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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9-10-13 (일) 12:41
분 류 로마서
첨부#1 2019년_로마서3강-1.hwp (28KB) (Down: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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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로마서 제3강] 행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

2019년 로마서 제 3 강
말씀 / 로마서 2:1-16
요절 / 로마서 2:6

행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지난 말씀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불경건하고 불의하게 살아가는 이방세계에 나타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로마는 부러운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는 불쌍한 세계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정욕과 상실한 마음을 따라 살아가는 로마 사람들을 정죄했습니다. “지옥의 땔감으로나 쓰여져야 할 놈들이야!”
그런데 바울은 그들을 향해 충격적인 말씀을 던집니다. 2: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판단’이란 본래 ‘헤아린다. 구분한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심판받을 사람인지, 구원받을 사람인지’, ‘옳은 행동인지, 옳지 않은 행동인지’를 구분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돕는 자리, 리더의 자리에 오를수록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매우 중요해집니다. 요즘처럼 신천지같은 이단들이 기승을 부릴 때에는 양의 탈을 쓰고 들어오는 이리들을 신속히 판단해야 합니다. 목자는 모임에 덕을 끼치는 사람을 분별하여 본으로 삼고 해를 끼치는 사람을 판단하여 징계해야 합니다.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고 악한 것을 악하다고 말할 수 있어야 진리의 모임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바울이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책망으로 시작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판단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남을 판단하는 기준을 스스로에게 적용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세계를 심판받아 마땅한 자들로 판단했다면, 자기들에게도 그런 모습이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했습니다. 유대인이라고 해서 특별 면제대상이 아니며, 이방인이라고 해서 가중처벌 대상도 아닙니다.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에게 동일한 심판이 임하는 것,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2)  
3절을 보십시오. 사도바울은 남을 판단하는 사람들을 향해 ‘같은 일을 행하고 있다’라고 말씀합니다. 1절에 이어 3절에서 다시 한 번 강조한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같은 죄인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방인들이 시기하고 미워하는 죄를 지었듯이, 유대인들도 시기하고 미워했습니다. 이방인들이 교만하고 수군수군하기를 좋아하는 죄를 지은 것처럼, 유대인들도 그런 맛으로 사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이방인들이 정욕의 죄를 즐기듯이, 유대인들도 그러했습니다. 사람의 속마음은 어디에 있든지 비슷합니다. 문명세계에 살고 있다고 해서 그 마음까지 문명화되는 것은 아니며, 아마존 정글에 살고 있다고 해서 그 마음까지 야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왜 스스로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했을까요?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이 많이 달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스포츠에 열광하는데, 유대인들은 율법을 암송했습니다. 이방인들은 몸에 문신을 새겼지만, 유대인들은 할례를 행했습니다. 이방인들은 안식일에 늘어지게 퍼질러 잠을 잤지만, 유대인들은 정시에 정장을 입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것으로 이방인들과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했으며, 하나님의 심판까지 피해갈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최근에 6명의 여신도들을 성추행하고 실형복역중인, 이단시비가 있는 어느 목회자는 ‘하나님은 여전히 자기를 기뻐하신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근거로 3가지를 제시했습니다. 첫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많은 고난을 받았으며, 둘째는 신유의 기적을 많이 보였으며, 셋째는 큰 교회를 세웠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저야말로 제일 먼저 심판받아 마땅한 죄인인데, 오직 은혜로 용서받았습니다.’ 죄의 고백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것들을 변명삼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해갈 줄로 생각했습니다. 아담이 회개하지 못하고 낙원을 잃어버린 이유도 핑계와 변명이었습니다. 자기에게 아무런 책임을 지우지 않는 이중 잣대가 문제입니다. 남을 판단할 때에는 ‘인간이 왜 그래?’하다가 자기 이야기로 들어가면 ‘인간이 다 그런 거지!’로 변신합니다. 상대방의 허물은 현미경을 동원해서라도 구석구석 찾기를 원하면서도 자기에게 있는 허물은 들보같이 거대할지라도 덮어두기를 원합니다.
요즘 우리사회를 강타하는 요절 말씀이 있습니다. ‘내로남불’, 어떤 분이 말씀 공부 중에 제게 물었습니다. ‘저는 조국장관에 대해 비판적이며 아내는 조국장관을 지지하는데, 어떻게 판단해야 좋겠습니까?’ 공개적으로 대답하기 어려운 위험한 질문이었습니다. 이쪽에서는 조국과 조국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내로남불이라고 판단하고 있는데, 저쪽에서는 조국을 공격하는 사람들을 내로남불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판단과 판단이 부딪히면 부부라도 싸움이 날 수 있습니다. 서로 ‘이 뻔한 진실을 왜 보지 못하느냐’ 인신공격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정치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이유입니다.
오늘 말씀을 적용하면, ‘내로남불’은 남을 판단하는 도구로만 쓸 것이 아니라 먼저 자신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날카로운 칼이 타인을 공격하면 흉기가 될 수 있고, 자기를 째고 들여다보면 편견이나 선입견을 치료하는 수술용 메스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조국을 범법자, 위선자로 판단했다면, 혹시 나에게도 범법자, 위선자의 모습이 있지는 않은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반면 조국을 억울하게 공격하는 악한 사건으로 판단했다면, 나에게도 고통하는 목소리를 외면하고 무정하고 무자비하게 달려가는 모습이 있지 않은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먼저 나를 돌아보면 이상하게도 분노 수치가 떨어지고 누군가를 향해 섣불리 돌을 드는 것이 정말 무서운 행동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판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만 남을 판단하는 것만큼 자기를 돌아보기에 힘써야 합니다. 세상의 수많은 사건들은 우리를 비추시는 하나님의 거울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 또한 나의 숨겨진 내면을 비추어주는 거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그런 인식으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거울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멋쟁이들은 외출을 하기 전에 항상 거울 앞에 섭니다. 그와 같이 아름다운 신앙생활은 바깥을 향하여 거울을 들이대기 전에 먼저 자신을 비춤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나를 돌아보는 것은 항상 부담되고 항상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나를 돌아보려면 마음을 낮추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거기에서부터 구원의 은혜가 새로워지고 다른 죄인들을 이해하고 도울 수 있는 성령의 도우심을 얻습니다. 반대로 자기발견이 없으면 변화도 없고 열매도 없습니다. 형식주의와 이중생활에 빠져 차가와지고 딱딱해집니다. 세상 분위기에 휘말려 영적으로 죽어가는데도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합니다. 유대인들이 빠졌던 함정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별다를 바 없이 살면서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면서 할례를 했다는 것이 그런 확신의 근거였습니다. 하지만 훌륭한 믿음의 선배와 영적 유산을 주신 것은 얼마든지 죄를 지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회개할 수 있도록 인자를 베푸신 것입니다.(4) 훌륭한 믿음의 조상들을 통해 ‘아! 이렇게 믿음 없이 살면 안되겠구나!’, 깨닫게 하는 손길입니다. 만약 할례를 하고 안식일을 지키고 율법을 알면서도 회개하지 않고 선을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결국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하는 마음을 따라 장차 임할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것입니다.(5) 다윗같이 훌륭한 사람이라도 치명적인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회개하기보다 끝까지 반발하며 고집을 피우는 것입니다. 수험생이 공부 스케줄대로 진도를 나가지 않고 놀고 있다면, 시험 보는 그날에 당할 진노를 쌓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잘못되었음을 알면서도 계속하여 고집을 부리고 회개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우리는 매순간 두렵고 떨림으로써 회개하고 새로워지기에 힘써야 합니다.

왜 그리해야 합니까! 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하나님은 행한 대로 보응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행한 대로’라는 말씀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밑줄 그어놓아야 합니다. 6,7,9,10절에서 반복하여 ‘행한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공정하신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행한 대로’의 반대말은 무엇이겠습니까! ‘말로, 겉모습으로, 스펙으로’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말이나 외모나 스펙을 따라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보응하십니다.(7) ‘참는다’라는 표현이 제일 먼저 나왔습니다. 선을 행하는 것은 이론이 아니라 고난을 참는 실전으로 시작합니다. 박해나 경제적인 손해나 남모르는 아픔을 참음으로부터 선한 행위가 시작됩니다. 때로는 자존심이 뭉개지는 것도 참아야 합니다. 어떤 분이 이런 표현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참된 종의 증거는 그 앞에 높여진 꽃다발로 계산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던져진 벽돌에 의해 평가된다.” ‘어디까지 인내할 수 있는가’는 얼마만큼 하나님을 사랑하는가의 척도입니다. ‘참고 선을 행하여’라는 말씀은 1회용 혹은 이벤트성이 아닌 지속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즉, 영광과 존귀과 썩지 아니할 것을 목표삼아 꾸준히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영생으로 갚아주십니다. 반면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십니다.(8)

세상은 무엇을 이루었느냐에 주목합니다. 탁월한 스펙은 열심히 살았다는 증거이거나 탁월한 재능의 소유자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척도입니다. 우리시대 청년들이 스펙쌓기에 열중하는 이유입니다. 세상은 스펙에 따라 대우하기도 하고 멸시하기도 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목자는 초등학교 때 친구를 꼬드겨 물건을 훔치다가 걸려 공범인 친구와 함께 담임 샘에게 끌려갔습니다. 담임은 자기를 보자마자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아니, 너같이 똑똑한 녀석이 어쩌다가 저런 놈의 꼬임에 넘어갔니?” 자기가 주범이고 친구가 공범이었는데, 순식간에 친구는 악당, 자기는 악당의 꼬임에 넘어간 순진한 아이로 둔갑한 것입니다. “아!, 이래서 공부를 잘해야 하는구나!” 깊이 영접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을 추구하고 있느냐, 인생목적에 더욱 주목해야 합니다. 사람을 속일 수는 있어도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습니다. 당장의 유익을 좇아 악을 행하면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평강은 사라지고 어둠이 찾아오고 심하면 불면이나 우울증에 빠집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 모두에게 해당하는 공통 원리입니다. 마찬가지로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습니다.(10) 손해 보고 아픔을 겪고 있는데도 얼굴에서는 빛이 나고 마음은 고상해지고 환난의 파도마저 흔들 수 없는 평안함을 누립니다. 선을 행하는 사람이 누리는 축복입니다. 목자가 양들을 돕다가 매번 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길에서 떠나지 않는 이유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민족을 뛰어넘어 모두에게 적용되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입니다.(11) 우리는 사람의 외모에 속아 넘어갈 때가 있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성적이 좋다고 해서 우리의 인격까지 좋은 것이 아님을 하나님은 아십니다. 우리가 명품을 걸쳤다고 해서, 우리를 명품인생으로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척’이 안통합니다. ‘착한 척, 순종하는 척, 노력하는 척’만 해서는 안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습니다. ‘나는 율법을 몰랐어요’라는 변명이 통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나는 그래도 율법을 알고 있고 있는데요’라는 변명도 통하지 않습니다. 범죄하였느냐, 범죄하지 않았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습니다.(13) 우리식으로 말하면 교회문턱을 얼마나 많이 넘어왔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배운 대로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매주 말씀을 공부하고 소감을 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배운 대로 순종하고 결단한 것을 지키는 것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율법을 모르는 사람도 율법을 아는 사람처럼 행동할 수 있습니다. 교회 나오지 않는 사람이 교회 나오는 사람보다 선한 모습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더 건강한 양심을 가졌을 때입니다.(15) 칸트는 ‘하늘에는 별이 있듯이 인간에게는 양심이 있다’라고 했습니다. 청결한 양심을 가진 사람은 작은 죄에도 부끄러워하고 가책을 받습니다. 무너진 양심을 가진 사람은 많은 죄를 지었는데도 조금의 가책을 받습니다. 완전히 죽어버린 양심을 가진 사람은 신경이 죽어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죄를 지어도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못합니다. 율법을 알든지 모르든지 화인 맞은 양심의 소유자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반면 살아있는 양심은 율법처럼 옳은 일, 그른 일들을 분별하고 고발합니다. 그로 인해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하나님께로 돌아가도록 합니다. 이방인의 양심이 살아있다면 그렇지 않은 유대인보다 율법에 합당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스펙에 주목할 것이 아닙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은밀한 것, 속생활, 속사람에 주목해야 합니다. 1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는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열망과 함께 악한 죄성도 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자들을 철저히 부서버리고 싶은 무자비함이 있습니다. 좋은 것이라면 속이고 뒤틀어서라도 빼앗고 싶은 탐욕이 있습니다. 하늘까지 높아지고 자랑하고픈 교만이 부드러운 말씨와 젠틀한 매너 뒤에 숨겨져 있습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마음껏 음란하게 살고픈 정욕이 마그마처럼 마음 깊숙이 흐르고 있습니다. 은밀히 숨겨진 것들이 언제 드러납니까! 홀로 있을 때, 혹은 다같이 죄를 짓는 분위기에서 아무도 문제시하지 않을 때 드러납니다. 돈이나 권력을 차지하여 자기 마음먹은 대로 살 수 있는 그 때에 드러나기도 합니다.
누구나 피해갈 수 없이 다 드러나는 때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의 은밀한 것들을 심판하시는 그 날입니다. 고린도후서 5:10절은 말씀합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면 누구나 두렵고 간절한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천로역정에 나오는 크리스챤은 등에 멘 무거운 죄짐을 생각하며,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탄식했습니다. 우리 안에 은밀한 것들을 생각하면, 그와 같이 하나님의 구원을 부르짖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의 모든 허물과 죄악을 덮어주시는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주님의 기도가 나를 위한 기도였으며,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은혜가 아니면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피해갈 수 없는 자임을 알게 됩니다. 지금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은 내가 탁월해서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주님의 은혜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매순간 말씀에 순종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고자 기도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영혼을 깨끗케 하시고 담대함을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스펙을 쌓아간다고 해서 사람이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캠퍼스 지성인들에게 힘써 복음을 전해야 이유입니다.  등록금이 없어서, 연애사업이나 취업에 실패해서 불쌍합니다.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이 불쌍한 것은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달라지려면 말씀으로 자기의 마음 속 깊은 곳을 비추고 회개해야 합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열매 맺는 새 인생이 시작됩니다. 세계 대표이신 윤모세 선교사님은 런던 제자양성역사의 비결을 일용할양식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런던 개척 초기 성경공부하고 은혜 받던 양들이 제자로 성장하지 못하는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이는 영국 지성인들 마음 깊숙이 숨겨진 우월감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방황하면서도 ‘나는 백인 지성인, 당신은 그렇지 않은 동양인’이라는 우월감으로 겸손히 듣고 배우지 않았습니다. 윤모세 선교사는 수 년 동안 함께 일용할 양식을 먹었습니다. 말씀이 그들 속에 있는 교만과 우월감을 드러내었고 회개할 힘을 주었습니다. 그럴수록 점점 영적으로 소통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동역하기 시작했습니다. 영국 사람에서 영국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 몇몇이 세워지자, 또 다른 영국 양들을 돕고 섬길 수 있는 베이스캠프가 되었습니다. 마음속 깊은 곳의 변화가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었습니다.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자부심에 걸맞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있는지를 진실하게 돌아보고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 시대는 스스로를 돌아보기를 싫어합니다. 이는 이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지구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미국과 중국, 미국과 북한의 대화가 진전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중동지역에서 그 오랜 시간 끔찍한 테러와 분쟁이 끊이지 않는 이유입니다. 상대방을 향해서만 판단의 칼날을 들이댑니다. 일본이 우리에게 미움 받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람들만이 자기를 돌아보기에 용감합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있는 모습 그대로 허물과 죄악을 들고 나아오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곳에 성령을 부으사 축복하십니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회개함으로써 진실하고 경건한 하나님의 자녀들로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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