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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8-07-22 (일) 12:47
분 류 마가복음
첨부#1 2018년_마가복음18강-1(최동진).hwp (32KB) (Down: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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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마가복음 제18강] 첫째 되고자 하면

  2018년 마가복음 제 18 강                                                      최동진

첫째 되고자 하면

 말씀/ 마가복음 9:30-50
 요절/ 마가복음 9:35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사람들은 누구나 큰 자, 위대한 자가 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위대한 자인가를 모르기 때문에 졸장부의 인생을 삽니다. 세상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높은 자리에 앉는다고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진정으로 위대한 자가 어떤 자인가 깨닫고 주님이 인정하시는 내면성 있는 하나님의 종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라(30-37)
  3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벙어리 귀신 들린 어린 아이를 고쳐주신 후 그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나가셨습니다. 갈릴리는 예수님의 주 사역지였지만 이번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으시고 비장한 모습으로 예루살렘을 향해 가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을 앞두시고 무엇보다도 제자양성에 중점을 두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가르치신 내용이 무엇입니까? 31절을 보십시오.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예수님은 베드로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고백을 받으신 후 처음으로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변화산에서 내려오시면서 두 번째로 가르치시고 이번에 세 번째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회만 되면 반복해서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의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요 구원과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중요한 십자가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을 생각할 때 답답하고 안타까웠지만 소망 가운데 계속 복음을 심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여전히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깨닫지 못하면 물어야 하는데 묻기조차 두려워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7:23절에 보면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였다고 했습니다. 이를 볼 때 제자들의 마음속에는 자기 생각, 자기 계획이 따로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머지않아 이루어질 메시야 왕국에서 누릴 영광을 소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꾸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 말씀하시니까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얼마 전 베드로가 사탄 소리까지 들으며 호되게 혼이 난 터라 잘 못 물었다가는 또 혼날까봐 두려운 나머지 감히 물을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고난을 싫어합니다. 십자가를 지기보다 편안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다보니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도록 가르치는 말씀을 부담스러워하고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말씀공부를 하기 위해 드리는 시간 조차도 아까워합니다. 말씀을 들어도 십자가 없는 은혜와 축복의 메시지만 듣고자 합니다. 그러다보니 목자의 입장에서도 부담스러운 십자가는 빼고 양들이 받아들일 만한 말씀만 전하기 쉽습니다.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말씀, 비전과 축복과 성공에 관한 말씀만 전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듣기 싫어해도 반복해서 십자가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복음만이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서만 교회가 살아나고 생명 구원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33절을 보십시오.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 때 제자들에게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잠잠했습니다. 이는 길에서 “누가 크냐?”하는 문제로 쟁론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왜 이 문제로 쟁론한 것입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시면 당장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들은 내각 편성 때 누가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격렬한 토론을 벌였습니다. 예수님이 세 제자만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가신 사건을 계기로 변화산파 3인방과 산 아래파 9명의 제자 간의 갈등과 경쟁이 격화되었습니다. 그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누가 크냐?’는 것이었습니다. “Who is the greatest?" 제자들은 모두 다 자기가 가장 높은 자, 위대한 자가 되기를 열망했습니다. 베드로는 자타가 공인하는 수제자로서 국정 운영의 첫 째 자리는 당연히 자기가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전 예수님으로부터 크게 책망 받음으로 수제자로서의 위상에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반면 안드레는 가장 먼저 부르심 받았지만 별로 존재감 없이 지내다가 오병이어 사건으로 위상이 급상승하여 이번 기회에 서열 1위의 자리를 굳히고자 하였습니다. 가룟 유다는 돈 맡은 자로서 자신이 실세라고 생각했습니다. 조급해진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과 친인척 관계라는 점을 앞세워 연합전선을 펴서 어머니까지 동원하여 물밑 교섭을 시도하였습니다.(마20:20) 그들의 가치관은 전혀 영적이지 못했고 인간적이고 세속적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자기중심적이었습니다. 그들은 각자의 기준에 따라 자신의 우위를 주장하며 물러서려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인류 구속역사를 이루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가고 계셨는데, 제자들은 그런 와중에도 누가 크냐며 치열하게 다투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고 다스리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제자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럴 때 그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알 수 없었고 십자가의 복음 진리도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을 보는 예수님의 마음은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첫째가 되고자 하는 이들의 인간적인 마음을 책망하시기보다 영적으로 승화시키셔서 진정으로 위대한 자가 되도록 가르쳐주셨습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사람들은 특별한 사람만이 첫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구든지 첫째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한 명이 아니라 모두가 첫째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첫째가 되는 길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첫째가 되기 위해 필요한 삶의 원리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자세에 대해 가르쳐주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자에게 필요한 조건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뭇 사람의 끝이 되어야 합니다. 뭇 사람의 끝에 있는 자는 자기를 가장 낮추는 자요, 가장 겸손한 자입니다.  끝이기 때문에 더 이상 낮아질 수도 없습니다. 뭇사람의 끝이란 말은 모든 사람 중에서 내가 가장 작은 자요, 보잘 것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누구보다도 훌륭한 인간 조건을 가진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다고 하였으며,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라고 하였습니다.(고전15:8,9) 또한 디모데전서 1:15절에서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 스스로 큰 자라 생각하고 예수 믿는 자들을 박해하는 데에 앞장서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후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가 깨달았을 때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주와 복음 역사에 헌신함으로 진정으로 위대한 삶을 살았습니다. 모세의 위대성도 궁중교육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의 겸손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는 40년간 광야에서 겸손 훈련 받고 낮아져서 200만 이스라엘 백성들을 섬겼습니다. 민수기12:3절에는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겸손에 있어서 가장 좋은 본을 보이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겸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예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의 모양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땅에 오시되 사람 위에 군림하는 자의 모습으로 오시지 않고 인생들을 섬기는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말구유에 가장 낮고 천한 모습으로 태어나셔서 온갖 냄새나는 죄인들을 겸손하게 섬겨주셨습니다. 부담스럽고 비천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셨고, 고뇌하는 지성인 니고데모에게 밤이 맞도록 거듭남의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기적인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시고 동고동락하시며 그의 깊은 내면의 상처를 치료해 주셨습니다. 세리와 창기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 누구도 예수님의 겸손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이 예수님이야 말로 가장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둘째로,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섬기기보다 섬김 받기를 좋아합니다. 세상에서는 높은 자리에 올라갈수록 많은 섬김을 받습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치열하게 경쟁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위대성은 얼마나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학교 성적 순으로 결정 되는 것도 아닙니다. 진정으로 위대한 자는 낮아져 섬기는 자입니다. 이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좋은 머리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특별한 능력이 요구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낮아져 섬긴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닙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나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 나의 인생에 도움이 되는 사람을 섬기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뭇 사람을 섬긴다고 할 때에는 이런 것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합니다. 나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나에게 상처와 피해를 준 사람, 나에게 별로 도움이 안되는 사람, 가까이 가기 부담스러운 사람, 원수 같은 사람도 섬겨야 합니다. 창세기의 요셉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변함없이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노예로 있을 때나, 감옥의 죄수로 있을 때나, 애굽의 총리가 되어 모든 국정을 다스릴 때에도 넓은 내면성으로 뭇 사람을 섬겼습니다. 그는 어떤 상황 가운데에서도 다른 사람들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을 노예로 팔아버린 형들조차도 하나님의 섭리 편에서 바라보고 사랑으로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그를 축복하사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생명과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는 역사에 귀하게 사용하셨습니다. 사람의 위대성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섬기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어떻게 뭇 사람을 섬길 수 있습니까? 많은 사람을 품을 수 있는 넓은 내면성이 필요합니다.  가장 위대하신 분으로서 가장 낮아져 섬김의 본을 보여주신 예수님을 배움으로 우리의 좁아터진 마음을 넓혀 뭇사람을 품고 섬기는 위대한 인생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섬겨야 하는가 가르쳐 주십니다. 36,37절을 보십시오.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어린 아이들은 순수하고 진실됩니다. 어른들처럼 생각이 복잡하지 않고 단순합니다.  어린 아이들의 해맑은 눈망울만 봐도 세상 모든 근심이 사라지고 마음이 밝아집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항상 이렇게 예쁜 모습만 보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부족한 면이 더 많이 있습니다. 자기중심적이고 끝없이 요구합니다. 아무리 가르쳐도 잘 알아듣지 못합니다. 잠간만 한 눈 팔면 사고를 치고 문제를 잘 일으킵니다. 그래서 잠시라도 눈을 뗄 수가 없고 손이 많이 갑니다. 이런 어린 아이를 감당하는 것은 힘들고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어린 아이를 무시하고 숫자에도 넣지 않았습니다. 정치인들도 선거권이 없는 어린 아이는 별로 도움이 안된다고 생각하고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이런 어린 아이들을 영접하는 것이 본성적으로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때 어린 아이도 순수한 마음으로 영접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에는 생물학적 나이는 성인이지만 영적으로 아직 어리고 믿음이 연약하여 섬세한 도움이 필요한 자들이 많습니다. 어디로 튈지 알 수 없어 늘 긴장하고 돌봐 주어야 하며,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보호해 주어야 합니다. 끝없이 섬김이 필요한 이들을 영접하고 섬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제자들의 문제도 서로 무시하고 영접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주위에 있는 어린 아이와 같이 연약한 자들을 영접하고 도와주는 자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내 힘으로는 영접하기 힘들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영접할 수 있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요,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와 같이 연약하고 부담스러운 자일지라도 영접하고 섬기는 자가 진정으로 위대한 자입니다.
  테레사 수녀님은 인도 콜카타의 빈민가에서 소외 받은 채 죽어가던 사람들을 위해 일생 헌신함으로 인도를 넘어 세계인의 성녀로 추앙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마더 테레사보다 18년 앞서 서럽고 외로운 이들을 위해 자신의 삶을 내던졌던 백의의 천사가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엘리자베스 셰핑, 한국 이름으로 서서평입니다. 그녀는 독일에서 미혼모의 딸로 태어나 어머니에게 버림받았지만 미국에서 간호학교를 나와 간호사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태평양 건너에 있는 조선이란 나라에 대해 듣게 되었습니다. 의료시설이 부족하고 위생관념조차 없어서 수많은 환자들이 치료조차 받지 못한 채 길 가에 버려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고통 받는 조선인에 대한 헌신이야말로 신이 자신에게 부여한 소명이라 여기고 조선에 선교사로 오게 되었습니다. 평생을 보리밥에 된장국을 먹고, 검정고무신을 신으며 조선인으로 살았던 서서평 선교사는 버림받고 가난했던 조선인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한일장신대학교의 전신인 이일학교와 대한간호협회의 전신인 조선 간호부회와 여전도연합회 등을 창설하였습니다. 또한 22년 동안 홀로 14명의 고아를 입양하고 과부를 돌보며, 한센병 환자를 돕는 등 마지막 순간까지도 조선을 위해 살다가 하나님 곁으로 떠났습니다. 그가 남긴 유산은 담요 반 장, 동전 7전, 강냉이가루 2홉뿐이었습니다. 텅 빈 그녀의 침대 밑에는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Not Success, But Service)’라는 좌우명이 걸려있었습니다. 광주 최초의 시민사회장으로 치러진 서서평의 장례식에는 수천 명의 광주 시민과 나환자들이 참석하여 ‘어머니!’를 외치며 오열하였고 수많은 여성들이 소복을 입고 운구행렬을 뒤따랐습니다. 이렇듯 그녀는 조선 땅에서 모든 버림받은 자들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어리고 연약하고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겸손하게 섬기는 자가 진정으로 위대한 자입니다.
  하나님은 세상 욕심을 좇아 살던 저를 학창시절 구원 하시고 이 땅까지 낮아져 오신 예수님을 배우며 영적으로 어린 영혼들을 섬기며 주와 복음 역사를 위한 삶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어린 아이들을 영접하는 것이 저에게는 전혀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밝고 순수한 어린 아이들을 상대하는 것이 저에게는 기쁨이고 삶의 활력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경성 센타 개척 초기부터 모임에 나와 여러 모양으로 섬김 받고 인정받고 세움 받는 삶에 익숙해져 있던 저에게는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중심적인 어른들을 영접하고 섬기는 것이 더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자기의 본성을 부인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배우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예수님으로부터 일방적인 사랑과 섬김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 이 은혜를 나의 심령 깊이 새기고 섬김 받고자 하는 마음을 회개하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연약한 자들을 영접하고 섬기는 진정으로 위대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II. 실족하게 하지 말라(38-50)
  38절을 보십시오. 요한은 분개하며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요한은 귀신이 쫓겨나가는 것을 보고 기뻐해야 했지만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즉시 그가 하는 일을 중지시켰습니다. 이는 그가 함께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로서의 특권의식과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귀신 쫓아내는 일을 자기들의 전유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편협하여 12제자 그룹에 속하지 않은 자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역사를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이름 권세를 믿었고 예수님의 이름 권세를 의지하여 아홉 명의 제자도 쫓아내지 못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그는 참으로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들을 통해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이에 예수님은 요한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39,4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예수님은 자신을 반대하지만 않으면 다 예수님의 편으로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모든 자를 배척하지 않고 영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각종 사람들을 다 품고 섬기셨습니다. 예수님 중심의 사람이라면 자신의 모임에 속하지 않았을지라도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서 사는 자들을 배척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큰 자가 되려면 좁은 마음을 버리고 예수님과 같은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41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이 말씀 역시 예수님의 포용성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다른 공동체에 있는 사람들일지라도 비방하지 말고 우리의 편으로 여기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큰 것으로 섬기지 못할지라도 냉수 한 그릇이라도 섬기고자 해야 합니다. 이는 그렇게 힘든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그것이 주님을 위하여 하는 것이면 기뻐 받으시고 반드시 상을 주십니다.
  42절을 보십시오.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니라.” 여기서 ‘작은 자’란 믿음이 있지만 아직 어린 사람을 말합니다. 어린 양은 쉽게 상처를 받고 작은 유혹에도 넘어집니다. 또 목자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도 쉽게 영향을 받습니다. 실족하게 한다는 것은 ‘걸려 넘어지게 한다, 죄를 짓게 한다’는 뜻입니다. 목자가 어린 양의 입장에서 섬세히 돕지 아니하면 어린 양을 실족시킬 수 있습니다. 양을 실족하게 하는 목자는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들어가는 것이 차라리 낫습니다. 이는 그만큼 실족시키는 일만큼은 특별히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강한 자에게 있어서 대수롭지 않은 일이 어린 자에게는 영적인 생명에 관한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연못에 장난으로 던진 돌에 개구리는 생명을 잃게 됩니다. 그러므로 목자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도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43절-48절은 죄의 심각성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목자의 죄는 다른 사람을 실족시키는 빌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의 손이나 발이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고, 눈이 범죄하게 하거든 눈을 빼어 버려야 합니다. 사탄은 우리의 손과 발과 눈으로 범죄하도록 만듭니다. 이 말씀대로라면 우리 가운데 손이나 발이나 눈이 남아있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죄에 대해 단호하게 대처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약점에 대해서는 관대해야 하지만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죄와 타협하지 말고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손발을 자르고 눈을 빼버릴 정도로 죄와 철저하게 싸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장애인의 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지옥은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무서운 곳입니다. 거기에서는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고 영원한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지옥에 들어간 사람들은 불로서 소금치듯 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작은 죄라도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낳는가를 알고 죄를 짓게 할 가능성이 있는 것은 적극적으로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죄의 심각성을 알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50절을 보십시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소금은 음식의 맛을 내 주고 또 음식물의 부패를 방지해 줍니다. 그러나 소금이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도 짜게 할 수 없습니다. 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 데에도 쓸데가 없어 버림받아 사람들의 발에 밟히게 됩니다. 세상은 음란하고 물질적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썩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고 세상을 정결케 회복시키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바리새인들처럼 세상 높은 자리에 앉아 특권만 누리려 할 때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해야 합니다. 소금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화목해야 합니다. 소금이 맛을 내려면 물에 녹아야 하듯이 우리도 자신을 죽여야 맛을 낼 수 있습니다. 비록 숫자가 적을지라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죄를 정말로 미워하고 예수님의 성품을 닮고자 몸부림칠 때 영력이 생기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소금과 같은 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제가 깊이 깨달은 진리는 양들을 도와주기 위해서는 제가 먼저 죄의 세력과 싸워 승리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예수님께 나아가 간절히 기도함으로 영적으로 깨어서 세상 유혹의 세력과 피 흘리기까지 싸워 승리하는 삶 살기를 기도합니다. 그럼으로 영적인 생명력을 유지하고, 세상의 소금이 되어 이 음란하고 죄악된 시대에 믿음의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쓰임 받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진정으로 위대한 자는 뭇 사람의 끝이 되어 많은 사람을 섬기는 자입니다. 우리의 본성으로는 어렵지만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때 우리도 위대한 자가 될 수 있다는 소망을 갖게 됩니다. 믿음이 어린 한 사람을 영접하고 섬기는 가운데 진정으로 위대한 자로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죄의 세력과 철저하게 싸움으로 죄로 병들고 부패한 이 시대에 믿음의 영향력을 끼치며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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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1 창세기 [2019년 창세기 제2강]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 관리자 2019-03-17 1091
580 창세기 [2019년 창세기 제1강]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관리자 2019-03-10 1171
579 요한일서 [2019년 요한일서 제5강] 세상을 이기는 믿음 관리자 2019-03-03 1340
578 요한일서 [2019년 요한일서 제4강]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관리자 2019-02-24 1026
577 요한일서 [2019년 요한일서 제3강]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자 관리자 2019-02-17 1636
576 요한일서 [2019년 요한일서 제2강]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 관리자 2019-02-10 887
575 요한일서 [2019년 요한일서 제1강] 우리의 사귐 서삼문 2019-02-03 1140
574 열왕기상 [2019년 열왕기상 제10강]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 관리자 2019-01-27 1120
573 열왕기상 [2019년 열왕기상 제9강] 하나님의 세미한 소리 관리자 2019-01-20 1183
572 예레미야 [2019년 신년말씀 제3강]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관리자 2019-01-13 1070
571 기타 [2019년 신년말씀 제2강] 성전을 건축하라 관리자 2019-01-06 891
570 요한복음 [2019년 신년말씀 제1강]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관리자 2018-12-30 968
569 누가복음 [2018년 성탄말씀 제3강]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느니라 관리자 2018-12-23 910
568 누가복음 [2018년 성탄말씀 제2강] 구원의 뿔 돋는 해되신 예수님 관리자 2018-12-16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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