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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2-07-01 (일) 12:44
분 류 마가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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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마가복음 제16강] 섬기러 오신 예수님

 2012 마가복음 제16강                                                       한아브라함

섬기러 오신 예수님

말씀 / 마가복음 10:32-45
요절 / 마가복음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사람들은 누구나 한번뿐인 인생을 가치 있게 위대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높은 자리에 오르거나 많은 것을 소유하면 위대한 인생이 될 것으로 착각합니다. 치열하게 경쟁하고 높은 자리를 쟁취 하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러합니다.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자가 위대한 자라고 하십니다. 으뜸이 되고자 하면 종이 되라고 하십니다. 역설적인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 마가복음 10장 45절은 마가복음 전체의 요절입니다. 이 말씀 한 구절 안에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심, 이 땅에서의 삶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이 나옵니다.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다 나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섬기는 종 예수님을 배워서 진정으로 위대한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 1장, 세상 영광을 구하는 제자들(32-41)
  32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지금 가시는 길은 마지막 예루살렘 여행길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고자 가시는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큰 사명을 앞두고 마음이 무거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보다 앞서 가셨습니다. 왜냐하면 이 길은 믿음의 길이요 순종의 길이요 생명의 길이기 때문에 당당하게 앞장서서 가셨습니다. 이를 본 제자들은 놀라고 두려웠습니다. 제자들은 아직 사명을 감당할 마음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아니 이제 곧 그동안 기다리고 소망하던 이스라엘의 회복, 곧 메시아 왕국 건설이 눈앞에 다가왔다고,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고, 예수님과 전혀 다른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영적인 상태를 아시고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가르치셨습니다. 33, 34절을 보십시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넘겨 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에게 넘겨주겟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밷으며 채찍질하고 죽일것이나 그는 삼일 만에 살아 나야하리라.” 십자가와 부활을 네 번째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는 개념 없는 제자들이 개념을 갖도록 하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벌어질 일이 무엇인지 알도록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질 결단과 각오를 부탁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물질주의 실용주의가 판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언제부턴가 교회도 세상의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고난 희생 사명 이라는 단어는 부담스러워 하고 축복 은혜 성공이란 단어를 가까이 하게 되었습니다. 강단에서 선포되어야 할 복음의 핵심인 메시지는 십자가와 부활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합니까? 십자가와 부활 메시지 듣기 힘듭니다. 1년에 고난 주간과 부활절에 각각 한번 전하고 끝입니다. 어느덧 기복신앙이 대세로 자리 잡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말씀을 듣기를 바라실까요? 두말할 것 없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일 것입니다. 우리가 즐겨 들어야할 말씀은 십자가와 부활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힘써 전해야 할 메시지도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가야할 길도 십자가와 부활의 길입니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고난에 대해 심각하게 말씀하실 때 야고보와 요한이 심각한 얼굴을 하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예수님이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하시자 그들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37절을 보십시오. “주의 영광중에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자리청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러는 겁니까? 얼마 전에 예수님이 경고하신 말씀.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에 은혜 받고 베드로 보다 먼저 되고자 한 것일까요? 마태복음에는 요한과 야고보를 동행하고 어머니가 청탁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치맛바람의 원조가 되었습니다. 누가 청탁한 걸까요. 어머니일까요 두 형제일까요. 마태는 열두 제자중 하나로 이들의 행동에 더욱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 두 형제를 어머니까지 동원한 치사한 녀석들로, 용감한 녀석들이 아니라 치사한 녀석들로 묘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튼 누가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이냐가 제자들 사이에 초미의 관심사였던 것입니다.
  3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된다 안된다 말씀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는가,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는가 질문 하셨습니다. 여기서 잔은 고난의 잔을 세례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일종의 예언의 말씀이셨습니다. 이런 깊은 뜻을 모르고 이들은 영광만 얻을 수 있다면 지옥의 문턱까지도 갔다 오겠다는 각오로 덤벼들었습니다. “예.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그 결과 야고보는 제일 먼저 순교의 피를 흘렸고 요한은 제일 마지막까지 살아서 누구보다 많은 고난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좌우편에 앉는 것은 두 명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두 명을 포함해서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것이라는 희망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섬겼고 주와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았다면 누구나, 우리를 포함해서 누구나 하나님이 보상하시는 그날에 상급과 영광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장차 올 영광을 소망한다면 오늘의 고난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8절은 말합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올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41절을 보십시오.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냈습니다. 직접적인 피해 당사자인 베드로는 “이 의리 없는 녀석들”하며 치를 떨었을 것입니다. 도마는 지금 이들의 정신이 올바른가 의심하며 화를 냈습니다. 늘 있으나 마나 조용하던 나다나엘도 이때만큼은 용감하게 외쳤습니다. “그 자리에 임자는 나야 나” 이를 볼 때 다른 제자들도 그들과 똑같이 높은 자리를 탐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언젠가는 높은 자리에서 이방인의 집권자들처럼 권세를 부리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몸은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있었지만 마음은 세상욕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동고동락 하며 예수님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들의 수준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 걸까요? 아직 십자가의 예수님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세상적인 가치관에서 복음적인 가치관으로 변화되지 못한 것입니다. 이는 비단 제자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제자들의 모습에서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우리도 높임 받고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고생 하지 않고 쉽게 영광을 얻으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편하게 살고 싶어 하고 섬김 받고 싶어 합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빠르게 변화하고 있습니까? 모두 편한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요즘 물건 사러 갈 필요가 없죠. 인터넷으로 쇼핑하면 됩니다. 클릭 한번 하면 집으로 다 갖다 줍니다. 이제 곧 홈 오토메이션 시대가 도래 한답니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청소도 서빙도 자동으로 다 된다는 거죠.
  요즘 전도가 잘 안되는 그이유가 있다는 거죠. 크리스찬들이 매력이 없다는 거예요. 세상 사람과 똑같이 욕심 부리고 절대 손해 안 보려하고 높은 자리에서 섬김 받으려만 하고 한사람을 일대일 말씀으로 섬기고 돕는 수고는 부담스러운 거죠. 희생하고 헌신하기보다 쉽고 편하게 신앙생활 하고자하는 마음이 우리 크리스찬들 가운데 전염병처럼 널리 퍼졌다는 것입니다. 복음신앙을 잃어 버린거죠. 매력을 상실한 거죠.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무엇이라 하십니까?

제2장,  섬기는 종이 되신 예수님(42-45)
  4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 모두를 부르시고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임의로 주관하고 권세를 부리는 것을 닮지 말도록 당부하십니다. 43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 말씀은 제자들은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과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점에서 달라야 합니까? 세상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아 섬김 받고 명령 하는 자가 위대한 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적세계에서는 종과 같이 겸손히 낮아져서 섬기는 자가 위대합니다. 세상에서는 부와 명예를 소유한 자를 위대하다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영적세계에서는 무엇을 소유했는가 보다도 어떤 사람인가 인격이 어떠한가 소유보다는 존재가 더 중요합니다. 섬기는 종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부인의 영적 투쟁과 자기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섬기는 종은 예수님을 잘 배울 때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목자로 부르시고 성경선생의 권세를 주시고 여러모로 훈련하시는 목적도 다른 사람을 섬기는 생명을 살리는 위대한 인생을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섬긴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먹임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남을 섬긴다고 해서 맛있는 것을 사주고 듣기 좋은 말만 해주고 그 사람과 친해진다고 잘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그 사람의 생명을 살려야 합니다. 의사가 죽어가는 환자를 잘 섬기는 것은 약으로 또는 수술로 고쳐서 살리는 것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것이 잘 섬기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때 죽어가는 영혼이 사는 것입니다. 영혼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수 있습니다.(마 4:4) 말씀만이 사람의 영혼을 살립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누어야 할 것은 말씀입니다. “말씀 심는 엄마” “성경 먹이는 엄마” 라는 책을 보면 자녀를 사랑한다면 말씀먹이는 엄마가 되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먹고 자라는 아이는 그 영혼이 병들지 않습니다. 밝고 건강합니다. 미래가 열립니다. 말씀 먹이는 엄마 말씀 먹이는 아빠 말씀 먹이는 목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함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랑을 먹고사는 존재입니다. 사랑은 가물어 메마른 땅에 내리는 단비와 같습니다. 사랑을 받으면 살아납니다.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이 사랑에 굶주려 있습니다. 아니 온 인류가 사랑에 굶주려 있습니다. 돈과 명예를 넘치도록 소유했어도 사랑에 목말라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사랑은 병든 사랑입니다. 상한 음식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오히려 상대방을 상하게, 병들게 할 뿐입니다. 누가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패인 상처를 치유할 수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로 나오도록 섬기는 것이 올바로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하면 할수록 생기는 딜레마가 하나있습니다.
섬기는 삶이 위대한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섬기려면 쉽지 않습니다. 머리는 섬겨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마음이 따라오질 않습니다. 간혹 마음은 섬기고자 하나 육신은 섬김 받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이  나이에 내가 하랴” “어린 니가 해라” 어떻게 우리가 섬기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 예수님은 섬기러 오셨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인자가 온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보통사건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역사가 히스토리가 BC와 AD로 나뉘었다는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빌립보서 2장 6절에서 8절은 말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과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 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주님은 거룩한 보좌에 앉으셔서 천사의 노래와 성도의 찬양을 받으셔야 될 분입니다. 그런 분이 더러운 육체를 입고 이 낮고 천한 땅에 오셨습니다. 죄와 슬픔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고난 받으며 사셨습니다. 요즘 닥터 진이라는 드라마를 보면 한 신경외과 의사가 어쩌다가 조선시대로 갔습니다. 거기서 고생하며 병든 자를 고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약도 만들고 주사도 만들어서 환자들을 고칩니다. 우리가 구석기시대의 사람들을 구원하기위해 그 시대로 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동굴에서 살고 야생동물과 싸우고 너무 힘들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이보다 더한 것입니다. 오셨다는 자체가 놀라운 사랑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일생 섬기는 삶을 사셨습니다. 몰려오는 병자들 굶주린 무리들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영접하여 주셨습니다. 몰려오는 무리들을 하루 이틀은 섬겨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섬기는 삶에는 휴식이 없었습니다. 장차 자신을 향하여 돌을 던지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칠 자들인 것을 아시면서도 죄인들을 섬기셨습니다. 가까이 할수록 부담스러운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냄새나는 더러운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섬김 받기 보다는 섬기셨지만 주님은 환영받기보다는 배척받으셨습니다. 그래도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고 고치는 일을 쉬지 않으셨습니다. preaching teaching healing의 섬김의 사역을 조금도 중단하지 않으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십자가의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45절을 다시 보십시오.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아무런 죄가 없으시지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이사야서 53절 5절 6절은 말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예수님은 죄와 관련 없으신 거룩하고 영화로운 분이십니다. 죽음을 모르시는 영원한 생명 자체이십니다. 죽을 죄인이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죽을 이유가 전혀 없으신 분이 죽으셨다는 것이 충격입니다.
그것도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 가셔야 했습니다. 대속해야할 우리의 죄가 얼마나 컸으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 가셔야만 헸다는 것입니까? 창조주 하나님을 불신한 죄, 하나님을 떠난 죄, 하나님께 불순종한 죄, 하나님이 지으신 온갖 창조물들을 누리고 살면서 감사치 않은 죄, 어디 그뿐입니까? 한 인간이 일생을 살면서 얼마나 많은 죄를 짓고 삽니까? 우리의 씻을 수 없는 죄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십자가는 인류가 고안해낸 가장 잔혹한 형벌입니다. 나라마다 중죄인을 잔인하게 죽이는 형벌이 있어 왔습니다. 교수형 단두대 우리나라에는 능지처참이라는 벌이 있었습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관에 사람을 넣고 사람을 파먹는 벌레들을 넣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형벌은 십자가의 형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른 여타의 형벌은 잠시 고통을 느끼다가 죽으면 끝이지만 십자가의 고통은 지속적인 고통을 오랫동안 느끼며 서서히 죽어가는 것입니다. 또한 십자가에 못 박힐 때에 아픔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맛보길 원하시면 손톱 밑에 대바늘을 쑤셔 넣어 보십시오. 굉장히 아플 것입니다. 이 고통보다 십자가의 고통은 수백 배 아니 수천 배나 더 아플 것입니다.
  주님은 왜 꼭 이런 가장 잔혹한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셔야만한 것입니까?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진노를 알지 않고는 십자가를 통해 드러낸 하나님의 참사랑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화목제물 어린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하나님은 인간이 지은 모든 죄에 대한 진노를 쏟아 부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우리가 감당해야할 무한한 형벌을 대신 감당하셨습니다. 온전한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어 죽어 가시며 예수님이 하신 한마디는 무엇입니까?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고통의 극한 가운데서도 주님은 당신의 고통에 매어있지 않으셨습니다. 극한 고통이나 질병가운데 있어보셨습니까? 저도 요로결석으로 아파봤는데 5일 동안이나 입원해서 돌을 깼지만 나오질 않아 너무 아파서 수술 받았습니다. 그 당시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한 가지 생각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 가운데서도 자신을 못 박은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이세상의 영혼들이 죄 사함을 받지 못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생각이 주님의 심장을 아프게 찔러왔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가시는 고통보다도 하나님의 죄 사함을 받지 못해 죽어갈 십자가 아래에 있는 영혼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아픔으로 우셨던 것입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이는 우리 인생들을 향한 주님의 마지막 기도요 피눈물 이었던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맛보고 구원받은 우리들이 이 감격을 잃어버리고 신앙의 매너리즘에 빠졌다면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죄사함을 받지 못해 지옥불로 떨어지는 영혼들을 향해 눈을 감고 입을 닫는 성도들이 가득한 곳이 교회라면 다시 한 번 예수님의 심장을 찌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구원받은 성도들이라면 이렇게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던 무지한 백성들을 사랑하시고 기도하시던 주님의 뜨거운 심장을 오늘 우리에게도 나누어 주옵소서” “예수님이 흘리신 피와 땀과 눈물을 오늘 우리에게도 나누어 주옵소서”
  우리도 한때 주님의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 앞에 감격하며 눈물을 흘리던 때가 있었습니다.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땅 끝까지 전하고 싶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말씀을 들어도 감동이 없습니다. 회개의 눈물이 없습니다. 삶의 변화가 없습니다. 어느덧 십자가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영적 불감증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섬길 힘을 잃게 되었습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던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위한 주님의 피눈물의 기도를 들으십시오. 이 십자가의 사랑을 회복할 때 우리는 비로소 섬기는 인생을 다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섬기려는 열정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그리고 팔다리로 내려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왜 말 안 듣는 양들을 따라다녀야 하는가? 왜 변화되지 않는 양들과 일대일 성경공부를 계속 해야하나? 회의에 시달릴 때가 있습니다. 왜 수양회 안가겠다고 하는 양을 수양회 오라고 계속해서 초청해야하나?  배은망덕한 양들을 위해 내 인생을 드려야 하나? 힘들어 할 떄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희생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섬기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섬기는 삶의 본을 보여주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도 섬기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저는 과부의 외아들로 자라나 섬김 받는데 익숙한 이기적인 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고 예수님의 섬기는 아름다운 생애를 본받는 목자요 선교사의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머리로는 섬겨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가슴이 식고 몸이 말을 잘 듣지 않았습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 땅에 오셔서 일생 섬기는 삶을 사시고 희생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묵상하는 가운데 은혜 받게 되었습니다.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섬기는 삶을 살 힘과 비전을 덧입게 되었습니다. 제가 말씀과 기도로 섬김으로 생명을 살리는 역사 섬기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주님은 이 땅에 섬기러 오셨습니다. 일생 냄새나는 죄인들을 섬기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처럼 섬기는 위대한 인생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새롭게 영접할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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