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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8-05-27 (일) 13:00
분 류 마가복음
첨부#1 2018년_마가복음9강-1(고영훈).hwp (48KB) (Down: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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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마가복음 제9강] 그가 누구이기에

 2018년 마가복음 제9강                                                             고영훈

그가 누구이기에

말씀 /마가복음 4:35-5:20
요절 /마가복음 4:41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오늘 말씀에는 두 가지 사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광풍을 잠잠케 하신 사건과 거라사 광인의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신 사건입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사건들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잘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연세계 뿐만 아니라 영적인 세계까지도 통치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창조주이십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믿을 때 인생의 광풍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또 양들에게 역사하는 악한 영들도 믿음으로 쫓아 낼 수 있게 됨을 봅니다. 이 시간 예수님이 나에게 어떤 분이 되시는가 잘 깨닫고 실제적인 문제 앞에서 믿음으로 승리하는 신앙생활 해 나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I. 광풍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35-41)
  35절을 보십시오. 그 날 저물 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루 종일 여러 비유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이렇게 하루 종일 말씀을 가르치고 나면 참으로 피곤합니다. 예수님도 쉼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다 저편 이방 땅에서 복음을 듣지 못하고 멸망해 가고 있는 영혼들에 대한 목자의 심정 때문에 편히 쉴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만민이 복음을 듣고 구원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런 예수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예수님과 함께 배 타고 떠난다는 말에 소풍가는 학생들 마냥 기뻐하며 즉각 배를 준비하였습니다. 때마침 바다 위로 불어오는 저녁 바람은 하루의 수고를 씻어 주는 듯 그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했습니다. 바다 이편에서 저편으로 가는 것은 우리 인생들의 항로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생 항로를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예수님을 선장으로 모시고 목적지가 분명한 항해를 하기 때문에 안전한 운행을 하고 있습니다. 비록 가는 도중 비바람이 몰아치고 배가 흔들리더라도 예수님이 함께 하시므로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어두운 밤바다를 향방 없이 배를 저어 갑니다. 스스로 선장이 되어 배를 저어 가므로 항상 불안하고 위험합니다. 우리 인생항로에서 누구와 동행하는가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셔서 우리를 친히 인도하시고 안전하게 인생항로를 마치게 하신다는 것은 그야말로 큰 은혜입니다. 우리 인생을 위험과 어려움에서 지키시며 하늘나라까지 무사히 이르게 하시는 예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37절을 보십시오.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조용하던 바다에 갑자기 큰 광풍이 일어나서 제자들에게 잠시나마 즐거웠던 순간이 금방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광풍이 거세게 불어 닥치자 삼각파도가 배를 집어 삼키듯이 몰아치며 배는 심하게 흔들렸습니다. 이는 전혀 예기치 못한 사건이었습니다. 아무리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어 온 제자들이라도 심히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정신을 가다듬고 배안의 물을 퍼내며 이를 극복하고자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이 광풍은 그들의 노력과 의지로 버틸 수 있는 그런 작은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배에는 점점 물이 많이 들어오고 급기야 가라앉는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지중해 해면보다 200미터나 낮은데다가 삼면이 산으로 둘러 싸여 있는 지형상 특징 때문에 북쪽 헬몬산에서 불어오는 찬 공기와 갈릴리 바다위의 덥고 습기 찬 공기가 부딪치게 되면 갑자기 돌풍으로 변합니다. 우리 인생에서도 이렇게 예기치 않는 광풍을 만나게 됩니다. 전혀 예기치 않게 질병의 광풍을 만나기도 하고 잘 되던 사업이 갑자기 부도가 나서 하루아침에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궁핍에 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광풍은 교통사고로, 화재로, 수재로 오기도 하고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을 앗아 가기도 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우리들에게도 이런 광풍은 예외가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으로 살기 때문에 가정에서 큰 핍박을 받을 수도 있고, 잘 자라던 양이 갑자기 힘든 소리를 하더니 떠나가는 광풍을 만나기도 합니다. 광풍은 한 개인 뿐만 아니라 국가 전체를 대상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도 20여 년 전 IMF광풍이 불어 닥쳐 온 국민이 큰 고통에 빠졌었습니다. 10년 전에는 미국의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우리나라에도 큰 경제적 광풍이 휩쓸고 갔었습니다. 이런 광풍이 왜 일어나는지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누구에게나 광풍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광풍은 사람들의 지식, 경험, 힘, 기술 등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을 함부로 살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죽음의 광풍을 만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울 것이 없도록 두렵고 떨림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광풍을 통해 하나님 없이 자행자지 하며 교만하게 살아가는 인생들에게 경고하십니다. 또 광풍을 통해 신자들을 연단하십니다. 사람들은 평소에는 자기의 능력을 믿고 자고하지만 광풍을 만나면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두 손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도움을 청합니다. 또한 세상의 헛된 소망을 훌훌 털어버리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광풍은 우리를 깊고 넓은 믿음의 세계로 인도합니다. 광풍은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며 정금과 같은 순수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게 합니다. 광풍은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사람을 하나님께서 쓰실 만한 영적인 사람으로 빚어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광풍 그 자체는 좋아할 수 없지만 그로 인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바랄 때 적극적으로 광풍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광풍 앞에 예수님과 제자들의 반응이 어떻게 다릅니까? 3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예수님은 놀랍게도 이런 와중에도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광풍으로 인해 배가 위태하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에는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이 하나님의 손에 달렸고 자신의 목숨을 만민 구속 역사에 드리셨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생명이 광풍에 의해 지배 받지 않음을 잘 아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곤하게 주무시는데 제자들은 어떠합니까? 광풍이 불어 올 때 제자들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들이 수십 년 간 익혀온 노련한 기술도, 바다에 대한 지식도, 지혜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다가 절망하고는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그들은 자고 있는 예수님을 깨우며 자기들이 죽게 되었는데 돌아보지 않으신다고 원망하며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를 볼 때 광풍 앞에서 제자들의 마음 가운데도 광풍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의심의 광풍, 원망의 광풍, 불신의 광풍, 두려움의 광풍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들이 볼 때 예수님은 자기들의 형편을 전혀 모르시고 안돌아 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많으시고 선한 목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안 돌아보실 리 없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제자들을 광풍 가운데 그냥 두셨을까요? 이는 그들을 연단하시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큰 뜻을 두셨습니다. 그들이 지금은 갈릴리 바다를 중심으로 지내고 있지만 장차는 전 세계를 다니며 복음을 전할 일꾼이 될 것을 믿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광풍 가운데 그냥 내버려 두십니다. 이는 우리에게 무관심하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큰 소원을 두고 연단하시고자 함입니다. 이런 광풍 훈련을 통하여 내면이 강해지고 믿음의 뿌리가 견고해지며 어떤 난관도 도전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내는 정예 용사가 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모르고 또 광풍의 의미를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제자들이 원망 섞인 목소리이지만 절망 중에 주님께 나아와 기도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절망 중에 부르짖어 도움을 구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시46:1). 우리가 환난 중에 주님께 부르짖어 기도할 때 주님께서는 반드시 그 기도를 응답해 주십니다.
  3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일어나셔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미친 듯이 날뛰던 바람과 바다가 순한 양같이 잠잠해졌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바람과 파도 소리로 아우성치듯 했던 바다가 아주 고요해졌습니다. 여기서 ‘꾸짖는다’는 말은 귀신을 꾸짖을 때 쓰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은 이 광풍이 발생한 것이 그 뒤에 숨어 역사하는 귀신의 소행임을 간파하셨습니다. 사탄은 할 수 있는 대로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먼저 광풍을 통해 연약한 제자들에게 두려움을 심어 거라사 지방까지 가지 말고 중도에 포기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사탄이 아무리 강하게 역사해도 우리 주님의 복음 역사를 중단 시킬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능히 바람과 바다도 잠잠케 하는 권능이 있었습니다. 이 예수님은 태초에 말씀으로 물을 한 곳으로 모이게 하시고 뭍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임할 때 어떤 사탄의 세력도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고 잠잠하게 됩니다.
  40절을 보십시오. 다 같이 읽겠습니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광풍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을 향하여 책망하셨습니다. 이는 그들 내면 가운데 발생한 마음의 광풍을 잠잠케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탄은 바다뿐 아니라 제자들 마음에도 광풍을 일으켜 두려워 떨게 하고 예수님에 대해서도 원망하고 불신하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왜 능력이 없느냐, 또는 기술이 없느냐고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믿음 없음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원하시는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이는 광풍 앞에서도 예수님의 권능과 사랑을 믿는 믿음입니다. 이는 이론적인 믿음이 아니라 실제적인 믿음입니다. 보통 때는 믿지만 문제 앞에서는 불신하는 그런 믿음이 아니라 문제 앞에서도 변함없이 믿는 살아 있는 믿음을 원하십니다. 지금 예수님이 주무신다고 해서 그들을 안도와 주신다고 원망하는 것은 실제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부르심 받은 제자들과 같은 배를 타고 가시며 도움이 필요할 때 도와주시고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늘이 무너져도 우리가 놓쳐서는 안될 것이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과 선한 주권과 섭리입니다. 이 믿음은 인생에 나침반이요 닻과 같아서 나의 삶에 방향이 되고 어떤 역경에서도 보호해 주는 힘이 됩니다. 우리는 능력 있는 성경 선생이요 목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실전에서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실제 문제를 만나면 믿음을 배우고자 하기보다 상황 탓, 조건 탓을 하며 문제가 해결되기만을 기다립니다. 이런 자세로는 항상 연약하고 한계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역경이나 환란은 나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 줍니다. 그리고 나를 강하고 담대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광풍을 만날 때 예수님의 사랑을 의심하며 원망할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적극적으로 광풍과 싸우며 산 믿음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믿음을 배운 자는 또 다른 문제를 만날 때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덧입게 됩니다.
  41절을 보십시오. 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제자들은 바람과 바다도 순종시키는 예수님의 권위에 완전히 압도당하였습니다. 그들은 이제 예수님에 대해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해 영적인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선생님(랍비)에서 창조주 하나님이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제자들이 현실의 문제 해결에 급급해 하지 않고 예수님을 배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성장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건을 통해서도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론적으로 배울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특히 시련이나 역경을 통해서 예수님을 깊이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항로에서 환난을 만날 때 끊임없이 예수님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처음 한 질문이 ‘주여, 누구십니까?’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누구신가 알고자 평생을 몸부림쳤습니다. 그가 이렇게 투쟁했을 때 점차 변화 되었고 주님께 크게 쓰임 받았습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광풍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광풍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을 심히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심히 두려워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움직이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한마디 말씀으로 온 세계를 지배하는 권세자가 되십니다. 우리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 우리를 복 주시는 분, 우리를 심판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만을 높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중히 여기시고 자신을 멸시하는 자를 멸시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인생항로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기술도 필요하고, 세상 사는 지혜와 경험도 필요하고, 물질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광풍을 만날 때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항로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을 믿는 믿음입니다. 나에게 두신 예수님의 절대적인 섭리와 주권을 믿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광풍을 이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과 섭리는 역경의 때라고 해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탄이 교묘하게 내 속에서 속삭이는 거짓 소리에 마음을 뺏기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역경을 이기고 예수님과 함께 인생항로를 끝까지 완주 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II. 거라사 광인을 구원하신 예수님(5:1-20)
  예수님께서 바다에서 광풍을 잠잠케 한 후에 거라사 지방에 이르렀습니다. 이곳은 로마의 10개 도시인 데가볼리 중의 하나로 이방 땅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에서 나오자마자 곧 머리가 헝클어지고 상처투성이요 벌거벗은 사람이 무덤에서 나와서 예수님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그가 ‘더러운 귀신 들린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귀신 들린 자의 특징이 어떠합니까?
첫째로, 그는 무덤에 거처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은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 사는 사회적인 존재입니다. 인간 사회가 생명이 살아 숨 쉬는 역동적인 곳이라면 무덤은 모든 것이 정지되고 고갈된 삭막한 곳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아예 무덤을 거처로 삼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가정과 사회가 그에게 요구하는 것이 많아서 견디다 못해 무덤까지 왔을까요? 아니면 자신의 내면 문제로 대인기피증이 생겨 사람들을 만나기가 두려워서 그랬을까요? 어쨌든 이 사람이 가정과 사회를 떠나 아무도 없는 무덤에서 거처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의 내면은 무덤과 같이 죽음의 요소로 가득 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을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둘째로, 자제력을 상실하였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여러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사람들은 그가 미쳐 날뛰며 충동적인 행동을 하고 다니기 때문에 쇠사슬과 고랑으로 묶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디서 힘이 나오는지 괴력을 발휘하여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습니다. 이는 힘으로는 아무도 그를 제어할 수 없음을 말해 줍니다. 귀신은 그를 아무도 없는 무덤에까지 인도하였습니다. 무덤의 죽은 자들은 아무도 그를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이곳은 법도, 까다로운 규범도, 제도도, 관습도 없었습니다. 옷을 입지 않아도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이제 참 자유인이 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으로 부터는 자유할 수 없었습니다. 이는 쇠사슬보다 더 강하고 무서운 귀신이 그를 사로잡아 노예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셋째로, 그는 자학하고 있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 그는 무덤과 산을 뛰어다니며 세상을 저주하는 온갖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답답한 내면을 주체할 수 없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그래도 내면의 욕구불만은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돌로 자기 몸을 자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귀신은 사람의 내면에 욕구불만을 불러일으키고 또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자라고 여기며 끊임없이 자학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귀신이 사람을 얼마나 비참하게 만드는 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가 왜 이렇게 몹쓸 사람이 되었을까요? 그가 이렇게 못쓰게 된 것은 근본적으로 그의 내면에 역사하는 귀신의 세력 때문입니다. 사람이 연약할 때 병균이 침입하여 서서히 병을 일으키듯이 영혼이 약해질 때 귀신이 들어와 지배하게 됩니다. 사람의 영혼을 약하게 하는 것은 인간 조건이나 주위 환경이 아니라 그 속에 역사하는 죄로 인한 것입니다. 인간은 본래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고귀한 존재입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위로 하나님을 섬기고 아래로는 만물을 다스리고 지키는 청지기가 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영육 간에 건강한 삶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불행하게도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죄를 범하고 창조주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더 이상 존재의미와 목적을 잃어버리고 죄의 구렁텅이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사탄이 지배하는 곳입니다. 사무엘 서를 보면 사울 왕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성령의 다스림을 받았을 때는 겸손하고 백성들을 사랑하는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점차 교만해져서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함부로 행했을 때 하나님의 영이 그를 떠나버렸습니다. 그러자 그에게 악한 영이 들어와 그를 지배하므로 죽을 때까지 고통하고 번뇌하며 지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면 자유가 있을 것 같지만 그 순간 사탄의 종이 되어 버립니다. 사탄은 이런 사람 속에 역사하여 하나님을 멀리 하게 하고 사람들과도 관계를 맺지 못하며 자기 자신을 학대하게 합니다. 더러운 귀신들린 거라사 광인도 모든 사람들로부터 멀어 지고, 심지어 자신으로 부터도 버림 받아 무덤사이에서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실상 구원을 애타게 바라는 영혼의 절규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버렸지만 예수님은 그를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그를 보시는 순간,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그를 구원하셨습니까?
첫째,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6-8)
  예수님은 그 사람을 보시는 순간, 그 속에 귀신이 역사하고 있는 것을 간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장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가 달려와 예수님 앞에 넙죽 엎드려 절을 하였습니다. 이를 볼 때 그는 예수님께 나아와 도움을 받고 싶어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막상 예수님께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또 그분의 도움을 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관계성 맺기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 속에 있는 귀신 때문에 분열 현상을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을 도우실 때 이 사람과 귀신을 분리하여 보셨습니다.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여기서 ‘그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영적 존재요, 말씀을 사랑하고 진리대로 살고자 하는 본래의 자아를 말합니다. 그런데 귀신이 그 사람 안에 들어가서 인격을 파괴시키고 하나님을 대적하게 하고 영적인 소원을 앗아가 버린 것입니다. 우리도 사람을 도울 때 그 사람과 그 안에서 역사하는 귀신을 분리해서 볼 줄 아는 영적인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 때 혈과 육의 무모한 싸움을 싸우지 않고 기도와 진리의 말씀으로 영적인 싸움을 하며 잘 도울 수가 있습니다.
둘째, 네 이름이 무엇이냐(9-15)
  9절을 보십시오.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귀신이 자기 정체를 숨기고 나오지 않고자 하자 예수님은 그에게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이름을 물으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이름은 그 사람의 존재와 전 인격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름을 물으신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본래 어떤 자였는데 지금 이렇게 되었는지 생각하게 하는 질문입니다. 거라사 광인은 귀신들려 본래의 자아를 잃어 버렸습니다. 그가 무덤사이에서 소리 지르며 제 몸을 상하게 하는 것은 그 속에 귀신이 역사하기 때문이지 본래 그의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도 하나님께서 주신 본래 이름이 있었습니다. 다만 그 이름은 귀신 때문에 숨겨져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그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질문하시므로 그의 내면 깊숙이 숨겨져 있는 본래 이름을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이 질문을 하십니다. 우리는 이 질문 앞에 진지하게 나의 이름이 무엇인지 돌아보아야할 것입니다. 현재 나의 죄악 된 모습을 본래 나의 모습으로 알고 그대로 살아간다면 결코 예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본래 이름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죄악 된 나의 이름을 발견하고 회개할 때 예수님은 나와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이 때 죄의 세력이 더 이상 내 속에서 역사하지 못하고 우리 주님께서 나의 주인이요, 왕이 되셔서 진정한 자유와 만족과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을 들은 그는 예수님 앞에 귀신 들린 자신의 모습을 고백하였습니다.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군대’란 레기온 즉, 6000명으로 구성된 로마 군단을 말합니다. 이를 볼 때 이 사람 속에 6000마리의 떼 귀신이 역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대답은 그가 그 동안 자아를 상실하고 귀신의 세력 때문에 얼마나 고통 해 왔는가를 고백한 것입니다. 그의 고백으로 인해 정체가 탄로 난 귀신들은 더 이상 그 속에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냥 나가지 않았고 돼지 떼에게로 들어갈 수 있도록 간청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허락하시자 그들은 즉시 돼지 떼에게로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2000마리나 되는 돼지 떼들이 일제히 비탈로 내리 달아 바다에 빠져 몰사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귀신 들렸던 자가 정신이 온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단정히 옷을 입고 이발과 면도도 하고 환하게 웃으며 본래의 자아를 회복하자 아주 미남이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으로 구원을 받고 본래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아무리 강한 귀신에 사로 잡혀 폐인이 되었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사랑과 말씀이 임할 때 귀신이 쫓겨나고 아름답고 건강한 새 모습을 찾게 됩니다. 그러나 이 지역의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을 보고도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들은 한 몹쓸 영혼이 구원 받고 온전해진 것으로 기뻐하기보다 돼지 2000마리를 잃게 된 것이 더 아깝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들은 물질주의에 눈이 어두워 메시아를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쳐 버렸습니다.
셋째, 주께서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16-20)
  이제 정신이 온전해진 거라사 청년은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을 더 깊이 배우고 싶어서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습니다. 이처럼 악령이 쫓겨나게 되면 영적인 소원이 생겨서 예수님을 더욱 더 알고자 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더욱 간절히 사모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의 간청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시며 사명을 주십니다. 19절을 보십시오.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예수님은 그가 먼저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동안 그에게 집과 사회는 그를 속박하고 스트레스를 주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변화된 그에게는 그의 사랑과 도움이 필요한 곳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그가 가족들에게 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주께서 그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고 불쌍히 여기셨는가를 전파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훌륭한 전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성경지식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행하신 큰 일을 기억하고 어떻게 불쌍히 여기신 것을 깨달을 때 능히 사명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나에게 행하신 일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나의 모든 죄의 값을 치루시므로 내가 온전한 자가 되었습니다. 이 구원의 은혜가 주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할 제목이 되고 또한 이를 끝까지 감당할 힘이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저의 인생항로 가운데 크고 작은 광풍 속에서 믿음을 배우게 하시고 지금까지 안전하게 천성 길을 가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 찬송 드립니다. 저는 오직 믿음으로 살고자 결단하였지만 신앙생활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믿음의 결혼을 준비하며 본격적인 거센 핍박의 광풍이 불어 왔습니다. 비행기 창가에서 넘실거리는 제주 앞바다를 보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내가 저 바다에 빠져 죽을 것 같은 절망적인 생각에 시달리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극적으로 할아버지의 마음을 움직이사 믿음의 결혼을 하도록 허락받게 하셨습니다. 저는 이제 결혼만 하면 장손으로서 금방 대를 이을 아들을 낳게 되리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나이 마흔이 다 되도록 아들을 낳지 못하자 제 내면에 광풍이 불어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들 낳는 것은 제 힘과 의지로 안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겸손히 주님께 엎드려 간절히 기도하였을 때 나이 마흔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장차 유능한 성경선생으로 복음역사를 계승할 아들을 주셨습니다. 우리 부부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더욱 더 주님의 역사에 충성하였습니다. 그러나 5년 전에 아버지가 위암에 걸리는 질병의 광풍이 발생하였습니다. 저희들은 사색이 되어 서울로 올라온 아버지를 붙들고 합심기도하며 주님께 도와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래서 위암 수술은 잘 되어 넘어 갔지만, 2년 전에 아버지가 이번엔 대장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계속되는 암 발생에 아버지는 삶을 포기하는 말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저희 부부는 주님께 도움을 청하고 아버지에게 믿음을 심었을 때 암 수술이 잘 되게 하시고 지금은 건강하게 잘 지내시며 최근에는 팔순 잔치도 은혜롭게 잘 치르게 되었습니다. 저와 저의 가정은 이런 광풍이 불 때 마다 사탄이 심는 의심과 불신의 광풍과도 싸우면서 무엇보다 그 어떤 것으로도 얻을 수 없는 살아있는 믿음을 배우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창조주이시오 저의 기도를 듣고 하나님의 선한 뜻대로 해결해주시는 좋으신 분이십니다. 저는 누구보다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고, 예수님 앞에 두렵고 떨리는 경외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과 규칙적인 새벽기도, 밤 기도 통해 교제 나누며 축복으로 주신 캠퍼스 제자 양성의 사명을 기쁨으로 힘에 지나도록 감당하고자 합니다. 앞으로도 천지 만물의 주인이신 예수님과 늘 동행하며 캠퍼스의 사탄에게 눌려 있는 도움이 필요한 영혼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목자요, 사명인의 삶을 잘 감당해 나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광풍을 잠잠케 하시고, 거라사 광인의 군대 귀신도 쫓아 내셨습니다. “그가 누구이기에” 이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초월적인 능력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를 두렵게 하는 인생의 광풍도 잠잠케 하실 수 있습니다. 사람의 내면에 역사하는 어떤 더러운 영도 쫓아내시고 깨끗케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고 주님의 초월적인 능력을 체험하길 기도합니다. 이 예수님을 힘써 전해서 어두움에 사로잡힌 자들을 구원하는 역사에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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