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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9-04-28 (일) 12:18
분 류 창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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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창세기 제8강] 바벨탑

 2019년 창세기 제8강                                                           이인구

바벨탑

말씀/창세기 9:18-11:26
요절/창세기 11: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1912년 세계최고를 자랑하는 영국의 초호화여객선 타이타닉호가 첫 출항하면서 선장이 큰소리쳤습니다. “하나님이라도 이 배를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배는 북대서양 빙산과 부딪히면서 탑승객 2224명중 1514명이 사망한 세계최대의 해난사고를 기록했습니다. 선장은 인간의 기술만 믿고 교만하게 사고해역에 이르기 전 사고가능성을 무시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과 대적해 바벨탑을 쌓은 인간의 교만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바벨탑을 쌓는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죄 가운데서도 계속되는 하나님의 소망과 사랑을 배울 수 있길 기도합니다.

홍수 심판 이후 하나님께서는 노아가족들에게 무지개 약속을 주시며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도록 도우셨습니다. 노아는 제2의 아담으로 그의 3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게 됐고 노아는 새로운 땅에서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과거 에덴처럼 풍요의 땅은 아니었지만 황량한 대지를 갈아엎고 포도나무를 심어 황량한 땅에 어느덧 숲이 우거지고, 주렁주렁 맺힌 열매들을 보며 향긋한 냄새를 맡으며 노아는 이제 고난의 시대가 가고 풍요의 시대가 도래한 것을 온몸을 느낄 수 있게 됐습니다. 하지만 이때 위기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탈무드’에 보면 이때를 풍자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노아가 포도를 재배하고 있을 때 사단이 와서 무엇을 하는지 물었습니다. 노아는 “포도를 재배하고 있어요.” 사단이 어떤 열매를 맺는지 묻기에 노아는 “포도라는 과일인데 매우 달면서도 새콤한 맛이 있죠. 그리고 이것을 발효시키면 사람을 즐겁게 해 주는 술이 된다오.” 사단은 그렇게 좋은 것이면 자기도 거들고 싶다고 하자 노아는 허락했습니다. 그러자 사단은 양과 사자와 돼지와 원숭이를 차례로 죽여 그 피를 포도나무의 거름으로 뿌렸습니다. 그 후 사람은 포도주를 마시면 처음에는 양처럼 순해지지만 좀 더 마시면 사자처럼 사나와지고 더 마시면 돼지처럼 추잡해지다 더욱 더 마시면 원숭이처럼 빨개져 소란을 피우게 된다고 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람은 술에 만취될 때 하나님의 형상을 잃고 짐승이 됩니다. 노아가 한잔씩 포도주를 마시면서 그를 싸고 있던 거룩한 형상이 한꺼풀씩 벗겨지면서 내면 한구석에 숨어있던 인간적 본성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며 선을 넘자 어느새 포도주가 노아를 삼키면서 노아는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돼지와 원숭이가 되어 온갖 추태를 부렸습니다. 600년의 일생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첫 사람 아담도 이루지 못한 하나님 앞에서의 완벽한 인생을 살았던 노아가, 이제 남은 인생 영광과 축복의 꽃길밖에 없는데 왜 그랬을까 의문이 듭니다. 홍수심판으로 모든 사람들이 다 죽어 너무 외로워서 그랬을까? 아니면 하나님의 무지개언약이후 영적긴장이 풀어져서 그랬을까? 어떤 이들은 노아가 술에 취해 심신이 미약해져서 한 행동인데 주취감형을 해줘어야 되지 않은가 말합니다. 하지만 술을 먹은 것도, 술기운에 자신을 맡긴 것도 노아의 의지이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없습니다. 어떤 죄인도 본래의 모습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이지만 자기의지로 죄에 몸과 영혼을 맡김으로 추악한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주변에서 그렇게 훌륭해 보이고 그렇게 존경스럽게 보이던 분들이 죄에 빠져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것을 볼 때에 도저히 믿어지지 않습니다. ‘도저히 그럴 분이 아닌데 왜 사단에게 영혼을 팔았을까?’ 미투 열풍이 불면서 정치계, 연예계뿐 아니라 사회 문화계에서도 겉으로 보기에는 깨끗하고 고고하고 훌륭하게 보였던 사람들의 추악한 민낯이 폭로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모든 인간은 본질상 죄인임을 적나라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모든 이들이 하나님을 떠나 세상의 육신의 죄악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도 홀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믿음을 지킴으로 구원받은 의인 노아조차도 죄인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 노아가 믿음의 공든 탑을 쌓는 데는 120년이 걸렸지만 무너지는 데는 한 순간이면 족했습니다. 오히려 축복의 때 안정의 때에 사단은 더욱 집요하게 신자들을 공격해 실족하게 하고 무너뜨리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최근 ‘페르소나’라는 말이 많이 쓰여집니다. 어릿광대들이 쓰던 가면을 뜻하는 말로 진정한 자신(자아)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비쳐지는 외적 인격(사회적 인격)을 뜻하는 말입니다.(정신분석학자 카를 융) 사람들은 사회에서 요구하는 의무, 직책 등에 따라 자신의 본성위에 가면을 씁니다. 그 가면을 씀으로 자신의 본성을 감추고 사회적 요구에 따라 살 수 있지만 어느 순간 가면 속에서 자신의 본질을 잊습니다. 또 페르소나가 본래의 모습과 너무나 다를 때 사람은 가면 속에서 위선 속에서 열등감과 고립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보이기 위한 가면을 벗고 말씀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실제 자신의 죄인된 모습을 발견해야 합니다. 아무리 오랜 신앙생활을 해도 아무리 많은 신앙적 업적을 남겨도 신자는 말씀 앞에서 죄인된 자신의 실체를 깨닫고 항상 말씀을 붙들고 겸손하게 조심하며 깨어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자신을 찾는 길(자기실현)이고 진정 구원받는 길입니다.
노아에게 포도와 포도주는 하나님의 축복의 상징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포도주에 취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아 많은 돈을 벌고 성공했다면 그 돈과 성공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하지만 돈과 성공에 취하면 안됩니다. 그것을 탐닉하고 즐기기만 한다면 오히려 그 축복으로 실족하게 되고 돈과 성공의 노예가 될 수 있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축복을 감사하고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데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노아가 만취돼 발가벗었을 때 다행히 장막 안에 자매들은 없었으나 웬일인지 아들 함이 아버지를 보러왔다가 충격적인 장면을 보게 됐습니다. 그는 만취되어 누워있는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들에게 알렸습니다. 여기서 ‘보다’의 히브리원어 ‘라아’는 ‘유심히 살펴보다’라는 뜻이고 ‘알리다’는 히브리원어 ‘나가드’는 ‘고발하다’ ‘누설하다’라는 뜻입니다. 즉 함은 아버지 노아의 허물을 유심히 살펴보고는 형제들에게 가서 아버지의 허물을 고발하고 비난한 것입니다. 요즘으로 하면 핸드폰으로 찍어서 인터넷에 올린 것입니다. 하지만 함의 말을 들은 셈과 야벳은 어떻게 했습니까? 23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아버지가 허물을 보인 것을 안타까워하며 아버지의 벗은 모습을 보지 않고 옷을 가져다가 뒷걸음쳐 들어가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습니다. 그들은 아버지를 깊이 사랑하고 존경했습니다. 방주 짓는 120년 동안 그들은 세상의 죄악된 문화에 물들지 않게 하기 위한 아버지의 간절한 바램과 요구에 많이 부딪히며 책망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무서운 홍수 심판 속에서 죄가 얼마나 무서운가 절실히 깨닫고 또 자신들도 심판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지만 방주 안에서 구원받게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했고 또 아버지께 감사했습니다. 구원받은 후에도 하나님 앞에서 가족들과 후손들을 위해 황량한 땅을 개간하는 아버지를 보며 미안하고 또 감사했습니다. 그 깊은 사랑과 존경심가운데 아버지의 인간적 죄악과 허물을 보고 판단할 수 없었고 자신들의 죄악과 허물로 여기고 조용히 덮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인간들의 돌이킬 수 없는 죄를 홍수 심판할 수밖에 없지만 노아가족을 구원하시고 다시 새 역사를 시작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함은 달랐습니다. 그는 아버지에 대한 감사가 없었습니다. 자신을 세상 죄에서 보호하려는 아버지와 부딪히며 받았던 책망이 상처가 되어 반발심으로 남았습니다. 아버지의 믿음 안에서 홍수심판에서도 구원받았지만 그것은 자신이 120년 동안 열심히 방주를 지은 것 때문이라는 자기의가 있었습니다. 그런 내면 속에서 함은 아버지의 허물을 보고는 정죄와 판단가운데 다른 형제들에게 고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가서 봐라! 나한테는 세상 죄를 회개하라고 그렇게 책망하면서 아버지의 실제모습이 어떤가 가서 보라!” 그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없었고 무엇보다 아버지의 권위에 대해 오랫동안 품어왔던 반발심이 내면깊이 숨어있었습니다. 사실 그 반발심은 아버지에 대한 것을 넘어 노아를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반항심입니다.
최근 많은 사람들이 함과 같이 남의 허물을 인터넷에 올려 폭로하는데 즐거움을 찾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은 알 권리가 있고 또 나는 알릴 의무가 있다’며 이상한 사명감을 갖습니다. 심지어 ‘정의의 이름’으로 다른 이들의 허물을 폭로하고 까발립니다. 그렇게 하면 왠지 자신이 상대적으로 우월해지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집니다. 하지만 마태복음(7:2)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라”
특히 신자는 자신들을 인도하는 주님의 종들을 함부로 비판하면 안됩니다. 물론 그들도 죄인이기 때문에 실수할 수도 있고 죄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판단과 정죄는 그들을 세우신 하나님만이 할 수 있고 신자들은 주님의 종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세우신 영적질서와 권위 안에서 순종하고 동역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이뤄나가길 바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적지도자들을 오래 참으시지만 끝까지 돌이키지 않을 때 무섭게 심판하십니다.
모세는 이방(구스)여인을 아내로 취하였습니다. 그때 모세의 누나 미리암이 아론과 함께 모세를 많은 백성들이 있는데서 공개적으로 비난했습니다. 이방인여인과 결혼한 것은 분명히 모세의 잘못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세를 벌주지 않고 공개 비난한 미리암에게 문둥병이 걸리게 하셨습니다. 왜냐면 모세는 잠시 실수했지만 그의 전 인생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믿음으로 바로의 아들의 특권을 포기했습니다. 또 하나님말씀에 순종해 바로와 싸워 백성들을 출애굽 시켰고 믿음으로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고 일평생 끊임없이 불평하는 노예백성들과 함께 하며 약속의 땅으로 인도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순간의 죄만 본 것이 아니라 인생전체를 보시고 그의 죄를 감당해주시고 또 지켜주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끝까지 믿음의 인생을 살도록 도우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큰 용서의 사랑으로 구원 받은 신자가 그 사랑으로 다른 이들을 용서하고 감당해주길 바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아버지에게 가정을 이끄는 권위와 책임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많은 자녀들이 어릴 때 아버지의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권위에 많은 상처를 받고 평생 고통스러워합니다. 어떻게 그 상처를 극복하고 치유할 수 있습니까? 아버지의 죄를 덮어줘야 합니다. 그것은 용서의 사랑입니다. 베드로전서(4:8b)은 말합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느니라.” 많은 아버지들이 젊을 때 약육강식의 세상 경쟁 속에서 살아나갈 때 자녀에게 행한 폭력과 죄 때문에 늙어 후회합니다. 하지만 이미 시간은 돌이킬 수 없고 자녀는 아버지를 용서해야 합니다. 왜냐면 아버지도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을 때 그가 아버지에게 받은 악과 죄가 그대로 자신의 자녀에게로 이어집니다. 아버지를 증오하고 판단하지만 막상 자신이 아버지가 되면 똑같이 그런 죄를 반복합니다. 자녀는 아버지를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의 사랑만이 죄와 악의 고리를 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에게 받은 사랑을 느낄 수 없는데 어떻게 용서할 수 있습니까? 신자는 우리의 영적 아버지인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통해 육신의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허물과 죄를 범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독생자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덮어주셨습니다. 덮어주시고 깨끗이 씻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의 허물과 죄를 볼 때에 드러내서 비판하고 비난하는 자가 되지 않고, 함께 가슴아파하며 같이 감당하며 함께 기도해주는 사랑의 신자들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24절을 보십시오. 노아는 술이 깨어 함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함의 막내아들인 가나안을 저주했습니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이 되기를 원하노라(25)” 또 자신의 허물을 덮어준 셈과 야벳을 축복했습니다.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26,27)” 노아가 셈과 야벳을 축복한 것은 마땅합니다. 하지만 함의 막내아들 가나안을 저주한 것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노아의 저주는 단지 노아가 술이 깨어 인간적인 감정으로 쏟아낸 저주가 아니었습니다. 왜냐면 정말로 노아의 축복과 저주대로 셈과 야벳의 자손은 축복의 길을 갔고 가나안의 자손은 저주를 받아 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노아의 말은 하나님이 노아를 통해 주신 계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가 술에 취해 실수했지만 그의 일생의 믿음의 삶을 인정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 그래서 순간의 죄를 덮어주시고 변함없이 노아를 하나님역사의 지도자요 조상으로 세워주셨습니다. 또 그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10장은 노아의 3아들 야벳, 함, 셈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야벳의 후손들은 인도, 유럽 쪽으로 퍼져나갔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신다고 예언했는데 그것은 그들이 셈족 이스라엘에게서 탄생된 메시아의 품안에서 살게 되는 백성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함의 후손들은 이집트, 아프리카 방면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가나안은 함의 넷째 아들로 여호수아시대 가나안족속은 셈족 이스라엘에 의해 비천한 종으로 전락되었고 솔로몬시대 완전히 정복당했습니다. 그것은 노아의 저주 때문이 아닌 그들의 죄악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에 빠져 성적문란이 심각했고 심지어 우상(몰렉)에게 자기자식까지 재물로 바쳤습니다. 그들은 노아의 경고를 기억하고 더욱 깨어 죄에서 멀어져야 했지만 오히려 반발심으로 더욱 완악해져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런 불신앙과 반항심은 함의 손자인 니므롯에서 절정에 달했습니다. 니므롯이란 이름은 ‘나는 반역하리라’ 뜻이고 함의 아버지에 대한 반항적인 기질이 손자에게 하나님께 반항하는 기질로 유전되었습니다. 그는 세상의 첫 용사로 하나님 앞에서(원문에는 하나님을 대적하여)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습니다. 그는 첫 제국을 건설한 첫 왕이었고 그가 건설한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론에서 앗수르까지 합친 큰 제국이었습니다. 앗수르의 신화에 의하면 그는 자신은 달신이요 자기아들들은 별신이라며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자신을 우상숭배하게 했습니다. 그때부터 바벨론과 앗수르에는 달과 별을 숭배하는 우상종교가 시작되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그가 바벨탑을 쌓도록 선동한 인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11장 전반부는 유명한 바벨탑사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노아로부터 새롭게 시작된 인류는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던 한 민족이었습니다. 아마도 셈족이 쓰는 히브리어로 추측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은 가인처럼 동쪽으로 이동했는데 시날 평지에 바벨론이란 도성을 세워 하나님 없는 세상나라와 역사를 이뤘습니다. 그곳은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 주변이고 바벨론 문화(메소포타미아 문명)가 꽃피운 곳입니다. 당시 벽돌이라는 혁명적인 발명품이 등장하게 됐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동굴 속에서 또 나무위에서 살거나 힘센 이들은 돌을 옮기고 깎아 집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흙을 이겨서 불에 구워보니 단단한 벽돌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됐고 단단한 벽돌을 쌓아서 견고한 집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지금은 유치원아이들이 벽돌쌓기 놀이를 하며 감탄하지만 당시로는 획기적인 발견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처럼 획기적이고 놀라운 인류문명의 가능성을 발견할 때 꼭 딴 생각을 합니다.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11:4)” 그들은 위대한 발명품 벽돌로 바벨탑을 쌓아 하늘까지 닿고자 했습니다. 왜 그들은 그런 위험한 도전을 한 것입니까?
첫째 교만의 죄.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그것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대적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처럼 되어 자기 이름을 내고 하나님보다 더 높아지고자 하는 교만 때문입니다. 유대인 철학자 필로에 따르면 당시 사람들은 바벨탑의 벽돌에 자신들의 이름을 새겼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에덴동산에서 인류의 첫 조상 아담이 생각했던 것과 같습니다. “네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창3:5) 사실 이것은 인간의 본성 속에 숨어든 사단의 치명적인 유혹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어봐” “바벨탑을 쌓아 하늘까지 올라가봐” 하나님과 대적하면서 마치 자신이 하나님인 것처럼 위험한 착각에 빠집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대적할수록 사단의 노예로 전락하게 됩니다.  
둘째 두려움.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인간은 하나님을 떠날 때 두려움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는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셔서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천국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을 받으며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떠나면 내가 나를 보호해야 하고 내가 나를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 에덴의 동쪽에 에녹성을 쌓은 가인처럼 니므롯 무리들은 바벨탑을 쌓아 지면에서 흩어지지 않고자 했습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하나님께서 다시는 홍수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지만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잃은 그들은 장대비가 내리면 두려움에 떨어야 했고 그래서 아무리 많은 비가 내려도 잠기지 않는 높은 탑을 쌓고자 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 없이 하나님과 대항해서 같이 모여 서로 도와가며 우리끼리 잘 살아보자고 쌓은 것이 바벨탑입니다. (하지만 평화와 공존을 외치지만 결국 그곳은 강한자만이 살아남는 약육강식의 정글이요 사막의 피라미드일 뿐입니다.) 바벨은 성경전체를 통해 하나님과 대적하는 세상권세를 상징합니다. 이 바벨탑의 문화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바벨론제국으로 나타났고 장차에는 요한계시록예언처럼 마지막시대의 상징인 바벨론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하나님과 대적하는 바벨탑을 진멸하고 무너뜨릴 것입니다.
최근의 놀라운 4차 산업기술과 생명공학의 발달은 인간의 삶은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인공지능로봇을 만들고 줄기세포를 이용해 생명까지 창조하려는 인간의 무모한도전은 자칫하면 하나님과 맞서고 도전하는 바벨탑이 될 수 있습니다. 얼마 전 미국 예일대교수팀(네나드 세스탄)이 죽은 지 4시간이 지난 돼지의 뇌에 혈액모방 특수용액과 산소를 공급해 일부 뇌세포의 기능이 회복되는 실험에 성공했습니다.(Nature지) 하지만 한 교수(옥스퍼드대 윌킨슨)는 죽은 사람의 뇌를 되살려 생각과 성격까지 회복할 수 있다면 죽음의 정의를 변경해야 할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인간을 위협하과 파괴하는 프랑켄슈타인을 만들 수 있는 것 입니다. 그런 과학과 의료의 발달은 인간의 삶에 유익인 동시에 인류를 파괴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재촉하는 바벨탑이 될 수 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대적하는 이들의 행태를 보고만 있을 수 없으셨습니다. 이들이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런 죄악된 역사를 쌓아올리는 것을 아셨고 또 스스로 그 죄악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아셨습니다. 죄악에서 돌이키지 않을 때 결국 심판하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셔서 그들을 지면에 흩으셨고 도시건설을 막으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심판을 피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현재 우리는 외국어를 배우느라 고통스럽지만 그것은 결국 인간의 죄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언어가 분열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한 것을 감사하게 여겨야 합니다.
바벨은 본래 ‘신의 문’이란 뜻인데 이 단어는 히브리어의 ‘혼잡’이란 단어와 발음이 비슷합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되기 위해 쌓아올린 바벨탑은 결국 혼잡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혼잡과 혼돈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다시 하나님께 돌아올 때 질서가 생기고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상 가장 쉬운 길이 교만이고 가장 어려운 길이 회개입니다. 하지만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만이 사는 길이요 축복의 길입니다.
10장 후반부(21절부터)와 11장 후반부(10절부터)는 셈의 족보입니다. 셈의 후손을 두부류로 나누었는데 그 이유가 있습니다. 10장 25절에 셈의 후손 중 에벨의 두 아들에서 세상이 나뉘어졌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의 두 아들 중 ‘욕단’은 바벨탑의 반역에 가담했지만 다른 아들 ‘벨렉’은 가담하지 않고 노아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10장 후반부는 ‘욕단’의 족보이고 11장 후반부는 ‘벨렉’의 족보로 하나님께서 따로 구별하셨습니다. 왜냐면 벨렉의 후손에서 믿음의 조상 아브람이 탄생하였고 그 후손을 통해 구원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를 통해 셈의 후손을 축복하셨습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겉으로 보기에는 함의 후손들이 더 잘나가 보입니다. 심지어 셈의 후손인 이스라엘은 함의 후손이 세운 바벨론과 애굽의 식민지로 산적도 있습니다. 함의 후손이 주류이고 셈의 후손이 비주류처럼 보입니다. 현재도 불신자들은 세상에서 하나님과 대적하여 바벨탑을 쌓으며 한없이 높아지고자 합니다. 그럼 하나님의 축복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신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세상의 불신자들이 아무리 뛰어난 능력으로 높고 화려한 바벨탑을 쌓는다 해도 결국 무너질 혼돈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신자들은 부족해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도와주심으로 결국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하나님의 도성’, ‘천성’으로 인도해주십니다. 우리는 노아에게 축복받은 셈의 후손이 아니지만 아브라함의 믿음을 배움으로 예수님을 영접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혼잡하고 혼돈스러운 세상에 속하지 않고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인도하심을 따름으로 결국 하나님의 도성(천성)의 도민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위해 바벨탑을 쌓는 세상에서 노아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생을 살도록 인도해주셨습니다. 하지만 신앙생활 중에서 가끔씩 다른 세상적모임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아쉬움과 소외감을 느낄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 마포구에서 20년을 개업했는데 10년 전쯤 동문의 부탁으로 마포구치과의사회 임원을 잠간 하며 총무까지 요청받았지만 결국 술자리 때문에 포기했었습니다. 만약 그 때 총무를 했다면 회장까지 할 수 있었는데 지금 오랜 개업생활에도 치과계에 영향력이 없어 아쉬울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세상의 바벨탑에 들어가는 것이고 그 안에서 하나님과 온전히 동행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제가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며 동화되는 것을 막으시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목적대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역사가운데 쓰임 받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제가 홍수심판 같은 인생 고난에서 구원받은 자로 허무하게 무너질 세상의 바벨탑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영광을 드러내는 인생을 살며 끝까지 하나님의 도성으로 나아갈 수 있길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는 홍수심판 후 노아의 죄를 감당해주시며 그를 통해 새 역사가 시작되도록 도우셨습니다. 또 하나님과 대적하는 세상의 바벨탑을 혼잡하게 하시며 믿는 자들을 통해 하나님역사를 인도해 가셨습니다. 우리가 노아처럼 세상 죄에 넘어질 때도 있지만 노아처럼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인생살 수 있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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