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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2-11-05 (토) 19:20
분 류 로마서
첨부#1 2022년_제자수양회_주제1강_로마서_8장17-_37절.hwp (30KB) (Down: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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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가을 제자 수양회 제1강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2022년 가을 제자 수양회 1강                                                  박 기 호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말씀/로마서 8:17-39
요절/로마서 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느끼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고난이나 죄 가운데 있을 때,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왜 이런 고난을 주시는가? 하나님이 나 같은 고질적인 죄인도 아직도 사랑하실까? 의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고난과 죄 문제에서는 최고 전문가입니다. 사도바울만큼 예수님을 핍박하고, 또 이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오늘 사도바울의 증언을 통하여, 나는 왜 고난을 받고, 성령이 나를 어떻게 도우시며,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정말로 끊어질 수 없는 것인지? 확증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왜 고난을 받는가?: 17-18절)
 18절 말씀을 다 같이 읽어 보시겠습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사도바울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고 선포합니다. 우리 인생은 굳이 나열하지 않아도 끝없는 고난 속에 있습니다. 신앙 안에서 고난 없이 항상 감사 찬양하며 평화롭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인생에서 고난 없이 예쁜 신앙생활만 하며 사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인생의 고난만 감당하기도 벅찬데, 캠퍼스 양들을 섬기느라 추가적인 고난을 감당하시는 분들도 우리 안에 많지 않습니까? 왜 우리가 이렇게 고난을 겪어야 할까요? 우리가 만약 고난 없는 인생을 산다면 그것이 축복일까요? 또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일까요? 이 질문에 대하여 사도바울은 답변합니다. 8장 17절,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즉, 우리가 받는 고난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기 위하여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받는 고난은 아무나 받고 싶다고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무에게나 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받는 고난은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 선정된 사람만이 받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내가 어떤 고난을 겪고 있다면, “내가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 선정되었구나”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인생은 고난만 생각한다면 너무 지치고 괴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받는 고난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의 신분으로 받을 장래 영광의 증표라면 어떻습니까? 고난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의 귀한 신분을 포기하시겠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될 영광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이 고난을 능히 견디며 승리하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피조물의 탄식: 19-22절)
 19절을 보면 이 고난은 성도만 받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 모든 피조물도 고난을 받고,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고대한다고 되어있습니다. “고대한다”라는 것은 “간절히 기다린다”라는 뜻입니다. 세상의 피조물, 모든 자연 만물도 겉으로는 화려하고 아름다워 보이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썩어짐의 종노릇하는데서 오는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제가 의사 생활을 시작한 지가 18년 정도가 되었는데, 한 가지 느낀 점은 사람의 육신은 너무나 연약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은 더 연약합니다. 너무 쉽게 부서지고, 무너지곤 합니다. 그러나 연약한 몸과 마음으로 쉽게 절망하고 굴복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뜻은 아닙니다. 20절을 보면 이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굴복하게 하는 이는 누구인가?’ 하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듭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에 인간을 고난과 사망에 굴복하게 하셨습니다. 즉 피조물이 이렇게 된 것은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피조물의 신음과 탄식은 인간의 죄와 연관된 것입니다. 21절을 보면 피조물은 이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기를 원합니다.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희망합니다. 이처럼 인간의 죄로 에덴동산의 평안과 충만함이 깨진 후 피조물도 함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피조물들의 고통과 신음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모든 피조물이 이 고통에서 해방되어 참 자유를 얻기를 원하십니다.

(성도의 기다림과 소망: 23-25절)
 그렇다면 이미 구원받은 성도들은 어떻습니까? 23절을 보십시오.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성도들도 고난 가운데 똑같이 탄식하며 죄로 물든 육신의 속량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왜 기다리고 있습니까? 그것은 연약한 육신과 죄의 세력으로 여전히 절망하고 고통받고 신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예수님의 피로 구원을 이미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몸의 속량과 참 자유가 오로지 예수님의 다시 오심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이 비밀을 아는 성도들은 고난 가운데 더 간절히 예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이 예수님에 대한 소망을 바라며 신자들은 인내로 기다려야 합니다. 이는 우리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 중의 너무나 혈기와 의분이 넘치는 어떤 목자님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목자님이 양들에게는 마치 수줍은 사슴처럼 상냥히 대하는 모습을 우연히 본 적이 있습니다. 양들이 공격하고 버릇없는 말을 해도 시종일관 참고 인내하며 껄껄 웃으며 받아주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런 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성령의 열매가 있기에 가능합니다. 인내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사람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도들은 완전한 몸의 구속이 이루어지기까지 인내하며,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며 소망하여야 합니다.
 여기서 성도가 기다리는 소망은 세상의 소망과 또 다른 점이 있습니다. 24절을 보면,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바라볼 소망이 눈에 보이는 세상 소망과는 비교 불가라는 것입니다. 상상하기 어렵게 훨씬 더 좋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소망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세상 소망은 눈에 보입니다. 그래서 그 소망에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도 알 수 있고, 좀 더 노력해서 정복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을 노력해서 쟁취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행위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것처럼, 보이지 않는 소망을 바라보아야만, 세상의 유혹과 고난을 이길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소망의 실체는 예수님으로 인한 하나님 나라 영광과 몸의 구속입니다. 이를 얻기 위해서 성도는 인내로 예수님이 다시 오실 날을 기다려야 합니다. 인내는 하나님이 주시는 굉장히 중요한 성령의 열매입니다. 요한계시록 14장 12절,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우리는 여러 가지 시험과 고난의 때에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지키고 완전한 구속을 소망하며 인내하며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성령의 탄식: 26-27절)
 또, 성령님은 신자의 연약함을 아시고 도우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십니다. 26-27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우리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알고,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고난 가운데 황망하여 마음을 가누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 안의 성령은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심으로 돕고 계십니다.

(협력하여 선을 이루심: 28-30절)
 이러한 성령의 중보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의 인생은 어떤 열매를 맺게 됩니까? 28절을 다 같이 읽어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는 과거 세상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던 데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바뀌게 됩니다. 여러분 주변에 누가 멋지고, 똑똑하고,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재산도 많고, 또 그 자녀들도 훌륭하다면, 여러분 그런 사람이 부럽습니까? 아닙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자가 받는 축복에는 비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인생의 중간 과정이 어떻든지 간에 그 결과는 무조건 happy ending으로 끝나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섭리. 즉 앞으로 그렇게 되도록 예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받은 고난은 그 과정은 실패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은 선으로 역사하사 선한 인생, 위대한 인생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 인생도 그 과정, 과정은 실패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합하여 놀라운 작품을 만드시고, 상상할 수 없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 주십니다. 그게 끝이 아닙니다. 30절에 보시면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의롭다고 여김을 받습니다. 더불어 영광스럽게 되기까지 합니다.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부르심은 받은 자는 그 자체로 큰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더욱이, 젊은 시절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다면 너무나 많은 복을 받은 상태로 인생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나님께 일방적인 축복을 받는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습니까? 내가 의로운 행동을 해서입니까?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그렇게 축복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29절을 보면 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님은 심지어 미리 다 정하셨습니다. 그 역사가 바로 이 자리에 자격 없이 서 있는 저이고, 여기 모인 여러분들 모두입니다. 따라서 부르심은 받은 사람은 아무 걱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기억하고, 그 축복에 감사하며, 또 그 감사에 기초하여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으로 족합니다. 이 사랑을 넘칠 때 우리는 캠퍼스 영혼들을 능히 섬기고, 캠퍼스에서 아름답고 승리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저는 과거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는 것임을 체험했습니다. 저는 넉넉하지 못한 집안 사정으로 학창시절 성적장학금과 과외로 등록금을 해결했습니다. 그 당시 7등까지 성적장학금을 주었는데 저는 매 학기 성적장학금을 받았고, 모자란 등록금은 열심히 과외를 해서 메꾸었습니다. 제가 생활전선으로 바쁘다 보니 말씀 공부는 규칙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예과가 끝나갈 무렵에 저의 1:1 목자님께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과외도 그만두라고 방향을 주셨습니다. 과외를 그만두고 말씀 공부도 꾸준히 하고, 장막 생활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순종한 8등을 해서 성적장학금조차도 못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러시는지 이유를 몰랐고 다시 과외를 시작해야하나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한 달쯤 지나서 대학 장학처에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외부 장학금이 들어왔는데, 이미 7등까지 장학금이 모두 고지되었기 때문에, 8등인 저에게 졸업할 때까지 4년간 등록금 전액을 지원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가만히 있어도 졸업할 때까지 등록금이 올라도 학비가 해결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은혜에 기초하여 학창 시절 등록금 걱정 없이 충분한 시간 여유를 가지고 3명의 의대 후배들을 말씀으로 섬길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세상에서 먹고 사는 문제에 구애받지 않고, 오로지 성경 말씀으로 후배들을 돕는 일에만 힘쓰도록 놀라운 방법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저를 일방적으로 부르시고, 구원하여 주시고, 놀라운 성령의 도우심으로 캠퍼스 역사에 사용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넉넉히 이기느니라: 31-39절)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미리 아시고, 부르시고, 믿음의 자녀로 의롭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완전한 섭리와 구원의 사랑 앞에 우리는 무슨 말을 더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이미 우리 죄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입니다. 가장 귀한 것을 이미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이, 어찌 다른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택하시고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받은 우리를 누가 고발하고, 정죄하겠습니까?
 35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참 은혜가 됩니다. 그런데 그다음 구절을 보면 움찔하게 됩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여러 고난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곤고입니까? 박해입니까? 기근입니까? 적신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또 있습니다. 36절을 보시면,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 같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종일 죽을 정도로 괴롭고, 곧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이 쌓여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고난을 겪을 때 하나님의 사랑을 믿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사도바울은 그런 일을 만나도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고 확신합니다. 37절을 다 같이 읽어 보시겠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 힘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만 의심하지 않고 굳게 믿으면 넉넉히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죄 문제로 하나님의 사랑을 종종 의심합니다. 자신을 돌아볼 때, 우리는 종종 여전히 죄인인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전에는 순진한 죄인이었다면, 지금은 눈치가 좀 생긴 어른 죄인이 된 것같이 느껴집니다. 하나님이 진짜 나를 지금도 이전처럼 사랑하실까? 이 문제에 대하여 사도바울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언제 시작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시작되었습니다.
 세상에서 죄인은 미움받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죄인조차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훌륭해서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썩어 문드러질 죄인이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일방적으로 사랑하시고 독생자를 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죄를 짓고 예배드리러 왔을 때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이 죄인아 또 왔냐? 또 죄지었냐? 이렇게 맞으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돌아온 탕자처럼 아버지로서 반갑게 맞아 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신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속을 썩이더라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독생자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대신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영으로 우리 안에 오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에 나아올 때 우리는 예수님의 영과 함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 나오는 자기의 피조물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십니다.
 이런 사랑을 받는데도 우리의 마음에 기쁨이 없고, 감사가 없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그것은 “내가 받았던 그 사랑이 혹시 나의 허물과 고난으로 앞으로 끊어지지 않을까?’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사랑을 아무리 받아도 받은 사랑을 의심한다면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이 끊을 수 없는 사랑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이 사랑이 말로만 하는 공허한 사랑이 아니고, 진짜 사랑이라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증표를 주셨습니다. 그 증표가 우리 죄를 위하여 대신 십자가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을 우리를 위하여 자기 아들을 십자가 매다심으로 사랑의 증표로 삼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긴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히 느껴지지 않거나, 받은 사랑의 기억이 희미해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큼은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우리에게 주신 증표, 즉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고난 가운데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증표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 증표가 우리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넉넉히 이길 수가 있습니다. 사랑의 증표로 주신 이 예수님의 피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예수님이 우리 안에 있는 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끊어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와 하나님을 연결하는 것은 예수님의 피로 만들어진 끊어지지 않는 가장 강력한 끈입니다. 이 피의 끈을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도 없고, 저 세상에도 없습니다. 과거에도 없고, 미래에도 없습니다. 심지어 죽음도 이 끈을 끊을 수가 없습니다. 하늘의 천사조차도 예수님의 피로 만들어진 이 하나님의 사랑의 끈을 끊을 수가 없습니다. 38~39절에 사도바울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저는 최근 코로나 환자 진료와 아버지 건강으로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3년 전에 아버지가 전립선암 4기, 중증 파킨슨병, 치매를 연달아 진단받으셨습니다. 저는 좁은 24평 집에 아버지를 모셨습니다. 아버지는 밤마다 저를 깨우시고, 대소변도 못 가리시기도 했습니다. 또 중증 코로나 환자를 보면서, 픽픽 죽어 나가는 사람의 모습을 계속 보다 보니 마음이 어두워졌습니다. 제 마음에 죽음의 세력이 들어왔습니다. 최근 1년 전부터는 잠을 거의 못 잤습니다. 밤에도 졸리지 않고, 낮에도 졸리지 않았습니다. 3일간 한잠도 못 자서 경련을 일으킨 적도 있었습니다. 집에 항경련제를 두고 잤습니다. 최대 82kg였던 체중이 한때 67kg까지 빠지기도 했습니다. 고혈압, 이명, 만성 전립선염, 만성 비염, 수면무호흡증, 불면증, 인지기능저하, 불안장애까지 여러 가지로 괴로웠습니다. 이런 것도 하나님의 사랑일까? 의심이 들었습니다. 이런 고난 가운데서도 한 가지 좋은 점이 있었습니다. 저는 한밤중에도 혼자 깨어서 할 일이 없다 보니 일용할 양식을 먹게 되었습니다. 잠을 조금이라도 잘 자는 날은 잠을 자서 감사하고, 못 자는 날은 일용할 양식을 여유 있게 먹을 수 있어서 감사하기로 하였습니다. 민수기 일용할 양식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저의 인생이 광야에서 고난을 겪는 이스라엘 백성과 같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이 광야를 건너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계획이요, 저를 사랑하시기 때문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만 바라보던 자를 하나님을 바라보고 내 죄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하셨습니다. 광야를 건너는 이스라엘 백성의 목표가 광야에 있지 않은 것처럼, 저의 인생의 최종 목적지도 이 땅에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광야에서 제가 할 일은 그 안에서 열심히 일해서 멋진 천막을 짓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 광야에서 무슨 큰 영광을 누리겠습니까? 광야는 그냥 광야일 뿐입니다. 광야는 소망 둘 땅이 아닙니다. 광야는 그저 하나님이 주시는 일용할 양식을 잘 먹고 인내로 잘 버텨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길목일 뿐입니다. 제가 저를 광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이 광야를 믿음과 인내로 건너서 약속의 땅에 이르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끈으로 세상을 넉넉히 이기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결론)
 우리의 고난은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기 위한 값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 고난이 힘들지만,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내와 소망으로 예수님을 기다리며 고난 가운데 넉넉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나를 위해 친히 간구하실 것입니다. 성령은 기이한 방법으로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도우심은 부르심을 받은 자,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모두에게 똑같이 일어납니다. 또, 우리 안에는 하나님이 사랑의 증표로 주신 것이 있습니다. 내 죄를 위하여 십자가 피 흘리신 예수님, 이 예수님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증표입니다. 따라서, 이 증표가 내 안에 있는 한, 어떠한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더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인생의 많은 고난 가운데,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증표,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기를 기도합니다. 이 예수님과 함께 넉넉히 이길 것을 믿고, 승리의 확신 가운데 주님을 섬기는 종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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