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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서삼문
작성일 2019-02-03 (일) 12:32
분 류 요한일서
첨부#1 2019년_요한1서1강-1(이인구).hwp (32KB) (Down: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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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요한일서 제1강] 우리의 사귐

  2019년 요한일서 제1강                                                           이인구

우리의 사귐

말씀/요한일서 1:1-2:2
요절/요한일서 1: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사도요한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요한복음, 요한서신(요한1-3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려는 목적으로 쓰여진 책이고 요한서신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성화의 문제에 집중하고 요한계시록은 신자의 마지막인 영화의 문제를 다뤘습니다. 요한서신은 과거역사를 기록한 요한복음도 아니고 미래의 역사를 예언한 요한계시록도 아닌 현재 예수님을 믿는 신자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는 초대교회의 정신적 지주요 사랑의 사도로 불리는 사도 요한이 A D 90년(요한복음을 기록한 몇 년 후) 자신이 직접 체험했던 예수님의 사랑과 가르침을 바탕으로 기록한 그의 첫 번째 편지입니다. 이 서신이 쓰여질 때는 로마황제 도미티아누스가 집권했던 때로 그는 스스로 신이라며 그리스도인을 박해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외적 박해보다 더 힘든 것은 내적으로 영지주의를 비롯한 이단들이 들어와 신자들을 미혹하고 실족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은 이 편지를 통해 그들의 거짓된 교리를 반박하고 신자들이 복음의 진리위에 굳게 서서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진리와 사랑에 기초한 사귐을 배우고 또 실천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태초’는 역사의 시간이 생기기 이전(창조이전)을 말하고 있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은 시간의 역사이전에 존재하신 하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태초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와 생명을 창조하셨고 또 말씀으로 세상역사를 주관하셨습니다. 태초에 말씀으로 존재하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시간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셨는데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체를 입고 이 땅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12제자중 하나이고 항상 예수님 옆에서 함께 하며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까지 목격한 자로써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실제적으로 체험하고 증거했습니다.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말씀은 당시 신자들을 미혹시키는 영지주의의 사상을 반박한 것입니다.
  영지주의는 1세기경 헬레니즘 시대 로마에 널리 보급되었던 사상입니다. 이들은 세계를 영적인 세계와 육적인 세계로 분리한 이원론적인 사상을 주장했습니다. 육적인 세계를 악으로 여기고 영을 통해서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 말했습니다. 자신의 기원과 운명에 대한 신비스럽고 영적인 지식을 알 때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구원자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인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인하면 우리의 신앙이 관념적이 되어 말씀과 삶이 분리된 이중적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은 영과 육체를 이원적으로 대립시키기 때문에 영의 만족을 구하면서도 육적으로는 방탕한 쾌락주의에 빠지든지 아니면 극단적인 금욕주의에 빠졌습니다. 먹고 살기도 힘든 세상에서 왜 이렇게 복잡한 사상을 만들어 사람들을 미혹하는가, 또 이런 사상에 넘어가는 신자들이 있는가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인간을 영과 육체로 분리시켜 육체가 어떤 죄를 짓든지 영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구원의 길입니다.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처럼 인간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거룩한 것을 사모하지만 또한 더러운 육신의 죄악을 갈망합니다. 육신의 죄악에 빠지면서도 구원받기를 바라는 것이 인간의 죄악된 본성입니다.
  그럼 왜 하나님께서 하늘의 모든 영광과 특권을 버리고 약하고 제한적인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까?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님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고 우리들에게 영원한 생명, 진정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물론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이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가집니다. 하지만 그 생명은 연약하고 불완전한 일시적 생명입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을 떠남으로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태어날 때부터 죽음을 향해 가는 불완전하고 일시적인 생명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인간이 죄 가운데 자신을 떠났지만 그들을 사랑하셔서 그들과 사귀기 위해 그들의 연약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인과 사귀기 위해 낮아져 오신 하나님의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랑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2)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언제부터인가 혼자 사는 것이 대세인 세상이 되었고 유명한 연예인이지만 혼자 사는 것을 보여주는 TV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가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방송프로그램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혼자 사는 것이 좋아서 혼자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인구수는 증가되고 과학기술과 사회 문화는 발전되지만 사람들은 ‘군중속의 고독’처럼 더욱 외로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중국에서 어떤 노인은 혼자 살다가 혼자 죽어갈 것이 너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공개적으로 같이 살 사람을 구해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혼자 고독사 했습니다. 최근 많은 사람들이 내면의 빈자리를 매우기 위해 애완견을 가족처럼 기르고 심지어 인공지능로봇이 가족이요 친구가 되기도 합니다. 어떤 과학자가 죽은 아버지를 그리워해서 인공지능 로봇을 만들어 아버지가 살아왔던 모든 정보를 입력하고 또 습관과 말투까지 똑같이 제작했습니다. 최근의 딥러닝기술을 통해 인공지능로봇은 기존에 입력된 정보를 응용해서 정말 과거의 살아있는 아버지처럼 똑같이 말했습니다. 아들과 소통하며 아들의 슬픔까지 공감했습니다. 로봇이 정말 아버지가 됐는지, 아버지가 로봇이 됐는지 구별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아버지 로봇에게 “정말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니 그 로봇은 대답하지 못하고 고민하다가 버그(bug)가 왔습니다. 설사 인공지능로봇의 발전이 진행되어 사랑을 인식하고 사랑을 표현한다 해도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진정한 사랑은 자기 부인이요 자기희생이므로 어느 로봇이 스스로를 파괴하면서까지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상대방과 함께 있어주고 그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 마음에 공감해주는 로봇같은, 애완견같은 사랑도 해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자신의 이기적 사랑을 채우기 위해 상대방에게 요구하고 집착함으로 오히려 고통을 줍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생의 명언처럼 ‘혼자 살면 외롭고 같이 살면 괴롭다.’ 말합니다.
  요사이 사람들은 스마트폰으로 수많은 온라인의 관계들을 맺고 살아갑니다. 쉬는 시간에도 계속 ‘카톡, 카톡’ 하며 부릅니다. 하지만 그런 많은 관계의 끈 속에서도 사람들은 더 외로움을 느낍니다. 왜냐면 그런 외적 관계 속에서는 진정한 사랑이 없고 사귐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이 고독과 외로움을 극복하고 다른 이들과 진정한 사귐을 가질 수 있습니까? 철학자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말했습니다. “타인의 지배 아래에 놓여 있는 일상세계로부터 떨어져 나온 유한하고 고독하며 불안으로 가득 찬 세계, 그곳이야 말로 우리의 본래적인 세계이며, 그곳에서 비로소 우리는 존재의 의미를 밝힐 수 있다.” 약간 어려운 말이지만 결국 인간은 고독과 외로움을 통해 진정한 자신의 존재를 깨달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수직적) 사귐이 회복되어야 인간들과의 (수평적) 사귐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 다른 이들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실체 없는 일시적이고 표면적이고 가식적인 관계보다도 나를 사랑하셔서 나와 함께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과의 사랑의 사귐을 회복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우리가 보고 들을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3)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분이 예수라는 말은 예수님은 관념이 아니라 실체라는 의미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예수님을 믿지만 관념적으로, 머리속으로만 믿습니다. 기도를 통해 대화해 본적이 없고 말씀을 통해 인생의 어둠과 혼란 속에서 한 걸음씩 인도하시는 예수님을 체험해본 적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어도 능력이 없고 기쁨이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죄악 되고 연약한 인간과 함께 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와 공감하고 소통하시기 위해 말구유에서 태어나셨고 일생 머리 둘 곳 없이 서민들과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또 죄로 인한 인생의 고통과 번민을 이해하고 감당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육신의 약함과 고통을 체험하심으로, 내 약점을 아시고 죄 지을 수밖에 없는 약함을 아시고 쓰러지고 넘어지는 나의 고통을 아시고 병들어 고생하는 나의 슬픔과 눈물을 아시고 죄의식 속에서 방황하고 좌절하는 내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하셨습니다. 그리고 먼저 오셔서 손을 내미셨습니다. 우리도 지금 나에게 손을 내미신 예수님을 만질 수 있습니다.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처럼 나와 함께 하신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질 수 있고 그 손을 만질 수 있습니다. 이 예수님을 실제적으로 체험할 때 구원의 확신이 생깁니다. 죄의 종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믿음과 자존감이 생깁니다. 그 믿음과 자존감속에서 인생의 어떤 고난과 역경과 아픔이 닥쳐와도 이겨 낼 수 있는 능력이 나옵니다. 죄로 인해 수없이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그 믿음과 자존감속에서 나옵니다.
  예수님과의 사귐은 신자로써의 은혜이자 특권입니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대통령의 사돈의 팔촌이나 영부인의 친구라도 큰 영광이라고 사람들에게 떠벌리고 다닙니다. 하지만 신자는 언제 어디서든지 말씀과 기도를 통해 나와 함께 하신 예수님과 사귀고 또 누릴 수 있습니다. 신자의 진정한 기쁨이 여기서 나옵니다.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4) 예수님과 사귀는 자의 특징은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세상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기쁨과 가장 근접한 세상의 기쁨이 있다면 아기가 엄마 품에 안겨 있을 때 누릴 수 있는 평안이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나를 지으시고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만이 줄 수 있는 내면의 평안이요 기쁨입니다. 신앙이 얼마나 건강한지를 알기 위해 자신에게 물어보는 아주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나는 지금 기쁜가?’ 사도 바울은 죽기 전 로마의 감옥에서 빌립보에 있는 교인들에게 편지했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립보서4:4,6,7) 어떻게 감옥에서 죽음을 앞두고 이런 기쁨의 편지를 쓸 수 있습니까? 그것은 인생의 고난의 아픔과 죽음의 두려움보다도 나와 함께 하신 예수님과의 사귐의 기쁨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가장 큰 고난인 죽음의 강을 혼자 건너면 반드시 빠져죽지만 예수님과 함께 라면 능히 건널 수 있고 영생의 새 땅으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 중 유일하게 사도요한만이 순교하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그가 평화로운 삶을 산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증거하면서 다른 제자들이 순교하는 것을 지켜보며 자신도 많은 위기 속에서 목숨을 이어가다 늙어서 밧모섬에 유배되어 생을 마쳤습니다. 오래 살면서 누구보다도 많은 고난과 역경을 겪어야 했지만 그럴수록 예수님과의 깊은 사랑의 사귐을 통해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세상이 주는 일시적이고 허무한 기쁨이 아닌 예수님께서 주시는 내면에서 솟아나는 기쁨을 체험하고 증거했습니다.
신자는 예수님과의 사랑의 사귐을 통해 또한 형제들을 사랑으로 사귈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만 잘 섬깁니다. 혼자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고 헌금하고 기도합니다. 구약시대처럼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에만 신경을 씁니다. 하지만 신약시대에 와서 예수님은 이웃을 돌아보고 사랑하라 명령하셨습니다. 로마서에는 믿음으로 의롭다고 했습니다.(롬5:1) 야고보서에서는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했습니다.(약2:21)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사람들 앞에서는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신자를 평가할 때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이 아닌 눈에 보이는 행함으로 판단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행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과의 사랑의 사귐이 있는 신자가 또한 사랑으로 형제와 이웃을 사귈 수 있습니다.
  5절부터는 신자가 예수님과 참된 사귐을 갖기 위해서 가져야 될 기본자세를 말하고 있습니다. 독일 신학자 고가르텐(1886-1967)은 우리 인생이 4개의 전치사 ‘of, for, with, by'로 결정된다고 말했습니다. 첫째 'of'는 소속을 뜻하며 내 인생이 ’누구에게 속해 있느냐‘ 묻는 것입니다. 두 번째 ’for'는 삶의 목적으로 ‘무엇을 위해 사느냐’의 문제이고 세 번째 ‘with'는 관계에 대한 것으로 ’누구와 함께 사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마지막 ’by'는 삶의 방식으로 ‘무엇으로 사느냐’ 대한 물음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과 사귐을 가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빛 가운데 나가야 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그 속에 조금의 어둠도 없으십니다. 요한서신에서는 ‘하나님은 빛이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두 주제가 반복해서 나옵니다. 이 두 가지는 하나님의 대표적인 성품입니다. 빛은 세상의 모든 어둠을 몰아내고 생명을 줍니다. 빛이 있는 곳에 영광이 있고 거룩이 있고 정의가 있고 진리가 있습니다. 중세시대 그림을 보면 신령한 사람의 머리위에 후광이 비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그려 넣은 것입니다. 잘생겼다고 돈이 많다고 후광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귀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빛이 내 어두운 인생을 밝게 비추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심으로 나의 모든 죄의 어둠을 몰아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6) 그러면 ‘어둠에 행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이 말씀은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 요한서신은 요한이 불신자들이 아닌 예수님을 영접한 신자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도 어둠이 있습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봉사하는 사람도 죄를 짓을 수 있습니다. ‘어둠에 행한다’는 것은 실수로 한 두 번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죄를 지음으로 죄에 매이는 것을 말합니다.
  한 신자가 목사님께 질문했습니다. “마귀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시간은 얼마나 걸립니까? 또 우리에게서 떠나는 시간은 얼마나 걸립니까?” 목사님이 대답했습니다. “캄캄한 방에 불을 켜보세요. 순식간에 밝아집니다. 그렇다고 어둠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다시 불을 끄게 되면 순식간에 어두워집니다.” 어둠은 어둠이 몰려온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빛이 없는 상태입니다. 우리 육신은 본래 어둠에 사로잡힌 죄인이었습니다. 죄의 종이었습니다. 내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 인간의 본질 안에 숨어 있습니다. 마음이 착한데 죄를 짓는 경우는 없습니다. 착하다고 착각할 뿐입니다. 착하게 살고 싶은 성품 뒤편에 죄를 즐기고 싶은 추악한 본성이 죄를 감추고 세련되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무식한 사람은 무식하게 죄 짓고 유식한 사람은 유식하게 죄 짓는 차이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똑똑한 정치인이 짓는 죄는 무식한 노동자가 짓는 죄보다 영향력이나 파괴력이 더 큽니다. 그 가식의 가면을 벗으면 누구나 죄인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지 못하면 구원자되신 예수님이 필요 없어집니다. 자신이 죄가 없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믿음으로 깨끗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신자가 사는 세상은 죄악되고 신자의 육신은 아직도 완전히 죄의 본성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영혼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을 행하기를 원하지만 육신은 수시로 죄에 빠지곤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 구원받은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구원받지 못한 이는 죄도 구원도 모른 채 평생 죄에 빠져 살다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구원받은 신자는 하나님의 자녀로 내면에 하나님의 빛(성령)이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육신의 모습으로 찾아오셨지만 부활승천 후 모든 신자들에게 다시 오실때는 성령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는 죄 사함 받음으로 잠자던 영이 살아나 성령으로 오신 예수님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사귀는 삶은 하나님의 빛 가운데 행하는 삶(성령을 좇는 삶)입니다. 그것은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매일 하나님 말씀 앞에 나아가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예수님의 피를 의지해 회개하는 삶입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깨뜨리는 벽입니다. 신자는 죄문제를 해결해야 하나님과의 진정한 사귐을 가질 수 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기독교문화를 즐기며 예수님과 사귄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찬양을 하며 교회에서 성도들 간의 친목교제를 가지며 또 지식적인 말씀공부를 통해 예수님과 사귄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온전한 사귐을 가질 수 없습니다. 사귐은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다가온다 해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의 사귐을 위해 성육신하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심으로 구원역사를 완성하셨습니다. 또 성령의 모습으로 모든 신자들에게 인격적으로 찾아오셔서 함께 사귀며 인도하시고자 하십니다. 하지만 신자가 예수님과 사귄다 하면서 죄를 회개하지 않고 어둠속에 머물러 있다면 절대로 사귐이 이뤄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내속에서 부르짖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 가운데, 안타까움으로 내 양심을 흔들어 깨우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나의 죄를 발견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예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죄를 회개하도록 노예처럼 뒤에서 채찍질하며 푸시하지 않으시고 친구처럼 함께 하시며 목자처럼 앞에서 본을 보이며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매일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 앞에 나와 회개하는 삶, 이것이 신자의 성화되는 삶입니다. 이 삶을 통해 신자는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서로 닮아간다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사랑으로 사귀면서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최면 때문에 자존심 때문에 아니면 귀찮아서 죄가 없다고 말하면 그것은 스스로 속이고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않고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이 편지를 쓰는 이유는 바로 예수님의 피로 거듭난 신자들이 영지주의자들 같은 이중적이고 외식적인 죄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죄를 발견하고 다시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덧입고 돌이키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수시로 죄의 유혹에 흔들리고 또 설사 회개하고 다시 죄에 빠진다 해도 우리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할 대언자이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은 신자들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죄인을 위해 자기 몸을 불살라 바친 화목재물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매일 사귐으로 죄를 이기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인생살 수 있길 기도합니다.
 새해가 되어도 여러 가지 외적문제로 신앙생활의 기쁨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작년 친척분의 치아를 발치한 후 골수염으로 진행되 종합병원으로 의뢰했는데 내가 추측했던 골다공증 약 때문이 아니라 발치문제라고 진단받아 큰 스트레스를 받게 됐습니다. 그 후 첫째아이가 건강이 안좋은 상태에서 수능을 봤는데 예상보다 점수가 잘나와 감사가운데 기도하며 기대를 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기대했던 대학은 다 떨어지고 또 수능이후 했던 기흉수술이 바로 재발되어서 큰 스트레스를 받게 됐습니다. 작년 힘들게 병원이전 후 하나님의 은혜로 많은 환자들을 보게 됐지만 기쁨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런 중에 요한일서 말씀가운데 신자의 기쁨에 대해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동안 자신이 무엇을 통해 기쁨을 얻었는가 돌아보게 됐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을 통해 받은 많은 은혜 속에서 기쁨을 체험했지만 예수님과의 사귐을 통한 기쁨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한 기쁨은 환경이나 조건개선, 소유를 통해 얻는 것이 아닌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얻는 존재를 통한 영적기쁨입니다. 제가 치과의사로서 부모로서 외적 만족과 인정을 통한 기쁨을 구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의 사귐을 통해 누구도 그 무엇도 막을 수 없는 영적기쁨을 찾고 구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예수님과의 사귐을 위해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외적문제도 조금씩 해결되고 있었습니다. 종합병원에 의뢰했던 친척 분은 결국 발치문제가 아닌 오랫동안 복용했던 골다공증 약 때문임이 드러났고 첫째 아이도 건강을 회복하고 재수를 준비하게 됐습니다. 재수하면서 함께 하신 예수님과의 영적 사귐을 통해 인내와 믿음을 배우고 기쁨을 체험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인생들에게 진정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추하고 약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와 함께 하시기 위해 나에게 오셨습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의 사랑을 영접하고 받아들일 수 있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사귐으로 예수님께 속하고 예수님을 위해,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의 말씀으로 사는 신자가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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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5 요한일서 [2019년 요한일서 제1강] 우리의 사귐 서삼문 2019-02-03 1103
574 열왕기상 [2019년 열왕기상 제10강]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 관리자 2019-01-27 1089
573 열왕기상 [2019년 열왕기상 제9강] 하나님의 세미한 소리 관리자 2019-01-20 1148
572 예레미야 [2019년 신년말씀 제3강]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관리자 2019-01-13 1038
571 기타 [2019년 신년말씀 제2강] 성전을 건축하라 관리자 2019-01-06 858
570 요한복음 [2019년 신년말씀 제1강]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관리자 2018-12-30 937
569 누가복음 [2018년 성탄말씀 제3강]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느니라 관리자 2018-12-23 875
568 누가복음 [2018년 성탄말씀 제2강] 구원의 뿔 돋는 해되신 예수님 관리자 2018-12-16 1204
567 누가복음 [2018년 성탄말씀 제1강] 영원한 왕 예수님 관리자 2018-12-09 934
566 열왕기상 [2018년 열왕기상 제8강] 바알에게 도전한 엘리야 관리자 2018-12-02 1257
565 열왕기상 [2018년 열왕기상 제7강] 여호와 보시기에 관리자 2018-11-25 992
564 시편 [2018년 추수감사예배] 주의 은택을 감사하나이다 관리자 2018-11-18 992
563 열왕기상 [2018년 열왕기상 제6강] 금송아지를 만든 여로보암 관리자 2018-11-11 1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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