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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8-08-19 (일) 12:40
분 류 마가복음
첨부#1 2018년_마가복음21강-1(이인구).hwp (64KB) (Down: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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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마가복음 제21강]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2018년 마가복음 제21강                                                          이인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말씀/마가복음 11:1-25
 요절/마가복음 1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마가복음 11장부터는 예수님 일생의 마지막 1주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33년 일생 중 마지막 1주일을 기록하는데 복음서의 1/3을 할당했습니다. 그만큼 마지막 1주일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1주일을 보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의 찬송처럼 주의 이름으로 오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어떤 면에서 나에게 주가 되시는가 배우고 영접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 많은 이들이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며 왕처럼 맞이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백성들이 기대하는 왕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떤 왕이 되십니까?
첫째, 모든 만물의 주권자 (1-6)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전 제자들을 시켜 나귀 새끼를 준비하도록 하셨습니다. 맞은편 마을로 가서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거든 끌고 오라했습니다. 만약 주인이 막는다면 ‘주가 쓰시겠다’고 하면 즉시 보내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첩보영화처럼 ‘주가 쓰시겠다’ 는 암호를 말하면 비밀에 가득 찬 새끼 나귀를 보내준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제자들이 말씀에 순종해 가서 보니 나귀 새끼가 문 앞거리에 매여 있고 그것을 푸니 덩치 큰 주인이 왜 남의 나귀에 손을 대느냐 따져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절도범으로 몰릴 것 같아 두려웠지만 ‘주가 쓰시겠다’ 하니 뜻밖에도 순순히 허락해주었습니다. ‘주가 쓰시겠다’ 이 암호 같은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요 왕이 되시는 첫 번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만물의 주인(주권자)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그동안 섬김의 종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섬기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는 주님으로써 자신을 드러내시고 주권을 행사하십니다. 주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주 갈등하는 문제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입니다. 하나님은 세상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자 또한 통치하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주권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지으신 인간에게 재능이나 재물 같은 축복을 줄 수 있지만 또한 질병이나 가난 같은 고난을 줄 수도 있습니다. 죽어 마땅한 죄인인데 오래 참으실 수도 있지만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신자를 일찍 데려갈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대적하는 바울을 오래 참으심으로 돌이키셨지만 스데반 같은 성령 충만한 지도자가 광분한 무리들에게 돌에 맞아 죽는 것도 주님의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세상에 이런 일이!’라고 할 만한 사건일지라도 신자는 “주께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사오며”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주권에 반발하는 이들에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롬9;21,21) 우리는 아무리 오랜 세월을 살아도 아무리 열심히 세상과 인간을 연구해도 당장 내일 일도 알지 못하고 자기 자신도 온전히 깨닫지 못합니다. 그런 우리가 천지를 지으시고 세상역사를 주관하시는 원대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의 원칙은 공의와 사랑입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주권신앙입니다. 세상에 주의 통치권이 미치지 않는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이 세상의 아주 작고 미천한 사건들 하나까지도 불꽃같은 눈으로 감찰하고 계십니다. 공중의 새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들의 백합화를 키우시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살펴보십니다. 특히 신자의 머리카락까지 세시며 그 눈물을 기억하시고 기도를 하나도 땅에 떨어뜨리지 않으십니다.
  이 시대는 인권이 강조되고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세상을 휩쓸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아니라 사람들의 인권이 강조되고 있으며 나의 권리를 찾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성도들조차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 같으면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느니 교회를 안 다니겠다느니 막말을 쏟아냅니다. “주님 이것이 정말 주의 뜻입니까? 제게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진정 지혜로운 신자는 자신의 뜻을 앞세우기 전에 하나님의 원대한 뜻을 찾고 그 뜻에 순종하고자 합니다. 왜냐면 그것이 결국 자신에게 최선이고 가장 좋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인생길이 좁고 거칠어도 신자는 믿음으로 그 인도하심을 따를 때 결국 그 길이 가장 빠르고 안전하고 무엇보다 정확한 인생의 지름길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5;17) 하나님을 믿어서 얻을 수 있는 유익 때문에 주님을 믿을 수 있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은 매우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인이 되시기 때문에 복종하는 것은 더욱 성숙된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자유로운 의지로 살도록 허용하십니다. 하지만 우리의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 주권 안에 있을 때 가능합니다. 세상과 인생은 하나님이 선장이신 커다란 배를 타고 항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은 선장이 되셔서 항해를 지휘하시고 그 항로는 누구도 방해할 수 없습니다. 파도가 치고 태풍이 몰아쳐도 주님은 그것들을 다스리시며 나아가실 것입니다. 승객들은 쇠사슬에 매여 있지 않고 선장의 주권 하에서 일을 하든지 쉬든지 놀든지 자유롭게 살 수 있습니다. 승객들 중에 난동을 부리거나 선상반란을 꾀하는 무리가 있다 해도 주님은 선장으로서 계속해서 상황을 통제하시며 역사의 배는 쉼 없이 목적지를 향해 나아갑니다. 우리가 선장되신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 지시에 순종할 때 편안가운데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주권에 반발하여 진정한 자유를 찾는다며 배를 떠난다면 결국 어두운 바다 속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항로가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분을 통해 십자가의 구원역사를 완성하심으로 많은 이들이 구원받는 것이 주님의 주권입니다. 주되신 예수님의 주권을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선택은 각자의 몫이지만 책임 역시 각자의 몫입니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온 세상의 왕이요 주인이시지만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나귀새끼를 쓰시고자 하셨습니다. 그것은 메시아에 대한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스가랴9;9) 세상 왕같으면 당연히 멋있는 백마가 이끄는 황금마차를 타고 수많은 호위병들을 거느리며 입성하든지 아니면 (불타는 BMW보다 안전한) 방탄 리무진 벤츠를 타고 입성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평화와 겸손의 왕으로 모든 이들을 섬기고 희생하시기 위해 나귀새끼를 선택하셨습니다. 그 나귀는 무더운 날 나무 밑에서 잘 쉬고 있는데 주가 쓰시겠다 하는 바람에 예수님을 태우고 가느라 땀을 뻘뻘 흘리고 고생했을 것입니다. 더구나 한 번도 사람을 태워본 적도 없는 어린 나귀인데 예수님을 태우고 가다 허리가 삐끗할 수 있지 않을까 반발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귀가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께 쓰임 받을 때 결국 이 나귀는 메시아를 등을 태우고 예루살렘성에 입성하는 나귀역사상 가장 영광스러운 나귀로 쓰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주가 쓰시겠다.” 우리도 한 번 밖에 없는 인생 속에서 잘못하면 사단이 나를 사용할 수도 있는데 주님께 부름 받아 쓰임 받는다면 정말 큰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우리 인생의 목적과 의미는 하나님영광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최근 많은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절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돈을 벌지 못해서보다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지 못해서입니다. 누구다 다 쓸모 있는 인생,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인생이 되고 싶지만 취업이 안되면 어디에서도 필요하지 않는 인생이라 느끼며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나라 대통령이나 기업회장에게 택함 받아 쓰임 받는 것도 큰 기쁨이요 영광이지만 천지를 창조하시고 세상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택함 받아 쓰임 받는 것은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요 축복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용할 수 있는 주권이 있지만 우리를 노예처럼 강제적으로 쓰시지 않으십니다. 나귀새끼나 나귀주인이 쓰임 받지 않겠다고 버티면 역사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쓰임 받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을 깨닫고 자유의지로 자발적으로 쓰임받길 원하십니다. 어떤 이는 내가 지금 쓰임받기에 부족하니 나중 더 완벽해지면 그때 쓰임 받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인생에서 쓰임 받을 수 있는 기회는 항상 오는 것이 아니고 완벽해지기를 기다리다 결국 평생 쓰임 받지 못합니다. 주님은 나귀새끼를 쓰신 것처럼 부족하고 연약한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 쓰시길 원하십니다. 사실 하나님역사에 내가 반드시 필요해서 쓰시려는 것이 아니라 나의 기쁨과 행복을 위해 써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역사 가운데 쓰시면서 나와 함께 하시고 나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외적 능력이나 조건이 아닌 쓰임 받고자 하는 마음, 믿음입니다.
  어떤 6살짜리 아이가 아빠를 너무 사랑했습니다. 아이는 아빠생일날 자기 용돈으로 아빠가 좋아하는 찹쌀 아이스크림을 사서 저녁때 몰래 아빠 이불 밑에 숨겨놓았습니다. 그런데 그날 아빠가 일이 많아 밤늦게 들어왔고 이불 밑의 찹쌀아이스크림은 다 녹고 뭉개져 먹을 수 없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빠가 다 뭉개진 찹쌀아이스크림을 보고 아이에게 왜 냉장고에 넣어 두지 않고 바보처럼 이불 밑에 넣어두었느냐 책망하겠습니까? 먹지 못해도 당연히 아이의 사랑에 큰 감동을 받아 아이를 안아 줄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부족해도 쓰임받은 결과보다 쓰임 받으려는 믿음과 마음을 받으시고 기뻐하십니다.
  우리의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인생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인생동안 많은 것들이 나의 손에서 잠시 머물지만 진정한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재산이나 자녀나 시간이나 지위가 나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이십니다. 이것을 알 때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한 욕심과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고 또 가진 것이 상대적으로 작다고 위축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모든 소유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자신이 맡은 것을 충성스럽게 관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요 왕되심을 인정하고 주님께 내 인생을 내어드리면 주님께서 내 인생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우신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신 왕 (7-10)
마침내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수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맞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며칠 후면 유대에서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이라 수많은 이들이 유월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다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발이 끌리며 우스꽝스럽게 입성하시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땅에 펴고 또 겉옷이 없는 사람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예수님의 앞길에 펴며 찬양했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9,10) 겉옷을 길에 까는 것은 왕을 맞이할 때 하는 존경과 예후의 표시였습니다. ‘호산나’ 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을 구원할 왕으로 환영하고 찬송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찾은 구원자는 영적구원자가 아닌 현실문제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경제적 정치적 구원자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수많은 불치병자들을 고치시고 오병이어로 5000명을 먹이시고 말씀한마디로 죽은 자를 살리시고 파도와 광풍을 잠재우신 예수님의 능력을 알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을 착취하는 위선적이고 거짓된 종교지도자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호통치시는 사이다 같은 외침도 들었습니다. 그들은 과거 통일왕국을 이루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던 다윗처럼 불의한 헤롯정권과 로마를 무너뜨리고 해방시켜줄 강한 왕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강한 힘으로 자신들을 괴롭히는 세상 악을 한방에 일망타진하는 슈퍼맨 같은 왕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런 메시아로 찾고 구합니다. 평생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주고 자녀문제 건강문제 노후문제 해결뿐 아니라 마음에 들지 않은 정치인이나 자신을 괴롭히는 직장상사 갑을 한 방에 날릴 수 있는 구원자요 왕을 찾습니다. 하지만 신학자 칼 바르트는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는 것 같지만 실상은 우상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를 생명의 길로 인도할 메시아가 아닌 자신들의 소원을 성취해주는 자기만족적인 신 즉 우상을 원하는 것입니다. 메시아를 찾는 것이 아니라 두드리거나 문지르면 소원을 들어주는 도깨비 방망이나 마술램프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주의 이름으로, 주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신 왕이십니다. 내 뜻을 이루어주고 나의 입맛에 맞는 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에게 사람들의 현실의 경제와 정치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죄 문제보다 훨씬 쉽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으로 돌을 빵으로 하늘의 비를 메추라기로 만들어 주시고 헤롯왕이나 로마황제를 날벼락으로 때려버리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됩니다. 예루살렘입성도 나귀 새끼를 타고 초라하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아닌 누가 봐도 폼 나고 화려하고 멋있게 로마황제보다 웅장하게 입성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죄의 노예상태에서 눈에 보이는 현실문제해결은 또 다른 문제만을 만들뿐입니다. 자신을 지으신 진짜 주인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회복되지 않으면 그 어떤 방법으로도 진정한 구원은 없습니다.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하며 온몸으로 찬양하던 무리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하지 않자 결국 5일후 배신하게 됩니다. ‘호산나’ 찬송하던 그 입으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소서!’ 외치는 광포한 무리들이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리석은 무리들의 죄악된 요구와 바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 외로운 좁은 길을 올라가셨습니다. 죄악되고 어리석지만 불쌍한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치욕과 고통의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셨습니다.
셋째, 구원주이자 심판주 (11-25)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어디로 가셨습니까? 예수님은 성전으로 가셔서 2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일이고 다른 하나는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들을 쫓아내신 일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둘러보신 후 이튿날 시장하셔서 멀리서 잎사귀가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 열매를 찾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무화과나무는 잎사귀가 무성해 당연히 그 열매가 있어야 하지만 잎사귀만 무성한 채 열매가 없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분노하시며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셔서 결국 뿌리 채 말라죽게 하셨습니다. 겸손하시고 평화로우신 예수님께서 배가 고프시다고 무화과나무를 저주해 죽게 하신 것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더구나 때는 4월이라 본격적으로 무화과나무열매를 기대(6월)하기는 아직 이른 때이고 그때는 기껏 작은 열매밖에 없는데 그 열매를 먹지 못했다고 저주하신 것은 더욱 납득이 어렵습니다. 무화과나무 저주사건은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있었던 유일한 파괴적인 이적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잎사귀만 무성하고 열매는 없는 무화과나무처럼 형식과 외식으로 가득 찬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책망과 저주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후 다시 성전으로 들어가셔서 성전의 죄악을 청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정신적으로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대제사장들과 종교지도자들에게 엄청난 도전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 후 왕으로써 먼저 가장 부패한 헤롯궁에 들어가 헤롯궁부터 뒤집어 엎으셔야 할 것 같은데 성전에 들어가 장사하는 상인들의 상을 뒤집어 엎으셨습니다. 주님이 보실 때 가장 중요한 곳은 성전이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입니다. 다른 곳은 다 썩어도 성전만큼은 말씀의 등불을 밝히고 간절한 기도로 시대의 양심이 되어야 했고 시대의 마지막 보루가 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성전은 마치 대제사장 안나스와 그 가족이 세놓은 상점과도 같았습니다. 종교라는 미명하에 순례자들을 착취하였던 성전 장사치들은 모두 대제사장의 허가와 승인을 받았습니다.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은 험해 노상강도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내의 장사꾼도둑들은 노상강도들보다 더 악독스러웠습니다. 돈 바꾸는 자들은 하나님께 성전세를 내려는 순례자들에게 하루 임금의 반 정도나 되는 수수료를 붙여 갈취하였습니다. 또 가난한 자들이 드리는 재물인 비둘기는 본래 성전 밖에서 잡거나 싸게 살 수 있었지만 성전의 검사관들이 그런 비둘기들은 반드시 흠을 잡아 퇴짜를 놓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난한 예배자들은 2배나 되는 돈을 더 내고 성전 안에서 비둘기를 사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깨끗케 하신 곳은 성전내의 ‘이방인의 뜰’라는 장소로 이방인들이 기도하도록 마련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독선적인 유대교지도자들은 이방인들에게 약속된 영적 특권을 의도적으로 방해하기 위해 ‘이방인의 뜰’을 장터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노하신 것은 백성들을 하나님께 돌이키도록 택함 받은 종교지도자들이 오히려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오는 길을 막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성전이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을 만나 죄를 용서받고 감사하는 곳이 아닌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는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의 분노의 책망에 종교지도자들은 더욱 어떻게 예수님을 죽일까 모의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죄악에 분노하시며 또한 슬퍼하셨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오시기 전 예루살렘 성을 보시며 우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께 택함 받고 많은 연단과 축복과 은혜를 받았음에도 끝까지 돌이키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하나님영광을 위해 가장 귀한 사명을 주시고 귀하게 쓰시고자 하셨지만 위선과 거짓의 잎사귀만 무성한 채 열매 없는 이스라엘이 쓰임 받지 못하고 결국 멸망당할 것을 아시고 슬퍼하시며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처럼 결국 A.D. 70년 로마 군인들에 의해 정복되고 학살당하게 됩니다. 당시 로마 장군 티투스가 예루살렘 성을 포위해, 성내의 약 100만 명의 백성들이 죽임을 당하고 나라는 무너져 남은 자들은 그 후 약 2000년 동안을 전 세계를 떠도는 민족이 됩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한 이들은 결국 약육강식의 세상 역사 속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고난과 역경은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 다시 돌이키도록 하시는 연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고난과 역경의 연단가운데 다시 주님을 바라보고 회개함으로 다시 주님의 거룩한 사명을 감당하는 쓰임 받는 제사장으로 소망을 두셨습니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뿌리까지 마른 것을 본 베드로는 내면에 불안과 두려움이 엄습하기 시작했습니다. 무리들처럼 예수님께서 헤롯을 무너뜨리고 위대한 왕국을 건설할 줄 알았는데 예수님은 정치는 관심도 없이 성전에 들어와 큰 소동을 일으켜 이제 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됐습니다. 장엄하고 아름다운 성전을 보며 자신도 그런 영광을 꿈꾸었는데 이제 한치 앞을 알지 못하는 불안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22-24)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는 표현은 당시 사용되었던 속담의 하나로서 ‘어려운 일, 불가능한 일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어둡고 불안한 세상을 바라보기보다 세상과 인생의 주관자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기도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기도함으로 그 뜻을 찾고 구하며 쓰임 받는 자들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둡고 죄악된 세상과 부족하고 연약한 자신을 바라볼 때 한계와 불신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주변의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의 마초같은 세상지도자들의 아귀  다툼 속에서 우리나라의 존재가 미약해보이고 더구나 그 속에서도 경쟁에서 뒤처지는 나의 존재가 하찮게 보입니다. 이런 혼란한 세상을 하나님이 어떻게 주관하시며 또 부족한 나를 어떻게 쓰실 수 있을까 불신에 빠집니다. 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은 변덕스런 세상 풍파 속에서도 본래의 선한 뜻과 계획대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나가실 것입니다. 우리는 약하지만 믿음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바라보고 진정한 주인이요 왕 되신 예수님을 따름으로 하나님역사가운데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이제 사단과의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뜻인 십자가의 구원의 길을 완성해 승리하셨지만 제자들은 기도하지 못해 믿음을 잃고 실패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희생으로 구원의 길을 여셨기 때문에 믿음을 잃은 제자들과 어리석은 무리들과 심지어 죄악된 종교지도자들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영접함으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게 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와 사고로 인해 죽을 저를 강한 권능으로 구원해주시고 하나님영광을 위해 쓰임 받는 새 생명을 살도록 인도하셨습니다. 하지만 구원받은 후에도 하나님영광보다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자신의 문제에 매이며 살아왔습니다. 구원받은 학창시절 때는 건강과 공부문제로 또 은혜로 졸업 후에는 진료문제와 결혼 문제에 매였고 또 은혜로 믿음의 가정을 이룬 후에는 자녀문제와 먹고 사는 문제에 끊임없이 매이며 살아왔습니다. 예수님보다 내가 나의 주인일 때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중에도 예수님은 현실문제가운데 말씀을 붙들도록 하셨고 또 하나님영광을 위해 말씀을 전하는 생명구원역사가운데 쓰임 받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양을 피싱해 섬기려는 소원이 별로 없었지만 학사가 되면서 중간목동들이나 다른 목자님과 양을 말씀으로 도우며 쓰임 받는 목자로 살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쓰임 받는 것에 대한 손해의식과 부담감도 있었지만 나이가 들수록 쓰임 받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깨닫게 됩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나를 위해 살아왔지만 결국 남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 쓰임 받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쓰임 받을 만한 종으로 연단도 주셨지만 또한 다른 이들을 섬기는 종으로 많은 은혜와 축복도 받았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 쓰임 받는 가운데 나와 함께 하신 예수님과 동행할 수 있었고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을 수 있었고 나의 진정한 주인이요 왕으로 섬기는 기쁨과 만족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최근 열심히 섬기지만 양들과 자녀들이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처럼 되지 않을까 염려와 불신이 들어올 때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말씀가운데 세상과 인생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기도하는 길 밖에 없음을 깨닫습니다. 제가 양들과 자녀들이 하나님께 쓰임 받을만한 자로 빚어지도록 섬기며 또 믿음의 기도의 끈을 놓지 않길 기도합니다. 제가 아직도 자기중심적일 때가 많지만 인생의 반환점을 돈 시점에서 왕 되신 예수님을 섬기며 쓰임 받음으로 열매 맺는 인생살 수 있길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우리의 주인이요 왕이 되십니다. 세상 왕들은 우리를 지배하러 오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우리가 나의 주인이요 왕 되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쓰임 받음으로 열매 맺는 인생 영광스런 인생을 살 수 있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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