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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9-05-05 (일) 12:22
분 류 누가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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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부활절 수양회 제2강] 청년아 일어나라

 2019년 부활절 수양회 제2강                                                       최바울

청년아 일어나라

말씀/누가복음 7:1-17
요절/누가복음 7: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맨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Happy Easter! 오늘은 어린이날입니다. 내일의 희망인 어린이들을 위한 날, 부활의 믿음과 소망이라는 좋은 선물을 주고자 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또 달력을 보니 다음 주일날이 석가탄신일입니다. 그런데 부처님 오신 날은 있어도 부처님 다시 사신 날은 없습니다. 부활절이 있는 유일한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예수님만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님께서 오늘 병들어 죽어가는 종을 고치시고, 죽어서 관속에 누워있는 청년을 일으켜 세우십니다. 이 시간 부활의 주 예수님의 “청년아 일어나라!” 말씀을 듣고 병든 자들이 고침 받으며, 죽은 청년들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흥왕하게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1장 백부장의 믿음(1-10)
1,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가버나움으로 가셨을 때였습니다.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종을 함부로 취급했습니다. 세 종류의 소유물이 있었는데, 첫째는 물건, 둘째는 가축, 마지막은 말하는 물건인 종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배가 풍랑을 만나 가라앉을 것 같으면 제일 먼저 물건을 버리고 그래도 안되면 가축을 버리고 그래도 안되면 종을 버렸다고 합니다. 가버나움의 군사 책임자이자 회당을 지어줄 만큼 부유했던 백부장에게는 쓸모있는 종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주인이 있으나 없으나 부지런히 일하는 종, 남들 싫어하는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종, 맡겨진 일은 무슨 일이 있든지 해내고 마는 악착같은 종 등 건강하고 일 잘하는 종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 종들은 종이지만 참 사랑스럽습니다. 하지만 쓸모가 있을 때에는 사랑스러워보여도 병들어 쓸모없어지면 사랑이 식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주인들이 종의 병을 고치는데 시간과 비용을 들이기보다 병든 종은 빨리 폐기처분하고 건강한 종을 새로 구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백부장은 병들어 죽어가는 종을 살리기 위해 로마군 장교로서의 체면과 자존심을 버리고 겸손히 식민지 백성인 장로들에게 예수님을 모셔오도록 부탁했습니다. 평소 백부장의 사랑과 도움을 많이 받았던 유대인 장로들도 다른 이방인들을 대하는 것과 다르게 예수님이 오셔서 이 백부장의 종을 고쳐 주시는 것이 합당하다며 마음을 다해 동역해 주었습니다. 백부장답지 않은 백부장의 인간애에 감동하신 예수님은 장로들의 간청하는 말을 들으시고 백부장의 집을 향해 함께 가셨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장로들과 함께 가사 백부장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백부장이 자기의 벗들을 보내어 간청하는 것이었습니다.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예수님은 백부장 집에 거의 다 오셨습니다. 이미 수고를 다 시켜 놓고 수고하시지 말라고 하는 이유가 뭘까요? 오셔서 고쳐달라고 해놓고는 ‘내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처음에 백부장의 관심은 자기 종의 병 낫는 것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예수님이 자기 집에 오고계신다고 생각하니 그의 생각과 관심이 조금씩 종의 병 낫는 것에서 예수님 자체로 옮겨갔습니다. 이전에 들었던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떠올렸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길래 나병 들린 사람을 깨끗하게 고칠 수 있었을까?(눅5:13)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길래 중풍병자를 걷게 하셨을까?(눅5:24) 예수님은 어떤 분이시고 또 나에게는 어떤 분이 되시는가? 백부장이 예수님에 대해 묵상하면 할수록 예수님은 주님(Lord)이셨습니다. 병의 주인도 되시고 자기 종의 주인도 되실 뿐 아니라 자기생명의 주인이며, 인생의 주인이었습니다. 그에 반해 자기는 죄인이었습니다. 병이 깊은 사람도 도울 만큼 인간애가 있어서 꽤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백부장답지 않게 겸손해서, 장로들이 인정할 만큼 반듯하게 살아서 의인인 줄 알았는데 예수님이라는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니 감히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백부장은 급히 벗들을 보내 고백했습니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6b,7a)
자신을 죄인으로 깊이 깨달았다고 해서 백부장이 병든 종의 치유를 포기했을까요? 7b절을 보십시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그는 한 사람을 돕고 섬기며 예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가 자아발견 하였지만 절망하지 않고 끝까지 하인의 병을 고치고자 했습니다. 거기서 나아가 백부장은 예수님이시라면 병든 종을 보지 않고 멀리서 말씀만 하시면 낫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를 믿었습니다. 백부장이 어떻게 이런 믿음을 갖게 되었을까요? 8절을 보십시오.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작은 도시국가에 불과했던 로마가 지중해 세계의 패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세계 최강 로마군 덕분이었습니다. 로마군은 장비 전술 체계 모든 면에서 뛰어났지만 특히 군율이 엄했습니다. 전사한 로마군 중에 등에 화살을 맞은 자가 없을 정도로 아무리 화살이 쏟아지는 불리한 상황에서도 상관의 돌격 앞으로 명령에 순종했다고 합니다. 백부장은 로마 황제가 왕궁에서 명령을 내리면 모든 로마 제국의 군인들과 백성들이 복종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역시 상관의 명령에 절대 순종했을 것입니다. 가라는 곳에는 목숨을 걸고 가고 오라고 하면 자기를 부인하고 왔을 것입니다. 그가 만일 가라 하면 오고 오라 하면 가는 반발심이 충만한 군인이었거나, 가라 해도 안가고 오라 해도 안오는 게으른 군인이었다면 아무리 군대생활을 오래 했더라도 이런 진리를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웠고 순종을 통해 말씀의 권세에 대한 믿음을 배운 백부장이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간청했을 때  예수님의 대답이 어떠합니까? 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이만한 믿음’이란 such great faith ‘위대한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했습니다.(4:23, 요 6:30) 예수님의 말씀 자체를 믿기보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믿었습니다. 표적과 기적을 보고서야 생기는 믿음, 이는 이스라엘 중에 웬만한 사람들은 거의 다 가지고 있는 요만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인정하시는 이만한 믿음, 위대한 믿음은 예수님의 말씀 자체를 절대적으로 믿는 믿음입니다. 내 인생에 기적을 베푸셔서 생기는 믿음이 아니라 사건 사건마다 주시는 말씀의 인도함을 받고 주시는 말씀에서 위로를 받고 주시는 말씀에서 힘을 얻는 믿음입니다. 곧 말씀이신 예수님 자체를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백부장을 칭찬하실 때 돌이켜서 따르는 무리들에게 이르신 것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책망과 동시에 예수님의 간절한 바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무리들도 백부장처럼 말씀 자체를 절대적으로 믿는 자들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공생애 3년 동안만 이 땅에서 제자들과 함께 계시다가 장차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나라로 가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가시고 나면 홀로 남은 제자들은 예수님이 남겨 놓으신 말씀을 믿고 의지하여 복음역사를 계승하고 자립적으로 구원역사를 이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님께서 돌이켜서 저와 이곳에 계신 분들에게 이르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저와 여러분이 봄학기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서 백부장의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는 절대적인 믿음과 순종을 배워서 병들어 죽어가는 캠퍼스 영혼들을 살리는 역사에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백부장이 보냈던 벗들이 집에 돌아가 보니 종이 이미 나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의 권세를 믿는 백부장의 믿음을 귀하게 여기시고 그의 믿음대로 병들어 죽어가는 종을 고쳐 주셨습니다.

제2장 청년아 일어나라(11-17)
11,12절을 보십시오. 그 후에 예수님께서 ‘즐거움, 아름다움’이란 뜻을 가진 나인 성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성 이름이 무색할 만큼 슬프고 비통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는데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였습니다. 독자를 잃은 과부 어머니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남편 잃은 아내를 과부라 하고 아내 잃은 남편을 홀아비라 하고 부모 잃은 아이를 고아라 하는데 자식 잃은 부모를 뜻하는 말은 우리말에도 영어에도 없습니다. 입에 담기도 싫을 만큼 슬프고 비통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앞서 보낸 부모의 곡소리는 귀신들도 무서워서 도망간다고 했습니다. 과부 어머니는 죽은 아들의 관을 따르며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셨습니다. 청년은 과부 어머니에게 단순한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남편을 잃은 아픔이 있었지만 아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가녀린 여인이 혼자 힘으로 먹고 사느라 힘에 부칠 때에도 아들의 웃는 모습을 보며 힘을 냈습니다. 그 청년은 과부 어머니의 희망이요, 기쁨이며 힘의 원천이기도 하고 살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청년의 죽음은 그 과부 어머니에게서 이 모든 것들을 다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독자를 잃은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 과부에게 “울지 말라” 명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독자를 잃은 과부에게 원 없이 울라고 했을 것입니다. 마음껏 울고 빨리 죽은 아들은 잊으라 했을 것입니다. 김성화 목사님은 경북대 문리대 수학과를 졸업하고 불교에 귀의해 혜경 스님이라는 법명으로 대한불교정토종 교육국장 포교국장까지 역임한 분입니다. 어느 날 불교단체 내분에 휘말려 김해 교도소 독방에 수감되었습니다. 교도소 도서관에서 날마다 불경을 빌려다 읽었는데 하루는 교도관이 불경은 다 대출이 되었으니 이거나 읽어보시라며 기드온 협회의 푸른색 신약 성경 한권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독방이라 심심해서 성경통독을 시작하셨는데 눅7장을 읽다가 독자를 잃은 나인성 과부에게 놀랍게도 ‘울지 말라!’ 명하시고 독자를 살려주시는 예수님에게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지금까지 진리라고 믿었던 석가모니는 외아들을 잃고 슬픔에 빠진 여인에게 마을에 가서 한번도 사람 죽은 일이 없는 집 쌀을 한줌 가져다가 죽을 끓여 먹이면 아들이 살아날 수 있다며 여인을 마을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런 집을 찾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온 여인에게 생자필멸 곧 사람은 나면 반드시 죽는 법이니 그만 체념하고 받아들이도록 했습니다. 아무리 지혜로운 석가모니라도 죽음이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는데 예수라는 분은 죽음의 한계를 넘어서 생명을 살리는 분임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출소 후 승려복을 벗고 신학교에 입학하여 목사 안수를 받고 부활의 역사적 사실성에 관한 설교를 하고 계십니다. 죽음 권세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슬피 우는 것과 같이 울어주는 것 뿐입니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것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울지 말라!’ 예수님께서 “울지 말라” 말씀하실 때에는 울어도 소용없다는 것이 아니라 더이상 울지 않게 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과부의 슬픔의 근원인 죽음문제를 해결해주시겠다는 뜻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섰습니다. 어느 누구도 멈출 수 없는 죽음의 행렬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멈춰 서게 되었습니다. 관 속에는 죽은 청년이 눈을 꼭 감은 채 싸늘한 시체로 누워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죽은 청년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14절을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그러자 죽었던 자가 벌떡 일어나 앉고 말도 했습니다(15a).
죽은 청년을 일으켜 세우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 예수님은 말씀으로 죽음의 권세조차 복종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이 죽게 된 것은 하나님께 범죄 하였기 때문입니다. 죽음에서 구원을 받으려면 먼저 죄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피흘림이 없으면 죄사함도 없습니다.(히9:22) 예수님은 나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피를 흘리셨습니다.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통해 죽음의 원인인 인간의 죄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신 예수님만이 죽음 권세를 그 발 아래 복종케 하실 수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죽은 청년들의 구원이요, 희망이 되십니다.
청년은 어떤 존재입니까? ‘청춘예찬’이란 수필에는 청춘을 가리켜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꾸며 내려온 동력이요 인생의 황금시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도 첫사람 아담을 지으실 때 귀엽고 사랑스러운 어린아이나 지혜와 경험이 무르익은 노인으로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처음부터 청년으로 지으셨습니다. 그럼 청년다움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외모일까요? 피부의 탄력성일까요? 의학의 발달로 그런 것들은 무의미해졌습니다. 그럼 체력일까요? 고영훈 목자님이나 오정훈 목자님을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청년에게는 생명력이 있고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끊임없이 도전하는 도전정신과 용기, 무한한 가능성이 있어야 하고 세속화되지 않은 순수함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가장 청년다움은 비전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는 젊은이들에게 환상 곧 비전을 보라고 설파했습니다. 몸은 청년이어도 비전이 없다면 아직 어린아이거나 노인입니다. 반면에 오늘날처럼 비전을 보기 힘든 시대에 조금 어려도 조금 연세가 있으셔도 마음에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품고 있는 사람은 이팔청춘 청년입니다. 이런 자가 개척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는 청년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본문의 청년은 죽어서 관 속에 누워 있습니다. 이는 청년이라도 죽어 관 속에 누워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육체는 살았으나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죽은 청년들도 있습니다. 반복되는 실패로 인해 패배주의의 관 속에 누워 아무리 해도 안될거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면 살아 있는 청년이 아니라 죽은 청년입니다. 운명주의의 관 속에 누워 상황 탓, 조건 탓을 하고 있다면 그 역시 죽은 청년입니다. 비전을 잃고 두려움과 염려와 절망의 관에 누워 도전해 보지 않고 어두운 생각을 하고 있다면 죽은 청년입니다. 정욕과 게임에 빠져 청년의 순수함과 열정을 잃어버리고 무기력의 관속에 누워 있는 죽은 청년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청년이 관 속에 누워 있는 것을 특히 더 안타까워하십니다. 청년은 관 속에 누워있으면 안됩니다. 청년은 관에서 나와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죽은 청년들을 다시 일으키려고 해도 관속에 누워 있는 죽은 청년들이 잘 일어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과부 어머니처럼 아무리 옆에서 일어나라 통곡을 해도 죽은 청년이 살아나지 않습니다. '일어나라'는 말 '에게르테티' 는 수동형으로 '일으킴을 받으라'는 뜻입니다. 죽은 청년이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날 수 없습니다. 죽은 청년을 다시 살리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만이 죽은 청년을 다시 살리실 수 있습니다. 죽은 청년이라도 예수님의 음성을 듣기만 하면 반드시 살아납니다. 요 5:25절은 말씀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노상현 형제님은 10년간 고시낭인으로 지내며 어두운 고시원에서 죽은 자와 방불한 삶을 살았습니다. 스트레스를 푼다며 또 몇 년을 게임이라는 관 속에 누워 지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삼하22:29절 “여호와여 주는 나의 등불이시니 여호와께서 나의 어둠을 밝히시리이다” 말씀을 듣고 일어났습니다. 지금은 어두운 고시원에서 나와 교회와 캠퍼스를 종횡무진 누비고 있습니다. 하루라도 말씀을 전하지 않으면 찝찝하다며 날마다 사모님들과 동역해서 양들을 피싱하고 말씀을 전하는 힘찬 청년 전도인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황준호 형제님이 노상현 형제님의 실제 나이를 듣고는 깜짝 놀랄 정도로 청년의 모습으로 회복이 되었습니다. 전영민 목자님은 병든 아버지를 대신해 장남으로써 집안을 책임져야 한다는 무거운 현실문제의 관에 갇혀 지냈습니다. CPA와 취업에 실패하면서 낙심과 염려로 은둔형 외톨이처럼 살다가 시42:5절 “네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말씀을 듣고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자 취업에도 성공하고 취업보다 10배 더 어려운 믿음의 가정까지 이루게 되었습니다. 집안의 가장에서 이제는 회장단으로서 복음역사를 책임지는 교회의 가장이요 2개 국어로 부활을 증거하는 청년으로 거듭났습니다. 내년에는 풍하 사모님의 도움을 받아 중국어까지 정복해서 UBF 역사상 최초인 3개 국어 부활장 암송에 도전해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가장 푸르러야 할 대학1학년 청년의 때에 하루종일 술과 담배에 찌들어 노래방, 만화방, 당구장 등을 전전하며 죽은 자와 방불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요한복음 5장 “네가 낫고자 하느냐....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말씀을 주셔서 무기력 무절제의 관속에서 시체처럼 누워있던 자를 일으켜 세우시고 일어나 걷는 사명인의 인생을 살게 하셨습니다. 졸업 후 치과의사 타이틀을 주님께 드리고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는 풀타임 목자로 살면서 병들어 죽어가는 캠퍼스 지성인들을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격없는 자를 스페인 선교사로 부르시고 스페인으로 가라고 하셨을 때에도 순종해서 갔습니다. 그런데 오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마음에 파고다는 두려움과 염려를 이기지 못하고 본국으로 몰래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말씀과 세계선교 명령에 불순종했다는 생각에 스스로의 정죄감을 이기지 못하고 말씀과 교회를 떠나 종로거리를 방황했습니다. 나이는 30대 청년이었지만 파고다 공원 할아버지들 틈 사이에서 내 인생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눈물 흘리며 절망의 관 속에 누워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큰 소리 치다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물고기 한 마리 없는 빈 그물만 쥐고 있는 베드로의 심정으로 자학과 사단의 고소와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 고통하던 죄인을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울지 말라 하시고 요한복음 21:12절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심으로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에 절망의 관 속에 누워 있는 자를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 올해에는 팀장으로서 백부장의 믿음과 순종을 배우게 하십니다. 제가 중풍병자출신 답게 천성이 게을러서 평신도의 한계에 갇혀 지내기를 잘하는데 올해 요절로 주신 요12: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말씀을 날마다 들어서 저의 병든 내면을 고침받고 죽어가는 캠퍼스 영혼들 죽은 자와 방불한 영혼들을 고치고 살리는 역사에 쓰임받기를 기도합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청년이 일어나 앉아서 말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생기가 돌고 말이 많아진 청년을 어머니에게 주셨습니다. 슬프고 비통했던 나인성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임하시자 그 이름대로 즐겁고 아름다운 부활의 기운이 충만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독자를 잃은 과부를 불쌍히 여기신 것처럼 봄학기 저희를 불쌍히 여기사 우리 자신과 우리에게 맡겨진 죽은 청년들을 살리시고 살아난 청년들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번 부활절 수양회의 결론입니다. 죽은 청년을 다시 살리신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죽은 청년을 다시 살리신 예수님은 죽은 청년들의 유일한 구원이시며 희망이십니다. 죽은 청년이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면 다시 살아납니다. 저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청년 백부장, 일당 백의 청년 백부장들이 되어서 병들어 죽어가는 지성인들, 이미 죽어 관속에 누운 지성인들을 고치고 살리는 역사에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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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1 창세기 [2019년 창세기 제11강] 뭇별을 보여주신 하나님 관리자 2019-05-26 1007
590 창세기 [2019년 창세기 제10강] 아브람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 관리자 2019-05-19 1063
589 창세기 [2019년 창세기 제9강] 아브람을 부르신 하나님 관리자 2019-05-12 1057
588 누가복음 [2019년 부활절 수양회 제2강] 청년아 일어나라 관리자 2019-05-05 1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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