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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9-04-14 (일) 12:51
분 류 창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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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창세기 제6강] 홍수 심판과 구원의 방주

  2019년 창세기 제 6 강                                                              최동진

홍수 심판과 구원의 방주

말씀 / 창세기 6:1-22
요절 / 창세기 6:13,14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죄는 가인과 라멕을 거치면서 점점 성장하였습니다. 세상은 음란하고 부패하고 포악함이 가득했고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셋의 후예들마저 죄의 영향을 받아 노아 시대에 와서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세상으로 인해 한탄하시고 홍수심판으로 쓸어버리고자 하셨습니다. 이런 가운데에서도 세상에 대한 소망을 완전히 끊지는 않으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노아 한 사람을 통해 세상을 보존하시고 구원 역사를 이루어 나가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머지않은 이 말세의 시대에 하나님의 경고하시는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말씀을 준행함으로 나 자신을 위한 구원의 방주 짓는 생활을 힘써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I. 죄악이 가득한 세상(1-7)
  1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났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았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셋의 후예들로서 경건한 믿음의 자녀들을 가리키고, 사람의 딸들이란 가인의 집안의 불경건한 자녀들을 가리킵니다. 결혼은 그 시대의 가치관을 잘 반영해 줍니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창설하신 것으로서 거룩하고 신성한 것입니다. 결혼은 육신의 정욕을 채우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연합하여 한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뜻보다 여자의 아름다운 외모에만 관심을 가지고 자기들이 보기에 좋아 보이는 모든 여자로 아내를 택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들은 여자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있는지, 영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 성숙한 내면성이 있는지 없는지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여자들은 오로지 남자들에게 예쁘게 보이기 위해 짙은 화장을 하고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온갖 명품으로 치장하고 남자들을 유혹하는 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또 형제들은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 육체를 갈고 닦았습니다. 그 시대는 한마디로 음란하고 부패했습니다. 오늘날의 결혼 풍속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믿음의 결혼이 좋은 것은 다 인정합니다. 그런데 막상 결혼을 할 때가 되면 외모, 경제력, 직장, 재산, 성격 등 따지는 조건이 많아집니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결정을 함에 있어서 내면의 믿음과 인격보다 외모와 조건을 더 중요시 할 때 시간이 지날수록 많은 문제점들이 드러나게 됩니다.
  자기들이 좋아하는 대로 마음대로 결혼했을 때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동물과 같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되어야 할 육신에 온갖 죄로 채워졌을 때 하나님의 영이 거하실 수 없었습니다. 사람은 동물과 달리 영혼을 가진 존재로서 영적인 것을 추구하며 거룩한 삶을 살 때 참 만족을 누리며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적인 것에 무관심하고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며 오직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사는 타락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7:27절에서 노아시대를 한마디로 잘 표현하셨습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사명을 감당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가고 사고팔고 즐기는 데에 마음을 빼앗길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들과 더 이상 함께 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심판하지 않으시고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120년이라는 유예기간은 그들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구원을 얻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오래 참으신 것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벧후3:9)
  그러나 시간을 많이 준다고 회개를 더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오히려 회개의 시간을 미루면서 죄를 더 쌓아갔습니다. 가정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배우는 가장 기본적인 공동체로서 가정 교회가 바로 설 때 자녀들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건전한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나게 됩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육신의 정욕을 좇아 이루어진 가정에서 자라난 자녀가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솔로몬도 이방 여인들과 마구 결혼함으로 자녀교육에 실패하였고 훗날 나라가 둘로 쪼개지는 단초를 제공하였습니다. 거룩한 가정이 사라질 때 그 시대는 더 이상 희망을 둘 수 없게 됩니다. 4절은 죄악된 그 시대의 또 다른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네피림이란 거인, 폭군, 침략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들은 체격이 크고 싸움을 잘하는 용사였으며, 고대에 유명한 사람들로서 세상적으로 잘나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힘을 자랑하는 가치관이 대세를 이루어 온 땅에 강포가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도 자녀들을 믿음의 사람으로 키우기보다 세상에서 힘 있고 잘나가는 사람으로 키우는 데에 자녀 양육의 목표를 두었습니다. 거인, 용사, 명성이 있는 사람은 오늘날 이 시대가 추구하는 가치관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자녀들이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고,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을 목표로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관리하며 투자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신앙교육은 소홀해지게 되고, 결국 세상에서의 성공과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세속적인 사람들을 키워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시대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어떠합니까? 5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하나님은 이런 시대를 보시고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시고 근심하셨습니다. 한탄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후회하셨다는 말이 아니라, 인간의 타락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의인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근심하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어떤 일로 슬퍼하신 것이 아니라 죄가 사람들에게 미친 불행으로 인해 슬퍼하신 것입니다. 1980년대 빌리그래햄 목사님은 미국이 청교도 정신을 잃고 타락한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미국을 심판하지 않으면 소돔과 고모라에 사과하셔야 한다는 말로 미국을 향한 그의 안타까운 심정을 나타낸 적이 있습니다. 인간은 절제되지 않은 정욕을 좇아가며 그것을 즐기지 않으면 모든 즐거움이 사라질 것처럼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창조 목적에서 벗어난 죄악된 인간의 모습을 보시고 한탄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정신과 육체가 다 부패하여 더 이상 인내하고 기다릴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음을 보셨습니다. 그들의 죄악은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내면에 뿌리 깊이 박혀있는 것이었습니다. 나무의 가지가 썩으면 잘라내면 되지만, 뿌리가 썩으면 뽑아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 시대는 근본적으로 그 심성이 부패하여, 생각하고 계획하는 마음의 모든 경향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에 오염되어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죄를 지어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온 세상이 썩어 악취가 진동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결국 죄악이 가득한 세상을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쓸어버린다는 것은 더러워진 것을 깨끗이 씻어내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물로 깨끗이 청소하듯이 썩어 냄새나는 세상을 홍수로 쓸어버리고자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신 상태로 세상을 돌이키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부패한 세상을 절대로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소돔과 고모라도 죄악이 관영할 때 심판하셨고, 가나안 정복 전쟁도 우상숭배의 죄에 빠져 음란하게 행하던 가나안 족속들의 죄가 가득 찼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쓸어버리신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우상숭배의 죄에 빠져 이방인과 똑같이 부패하였을 때에 바벨론에 의해 쓸어버림을 당했습니다. 죄악이 관영하면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이것은 개인이나 사회나 국가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하나님의 역사 원칙입니다. 오늘 날도 예외가 아닙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과거 어느 때 보다도 썩어있습니다. 최첨단 시스템과 기계를 이용하여 온갖 범죄를 저지르며, 죄를 짓는데 창조적인 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죄를 부끄러워 할 줄도 모르고 공공연히 자랑하다가 한순간에 몰락하기도 합니다. 갈수록 죄의 물결의 수위가 높아져서 이제는 편안하게 숨 쉬고 살기도 힘든 시대가 되었습니다. 때가 되면 쓰레기 같이 되어버린 세상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쓸어버리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악된 이 세상에 마음 빼앗기지 말고 하나님의 경고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II.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라(8-22)
  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총애와 택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노아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9,10절을 보십시오.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로마서 3:10절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노아는 의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아무 죄가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가 의로운 삶을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은혜를 입은 자임을 알 때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는 ‘당대에 완전한 자’였습니다. 완전하다는 말은 대개 제사에서 드리는 흠이 없는 동물을 일컫는 말로서 사람에게 사용될 때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도덕적으로 나무랄 데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것은 세상 가치관이나 자기 원하는 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 육신의 소욕을 좇아 자기 원하는 대로 살아갈 때에 홀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의롭고 진실되게 살려고 하다가도 캠퍼스나 직장 분위기에 휩쓸려 타협해 버리고 맙니다. 적극적으로 죄를 짓지 않더라도 주위 사람들로부터 비난받지 않고 소외당하지 않기 위해 적당히 분위기에 맞추어 동조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노아는 그 시대와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믿음을 버려도 그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다 육신적인 삶을 영위할 때, 그는 경건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세상 속에서 살았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물질과 인간 중심으로 살 때, 그는 하나님과 말씀을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법도대로 살고자 애를 썼습니다.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힘찬 연어들처럼 노아는 홀로 죄악의 파도와 싸우는 거룩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 길이 막막한 어둠으로 별빛조차 보이지 않는 길일지라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기에 힘쓰므로 자신의 연약함을 이기고 죄악된 환경을 이기고 부패한 그 시대를 이겼습니다. 그는 소극적으로 중심만 지킨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의를 전파하는 삶을 살았습니다.(벧후2:5) 그는 그 시대의 악영향을 받지 않고 오히려 시대에 영향을 끼치는 도전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노아 한 사람을 천하 모든 사람보다 귀하게 여기시고 무서운 심판 가운데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우리도 죄악된 세상 풍조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 편에 분명히 서서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본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의 모습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은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6장11,12절에 보면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서 부패하고 포악함이 가득해졌습니다. 그 땅은 강도, 살인, 강간, 불의, 속임수와 거짓으로 충만하여 심판이 불가피하게 되었습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심판의 계획을 말씀하시고 방주를 짓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방주의 크기와 모양과 사용될 재료까지 상세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방주는 길이가 135미터, 너비는 22.5미터, 높이는 13.5미터로서 축구장보다 길이는 더 길고 폭은 좁은 형태였으며 상중하 3층으로 구성된 엄청나게 큰 장방형의 상자 모양의 배였습니다. 항해할 목적이 아니라 홍수에 대비해 물에 뜨기 위해 만들었기에 지붕이 있고 튼튼합니다. 길이와 폭의 비율은 6:1로서 이는 안정성을 보장하는 황금비율입니다. 방주의 크기는 미국의 철도 화물차량 522칸에 해당하는 부피를 가졌는데 화물차량 한 칸에 약 240마리의 양을 실을 수 있다고 하니, 방주 안에 양을 싣는다면 자그마치 125,280마리의 양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겠다고 하신 후 혈육 있는 모든 새와 가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각기 그 종류대로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지구상에 살아있는 동물 중 포유류, 조류, 파충류, 양서류가 이 범주에 해당하는데 이들 모두를 합하면 대략 17,600종류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들을 한 쌍씩 실으면 35,200마리가 됩니다. 이들의 몸의 크기는 각기 다르지만, 한 계산에 의하면 이들을 크기 순으로 배열했을 때 중간에 위치하는 동물은 대략 조그마한 쥐에 해당하며, 양보다 더 큰 동물은 대략 11%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여유 있게 잡아 이들의 평균 크기를 양으로 생각하면 방주에 실어야 할 동물의 수는 결국 양 35,200마리에 해당되고 방주의 크기는 이들 동물들을 다 싣고도 그 두 배 이상의 공간이 남습니다. 그 남은 공간에는 노아의 식구와 동물들이 먹을 식량과 그들의 배설물, 그리고 통풍을 위한 여유 공간으로 쓰였을 것입니다. 이 내용들은 미국 창조과학연구소의 John Woodmorppe의 저서 <노아의 방주: 그 적합성 연구>라는 저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노아의 식구 8명이 이렇게 큰 방주를 짓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는 그의 전 인생을 걸어야 하는 일생일대의 프로젝트였습니다. 불확실성의 시대에 어떤 일을 위해 투자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많은 갈등과 고민이 필요합니다. 어느 한 분야에 전부 투자하는 것은 무모한 일입니다. 특히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는 길을 마다하고 아무도 가본 적이 없는 길을 간다는 것은 웬만한 결단과 각오가 아니면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노아에게 이 방주를 “너를 위하여”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마치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위해 나의 시간과 물질을 드려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누가 알아주지 않거나 보상이 없을 때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마음에 기쁨이 없고 피해의식, 손해의식에 빠지기를 잘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신앙생활은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을 위한 방주 짓는 생활입니다. 이것이 나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알 때 누가 뭐라고 하든지 다른 마음 품지 않고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자기 인생을 드리는 것은 결코 실패가 없는 가장 확실한 투자입니다.
  미국의 저명한 조선 건축가 디키씨는 미국 전함 오레건호를 설계할 때 노아가 방주를 건조할 때 이용했던 것과 동일한 설계비율을 사용했는데 해군에서는 오레건호를 지금까지 건조된 것 중 가장 견고한 군함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노아의 방주의 안전성과 효율성은 이미 수많은 연구진에 의해 입증되었습니다. 보통 파도 높이는 3-4m 정도 되는데 노아의 방주는 30m의 파도까지도 견딜 수 있다는 것이 실제 실험으로 증명되었으며 한쪽으로 90도 정도 기울어져도 즉시 다시 중심을 잡을 수 있다고 합니다. 과학적 지식이 없던 노아가 어떻게 이런 방주를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친히 설계하셨고 노아는 이 설계도대로 다 준행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보통 사람으로서는 120년 후에 홍수가 난다는 말을 믿을 수 없습니다. 심판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 노아에게도 시험이 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심판은 이때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전무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문제는 하나님의 약속과 경고의 말씀에 대한 경외심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노아가 하와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심 없이 나름대로 받아들이고 자기 편한대로 만들었다면 방주 짓느라 평생 고생만 하고 홍수 때 세상과 함께 멸망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방주를 지을 때 나름대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말씀을 맞추지 않고 말씀에 자기를 맞추었습니다. 노아가 의인이라 칭함을 받고 방대한 방주를 완성할 수 있었던 그의 신앙생활의 key word는 ‘다 준행하였더라’입니다.
  히브리서 11:7절은 말합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그가 120년 동안 방주를 예비하는 생활을 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이단이다, 광신자다, 치매라며 놀려댔을 것입니다. 많은 시간과 물질과 정열을 투자해야 함으로 실제적인 어려움이 많았을 것입니다. 방주를 짓다가 힘들 때에는 “꼭 이렇게 크게 지어야 하나?” “하나님께서 정말 세상을 심판하실까?” 하는 생각이 스쳐갔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재테크를 하며 노후대비에 열심인데 노후대비는 생각도 못하고 오히려 막대한 돈을 쏟아 부으면서 방주를 짓고 있는 자신이 너무 대책없이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 사탄이 심는 회의와 두려움과 상대적인 생각으로 더 힘들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심판에 대한 경고의 나팔을 불어도 사람들이 들은 척도 하지 않을 때 절망적인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1,2년은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10년, 20년, 아니 100년이 넘도록 그렇게 한다는 것은 마음에 기쁨과 소망과 확신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방주를 짓기 전이나 방주를 짓는 생활을 하는 중에나 변함없이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는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고 믿고 의지했습니다. 노아는 믿음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노아는 무엇보다도 보지 못하는 일 곧 심판이 있음을 굳게 믿었습니다. 장차 하나님이 모든 것을 쓸어버리신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치 않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방주 짓는 것이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노아를 기뻐하시고 위로와 사랑을 공급해주셨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항상 힘이 넘치고 스피릿이 충만했습니다. 하나님은 방주 짓는 생활을 통해 노아의 믿음을 연단하시고 그를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심판에 대한 경고를 하셨습니다. 노아의 방주 짓는 삶은 경건치 않은 그 시대 사람들의 죄를 드러내고 정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경외심을 가지고 말씀대로 다 준행하는 삶을 산 노아를 통해서 하나님은 새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제가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큰 은혜를 받은 자인가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 시대와 같이 타락하고 부패한 이 시대에 세상 풍조를 좇아 살다가 멸망에 이를 수 밖에 없던 저를 구원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믿음의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학창시절 다른 친구들이 도서관 갈 때 날마다 센타에 나와 말씀공부하고 기도모임과 각종 모임을 섬기며 예수님의 제자의 삶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당시에는 꼭 중간고사 일주일 전에 부활절 수양회가 있어서 공부할 시간이 부족하여 부활의 스피릿으로 시험을 볼 수 밖에 없었고, 이것을 통해 부활의 산 믿음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역사를 섬기다가 성적이 떨어지고 재시에 걸리기도 하였습니다. 주변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저를 걱정해주며 신앙생활도 좋지만 너무 빠지지 말라는 충고를 많이 하였습니다. 이렇게 살다가 망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들기도 하였지만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을 책임져주실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이 길이 생명의 길임을 믿었고 한 번 발을 들여놓은 믿음의 길에서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저와 동행해주심으로 고비마다 제자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지켜주셨습니다. 결혼의 진리가 무너진 이 시대에 하나님의 뜻 안에서 혜경 동역자와 아름다운 믿음의 가정을 이루게 하시고 함께 동역하여 구원의 방주 짓는 생활을 하게 하셨습니다. 젊은 날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고 믿음으로 결단하고 예수님의 구원의 방주에 올라타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산 것은 그야말로 내 인생에 있어서 신의 한 수였습니다. 이 길이 외롭고 힘든 길이고 30년이 넘도록 늘 똑같은 일을 하고 있는 자신이 정체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만 나의 인생의 황금기를 방주 짓는 일에 드리고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가끔씩은 이렇게 살다가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면 손해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만일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를 무시하고 세상 죄악을 즐기는 삶을 살다가 방주를 준비할 겨를도 없이 심판의 날을 맞이한다면 그야말로 낭패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설사 심판이 없다 하더라도 평생 세상에서 찾아보기 힘든 순수하고 진실된 믿음의 동역자님들과 함께 교제하며 죄악된 세상과 거슬러 진리의 인생을 살았다는 것이 행운이고 그 자체로도 가치가 있는 삶임을 확신합니다. 제가 일생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말씀대로 준행하며 끝까지 구원의 방주 짓는 삶을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나의 삶이 이 시대에 구원의 메시지가 되게 하시고, 죄의 바다에서 방황하며 고통하는 양들에게 구원의 방주 되신 예수님을 힘써 전하며 많은 양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복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노아 시대와 같이 부패하고 음란한 이 시대 가운데 저희들을 택하셔서 구원 역사를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준행하며 1대1 말씀전파를 통해 구원의 방주를 예비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이것이 나를 위한 것이며 이 시대를 실리는 일임을 확신하고, 노아와 같이 의를 전파하기에 힘쓰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이 시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새 역사창조에 쓰임 받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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