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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9-03-24 (일) 12:38
분 류 창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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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창세기 제3강] 에덴동산을 창설하신 하나님

  2019년 창세기 제3강                                                              오정훈

에덴동산을 창설하신 하나님

 말씀/창세기 2:4-25
 요절/창세기 2: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태국의 푸켓은 바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에머랄드빛 바다빛깔로 지상낙원으로 불린다고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낙원을 상실한 사람들은 이처럼 낙원을 꿈꾸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아무리 아름다운 곳도 인간의 탐욕과 죄악으로 결국 낙원이 되지 못합니다. 진정한 낙원은 하나님이 창설하신 에덴동산뿐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이 에덴동산을 우리 안에 회복하여 주길 원하십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해 에덴동산에 대한 소망을 덧입고 주 안에서 낙원을 회복하므로 에덴의 행복과 기쁨을 누리게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4절입니다.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2장 4절부터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 하나님으로 바뀌어 나옵니다.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이 보통명사 엘로힘, ‘전능자’란 뜻을 가지고 있다면 여호와 하나님은 히브리어 고유명사인 야훼로서 ‘스스로 계신 분, 완전하신 분,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창조하신 인간들과 함께 하사 교제하시는,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기 전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도, 밭에 채소도 나지 않았습니다. 오직 안개만 지면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시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없는 집이 폐가가 되듯이 사람이 없는 땅은 황무지로 남아있게 됩니다. 7절을 다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우리는 앞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고귀하게 지어진 존재임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체는 흙 그것도 땅의 먼지로 만들었다고 하십니다. 흙은 연약함, 비참함을 상징합니다. 수저 중에서도 가장 낮은 수저를 가리켜 흙수저라고 합니다. 오뚝한 코, 우람한 어깨, 강철 같은 다리, 초롱초롱 빛나는 눈, 이 모든 것을 생각하면 인간이 흙으로 지어진 존재라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땅의 흙으로 만들어진 존재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파스칼은 이런 인간을 향해 “바늘과 침, 수증기로도 인간을 죽일 수 있다. 거기에 비하면 우주는 얼마나 광활하고 위대한가?” 하였습니다. 실제로 강철같이 튼튼해 보이는 사람도 독감 한 번 걸리면 꼼짝도 못하고 드러눕게 되고 맙니다. 면역이 떨어져 대상포진에라도 걸리는 날에는 죽음의 고통을 맛보게 됩니다. 또 내면은 얼마나 약한지 별것도 아닌 사람들의 말에 쉽게 상처받고 쓰러져 버립니다. 그리고 결국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시편 기자는 이런 인생의 연약함을 잘 알고 노래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103:14).” 사람들은 이렇게 흙으로 된 연약한 육신에 낙심합니다. <저도 요즘 많이 낙심하고 있습니다.> 이왕 만드시는 것 강철이나 화강암 같은 것으로 만드셨으면 좋았을 텐데 왜 하필이면 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흙으로 만드신 것일까요?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 육신이 흙임을 알고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할 때 연약한 육신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흙으로 지어졌다는 것을 아는 것은 비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우리가 자기 잘난 맛에 살지 않고 또 강철 같은 사람이 되도록 기도하지 않고 자신의 연약함을 깊이 인정하고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승리하는 삶 살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흙으로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므로 사람이 생령(living being)이 되었습니다. ‘생령이 된지라’ 이는 열정적인 생명력,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연결되고자 하는 거룩한 열망을 가진 존재라는 뜻입니다. 사람에게는 살고자 하는 열망이 있습니다. 이 열망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향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엄마와 태아의 생명이 탯줄로 연결되어 있듯이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과 연결돼 있습니다. 그래서 흙에 속한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위의 것을 찾습니다. 우리가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때마다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으로부터 생기를 얻어야 합니다. 기도로 영혼의 호흡을 하고 영의 양식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과 제대로 연결되어 하나님이 불어 넣어주시는 생명력 넘치는 삶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흙으로 지으신 인간을 위해 무엇을 하셨습니까? 8절을 다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셨습니다. 에덴은 ‘희락, 기쁨, 즐거움’이란 뜻으로 기쁨과 희락의 동산, 낙원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낙원을 소망하며 이상향을 꿈꿉니다. 영화 미션에 나오는 이과수 폭포는 그곳을 방문해본 목자님들 말대로 몇 개 남지 않은 지상 낙원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때가 묻지 않은 아름다운 자연 환경과 환상적인 폭포는 낙원 그 자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영화에서 보듯이 폭포 위의 과라니 부족을 노예로 사냥하는 로드리고 멘도사(로버트 드니로) 같은 인간이 있는 한 이곳도 진정한 낙원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진정한 낙원이 없기에 사람들은 디즈니랜드 에버랜드 같은 놀이동산을 만들어 잠시라도 낙원의 즐거움을 누리고자 합니다. 그러나 애들 데리고 여기저기 다니다 보면 녹초가 되어 기쁨이고 희락이고 얼른 집에 가서 쉬고 싶어질 뿐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하나님이 창설하신 에덴동산은 기쁨과 행복으로 충만한 완전한 낙원이었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첫째로, 외적인 환경이 완벽하였습니다. 9절을 다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에덴동산에는 세상의 모든 종류의 과일이 사시사철 주렁주렁 열렸습니다. 사과, 바나나, 배, 포도, 망고는 기본이고 마트에 가면 쪼금 비싸서 망설이게 되는 체리와 과일의 황제 두리안까지 없는 것 없이 널려 있었습니다. 맛만 좋은 것이 아니라 보기에도 아름다워 인간의 보는 즐거움을 만족시켜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먹고 사는 문제로 입시경쟁, 취업전쟁으로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데 에덴동산은 먹고 사는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진정한 낙원이었습니다. 거기다가 동산 중앙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었습니다. 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영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은 생로병사의 고통에 시달리며 살아갑니다. 사고로, 암과 같은 질병으로, 또 노화로 죽어갑니다. 건강하지 못하면 돈도 권력도 다 소용없습니다. 병원에 가보면 아픈 사람들의 소망은 오로지 건강을 회복하는 것뿐입니다. 다른 것은 필요 없다고 말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항상 왕성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곳에는 아픔도 치매도 죽음도 없습니다. 생명력이 충만한 낙원입니다. 그러나 이 생명은 그냥 얻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통해 하나님이 정하신 선과 악의 기준을 따라 살 때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에덴에서 강이 발원하여 그곳을 적시며 네 곳으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강이 시작되는 곳에 문명이 생겨나고 풍요의 역사가 있습니다. 첫째와 둘째 강은 비손과 기혼으로 각각 ‘풍부하게 흐른다’, ‘차고 넘친다’는 뜻으로 강바닥이 훤히 내다보이는 중랑천과는 차원이 다른 풍요로운 강이었습니다. 셋째와 넷째 강은 지금의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으로 에덴동산이 전설적인 존재가 아님을 말해줍니다. 그곳에는 순금이 있었으며 베델리엄과 호마노 같은 각종 보석이 널려 있었습니다. 이 에덴동산은 수정같이 맑은 강이 흐르고 정금으로 장식된 장차 우리가 들어갈 하나님 나라와 흡사합니다. 현재 이스라엘이 광야에 있지만 가나안 땅에 들어갈 소망이 있듯이 우리도 언젠가는 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소망이 있습니다. 이 낙원에 대한 소망 가운데 하나님이 정하신 선과 악의 기준을 따라 진리의 길 믿음의 길을 가므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거룩한 백성들이 될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둘째로, 에덴동산에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있었습니다. 15절을 다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에덴동산은 무위도식하는 곳이 아니라 그것을 경작하고 지키라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명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인간은 이처럼 처음부터 일하는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타락한 세상에서 노동은 고통이지만 본래 노동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밀레의 만종은 열심히 일한 뒤에 감사 기도를 드리는 부부를 통해 일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를 잔잔하고도 감명 깊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요즘은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어 괴로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40-50대 실업으로 인한 빈곤, 그로 인한 고독사가 급증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시대에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사명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사람들을 진리의 말씀으로 양육하여 키우는 위대한 사명이 있습니다. 노동의 의미와 가치가 왜곡된 시대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힘써 감당하므로 인생의 참된 보람과 열매 맺는 삶 살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셋째로 거룩한 계명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16,17절 말씀을 다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를 임의로 먹을 수 있는 무한한 자유를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요일별로 색깔별로 계절별로 제한을 두지 않으시고 원하는 대로 마음껏 먹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인간에게 무한한 자유를 주는 동시에 반드시 지켜야 하는 한 가지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경고하십니다. 왜 먹으면 죽을 것을 낙원에 만들어 놓으시고 무시무시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선과 악의 판단 기준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그것을 넘어서게 되면 죽게 됨을 알려주시기 위함이십니다. 인간이 할 일은 하나님이 정하신 선과 악의 기준을 절대적으로 지키므로 그 안에서 에덴의 행복을 마음껏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기가 보기에 무엇이 옳고 그른가 판단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상대적인 가치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좇아 선과 악의 개념을 바꾸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또 인기를 끌고 있다고 그것이 절대로 다 옳은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어떤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한 것으로 절대로 그 길로 가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보기에 좋은 대로 행한다면 거기서부터 에덴이 파괴되고 결국은 죽음에 이르게 되고 맙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언16:25).”
 이처럼 세상에는 임의로 먹을 수 있는 것이 있고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세계가 있습니다. 저녁에 라면을 먹을 것인지, 김치에 밥을 비벼먹을 것인지 그것은 얼마든지 임의로 할 수 있습니다. 20년도 더 전에 장막을 할 때 존경하는 이인구 목자님은 아침마다 삼겹살을 구워먹었습니다. 맛있다 하면서 저에게도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김태진 목자님은 그 먹다 남은 삼겹살에다가 김치와 여러 가지를 섞어서 특이한 찌개를 끓여 맛있다고 저보고 먹어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결단코 먹지 않았습니다. 이런 것은 임의로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로 임의로 취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소수자 인권존중이라는 이유로 동성애를 지지하고 합법화하는 것은 절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요즘 대학가에서 학생들은 동거하는 것을 대학가 문화 트렌드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성적타락과 순리를 거스르는 동성애 모두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악을 한두 번 체험한다고 설마 죽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설마가 사람 잡습니다. <이번에 터진 버닝썬 사건은 사람이 임의로 취해서는 안되는 일을 행할 때 그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독은 한번 먹든 두 번 먹든 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그러므로 하나님 보시기에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이지 판단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이 진부하고 고리타분해 보여도 그것만이 절대 진리임을 알고 그것을 좇아 살아야 합니다. 거기에 행복이 있고 에덴이 회복되는 역사가 시작됩니다.
넷째로, 에덴동산에는 에덴 중의 에덴인 결혼이 있었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요즘 혼자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나 혼자 산다’라는 프로가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습니다. 취업난에 너무나 올라버린 집값, 과다한 자녀양육비 등으로 결혼을 포기하고 혼자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혼자 사는 것이 별로 어색하지 않은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다 말씀하십니다. 혼자 살면 외롭고 혼자만의 한계에 처하게 됩니다.(전도서4:9,10) 타락한 이후에는 성적 유혹을 이길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혼자 살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창설하신 결혼은 사명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결혼은 나이가 찼으니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하나님이 짝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결혼만큼은 자기이상과 감정을 좇아 자기 뜻대로 하고자 합니다. 학벌과 직장 돈과 외모를 보고 결혼합니다. 그러나 출발이 잘못되면 불행한 결과를 맞게 되고 맙니다. 유명 운동선수 연예인들의 결혼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지만 얼마 못가서 이혼했다는 소식을 흔치 않게 듣게 됩니다. 이처럼 본래 의미와 목적을 상실한 결혼은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창설하신 결혼은 또 다른 인생 출발의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것은 몰라도 결혼만큼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명 중심으로 해야 합니다. 그때 진정으로 행복하고 사랑이 넘치는 가정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짓고자 하셨습니다. 배필이라는 말은 맞은편에 있는 자, 그의 상대가 되는 사람이란 뜻으로 돕는 배필은 육체적 사회적 영적으로 상대방을 도와주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남자는 여자의 부족한 점을 도와주고 여자는 남자의 부족한 점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대개 남자는 큰소리는 잘 치지만 섬세하지 못하고 뒷감당을 하지 못합니다. 보기보다 겁이 많고 허약하여 절대로 의지할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반면 여자는 신체적으로 연약한 그릇으로 남자의 도움이 필요하고 큰일을 결정할 때 쉽게 방향을 잡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남편은 그런 점에서 아내에게 도움을 주고 아내도 남편에게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서로의 부족함을 알고 서로 도와주고 동역하는 것이 결혼을 창설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에게로 인도하셨습니다. ‘너는 먹는 게 좀 돼니 돼지’, ‘너는 목이 기니 기린’ 이렇게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그 이름이 되었습니다. 이는 아담이 만물의 영장으로서 그 주권을 행사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열심히 사명을 감당해도 혼자인 아담은 어딘가 모르게 외롭고 쓸쓸해 보였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그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그것으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인간에게는 뼈가 206개나 있는데 하필이면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혹자는 “여자가 남자 위에 군림하지 않도록 머리뼈로 만들지 아니하셨고 남자에게 짓밟히지 않도록 발뼈로 만들지 아니하셨으며 심장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호받고 사랑받도록 하기 위하여 갈비뼈로 만드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남자는 갈비뼈 하나가 없으므로 그만큼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이를 알고 겸손히 아내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아내도 세계를 지배하는 자는 남자지만 남자를 지배하는 자는 여자라는 말에 우쭐하여 남자를 휘어잡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서로 귀하게 여기고 존중하며 겸손히 동역하여 하나님의 뜻을 섬길 때 가정의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22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드시고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셨습니다. 이는 결혼을 시작하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완성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심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결혼에 누구보다도 문제의식과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나를 가장 잘 아시고 나를 가장 잘 도와줄 배필을 친히 찾아 인도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내 갈비뼈를 찾기 위해 돌아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열심히 아담처럼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예비하신 가장 합당한 동역자를 주십니다. 이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특별히 아직 결혼하지 않은 분들에게 이 믿음주시길 기도합니다. 그래서 올 한해 우리 가운데 아름다운 믿음의 가정들이 많이 세워지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면 여자를 맞이하는 아담의 소감이 무엇입니까? 23절을 다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 이는 자기 몸의 일부분인 여자를 맞이하는 아담의 벅찬 감격과 기쁨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사람을 만날 때 이런 기쁨과 감격이 있습니다. 나의 인생을 축복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남자는 ‘이쉬(ish)’이고 여자는 '이샤(isha)'로서 거의 비슷하면서도 다릅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주신 아내를 나의 살 중에 살이요 뼈 중의 뼈로 영접하였습니다. 자신의 몸의 일부로 영접하고 자신의 몸처럼 사랑한 것입니다. 남편은 이와 같이 아내를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해야합니다. 아내를 미워하는 것은 곧 자기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하여 칠년을 수일같이 여겼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성경이 말하는 바 결혼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첫째, 남자가 부모를 떠나는 것입니다. 부모를 떠난다는 것은 ‘남기고 두고 간다’는 것으로 아내와 합하기 위해서 부모와의 강한 결속을 떠나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통해 인격적 육체적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것을 말합니다. 부모를 떠나 자립할 때 온전한 가정을 이룰 수 있습니다. 둘째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연합’이란 육체적 연합만이 아니라 인격적 연합, 영적 연합을 의미합니다. 딱풀로 종이 두 장을 붙이면 종이 한 장이 되듯이 그렇게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를 위해 마음과 뜻이 같아야 하고 믿음도 같고, 무엇보다 사명이 같아야 합니다. 이렇게 연합할 때 둘이 온전한 하나가 됩니다. 물론 먹는 것, 삶의 스타일은 다를 수 있고 또 다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 분 하나님, 한 분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습니다(마19:6). 죽으나 사나 껌딱지처럼 하나가 되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부끄러움이 없는 것은 두 사람 사이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완전히 하나가 된 상태를 말합니다. 서로 깊이 사랑하고 신뢰하는 가정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가정이요, 우리가 이루어야 할 행복한 가정의 모습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합당한 돕는 배필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가정, 열매 맺는 가정 되게 하시길 기도합니다.
 저는 예전에 고린도전서7:28 말씀에 은혜 받고 혼자 살고자 결단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장가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사도 바울이 나를 아껴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어찌 순종하지 않을 수 있으리요’ 하고 바울 수도원을 만들어 혼자 살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숨어 있는 낙원을 찾아 조국의 산하를 돌아다녔습니다. 이런 저를 찾아 사모님은 자주 전화하셨는데 그때마다 저는 주왕산 월출산 소백산 정상에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세상에 있지도 않은 낙원을 찾아 혼자 돌아다니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결혼의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영육 간에 생육하고 번성케 하사 세 아들을 주시고 몇몇 사람들을 섬기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예전에는 혼자 사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가정이 에덴 중에 에덴이라는 말이 사실이었습니다. 동역자의 섬김도 받고 가정을 통해 자녀양육과 양들을 섬기며 하나님을 배우니 인생이 좀 더 깊어지고 내면에 사랑과 인내의 열매도 맺히게 되었습니다. 또 부족하지만 거룩한 계명의 말씀을 좇아 살 때 세상 죄에 찌들지 않고 경건하게 그 안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어 감사드리게 되었습니다. 때로 제자양성의 사명, 말씀의 우물을 파는 사명이 힘들고 부담스럽지만 이를 감당할 때 살아 있음을 느끼고 생명력이 생겨나게 됩니다. 바울 수도원이나 만들어 고독하고 처절하게 살다가 끝날 죄인을 찾아오시고 하나님 안에서 참된 행복과 기쁨을 누리게 하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려드립니다. 제가 낙원을 상실하여 절망과 고통 속에 있는 영혼들에게 하나님 안에 있는 이 에덴을 증거하므로 이를 회복하고 누리게 하는 역사에 쓰임 받을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에덴동산을 창설하신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오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잃어버린 낙원을 회복하고 참된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시대에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며 맡기신 사명에 충성함으로 하나님이 베푸신 가정 안에서 에덴의 행복을 누리는 복된 삶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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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9 창세기 [2019년 창세기 제19강] 벧엘의 하나님 관리자 2019-07-21 1180
598 창세기 [2019년 창세기 제18강] 이삭의 축복을 받은 야곱 관리자 2019-07-14 1314
597 창세기 [2019년 창세기 제17강] 약속의 땅에 거주한 이삭 관리자 2019-07-07 1049
596 창세기 [2019년 창세기 제16강] 이삭의 결혼 관리자 2019-06-30 1068
595 창세기 [2019년 창세기 제15강]아브라함을 시험하신 하나님 관리자 2019-06-25 1038
594 창세기 [2019년 창세기 제14강] 약속대로 이삭을 주신 하나님 관리자 2019-06-16 1021
593 창세기 [2019년 창세기 제13강] 아브라함을 친구 삼으신 하나님 관리자 2019-06-09 992
592 창세기 [2019년 창세기 제12강] 여러 민족의 아버지 아브라함 관리자 2019-06-02 1002
591 창세기 [2019년 창세기 제11강] 뭇별을 보여주신 하나님 관리자 2019-05-26 1009
590 창세기 [2019년 창세기 제10강] 아브람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 관리자 2019-05-19 1066
589 창세기 [2019년 창세기 제9강] 아브람을 부르신 하나님 관리자 2019-05-12 1060
588 누가복음 [2019년 부활절 수양회 제2강] 청년아 일어나라 관리자 2019-05-05 1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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