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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1-04-24 (일) 13:16
분 류 고린도전서
첨부#1 2011년_부활절수양회_제2강-1_-_최바울_김태양_서삼문.hwp (74KB) (Down: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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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부활절수양회 제2강] 성경대로 부활하신 예수님 - 최바울, 김태양, 서삼문
2011년 부활절수양회 주제2강                                        최바울, 김태양, 서삼문

성경대로 부활하신 예수님

말씀 / 고린도전서 15:1-58
요절 / 고린도전서 15:3,4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우리는 한번 뿐인 인생 누구나 성공적인 인생 살기를 원하지 실패한 인생 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럼 인생살이에 있어서 성공과 실패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벌어놓은 재산입니까? 키워놓은 자식들입니까? 맺어놓은 인간관계입니까? 성공과 실패의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사도바울의 관점에서 본다면 죽음에 승리하는 것이 성공적인 인생이요, 패배하는 것이 실패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아무리 몸부림쳐도 사람은 결국 죽게 되기 때문에 끝에 가서는 실패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은 놀랍게도 우리에게 죽음을 이기는 승리의 길이 있음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부활신앙을 갖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부활에 대해서 배움으로,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는 부활신앙과 이에 기초한 삶의 자세를 덧입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고린도전서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서로 편을 갈라 분쟁하였고, 양극화현상 때문에 생긴 빈부 간의 갈등문제도 있었습니다. 음행 문제, 혼인 문제,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 심지어 누가 더 영적인 사람인가를 놓고 다투는 문제도 있었습니다. 이는 고린도 교회가 세속 도시의 한 복판에 있으면서, 세상에 영향을 끼치기보다 오히려 세상의 영향을 받아 복음의 진리를 놓치고 세속화 된 것이 그 원인이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 다루고 있는 죽은 자의 부활 문제도 그중의 하나였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어떤 신자들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 의문을 품었습니다. 아무리 믿는 것이 좋다고 해도 믿을 것을 믿어야지 한번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은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여기는 자들이 생겼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 믿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 부활 신앙을 갖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Ⅰ.부활의 복음(1-11)
 1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신자들의 부활신앙을 돕기 위해 먼저 자신이 전해 준 복음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이 복음은 고린도 교회의 형제 자매들이 이미 이전에 받아들인 것이고, 현재 그 안에 굳게 서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과거 복음을 영접하기 전에는 인생 목적과 방향이 없이 음란하고 방탕한 도시 분위기에 젖어 타락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바울이 전한 복음을 영접한 뒤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죄악된 옛생활을 청산하고 일주일에 한번씩 꼬박꼬박 성경말씀을 공부했습니다. 중간고사로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에도, 회사일 때문에 멀리 출장을 가게 되어도 절대적으로 교회에 출석하여 주일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그들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습니까? 2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고린도 교회의 일부 신자들은 복음을 전해 준 목자 바울이 떠난 후, 그들이 처음 듣고 붙잡았던 복음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고린도 시에 만연해 있던 영지주의와 육신주의 쾌락주의의 영향을 받아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상실한 채 무덤덤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점차 절대 복음신앙을 잃고 인본적이 되어갔습니다. 말씀공부도 빠지고, 가끔 중요한 일이 있으면 예배도 빠지곤 하였습니다. 특히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서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어디 있냐는 세상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서, 또 실제로 사람이 죽고 몸이 썩어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현실을 보면서 부활에 대해 불신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된 근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이 이미 받은 바 복음을 굳게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굳게 붙들기보다 헬라인답게 지성인답게 새로운 것, 이성에 어긋나지 않는 논리적인 것을 추구하였습니다. 고리타분한 성경말씀보다 짜릿하고 재미있고 실용적인 세상 지식과 즐거움을 붙들었습니다. 세상에는 복음을 굳게 붙들지 못하게 하는 죄의 유혹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처음 받은 복음을 굳게 붙잡지 못하고 놓아버리면 더 이상 신자답게 살 수 없게 됩니다. 더 이상 부활을 믿는 믿음으로 살지 못하게 됩니다. 다시 죽음의 권세에 종노릇 하며, 죄의 종노릇 하며 살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몸부림치던 옛생활로 돌아가고,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가 아니라 자기를 위하여 사는 소시민적이고 이기적인 삶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문제 많은 고린도 교회에 자기가 전해 준 복음이 무엇인가를 다시 상기시켜야 했습니다. 그 복음을 끝까지 붙잡아야 구원을 얻게 됨을 일깨워 주어야 했습니다.

 그럼 바울이 그들에게 전해 준 복음 곧 기쁜 소식이 무엇입니까? 3,4절을 보십시오.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복음은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 그들에게 또 오늘 나에게 왜 기쁜 소식이 됩니까? 우리 인간의 근본 문제는 죄와 죽음의 문제입니다. 죄란 그리스 원어로는 ‘hamartia’란 말로 분리되다(seperate), 끊어지다(cut)의 의미가 있습니다. 죄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으로 하나님과 분리된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분리된 인간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 없이 마음대로 살고자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되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니하였습니다(롬1:21). 그 결과 인간은 고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잃고 동물과 같은 육신으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창 6:3). 불의, 추악, 탐욕, 시기, 살인, 분쟁, 악독 등의 죄의 열매를 맺다가 결국에는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죄의 대가는 한번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후에는 무서운 심판이 있습니다.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떨어져 영원토록 고통을 받게 됩니다. 이처럼 죄의 결과는 인간을 비참하게 만들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끔찍한 죄의 대가를 치루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모든 물과 피를 쏟으셨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가 나음을 입고 평안을 얻게 되었습니다. 심판에서 벗어나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이것이 바로 십자가에 담긴 비밀스러운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자들에게 죄사함과 구원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4절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님은 완전히 죽으셨지만 성경대로 사흘 만에 살아나셨습니다. 이로써 인간을 그토록 괴롭히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폴 틸리히는 “인간의 불안과 초조와 공포의 원인은 죽는다는 것, 존재가 비존재로 바뀐다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인간은 평생 동안 불안과 초조와 공포에 시달리다 비참하게 죽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는 불안과 초조와 공포에서 해방되어 생명과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죄사함의 확신과 영생에 대한 소망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는 누군가가 죽음을 피해갈 수 없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들에게 전해 준 복음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참된 것임을 두 가지 근거로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은 성경대로 된 일이라는 점입니다. ‘성경대로’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면 말씀대로, 성경대로 빛이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에 부활이 있으리라 말씀하셨고, 그 말씀을 성취한 사건이라면 그것은 정말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후 수 많은 증인들에게 보이셨으며, 그 증인들 중에는 지금도 대다수가 살아있다는 점입니다.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 보이셨습니다. 그 후에는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습니다. 그 증인들 중에는 지금까지 대다수가 살아있었습니다. 그 후에는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는 모든 사도에게 보이셨습니다. 맨 나중에는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바울에게도 보이셨습니다. 많은 증인이 있다는 것은 그 일의 참됨을 말해줍니다. 더군다나 증인들의 변화된 삶은 부활의 증거를 더욱더 확실하게 합니다. 베드로는 꼬마 여자아이 한 사람 앞에서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던 자였습니다. 이런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두려움을 극복하고 수천명 앞에서 담대히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못 박힌 손과 허리에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던 의심의 달인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 변하여 인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Saint Thomas가 되었습니다. 누구보다도 사도 바울 또한 부활의 증인이었습니다. 신앙이 없는 문화학자들은 기독교를 바울의 종교라 할 정도로 기독교역사에서 사도 바울이 차지하는 비중이 큽니다. 그러나 초기 바울은 유대교 신봉자로 나사렛 예수를 이단으로 알고 잔인하게 교회를 박해하던 자였습니다. 그는 예수 믿는 자를 발본색원하여 죽이고자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거듭나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부활신앙은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때 누구든지 변하여 담대한 부활의 증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9절과 10절을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구원받은 자신이 과거 어떤 자였는가 겸손히 증거합니다. 9절과 1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의 자격이 없기 때문에 자신은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다고 고백합니다. 과거 그는 ‘큰 자’ 란 뜻의 ‘사울’이었지만 이제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여전히 예수님을 박해하고 복음역사를 훼방하였을 자신을 생각할 때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시고 사도로 삼으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심령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는 이 은혜를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 모든 사도 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습니다. 그는 많이 헐벗고 굶주리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수갑을 찬 죄수의 몸으로 로마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로인해 유럽과 소아시아에 편만 하게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그는 이 때 자기 의를 내세우기 쉬웠지만 이 모든 것이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간증하였습니다. 이처럼 성경의 진실성과 다수의 증인들이 존재함을 볼 때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참된 사실입니다. 그래서 바울이나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셨다고 전파하였고, 그들도 이 같이 믿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죄인에게도 부활의 주가 되십니다. 저는 목자 중에 지극히 작은 자요, 하나님의 교회를 제대로 섬기지 못하였으므로 바울이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평신도가 되었지만 직장과 사명을 동시에 감당하면 제 명에 못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이 들었습니다. 특히 치과진료의 특성상 육체와 정신이 모두 소진될 때가 많아 일을 마치고 목자로서 십자가를 감당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새벽기도 한번 하기라도 하면 하루 종일 피곤에 시달렸습니다. 오늘만큼은 퇴근하고 캠퍼스로 가리라 다짐하며 치과를 나와 지하철을 타도 캠퍼스가 있는 회기역을 지나치고 센타가 있는 외대역을 지나쳐 집이 있는 신이문역에서 내렸습니다. 받은 은혜가 컸지만 더 많이 수고하지 않고 더 많이 쉬고자 하였습니다.  말씀을 통해 이것이 상황과 조건 문제가 아니라 제가 받은 복음진리 곧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영광이라는 진리를 붙들지 못했기 때문임을 깨닫고 회개케 됩니다. 제가 올해 요절 로마서 12:1,2 말씀을 다시 붙들고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가운데 내게 주신 구원의 은혜, 부르심의 은혜가 헛되지 않도록 더 많이 수고하는 자가 되겠습니다.

Ⅱ. 부활의 능력(12-34)
(1) 죽은 자의 부활 (12-28)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경대로 성취되어진 일이요, 수많은 증인들에 의해서 목격되어진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서 어떤 문제가 제기되었습니까? 12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고린도 성도들 가운데는 죽은 자의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헬라의 이원론 사상으로 부활의 진리를 공격하였습니다. 헬라의 이원론은 인간의 영혼은 불멸하는 것이지만 인간의 육체는 악한 것이어서 부패하고 썩어 영원히 사라진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부패하고 썩어 영원히 사라진 육체가 어떻게 다시 영혼과 결합하여 죽은 자의 몸이 부활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이는 결국 그리스도의 부활과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복잡한 현실 속에 살면서 도대체 예수님의 부활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며 부활을 나와 상관없는 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어떤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까?
첫째, 그리스도의 부활도 없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부활도 없습니다.
둘째, 우리가 전파하는 것이나 믿음도 헛것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우리가 믿고 전파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사흘 만에 살아나사 생명의 구주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 나라에서 영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아니하셨다면 우리가 하는 일대일이나 새벽기도 등 주와 복음역사를 위해 하는 모든 일은 헛것이 되고 맙니다.
셋째,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됩니다. 15a절을 보십시오.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다면 우리는 거짓말쟁이요 남을 속이는 사기꾼이 됩니다. 우리 목자님들은 거짓말을 열심히 연구해서 사기를 치며 서로 잘 했다고 칭찬합니다. 우리 2세들은 부모들이 다하지 못한 사기를 위해 대를 이어 사기 치는 자들이 됩니다. 그리고 이번 5월에 있을 50주년 기념예배는 세계 곳곳에 상주하는 국제 사기꾼들이 모이는 단합 대회가 됩니다.
넷째,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게 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구원 역사가 완성되었다는 확신한 증거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구원 역사는 일어날 수 없는 것이며, 우리는 여전히 죄와 사단의 종노릇하는 삶을 살다가 심판을 받고,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됩니다.
다섯째, 신자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자가 됩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과거 많은 성도들이 부활의 소망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의 피를 흘리고 잠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이들은 헛된 소망을 바라다가 멸망하였으니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들뿐만 아니라 우리 신자들은 더욱 불쌍한 자가 됩니다. 인생들의 소망은 이 땅에 살 동안만이라도 좀 더 편안하게 인생을 즐기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이런 소망을 부인하고 주님을 위해서 시간과 물질을 드리고 청춘을 드리며 복음역사를 섬깁니다. 온 세상이 즐기는 밤 문화, 놀이문화, 휴일문화를 다 부인하고 양을 치고 소감을 쓰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우리는 가장 어리석은 자들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이처럼 거짓 희망에 속아서 죽도록 고생하다가 죽음으로 끝나게 되니 우리 신자들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상의 문제들을 살펴 볼 때 죽은 자의 부활은 결코 없어서는 안 되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을 부인하면 그리스도의 부활도 부인하게 되고 기독교 신앙전체가 흔들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기초는 그리스도의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확실한 것이며 필연적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까지의 ‘만일’이라는 모든 가정을 뒤엎고 예수님이 분명히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음을 증거 합니다. 20절을 다 같이 한 목소리로 읽어 보시겠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첫 열매는 이제 본격적으로 거두어드릴 추수의 표시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앞으로 모든 신자들이 본격적으로 부활할 것이라는 확실한 표시가 됩니다. 우리가 언젠가는 죽어 무덤 속에 갇혀 잠들게 되지만 첫 열매이신 예수님의 뒤를 이어 우리 몸도 장차 죽음을 이기고 예수님처럼 영광스럽게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됩니까? 21-23절을 보십시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사망이 들어왔습니다. 마찬가지로 부활의 첫 열매되신 예수님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는데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시요, 다음에는 그리스도가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속한 성도들입니다. 이는 우리가 붙들어야 할 참된 소망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개개인의 생명을 살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장차 우주적인 놀라운 변혁을 가져오게 됩니다. 24-28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최후의 날에 심판장이 되셔서 온 세상을 심판하시게 됩니다. 그 때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칩니다. 이때 예수님은 인생들을 그토록 괴롭혀 왔던 사망권세를 멸하십니다. 예수님은 만물을 발아래 복종시킨 후 자신도 하나님 아버지께 복종하심으로 만유의 질서를 바로 잡으시고 만유를 회복하십니다. 이때까지 세상은 사단의 권세로 인해 창조질서가 무너지고 그 가운데서 인생들과 자연만물은 신음하고 탄식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무너진 창조의 질서를 바로 잡으시고 만유를 회복하심으로 우리 신자들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사랑하시는 주님과 함께 영원토록 왕 노릇하게 됩니다.

(2) 부활을 믿는 자의 삶 (29-34)
바울은 이때까지 죽은 자의 부활의 확실성과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 인생들에게 주는 희망에 대해 증거 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부활신앙 가운데 사는 자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자신의 예를 들어 권면하고 있습니다.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해 세례 받는 행위도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29). 당시에는 세례 받고자 하는 자가 받지 못하고 죽으면 사후의 구원을 위해서 대신 세례를 받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죽은 자의 부활을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부활을 믿는 사람은 위험과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다같이 30,31절 말씀을 읽어보시겠습니다. “또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바울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며 순교자적인 자세로 살았습니다. 고린도 후서 11장 26절을 보면 그는 강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시내와 광야와 바다를 건너는 위험, 거짓 형제의 위험을 무릅쓰며 복음역사를 섬겼습니다. 또 바울은 주와 복음을 위해 "날마다 죽는 삶을" 살았습니다. 여기서 ‘날마다 죽는다’는 것은 순교자적인 자세로 복음역사를 섬겼다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언제나 주와 복음을 위해 순교할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이요 유대인중의 유대인이요 당대 최고의 학자인 가말리엘의 문하로서 학문과 재능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또한 그는 태어날 때부터 로마인의 신분을 가진 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세상에서 얼마든지 존경받으며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이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안일하게 살고자 하는 육신의 소욕을 날마다 부인했습니다. 세상영광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 사람들의 인정을 구하는 마음을 부인하고 오히려 자기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그는 날마다 자신을 죽이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희생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이는 그가 부활의 소망으로 충만하였기 때문입니다.
32절을 보십시오.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바울은 자신도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겠다.’고 말합니다. 당시 에베소에는 원형경기장이 있었고, 여기에는 맹수들과 싸우는 검투사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맹수와 싸우든지 아니면 자기들끼리 싸우든지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숨이 붙어 있는 한 먹고 마시며 즐기고자 했습니다. 이와 같이 부활신앙이 없을 때 근본적으로 쾌락주의자가 되어 버립니다. 만일 이 세상에서의 삶이 끝이라면 인생을 마음껏 즐기며 사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영원한 소망을 위해서 잠시 손해 보는 생활을 했습니다. 또한 하늘나라의 영원한 유익을 위해서 잠시 현실적인 유익을 버렸습니다.
이제 바울은 부활신앙으로 고린도 성도들에게 권면합니다. 33,34절을 다 같이 한 목소리로 읽어 보시겠습니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악한 동무들은 영적으로 무지하여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로서 부활신앙과 부활의 소망을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지혜로운 자처럼 보이지만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는 허무적 쾌락주의자들입니다. 우리는 이들에게 속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부활신앙으로 날마다 자신을 쳐 복종시키고 적극적으로 깨어 의를 행해야 합니다. 세상으로 향한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반복해서 죄를 짓는 행실을 멈춰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날마다 부활을 맛보며 살 수 있습니다.
저는 말씀을 준비 하면서 자신의 근본 문제가 부활 신앙이 없는 것임을 발견하고 회개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부활 신앙이 없을 때 현실주의자가 되어서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기를 바랬습니다. 저는 물질만 있으면 나의 인생 문제가 다 해결 될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물질을 모아 보고자 노력도 해보았고, 매주 로또복권을 사며 이 땅에서 안락한 삶을 살고자 허황된 꿈을 꾸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겨우 먹고 살 만큼만 물질을 주셨기 때문에 저의 가정은 언제나 궁핍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저는 이 땅에서 마음껏 골프도 치면서 즐기며 살고 싶은데 여건이 되지 않아 불평 불만만 늘어가고 기쁨을 잃어 갔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궁핍한 삶을 주신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떠나 더욱더 육신적이 되어 갔으며 쾌락을 좇아 살게 되었습니다. 저는 감정의 노예가 되어 거칠고 폭력적이 되어 갔으며,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동역자에게 폭언을 하고 폭력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정욕의 죄에 번번이 넘어지는 자신으로 인해 영원히 심판 받았다는 사단의 고소는 저를 깊은 절망의 수렁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저는 어쩔 수 없는 패배감에 자포자기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고 가정의 많은 어려움을 주시므로 어쩔 수 없이 새벽을 깨어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저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죄로 인해 말라비틀어진 자신의 영혼을 발견하고는 살려 달라고 통곡하며 기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버지여 내 영혼 어찌합니까? 아버지여 내 영혼 어찌합니까? 아버지여 내 영혼을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저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저는 고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동물과 같이 육체로 전락한 자신을 바라보며 통곡하며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경희사모님을 통해 찾아오시고 말씀을 통해 생명을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동안 여러 훈련들을 통해서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보고,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제가 부활의 믿음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도록 인도하고 계십니다. 제가 현실 문제에 매여 절망하기보다 부활의 소망가운데 하루에 한 사람에게 힘써 복음을 증거 하는 삶을 살 수 있길 기도합니다. 저에게 부활의 믿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올려드립니다.
 
Ⅲ.부활의 영광과 최후의 승리(35-58)
(1)부활의 영광(35-49)
바울은 지금까지 죽은 자의 부활이 반드시 있음을 증거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부활을 단순히 이 땅의 연장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부활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이들의 생각대로 부활이 단순히 이생의 연장이라면 우리 중에도 부활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이 문제를 씨앗의 비유를 통해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36절을 보십시오.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바울은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그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줍니다.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다시 살아나지 못합니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조금의 의심도 없이 당연한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땅 속에 묻혀 죽은 씨가 어떻게 다시 사느냐고 의문을 제기하는 농부는 없습니다. 그냥 믿습니다. 씨를 뿌리면서 당연히 씨가 죽어서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힐 것을 기대합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도 죽어서 묻힌 후에는 반드시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납니다. 이것이 부활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살 수 있느냐고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질문에 불과합니다.
  37,38절을 보십시오. 또한 씨를 뿌릴 때는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형체를 주십니다. 대개 알맹이의 모습은 비슷합니다. 그래서 전문가가 아니면 씨만 보고는 무슨 씨인지 구별할 수 없습니다. 같은 채송화 씨라도 빨간 꽃을 피울지, 노란 꽃을 피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씨를 뿌리고 나면 거기에서 싹이 나오고, 줄기가 뻗어나고, 거기에 탐스럽고 아름다운 꽃이 핍니다. 이런 형체를 도대체 누가 입혀 줄 수 있겠습니까? 오직 하나님께서 그 뜻대로 형체를 주십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도 지금의 모습은 볼품이 없지만 죽고 묻힌 후에는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합니다.
 42, 43절을 보십시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우리는 썩을 몸을 안고 살고 있습니다. 우리 육체는 썩을 몸이기에 20대에 한창 꽃 피우다가 30대가 되면 벌써 늙어가는 소리가 들립니다. 머리에서 흰 것이 보이는가 하면, 이마가 갑자기 넓어지시는 분도 있습니다. 자매님들은 고운 피부에 하나둘씩 잔주름이 늘어갑니다. 썩을 몸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얼마나 슬프게 합니까?
또, 우리 몸은 욕됩니다. 우리는 감정과 욕심에 이끌려 죄를 범할 가능성에 쉽게 노출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아름답고 고귀한 삶을 살고 싶지만, 육체의 정욕에 지배되어 부끄러운 삶으로 전락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또, 우리 몸은 약합니다. 조금만 무리하는 것 같으면 벌써 감기가 오고, 입안이 헐고, 입술이 부르틉니다. 육체의 몸을 입고 사는 우리의 삶은 근본적으로 한계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부활하는 몸은 다릅니다. 썩어 없어지는 몸을 온전히 헌신할 때 썩지 아니하는 몸으로 다시 살게 됩니다. 지금은 아무리 같은 죄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혈서를 써도 다시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날이 되면 모든 욕되고 수치스러운 것은 사라지고 너무나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됩니다. 천사가 흠모할 만한 자로 변화됩니다. 부활의 몸은 더 이상 약한 것이 없습니다. 강철같이 단단하면서도 새털같이 유연하여 하늘을 날아다닙니다. 또한 양들을 쫓아다닐 필요 없이 눈 깜짝할 사이에 공간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몸이 될 것입니다. 다시는 사망이나 아픈 것이 우리를 괴롭히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소망을 가진 자에게 죽음이란 새로운 세계를 향한 희망의 디딤돌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부활의 소망을 간직하고 살 때 현재의 삶에서도 강하고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영광스러운 부활의 소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2)최후의 승리(50-58)
바울은 이제 최후의 승리를 노래합니다. 51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비밀은 사실이지만 아직 공개되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비밀은 바로 예수님의 재림을 알리는 천사장의 나팔소리가 날 때 우리가 다 홀연히 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나팔소리에 주와 복음을 위해 일생을 바친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무덤을 열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그리고 또 남아서 믿음을 지키며 헌신하던 이들도 신령한 몸으로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여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어떤 분은 옷을 찢으며 애통하는 회개기도를 드리다 찢어진 옷을 입고 올라가고, 어떤 분은 양들에게 심방 갔다가 무시 받고 울음을 삼키며 돌아오는 길에 올라갑니다. 어떤 분은 센터에서 설거지를 하다가 올라가고 어떤 분은 부활장을 암송하다 올라가고 어떤 분은 1:1하다가 양과 함께 하늘로 직행합니다. 그날은 신자들에게는 가장 영광스러운 날이요 믿지 않는 자들에겐 심판의 날입니다. 그날에 신자들은 “잘하였다 충성된 종아” 하시는 예수님의 칭찬과 위로의 말씀으로 인해 그 동안의 모든 수고와 아픔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흘렸던 눈물이 환희로 바뀌게 됩니다. 이것은 신자만이 간직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비밀입니다.
  또 그때에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는 말씀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때까지 사망은 인류 위에 왕 노릇 해왔습니다. 죽음은 우리 모두가 예외 없이 필연적으로 만나게 될 최대의 원수입니다. 이 사망이 주는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은 진리를 따르지 못하고 소극적으로 비겁한 삶을 삽니다. 죽음 앞에서 비굴해지고 죽음권세로 인해 허무와 쾌락에 무릎을 꿇습니다. 우리가 사는 날 동안 아무리 노력해도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거룩하지 못하고 결국 썩게 되고 욕되게 되고 약하게 되는 것이 이 사망권세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사망권세를 완전히 박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모든 죄를 지고 비참하게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지만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사망을 이기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엄청난 승리를 외치고 있습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그 동안 죄가 사망의 고통을 갖다 주고 또 율법이 우리의 죄를 찾고 정죄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재림으로 인해 우리 몸은 죄성이 없고 죽지 않는 몸으로 변화되기 때문에 죄도 율법도 사망도 다 힘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는 날은 진정 사망의 사망일이 될 것입니다. 바울은 부활의 확신가운데 이 비밀을 알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처럼 결국 사망을 이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죽음 권세를 호통 치며 주와 복음역사를 위해 일생을 바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 안에 있을 때 더 이상 죽음의 세력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면 승리가 보장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58절을 읽어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라” 우리는 이제 부활신앙 위에 흔들리지 않는 견실한 믿음의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부활신앙 위에 굳게 서서 어떠한 유혹과 핍박에도 흔들리지 말아야합니다. 왜냐하면 이 일만이 헛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죽어 가는 영혼을 살리는 일만큼 값진 일은 없습니다. 주님께선 신자들이 주님을 위해 드린 모든 수고와 진심을 다 아십니다. 주님께 드린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당장 열매가 없더라도 언젠가 반드시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와 복음을 위해 흘린 눈물과 진심을 다 열납하시고 하늘나라에서 큰 상급으로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 우리가 부활의 소망가운데 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확신 있게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저는 과거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며 부활의 주님을 부정하던 자였습니다. 이런 저는 심판받아 마땅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저를 긍휼히 여기셔서 말씀공부를 통해서 만나주시고 여름수양회를 통해서 주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하시며 십자가의 피의 은혜로 구원을 받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캠퍼스에 나아가 주님을 증거하는 부활의 증인의 삶을 살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학사가 되어 결혼하고 가장이 되면서부터 하늘나라에 대한 산소망을 갖기보다 세상에 코를 박고 살 때가 많았습니다. 처자식을 먹여 살리고 치열한 경쟁사회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핑계로 주님을 가까이 하기보다 세상의 물질을 좇아가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학창시절 때는 날마다 센터에 나와서 중보기도에 동참하였지만 지금은 주일에나 센터에 나와 예배드리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가 진정으로 바라고 소망해야 하는 것이 세상의 물질이 아니라 부활의 소망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세상일에 코를 박고 세상 물질을 좇아가는 삶을 살 것이 아니라 부활의 산소망을 가지고 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확신 있게 주님이 주신 캠퍼스 미션의 사명을 믿음으로 감당하는 자가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재림의 때에 영광의 주, 승리의 주로 다시 오십니다. 마지막 나팔소리가 날 때 우리는 썩지 않고 영광스럽고 강한 몸으로 다시 부활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산 소망이 넘치는 자는 견실하며 흔들리지 않습니다.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됩니다. 우리에게 최후 승리를 주시는 부활의 주, 영광의 주를 바라보고 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주님을 위해 더욱 더 수고하고 힘쓰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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