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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8-04-22 (일) 12:33
분 류 마가복음
첨부#1 2018년_마가복음5강-1(최동진).hwp (29KB) (Down: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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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마가복음 제5강] 어느 것이 옳으냐?

 2018년 마가복음 제 5 강                                                        최동진

어느 것이 옳으냐?

말씀/ 마가복음 2:18-3:6
요절/ 마가복음 3:4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오늘 말씀에서는 금식과 인식일 문제로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에 일어난 충돌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고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명하시자 귀신이 쫓겨나고,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을 선포하심으로 중풍병자가 일어나 걷고, 악명 높은 세리 레위가 변화되어 많은 사람들을 초청하여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는 전에 보지 못한 놀라운 새 역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사사건건이 “어찌하여”를 외치며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에 대해 트집을 잡았습니다. 예수님은 낡은 전통과 관습에 얽매여 있는 그들의 그릇된 가치관에 도전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신앙생활의 자세에 대해 돌아보고 새 가죽부대가 되어 새 포도주 되신 예수님으로 인한 기쁨이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적극적으로 선을 행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I.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2:18-22)
  지난 시간 말씀에서 예수님은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불러주셨습니다. 레위는 즉시 일어나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세리 레위는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여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레위의 변화된 모습에 많은 세리 족속들이 은혜를 받고 변화되어 연일 초청역사가 이어졌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초청을 받아 마음껏 먹고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와 금식문제로 비난하며 따졌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당시의 전통에 따라서 금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1년에 한 번 대 속죄일에 회개의 표시로 금식하도록 규정하였습니다.(레23:27)  바벨론 포로 이후에는 국가적 재난을 당한 것을 기억하기 위해 1년에 4번 금식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 당시에는 한층 더 강화되어 모세가 율법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 올라간 날과 내려온 날을 기념하여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이틀씩 금식하였습니다.(눅18:12) 당시 금식은 경건의 표시였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경건한 자임을 과시하기 위해 금식을 할 때 슬픈 기색을 띠고 얼굴도 씻지 않고 흉하게 하였습니다.(마6:16) 그들이 볼 때 예수님과 제자들은 경건하지 못한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다보면 경건의 척도로 여겨지는 것들이 생기게 됩니다. 새벽기도를 절대적으로 감당하고 주 7회 일용할 양식을 먹고 주 1회 소감을 감당하고 십일조를 제 때 드리고 캠퍼스 피싱과 1대1을 열심히 감당하고 각종 모임에 참석하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여기기 쉽습니다. 그런데 이런 율법과 규칙에 얽매일 때 자칫하면 신앙생활의 진정한 의미와 기쁨을 잃어버리고 형식적이고 딱딱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이 어떠합니까? 1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예수님은 자신을 신랑, 그를 따르는 자들을 혼인집 손님들로 비유하십니다. 예수님은 첫 번째 표적으로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심으로 예수님의 사역의 성격을 나타내셨습니다. 신앙생활은 신랑되신 예수님과 함께 즐거워하는 혼인잔치와 같은 것입니다. 혼인집에 가서 금식한다며 식사도 안하고 슬픈 얼굴을 하고 심각하게 앉아 있는다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이는 신랑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음식도 맛있게 먹고 축가도 불러주고 춤도 추면서 함께 즐거워해야 합니다. 이처럼 신앙생활은 예수님으로 인해 기쁨이 넘치는 생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구원 잔치에 초청받은 자들로서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세상에서 맛볼 수 없는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금식 자체를 부정하신 것은 아닙니다. 금식을 해야 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이는 역사적으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를 의미합니다. 영적인 의미로는 우리의 허물과 죄로 인해, 또는 분주한 세상 일로 인해 예수님과의 교제가 끊어졌을 때를 의미합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데도 기쁨이 없고 피곤하게 느껴진다면 예수님과의 관계성에 문제가 없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만일 나의 중심에 예수님 외에 물질, 세상 욕심, 이성의 사랑에 대한 목마름이나 다른 것이 들어와 있다면 애통하며 회개하고 금식해야 합니다. 육신의 욕구를 자제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고, 진실된 소감을 통해 예수님을 마음의 중심에 모시기 위한 영적 투쟁을 해야 합니다. 참된 기쁨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고 예수님과 교제할 때 생겨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 비유를 통해서 그들의 문제를 깨우쳐주십니다. 21,22절을 보십시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생베 조각은 신축성이 좋아서 낡은 옷에 붙이면 낡은 옷을 잡아 당겨 해어지게 만듭니다. 또한 새 포도주는 왕성한 발효력이 있어서 낡은 가죽부대에 넣으면 부대를 터뜨려 쏟아지게 만듭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합니다. 여기서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는 예수님과 생명력이 왕성한 복음을 가리키고, 낡은 옷, 낡은 가죽 부대는 장로들의 유전과 같은 유대교의 전통을 가리킵니다. 바리새인들은 낡은 가죽부대가 되어 예수님으로 시작된 복음을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과 복음은 새 옷, 새 포도주와 같아서 늘 새롭고 신선합니다. 복음에는 생명력이 있고 역동적입니다. 예수님은 일생 물고기에 울고 웃으며 살다가 물거품처럼 사라질 인생을 살던 자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시고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부정하게 여기는 나병환자에게 다가가서 손을 대시고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며 치료해주셨습니다. 지붕을 뜯고 나아온 중풍병자를 영접하시고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며 죄 사함을 선포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배척하는 세리 레위를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며 제자로 삼아주셨을 뿐만 아니라 세리와 죄인들과 거리낌 없이 식사교제를 나누셨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더러운 귀신들도 소리를 지르며 쫓겨났습니다. 복음은 어떤 죄인도 변하여 새 사람 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죄 사함의 기쁨을 주고 활기차고 생명력 넘치며 새 역사를 창조하는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그런데 복음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마음이 문제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항상 새 부대가 되어야 합니다. 새 부대가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새 부대가 될 수 있습니까?
첫째로, 끊임없이 배우고자 하는 겸손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다 안다는 교만한 생각으로 더 이상 배우려 하지 않을 때 낡은 가죽부대와 같이 쓸모없게 되어버립니다. 사도바울은 인간적으로나 영적으로 완숙한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자신은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끊임없이 좇아간다고 하였습니다.(빌 3:12-14) 우리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성장해야 합니다(엡4:13)
둘째로, 죄를 회개함으로 복음 중심의 삶으로 끊임없이 돌이켜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본성적으로 안일을 사랑합니다. 고생하기보다 현재 상태에 만족하고 안주하고 싶습니다. 처음 신앙생활을 할 때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양들을 사랑하고 말씀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으로 출발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의 연륜이 쌓일수록 점점 진리에 대한 열정이 사라지고 매너리즘에 빠져 형식적이 되어 마음이 굳어지고 습관적으로 살아갑니다.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그냥 지내다보면 누구나 낡은 가죽부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굳게 붙들고 영적 투쟁을 감당할 때 겉 사람은 낡아지지만 속사람은 변화되고 새로워지게 됩니다.(고후4:16) 한 편의 소감을 쓰더라도 죄에 대한 진실된 고백과 회개가 있을 때 내면이 낡은 가죽부대와 같이 되어버리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날마다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삶을 통해 일생 청년의 스피릿을 지키며 왕성한 개척역사를 섬길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신의 본성을 거슬러 죄와 싸우는 생활을 통해 새 힘을 덧입고 새 부대가 될 수 있습니다.

II.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2:23-3:6)
  23절을 보십시오.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새 그의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예수님과 제자들은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과 함께 하며 훈련 받느라 식사할 겨를도 없었던 제자들은 배가 고파 거의 무의식적으로 밀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서 먹었습니다. 그러자 이를 몰래 지켜보고 있던 바리새인들이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나타나 날카롭게 비난했습니다.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당시 안식일은 할례와 함께 유대교를 지탱하는 두 기둥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잘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잘 지키기 위해 안식일에 대한 규례를 39가지나 만들었고, 각 규례 안에 6가지의 시행 세칙을 두어 총 234가지 규정을 만들어 지켰습니다. 안식일 규례에 의하면 안식일에는 추수, 타작, 키질은 물론 음식 준비를 해서도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볼 때 제자들이 이삭을 자른 것은 추수하는 일을 한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배고픈 제자들의 상태를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행동을 이해하시고 다윗의 예를 들어 변호해 주셨습니다. 25,2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다윗과 그의 일행은 사울에게 쫓기다가 성전으로 갔습니다. 그러데 그곳에는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 외에는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이때 제사장 아히멜렉은 배고픈 다윗 일행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진설병을 주어 먹게 하였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마땅하지만 생명을 살리는 것보다 앞세울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후에 사울왕은 이를 빌미로 제사장 85명을 죽이는 악을 행했습니다. 그때 살아남은 자가 제사장 아비아달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아히멜렉 제사장 때라 하지 않고 아비아달 제사장 때라고 하신 것은 바리새인들이 제사장들을 죽인 사울왕처럼 예수님과 제자들을 죽이는 자임을 드러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다윗과 같이 귀하게 여기시고 그들의 편이 되어 적극적으로 변호해주심으로 그들의 기를 살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안식일의 본래 의미에 대해서 가르쳐주셨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하나님은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신 후 제 7일에 안식하시고 그날을 복주사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쉬고자 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복을 위해 창설하신 날입니다. 안식일은 육체적, 정신적 쉼과 함께 영적인 재충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날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복잡한 규정을 만들어 안식일 법을 지키게 함으로써 오히려 안식일이 더욱 무거운 멍에를 메는 날이 되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28절에서 예수님은 더욱 놀라운 선포를 하십니다.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예수님은 안식일을 창설하시고 주관하시는 창조주로서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해 안식을 잃어버린 인생들에게 참된 안식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안식일은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만나고 주님과 교제를 나누는 날입니다. 우리는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 교회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안식 후 첫 날을 주의 날이라 하여 거룩한 안식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찬양과 기도와 모든 섬김의 행위를 통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때 구원의 감격과 기쁨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과 같이 안식일 법을 지키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본질을 잃어버리게 되고 안식일은 일주일 중에서 가장 바쁘고 피곤한 날이 되어버립니다. 저희가 안식일의 의미를 기억하고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과의 사랑의 교제를 통해 죄 사함의 은혜를 덧입고 참 안식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으로 양들을 섬기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힘쓰므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기도합니다.
  3장 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었습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그는 오른 손이 말라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불편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는 일을 할 수도 없었고 자신의 치부를 숨기기 위해 여름에도 긴 옷을 입고 다녀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예수님께 대한 소문을 듣고 치료를 받고자 안식일에 회당에 나왔습니다. 그는 한 손을 주머니에 넣고 만지작거리며 예수님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바리새인들이 있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바리새인들은 그 시대의 목자들로서 한 손 마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어야 했습니다. 직접 치료해 줄 능력이 없으면 그의 손을 붙잡고 기도라도 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예수님이 안식일날 한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시는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 손 마른 사람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고발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악한 속셈을 다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다른 날 조용히 따로 불러서 고쳐주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시고 정면으로 도전하셨습니다.
  선한 목자 예수님은 안식일날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 깨우쳐주고자 하셨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장로들의 유전은 주로 하지 말라는 금지 규정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안식일에는 아무 것도 안하는 것을 안식일 법을 잘 지키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의 근본정신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요,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도 양 한 마리가 구덩이에 빠지면 안식일에라도 구해주는 것을 당연히 여겼습니다.(마12:11) 그런데 사람의 생명은 양의 생명보다 얼마나 더 소중합니까? 한 손 마른 사람은 고침 받기 위해 회당에 나왔는데 그냥 보고만 있는다면 악을 행하는 것이요 생명을 죽이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은 말라버린 손으로 인해 안식을 잃어버린 불쌍한 영혼에게 참 안식을 주고자 하셨습니다. 그의 생명을 살리고자 하셨습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요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인식일의 규례에 얽매여 선악의 분별력을 상실하고 생명에 대한 존엄성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 법을 어기고 큰 악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양심이 마비된 그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잠잠하였습니다. 그들도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신들이 악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완악하여 전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회개하지 않을 때 더욱 완악해지게 됩니다. 그들은 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죄를 짓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의 완악함으로 인해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둘러보셨습니다. 그리고 “네 손을 내밀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한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도와주기 위해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한 양을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까지도 내어주셨습니다. 그 사람이 손을 내밀자 그의 손이 즉시 회복되었습니다. 동시에 그의 인생도 회복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기쁜 일입니까? 이를 본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도리어 시기심에 사로잡혀 선한 목자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까 헤롯당과 의논하였습니다. 그들은 평소에는 헤롯당과 원수지간이었으나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서 적과의 동침도 서슴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한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질문하십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우리는 학창시절부터 절대복음신앙을 지키기 위해 세상과 구별된 생활을 하고자 많은 투쟁을 했습니다. 이로 인해 학교와 직장에서 많은 오해와 불이익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여름휴가는 각종 수양회 참석을 위해 자진 반납하고 세상 사람들이 세상 즐거움을 즐길 때 우리는 주님께서 맡기신 양들을 돌보느라 젊음을 드렸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의 희생과 섬김을 배우고 많은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그런데 캠퍼스 역사가 점점 힘들어지면서 과거의 스피릿이 많이 퇴색한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럴 때 종교생활에만 열심을 내는 바리새인과 같이 되어 선을 행하는 일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아무 자격 없는 자를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구원하사 이 시대 캠퍼스 양들의 목자요 성경선생으로 세워주셨습니다. 지금까지 한 손 마른 자와 같이 내면이 메말라 죽어가는 캠퍼스 양무리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게 하시고 생명을 살리는 역사에 쓰임 받게 하셨습니다. 지난주에는 오랜 만에 저녁에 가대캠퍼스 심방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말씀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말씀을 전하는 것도 못마땅하게 여기고 배척하는 양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예수님께서 저에게 “어느 것이 옳으냐?” 질문하시는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저는 저의 딱딱한 마음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죄로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기를 원하십니다.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복음 전파에 있어서 나이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실제로 우리 가운데에도 은퇴 후에 새롭게 개척역사를 섬기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제가 어느덧 낡은 가죽부대와 같이 되어 현재의 상태에 안주하려 하였던 죄를 회개합니다. 제가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 회개함으로 청년의 스피릿을 덧입고 새롭게 되어 캠퍼스 복음 전파 사명에 충성함으로 생명을 살리는 역사에 쓰임 받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우리에게 참 안식을 주기를 원하십니다. 선한 목자 예수님은 한 영혼을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까지 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질문하십니다.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저희가 새 포도주 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날마다 새롭게 되고 생명력 충만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적극적으로 선을 행함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안식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죄로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영접하고 일대일을 통한 복음 전파 사명에 힘쓰므로 봄학기 저희 가운데 생명이 살아나는 역사가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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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0 마가복음 [2018년 마가복음 제10강]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관리자 2018-06-03 1141
539 마가복음 [2018년 마가복음 제9강] 그가 누구이기에 관리자 2018-05-27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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