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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9-06-16 (일) 12:50
분 류 창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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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창세기 제14강] 약속대로 이삭을 주신 하나님

 2019년 창세기 제14강                                                               최동진

약속대로 이삭을 주신 하나님

말씀 / 창세기 20:1-21:34
요절 / 창세기 21:1,2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아브라함은 75세 때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믿음생활을 출발하여 어느덧 100세를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지난 시간 손님을 풍성하게 대접하고 심판의 위기에 처한 조카 롯을 위해 중보기도 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완숙한 믿음의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여전히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아름다운 아내로 인해 과거의 실수를 반복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실수와 허물이 많은 아브라함을 선지자로 세우시고 마침내 이삭을 주심으로 약속을 이뤄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을 깊이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아브라함을 선지자로 세우신 하나님(20장)
  20장1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가나안 남쪽에 위치한 네게브 땅으로 옮겨서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거류하였습니다. 이곳은 블레셋 지역으로서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목이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또다시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였습니다. 이전에 애굽에 갔을 때는 믿음이 어려서 그랬다고 이해할 수 있지만, 이후 많은 믿음의 체험들과 기도의 응답을 받고 이제 여러 민족의 아버지로서 약속의 아들 이삭을 얻게 되었는데, 신앙경륜이 24년씩이나 되고, 연세가 99세나 된 어르신이 왜 그러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얼마 전 전쟁에서 용맹스럽게 싸우던 아브라함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고 아내로 인해 목숨을 잃을까봐 전전긍긍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이 안쓰럽기만 합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하는 말처럼 아브라함의 이런 모습은 인간이 나쁜 습관에서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를 잘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쉽게 극복되지 않는 고질적인 죄 문제들을 한 두 가지씩 가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고질병은 두려움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두려움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는 당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방 세계의 사람들이 미모의 아내로 인해 자기를 죽일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11) 아브라함은 예쁜 아내를 보호해야 할 남편으로서의 의무를 저버리고 자기가 살기 위해 아내에게 자기를 오빠라 부르도록 하였습니다. 실제로 사라는 아브라함의 이복 동생이었기 때문에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또 아내를 아비멜렉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약속이 막 이루어지려 하는 마지막 단계에 아내를 빼앗겼으니, 사라의 몸을 통해 자식을 얻으리라는 아브라함의 꿈과 함께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계획도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브라함을 어떻게 도와주셨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 하나님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아브라함을 꾸짖지 않으시고,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셔서 경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비멜렉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라가 결혼한 여인인지 알지 못했고 사라를 데려간 후에도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함부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름대로 윤리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었고 정당한 절차를 밟아서 사라를 아내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아비멜렉에게 하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아니하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함이 이 때문이라.” 하나님도 아비멜렉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아비멜렉이 범죄하지 말도록 하나님께서 친히 도와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라에게 죄를 짓는 것을 하나님에게 범죄하는 것과 동일시 하셨습니다. 이것이 택하신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살기가 등등하여 신자들을 박해할 때에도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행9:4)”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행9:5)”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신자들이 괴롭힘을 당할 때 하나님 자신이 당하는 것처럼 고통스러워하십니다. 아브라함이 비록 허물과 실수가 많고 하나님의 기대수준에 못 미쳤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부르시면서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에게는 복을 내리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에게는 저주하겠다고 하신 약속대로 변함없이 아브라함의 편이 되셔서 보호하시고 돌봐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지자로 세우셨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 선지자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대언자입니다. 시실 하나님이 보실 때 아브라함은 부족한 점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름값도 못한다고 약속을 취소하고 이름을 아브람으로 돌려놓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을 선지자라고 높이시고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를 통해서 그가 살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지자라고 하신 것은 그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기도를 통해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으며 축복할 수도 있고 저주할 수도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 면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보실 때 없어서는 안될 매우 소중한 사람입니다. 남자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허물과 실수를 감싸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하고 깊은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 감동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로 이어졌고 훗날 아브라함의 믿음이 자신의 목숨과도 같은 이삭까지도 바칠 수 있는 수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을 불러 책망한 후 그에게 후한 선물과 함께 사라도 돌려보내었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서 원하는 대로 거하도록 해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위해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출산하게 하셨습니다. 자식을 못 낳은 아브라함이 다른 사람의 해산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상황에 맞지 않은 것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기도의 종으로 성장하였고 아브라함이 기도하였을 때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의 집에 출산하게 하셨습니다. 야고보서 5:16절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를 이루실 것을 믿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의 기도를 들으시고 반드시 역사해주십니다. 기도하는 데에 특별한 스펙이나 인간조건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아는 엘리야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습니다.(약5:17)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그 뜻을 이루어나가십니다. 이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우리의 허물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예수님의 피로 구원하시고 우리를 이 시대의 선지자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밤낮 모여서 열심히 기도하므로 주님이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체험하기를 수 있길 기도합니다. 이 시대와 캠퍼스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복음 전파 사명을 힘써 감당함으로 캠퍼스 영혼들이 살아나고 나아가 세상 만민을 살리고 구원받게 하는 역사에 귀하게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II. 약속을 성취하신 하나님(21장)
  21:1,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약속하신 기한에 약속하신 대로 사라에게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마침내, 드디어 25년 만에 그토록 기다리던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들이 태어났다’는 사실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대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여호와의 약속이 성취되었다’는 점을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배울 점이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은 한 번 하신 약속은 반드시 성취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25년 전에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자식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12:2,3) 세월은 살같이 빠르게 지나갔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이 약해져 초조한 마음이 들고 손해의식에 빠져 드러눕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브라함을 찾아오셔서 밤하늘의 별을 세어보게도 하시고 때로는 책망도 하시면서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믿음으로 살도록 도우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약속을 주신지 25년 만에 그 약속대로 이삭을 낳게 하셨습니다. 이삭의 탄생은 하나님과 그 말씀의 신실하심을 증거합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말씀을 기초로 일하시고, 한 번 하신 약속은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실패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롬8:28)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살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약속을 이루시되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시되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요구나 상황에 따라 역사하지 않으시고 주권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역사하십니다. 이삭이 태어났을 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100세, 사라의 나이는 90세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이 빨리 이루어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조급해하는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말씀을 다시 주시고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서야 이삭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아브라함의 원대로 빨리 아들을 주지 않으시고 그토록 오랫동안 애태우며 기다리게 하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삭을 주시기까지 아브라함을 훈련하신 점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은 아들을 얻고 인생 문제 해결하는데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를 꼬투리로 그에게 믿음을 심는데 관심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현실적으로 자기 당대에 필요한 눈에 보이는 복을 원했지만,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더 큰 복, 신령하고 영적인 복을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영적인 눈을 떠서 하나님의 원대한 뜻을 깨닫고, 그 뜻을 섬기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삭의 탄생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로 말미암은 것임을 나타내셨습니다. 또한 이삭은 육신의 자녀가 아니라 약속의 자녀로서 장차 오실 메시아의 증표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원할 때 빨리 주셨다면 아브라함은 믿음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깊이 체험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때로 우리가 간절히 소원하고 기도하는 바를 빨리 들어주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는 아직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빨리 들어주시면 쉽게 자족하고 교만해져서 믿음의 성장이 막히고 쓸모없게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자라 축복을 감당할 만한 내면의 그릇이 준비되고, 하나님의 때가 되면,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응답하시되 가장 좋은 것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지체하신다고 불안해하거나 초조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가장 좋은 것을 받으려면 믿음으로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은 믿는 자로 하여금 최후에 웃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삭을 낳은 사라의 소감이 무엇입니까? 5,6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날 때에 백세라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창세기에는 사라가 웃었다는 기록이 두 번 나옵니다. 18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년 이 맘 때에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를 부엌에서 들은 사라가 어이가 없어서 한 번 웃었습니다. 이때에는 불신이 담긴 웃음이었기 때문에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90세 할머니가 아들 이삭을 낳고 그를 가슴에 안고 젖을 먹이며 웃는 웃음은 기쁨과 감격에서 나오는 웃음이었습니다. 사라는 그동안 해결되지 않는 인생 문제로 인해 누구보다도 맘고생을 많이 하였습니다. 아브라함과 결혼을 한 후 자식을 낳지 못하여 부끄러운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겁 많은 남편 때문에 두 번이나 다른 남자에게 팔려갈 뻔하기도 하였습니다. 자식을 낳지 못하는 죄로 종으로 데리고 있던 하갈에게 안방마님의 자리를 내어주고 사라는 쓸쓸히 늙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라의 내면의 고통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스마엘을 얻고 좋아 어쩔 줄 몰라 하는 아브라함을 보면서 사라는 남몰래 눈물을 흘리며 지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아브라함을 주인으로 섬기며(18:12), 아브라함과 동역하여 온 마음을 다해 손님을 대접하며 자신의 도리를 다하는 사라에게서 성숙한 믿음의 내면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라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또 이르되 사라가 자식들을 젖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마는 아브라함의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하니라.” 이제 사라에게 지난 날의 아픔과 슬픔은 과거의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신실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살아온 지난 25년간의 눈물겨운 믿음의 투쟁에서 얻은 승리의 감격은 그간의 모든 슬픔과 아픔을 능히 덮고도 남았습니다. 이삭은 기쁨, 웃음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가정에 기쁨을 주셨고, 이 소식을 듣는 모든 자들이 함게 기쁨을 나누게 하셨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산 결과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의 열매로서 진정한 웃음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삭의 탄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로 말미암은 것으로서 아브라함의 가정의 믿음을 확증하는 증거입니다. 또한 이삭은 단순히 육신의 자녀가 아니라 약속의 자녀로서 장차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심으로 이루어질 구원 역사의 예표이기도 합니다. 구원 역사는 결코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 과정에 많은 고난과 아픔을 겪기도 하지만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고 믿음의 길을 갈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승리의 기쁨과 감격의 열매를 주시고 우리로 마침내 웃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을 믿고 끝까지 인내함으로 최후에 웃는 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저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맡겨주시고 캠퍼스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고 양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선지자의 직분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창세기15장5절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말씀을 주시고 소망가운데 가대개척역사를 섬기도록 하셨습니다. 아들도 장차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는 비전 가운데 이름을 열국이로 지어주셨습니다. 저는 자연스럽게 열국의 아버지가 되었지만 양 한 사람 없이 나이만 먹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의약분업 파업이 일어나 병원 문을 닫고 불확실한 장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방에서 컴퓨터로 상황만 살피고 있을 때 혜경동역자의 동역으로 함께 캠퍼스에 나아갔는데 이때 하나님은 당시 본과1학년이었던 문아림형제님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지금의 문대범 목자입니다. 하나님은 오랜 기간 양 없는 목자 훈련을 통해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믿음의 가치관을 놓게 하시고 때가 되었을 때 믿음의 열매를 주심으로 이삭을 얻은 기쁨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꾸준한 말씀공부를 통해 이제는 모임에 없어서는 안될 귀한 동역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두 자녀를 독일로 보내어 세계선교의 씨앗으로 드리게 하시고, 지난 9년간 콜롬비아 박안드레스 선교사님을 매주 스카이프 1대1로 섬기며 세계선교역사에 동참하게 하셨습니다. 부족한 자를 이 시대 선지자로 세우시고 캠퍼스와 세계선교 역사를 위해 기도하며 말씀을 전하는 일에 사용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요즈음 인본주의, 물질주의, 반기독교 사상의 세력이 확산되면서 복음주의가 점점 설 땅을 잃어가고 있는 현실로 인해 믿음이 위축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한 번 하신 약속은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심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역사는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통해 끊어지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져왔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부족한 저와 우리 모임을 통해 구원 역사를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제가 현실 앞에 절망하기보다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영적 안일을 회개하고 깨어서 기도하며 복음증거자의 사명을 힘써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복음신앙의 뿌리를 굳게 내리고 하나님과 영원토록 동행하며 생명을 낳고 키우는 역사에 쓰임 받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8절을 보십시오. 이삭이 자라나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당시에는 보통 3살 때에 젖을 떼었다고 합니다. 이 때 이스마엘의 나이는 17세 정도로서 건장한 사춘기 청소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라가 보니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는 것이었습니다. 놀린다는 것은 단순히 벼이삭이냐, 밀이삭이냐 하며 가볍게 놀리는 정도가 아니고 멸시하고 핍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삭이 태어나기 전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전부였습니다. 아브라함의 노년에 얻은 외아들로서 아브라함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부족함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삭이 태어남으로 하루아침에 모든 관심과 사랑을 빼앗겼습니다. 서자의 신세로 전락하여 상속권마저 상실하게 되자 시기심과 운명주의로 인한 슬픔에 사로잡혀 고의로 동생을 박해한 것입니다.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이를 알리며 이스마엘을 내쫓으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깊은 근심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삭도 그의 자식이지만 이스마엘도 13년간 아버지의 기쁨을 누리게 해줬던 사랑스런 자식이었습니다. 이스마엘은 어느덧 건장한 청년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이런 이스마엘을 내쫓는 것은 인간적으로 차마 못할 짓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고민이 커져가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하나님은 사라의 손을 들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씨이기 때문에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냈습니다. 이 부분을 읽다보면 사라도 너무하고 하나님도 너무하신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왜 이삭과 이스마엘을 함께 키울 수 없단 말입니까? 왜 사랑으로 다 품지 못하는 것입니까? 이삭은 어리고 연약하지만 이스마엘은 강합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을 함께 키운다면 이삭이 기가 죽어 잘 자라지 못할 것이고 이로 인한 가정 내에 분쟁과 다툼으로 인한 갈등이 끊이지 않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이삭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보호가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이스마엘을 과감하게 쫓아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4:21-31절에서 이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스마엘은 여종에게서 육체를 따라 났고, 이삭은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약속으로 말미암았습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인간적인 방법으로 얻은 육신의 자녀요, 이삭은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주신 약속의 자녀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마엘이 사람의 지혜와 노력으로 태어났다면 이삭은 하나님의 능력과 도우심으로 얻은 아들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이삭을 통해 구속역사를 계승하십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스마엘은 율법을 기리키고, 이삭은 은혜를 가리킵니다. 또 이스마엘은 인본주의를 가리키고, 이삭은 복음주의를 가리킵니다. 인본주의는 인간 중심이요, 복음주의는 하나님 중심입니다. 인본주의는 이성 중심이요, 복음주의는 말씀 중심입니다. 이 두 세력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언제나 인본주의는 복음주의를 핍박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8:34)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본주의 신자들은 자기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사명의 십자가를 지지 않습니다. 다만 복음이 주는 은혜만을 누리고자 합니다. 이들은 복음주의자들을 비웃고 핍박합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을 어리석게 생각하고, 말씀은 시대에 맞게 변형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자들은 말은 그럴듯하게 잘하지만 실제 생활에는 아무런 영적인 열매가 없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습니다. 이들의 비복음적인 신앙은 불신자들에게 좋지 못한 영향력을 끼칩니다.
  우리의 내면에도 이스마엘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성보다 사람과의 관계를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살면서 이스마엘을 통해 위로 받았듯이 우리의 신앙생활도 사람을 통해 위로 받고 사람과의 관계성 속에서 신앙생활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믿음이 어린 초기 신앙의 단계에는 하나님보다 목자님을 통해 위로 받고 목자님의 친절과 섬김 때문에 신앙생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성장을 하면 인간관계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기초한 신앙의 단계로 들어가야 합니다. 사람을 의지하고 사람의 눈치를 보는 신앙의 단계를 넘어 하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을 배우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스마엘을 내보내고 이삭을 붙들었습니다. 그가 이스마엘을 내쫓고자 했을 때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그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갈5:24). 결국 아브라함은 자신 속에 있는 인본주의적인 요소와 싸워 이겼습니다. 자기 속에 있는 인본주의 요소를 몰아내고 하나님 중심의 복음주의 신앙 위에 굳게 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도 친히 돌봐주셨습니다.(15-21)
  아브라함의 믿음은 이제 상당히 성장했습니다. 그는 믿음의 거목이 되어 주위 사람들에게 좋은 믿음의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22,23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하지 아니하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네가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 아브라함이 처음 그랄 땅을 밟았을 때 그는 아내로 인해 죽을까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곳의 최고 통치권자인 왕과 군대장관이 함께 와서 당대에 뿐만 아니라 후대에까지 효력이 있는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자고 하였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의 종들이 그의 우물을 빼앗은 일에 관하여 아비멜렉을 책망했습니다. 그리고 대등한 입장에서 평화 조약을 맺고 또 우물에 대한 소유권도 확실하게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더 이상 세상 권세자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당당한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 후 아브라함은 무엇을 했습니까? 33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에셀나무는 지중해 연안의 산악지대와 사막 같은 건조한 땅이나, 염도가 높은 바닷가에서도 잘 자라는 나무로서 다른 식물이 모두 말라죽어도 그 푸르름을 잃지 않고 자라는 상록수입니다. 이 나무를 심은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불변의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아브라함의 마음의 결단을 나타냅니다. 또 영생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영원한 역사 가운데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인식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그는 영존하시는 하나님께 믿음의 뿌리를 내리고 어떤 환경 가운데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담대한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한 번 하신 약속을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나와 우리 모임에 주신 약속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이 시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데에 쓰임 받는 복된 인생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불신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고 믿음의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최후에 웃는 진정한 승리의 기쁨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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