨과 만족이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아무리 빨리, 많이 소유하고 또 높이 올라가도 결국 죽음 앞에서 빈털터리가 되고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된다는 진실을 깨닫고 영원한 생명을 갈구하게 됐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구원과 영생의 길은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많은 율법을 지켰지만 영생에 대한 확신이 생기지 않았고 결국 예수님께 나아오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율법을 지키는 행위를 통해 영생을 얻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먼저 가장 기본적인 십계명을 제대로 지키는지 체크하셨습니다.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20) 예수님은 십계명중 인간관계에 관한 다섯 계명(5-9계명)을 언급하셨습니다. 십계명중 처음 4계명은 하나님사랑에 관한 것이고 뒤의 6계명은 이웃사랑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사랑과 이웃 사랑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부자청년은 이것은 자신이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다고 확신했습니다. 보통 유대인들은 6살부터 율법을 암송하게 하고 12살부터 지키면서 율법의 멍에를 메도록 하는데 이 청년은 어릴 때부터 다 지켰다고 자신하는 것을 보면 참 대단한 사람이구나 놀라게 됩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간음하지 말고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 이해되지만 어떻게 어릴 때부터 단 한 번도 남의 물건에 손을 대지 않고, 거짓말도 하지 않고, 부모속도 썩히지 않았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갑자기 섬뜻한 의구심이 생깁니다. 사실 율법을 완벽히 지킴으로 영생을 얻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향해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한 것이고 친구에게 분노하고 욕하는 것도 살인하는 마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그 누구도 율법의 완수자가 될 수 없고 다만 율법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긍휼을 구할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깨달을 뿐입니다.(롬3;20)
  예수님은 그의 대답을 통해 그에게 아직도 부족한 한 가지를 발견하시고 그 해결책을 제시하셨습니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22) 그가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준다고 해도 직접적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 예수님께서 모든 이들에게 영생을 얻을 조건으로 자신의 소유를 다 팔도록 하지도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아직도 부족한 한 가지, 그가 영생을 얻는데 치명적인 약점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물질에 대한 탐심으로 십계명의 10번째 계명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찌니라” 이웃사랑에 대한 율법을 지키는 것은 단지 이웃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함으로 자기의 소유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는 부자로 살면서 주변의 많은 가난한 이웃의 고통을 보면서도 자신은 이웃을 사랑하는 율법을 철저히 지켰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탐심은 물질에 대한 우상숭배로 그가 영생을 얻기 위해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17;3) 또 영생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좇을 때 얻을 수 있습니다. 부자관원이 예수님을 온전히 좇기 위해서는 물질에 대한 탐심을 극복할 때 가능합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난 후 기꺼이 자신의 소유를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하지만 부자관원은 예수님의 말씀에 심히 근심하였습니다. 큰 부자였던 그에게 자신의 소유는 우상이었습니다. 어쩌면 영생을 간절히 바라는 이유도 자신의 소유를 영원히 잃지 않고 누리기 위해서일지 모릅니다. 부자관원은 율법을 지키며 자기 의를 쌓고 소유를 채우고 지위와 명예를 성취하는 것처럼 가장 값진 하늘 보화인 영생 또한 세상보화처럼 성취하여 소유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진정 가치 있는 것을 얻기 위해 자신의 것을 버리도록 하셨습니다. 구원과 영생은 우리의 노력과 의지로 쌓아서 얻을 수 있는 소유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 것을 버리고 비움으로 얻을 수 있는 존재의 변화입니다.
  결국 젊은 부자는 영생 앞에서 갈등하다 소유를 포기할 수 없어 떠났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허무한 뒷모습을 보며 말씀하셨습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25) 낙타는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제일 큰 짐승이고 바늘귀는 제일 작은 통로입니다. 나이 들어 눈이 침침한 분들은 그 바늘귀로 낙타는커녕 가는 실조차 넣기 힘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수 있나이까?”(26) 유대인들은 부자가 되는 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생각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큰 부자가 된 것처럼 믿음으로 사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라 여기며 믿음으로 살면서 부자가 되는 것을 꿈꾸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물질이 하나님을 섬기는데 가장 방해하는 우상이 될 수 있음을 아셨습니다. 전 역사를 걸쳐 사단의 가장 큰 무기는 물질과 쾌락으로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사랑할 때 물질의 노예가 됨으로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하지만 절망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27) 구원과 영생은 사람의 의지와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부자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지만 하나님은 역사상 수많은 부자들의 마음을 변화시켜 물질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가난한자들에게 나눠주고 하나님역사를 섬기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성프란체스코는 부유한 상인의 아들이었습니다. 젊은 시절 그는 물질로 흥청망청 즐기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인간적혈기로 전쟁에 참여했다 포로가 되어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한번 뿐인 인생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게 됐습니다. 그 후 길에서 나병환자를 만났는데 평소 그들에게 심한 불쾌감과 혐오감을 가지고 있던 그가 성령의 감동에 의해 나병환자의 손에 자신의 입술을 댔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체험을 했습니다. “주님의 인도로 나는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그들에게서 느꼈던 쓴맛이 단맛으로 변했습니다. 전에는 참기도 어려웠던 일이 내 영혼과 육신의 단맛으로 변했습니다.” 예수님의 인도로 병자에게 선을 베풀었을 때, 물질로 얻는 말초적 기쁨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혼의 기쁨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 깨달음 후 그는 가난한 사람들과 나병환자들과 함께 하며 돕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이런 그가 못마땅해 상속권을 박탈하겠다고 위협했지만 그는 아버지가 준 옷까지 벗어버리고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을 의지하며 살겠다고 선포했습니다. 그 후 일생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가난한 삶을 살며 하나님나라 복음을 선포하고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을 돌보며 물질적인 세상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선순위입니다. 물질과 하나님, 누구를 자신의 주인으로 삼느냐 입니다.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말씀에 베드로는 즉시 간증했습니다.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부자관원은 실패했지만 베드로는 부자관원만큼의 소유는 아니지만 자신의 모든 소유를 버리고 예수님을 좇은 것을 간증했습니다. 처음 동생 안드레를 따라 예수님을 만났을 때 “장차 베드로(반석)라 하리라” 소망을 받은 후에도(요1;42) 예수님을 좇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어가는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신 후에도 결단하지 못했습니다.(눅4;39) 예수님께 감사했지만 아직 자신의 모든 인생을 걸만큼 확신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밤새 그물을 내렸지만 빈 배로 돌아와 베테랑어부의 자존심이 무너진 새벽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말씀에 순종했을 때 배 한가득 물고기를 잡은 은혜를 체험한 후 그는 자신의 인생의 주인 되신 예수님을 주로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버리고 좇을 수 있었습니다. 그가 모든 소유를 버리고 예수님을 좇을 수 있는 것은 부자관원보다 훌륭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인도하시며 책임져주시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간증에 말씀하셨습니다.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29.30)
부자관원에게 재물이 자신의 가장 큰 보물인 것처럼 많은 이들에게 집과 가족은 자신의 소중한 보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자신의 세상보물을 버릴 때 더 귀한 하늘보화를 얻을 수 있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가 하는 영적 가치관(무엇이 중헌디?)입니다.
  최근 인공지능, 빅데이터등의 발전가운데 4차 산업혁명시대가 오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여러 가지 일들을 같이 하는 멀티태스킹(multitasking)이 유행이 되었습니다. 매일 새로운 것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얼리 어답터’는 되지 못해도 세상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수많은 것을 경험하고 획득하기 위해 멀티태스킹을 추구합니다. 아이들은 음악을 듣고 문자를 보내면서 또한 공부를 합니다. 어른들은 화상업무를 보며 인터넷검색을 하면서 또 식사를 합니다. 바쁜 경쟁사회에서 멀티태스킹을 통해 어떤 것도 포기하지 않고 다 잘하고자 하지만 실상 어떤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더 큰 문제는 여러가지를 같이 하면서 무엇이 더 중요하고 무엇이 더 우선순위인지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인생에서도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하면 다른 기회를 놓칠 것 같아 여러 가지 일에 분산합니다. 회사에 다니면서 더 나은 곳 이직을 위해 공부하고 또 노후를 위해 주식과 코인에 투자합니다. 동시에 시간될 때 말씀공부를 하고 예배도 보며 사후 영생도 준비합니다.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 격언처럼 성공하는 인생을 위해 여러 곳에 분산투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인도하시는 구원과 영생의 길은 멀티태스킹이나 분산투자가 아니라 '선택과 집중'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중요한 것을 얻기 위해 덜 중요한 것을 버리는 선택을 원하십니다. 세상은 넓고 인생은 짧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본질적인 것과 지엽적인 것으로 구별해야 하고 급하고 중요한 일부터 선택한 후 집중해서 해결해 나가야 합니다. 하지만 선택과 집중은 전형적인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의 전략입니다. 얼마 전 많은 젊은이들이 헛된 믿음으로 코인을 선택하고 전 재산을 집중투자해서 인생의 돌이킬 수 없는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생 후회하지 않는 선택을 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혜란 무시해도 될 일이 무엇인지 판별하는 기술”이라고 했습니다.(제임스) 하지만 최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진정한 지혜는 세상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신자는 선한 뜻(섭리)가운데 나를 선택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길을 선택해야 하고 그 길에 인생을 집중해야 합니다. 선택과 집중은 필연적으로 선택하지 않는 것을 버리는 아픔이 따릅니다.
  신자가 하나님나라를 위해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리는 것은 큰 아픔과 희생이 따릅니다. 얼마 전까지 많은 사람들이 영혼까지 끌어 모아 집을 사려고 했습니다. 많은 남자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아내로 얻기 위해 인생을 걸었습니다. (로미오는 줄리엣을 아내로 얻기 위해 목숨을 바쳤고 젊은 베르테르는 사랑하는 사람을 아내로 얻지 못해 목숨을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부모, 형제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을 가장 큰 도덕으로 생각하고 자녀를 사랑하고 헌신하는 것은 아름다운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를 위해 이렇게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것을 버리고 희생하라고 하십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생은 자신의 모든 보물을 버리고 팔고 투자할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 영생을 얻을 때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성가운데 우리의 세상보물도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가치와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집에 대한 욕심을 버릴 때 하늘나라 천성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육신적인 사랑을 버릴 때 진정한 사랑,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다. 또 형제 부모와 자녀에 대한 인간적 사랑(집착)을 버릴 때 하나님의 안에서 진정한 행복과 소망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나라를 위하여 선택할 때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다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으로 세상 모든 것을 주관하시지만 한 사람의 자유의지의 선택을 임의로 주관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죄인도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 있고 영생의 축복을 주실 수 있는 분이지만 그 길에 들어서는 선택은 택함 받은 그 사람의 몫입니다. 신앙계의 선택과 집중의 고수 사도바울은 간증했습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3;8,9a) 사도바울은 뛰어난 랍비 가말리엘의 제자요 바리새인이요 또 로마 시민권자였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자랑을 배설물로 버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선택했을 때 많은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은 어리석다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역사상 수많은 신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의 길을 따르며 신약 13권을 저술하며 많은 교회를 세우고 복음의 기초를 놓은 바울의 위대한 선택과 집중을 따르고 배웁니다. 우리가 하나님영광을 위해 예수님을 따르는 길을 선택하고 인생을 집중함으로 현세에 여러 배를 받을 뿐 아니라 영생의 기쁨을 체험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저는 학창시절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구원받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인생을 살게 됐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새 인생을 살면서도 일생 예수님을 따르는 좁은 길을 가는 목자의 삶에 믿음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릴 수 없어 오랫동안 교회에서도 세상에서도 속하지 못하고 집중하지 못하는 이방인으로 살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헛된 세상이 아닌 예수님을 따르는 길을 선택하도록 도우셨습니다. 학창시절 내내 방황했지만 학창시절 말 국가고시의 홍해 앞에서 내 인생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붙들고 졸업 후 다시 예수님을 따르는 목자의 인생을 결단하게 도와주셨습니다. 또 졸업 후 세상의 유혹 속에서 흔들렸지만 결혼 앞에서 믿음의 동역자를 만남으로 믿음의 인생을 선택하게 도와주셨습니다. 또 결혼 후 세상안일과 영광에 흔들릴 때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은 부족한 저를 진리의 말씀대로 살도록 이날까지 이끄셨습니다. 지나고 보면 제 인생에서 많은 중요하고 위험한 선택의 갈림길에서 하나님께서는 함께 하시며 제가 죄악되고 헛된 길을 선택하지 않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앞으로도 제가 세상의 헛된 물질과 풀의 꽃과 같은 세상명예와 교만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 말씀의 인도함 받으며 일생 예수님을 따르는 좁지만 영생의 길로 나아갈 수 있길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3가지 이야기를 통해 영생을 얻는 길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가 세리처럼 겸손한 기도를 드림으로 죄 사함의 은혜를 덧입고, 어린 아이처럼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함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또 세상보화를 버리고 예수님을 온전히 따름으로 영생의 기쁨과 열매를 얻을 수 있길 기도합니다.

Epilogue
프란체스코가 그의 생의 마지막이 가까워옴을 깨닫고 의사에게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물었습니다. 의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면 병은 곧 물러날 것입니다.” 안심시키고자 했지만 프란체스코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자신의 소원이라며 진실을 원했습니다. 그는 의사에게 불치병으로 자신의 생이 몇 달 남지 않음을 듣고는 하늘을 향해 두 손을 치켜들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나의 육체의 죽음으로 인해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이 땅에서 한 번 삶을 누린 자라면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는데 죄 중에 죽는 자는 재앙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거룩한 뜻을 이루며 세상을 떠나는 이는 진정 행복한 자입니다!” 몇 달 후 그는 병으로 거의 실명상태에서도 시편 말씀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생에 대한 기쁨과 확신가운데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때 그의 나의 45세, 그가 회개한지 20년이 되는 해(1226년)였습니다. 어떤 이에겐 아쉬운 인생일수도 있지만 길지 않은 그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기쁨과 확신가운데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간 것은 진정 축복된 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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