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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8-08-12 (일) 13:03
분 류 마가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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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마가복음 제20강] 섬기러 오신 예수님

 2018년 마가복음 제20강                                                                     김반석

섬기러 오신 예수님

 말씀 / 마가복음 10:32-52
 요절 / 마가복음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오늘 말씀은 섬김과 희생을 통한 대속의 은혜에 대한 내용으로 4복음서에 기록돼 있습니다.(마20:17-28, 눅22:20-24,요13:1-20) 이는 복음역사에 있어서‘섬김’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여러 번 공부하여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섬기고 있는데 뭘 더 섬겨야 되지!”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바울이 구원의 은혜를 잊어버린 고린도 성도들에게 이미 전한 복음을 상기시켰듯이(고전15:1), 우리도 신앙생활하면서‘ 섬김’의 진리를 늘 상기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섬김의 은혜를 잊어버리면 자신도 모르게 높은 자리에 앉아 섬김 받는 생활에 익숙해져 갑니다. 이때 상대방에게 요구하게 되고, 불협화음이 일어납니다. 과연 나는 배운 말씀대로 현재 ‘섬김󰡑을 실천하고 있는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하여 섬기러 오신 예수님을 잘 배워 예수님과 같이 평생 섬기는 삶을 살 수 있길 기도합니다. 또한 섬기는 리더십으로 믿음의 좋은 영향력을 끼치고, 생명을 구원하는 역사에 귀히 쓰임 받는 종들이 되길 기도합니다.

 Ⅰ. 반복해서 가르치시는 예수님(10:32-34)  
3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이었습니다. 이 길은 어떤 길입니까? 예루살렘 맛집 여행길이라면 즐거운 마음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길은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입니다.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험한 길입니다. 이런 끔찍한 길은 가능한 피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미적거리지 않으시고, 비장한 각오로 앞장서서 가셨습니다. 제자들은 평소와 다른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겠구나!󰡑하며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33,34절을 보십시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이미 두 번이나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막8:31,9:31)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의미를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고난 없는 영광, 은혜, 축복만 누리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인내하시며 죽음과 부활에 대해 이전보다 더 자세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자신이 죽임 당할 장소가 예루살렘이요, 종교지도자들이 죽이기로 결의한 후 이방인에게 넘겨진다는 것, 그들에게 고난 받아 죽으시고 삼일 만에 살아나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14:53-15:47). 그러면 이렇게 듣기 싫어하는 제자들에게 반복해서 가르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은 복음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해 영벌에 처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약속하신 대로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성경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사 구원의 주, 생명의 주가 되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고, 제자들의 사명은 이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다른 것은 몰라도 이 진리만은 반드시 영접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받아들일 때까지 분명한 자세로 반복해서 가르치시므로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으로 살길 원하셨습니다.
둘째, 제자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돕기 위함입니다. 제자들은 현재 십자가를 현실로 받아들일 마음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예수님이 갑자기 돌아가시면, 제자들은 실족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뤄지고 있음을 반복해서 가르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전도, 섬김, 희생 등 십자가를 부담스러워 합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십자가를 회피하고자 합니다. 십자가만 없으면 신앙생활이 은혜로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신앙생활은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조금 고난이 따르더라도 자기를 부인하고, 적극적인 자세로 십자가를 지며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할 때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기쁨과 은혜가 충만하고 열매 맺는 삶을 살게 됩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통한 부활의 영광이 진리요 생명의 길입니다. 우리가 이를 마음에 새기고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길 기도합니다. 또한 양들에게도 십자가를 가르치기에 힘쓰길 기도합니다. 힘들어지지는 않을까 우려하여 가급적 좋은 말만 해서는 제자양성을 할 수 없습니다. 양들이 영접할 때까지 반복해서 십자가를 가르쳐야 합니다. 십자가는 나를 살리고, 양들을 살리고, 우리를 살리는 진리임을 믿습니다.

Ⅱ.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기까지 섬기신 예수님(10:35-52)
세 번의 가르침에도 제자들은 복음진리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세상적인 영광이었습니다. 그 중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나와 당당하게 요구했습니다.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야심을 꿰뚫어보시고, 무엇을 해주길 원하는지 물으셨습니다. 그들은 거침없이 대답했습니다.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면 이들이 이 시점에서 왜 이런 요구를 했을까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눅19:11). 그들은 예수님이 로마세력을 축출하고, 왕으로 등극하여 지상 메시아 왕국을 건설하시면, 좌우편에 앉아 권세와 영광을 누리고 싶었습니다. 지금까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생활을 했으니, 그 정도는 보상 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10:28) 그들은 야심에 불탔습니다. 그런데 수제자 베드로 때문에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그 자리에 오르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베드로만 없으면 최고 리더로 인정받고 신앙생활 잘 할 수 있을 텐데 베드로가 있어 늘 불안했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3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그들은 영적으로 무지하여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마시는 잔과 받으실 세례는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에게 그러한 무서운 고난과 죽음의 고통을 감당할 수 있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높은 자리에 앉을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지 하겠다고 장담했습니다. “주님! 뭐든 다 할 테니, 제발 그 자리에 앉게만 해주시옵소서!” 세상 권세와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렇습니다. 신앙생활하면서도 열심히 주와 복음역사를 섬겼으니 그에 합당하게 대접받길 원하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깁니다. 이런 생각은 교회의 갈등과 분열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야심에 가득 찬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39b,40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이 말씀대로 야고보는 헤롯의 칼에 맞아 12제자 중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고(행12:2), 요한은 도미시안 황제 때 밧모섬으로 귀향 가서 100세가 넘어 죽을 때까지 가장 오랫동안 복음역사를 섬기며 고난 받았습니다. 제자들은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며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는 권세를 누리게 됩니다(눅22:30). 그러나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원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문제이므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야심이 무의미한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세로 순종하며 예수님의 고난을 몸에 익히고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에게 합당한 자리를 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나머지 10명의 제자들은 야고보와 요한의 행동에 분개했습니다. “치사한 놈들! 얍쌉하게 선수를 치다니!” 그들은 ‘김영란법’을 위반한 행위라며 고발하고자 했습니다. 이를 볼 때 그들에게도 동일한 야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해도 세상적인 가치관과 사고방식으로부터 변화되지 않으면 동상이몽을 꾸며 서로 으르렁거리고 다툴 수밖에 없습니다.
4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다가 세상 집권자들이 어떻게 사람을 주관하는지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타인을 임의로 주관하고, 권세를 부립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갑질문화’가 이를 잘 말해줍니다. 국가인권위원회의 발표(2018.2.)에 의하면, 직장인의 70% 이상이 직장 내 괴롭힘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악습은 철폐되어야 하는데, 내가 당했으니 너도 당해보라며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얼마 전 ‘H그룹 일가의 갑질’이 국민들의 공분을 샀습니다. 마음에 안 들면 폭언과 폭행을 서슴치 않습니다. 지위를 이용해 사리사욕을 채우고, 약자들 위에 군림합니다. 세상에서는 이렇게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이 큰 자요, 성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높아지고자 온갖 노력을 다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는 세상의 집권자들과 달라야 합니다. 43,44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세상에서는 섬김 받는 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크고, 모든 사람으로부터 섬김 받는 자리에 앉은 사람을 으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그 사람이 어떤 신분의 소유자이고, 무엇을 얼마만큼 소유했는가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지 않으십니다. 그 사람이 어느 정도까지 낮아지고, 얼마만큼 많이 섬기는 자인가를 보십니다. 높은 자리에 앉아서 남에게 지시하고, 섬김만 받는 사람의 내면은 밴댕이 속처럼 좁고 교만합니다. 그러나 종과 같이 낮아져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의 내면은 바다와 같이 깊고 넓습니다. 제자들은 위대한 자가 되고 싶었으나 섬기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최고가 되고 싶었으나 종의 자세는 갖추지 못했습니다. 위대성의 척도는 자기중심적이고 교만한 내면이 변화되어 많은 사람을 품고 섬기는 내면성에 달려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소위 ‘짬밥󰡑이 많아지면 섬김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이처럼 목자도 처음에는 양들을 섬기지만 점차 경륜이 쌓이고,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다 보면 후배들로부터 섬김을 받고 싶습니다. 그래서 후배들이 인사를 안 하면 불쾌해합니다. 선배 대접을 안 해주면 화가 나기도 합니다. 이게 바로 높은 자리에 앉아 섬김 받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내가 먼저 인사하고, 내가 먼저 상대방을 섬기면 은혜가 되고 좋은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배우고자 하는 열정을 갖고 복음역사를 섬기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이를 통해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받고자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상이 없습니다.(마6:1)
섬김 받고 인정받고자 하면 자신도 모르게 권위를 부리고, 독선적이 되어 다른 사람을 힘들게 만듭니다. 지배하고 군림하는 자는 자기 혼자만 기쁘고, 소통 없이 일방적으로 지시만 하여 많은 사람을 괴롭게 만듭니다. 그러나 낮아져 섬길 때, 자신은 물론이요 남을 기쁘게 하고 행복하게 합니다. 내가 겸손하게 종의 자세로 섬기면 교회구성원이 은혜를 받고, 사랑과 평화가 넘치게 됩니다. 가정에서도 부부나 자녀 사이에서 가장으로 섬김 받으려고 하면 충돌하게 되고 불화하게 됩니다. 직장에서도 상사로서 아랫사람들의 섬김만 받으려고 하면 앞에서는 예스하지만 뒷담화의 주인공이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어떤 장소, 어떤 위치에 있든지󰡐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라는 말씀을 기억하고, 낮아져 섬기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상대방에게 관심을 갖고 살펴서 필요로 하는 것을 채워줘야 합니다. 복음역사에 있어서 최고의 자리는 섬김을 받는 자리가 아니라, 무익한 종의 자세로 자신을 비우고 낮아져 섬기는 자리입니다.
나는 지금 섬김을 받고 싶어 합니까? 아니면 종의 자세로 낮아져 섬기고자 합니까? 영적인 리더십은 섬기는 삶에서 나옵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도리어 낮아져 섬기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다른 사람을 감동시키고, 좋은 본이 되어 섬기는 분위기가 형성됩니다. 사람들은 이런 지도자를 마음으로부터 존경하고 따릅니다. 하나님은 겸손히 낮아져 종의 자리에서 섬기는 사람을 높이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마23:12, 벧전5:5b)
그런데 이론적으로 낮아져 섬겨야 된다는 것은 잘 알지만 막상 실제 생활에서 섬기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섬기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45절을 보십시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첫째, 섬기러 오신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섬기다’는 말은 ‘공경하여 받들어 모시다’는 뜻입니다. 이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그럼, 예수님이 우리를 섬기러 오셨다면 예수님이 우리보다 아랫사람입니까? 아니죠. 예수님은 원래 그 본체가 하나님이십니다(빌2:6). 만물의 창조주시오 생명의 근원이십니다.(요1:1-4) 거룩하시고 전능하시고 영광스런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피조물로부터 섬김을 받으셔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런 모습으로 오셨어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섬김을 받을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도리어 섬기는 삶을 사셨습니다.󰡐도리어 섬기려 하고󰡑예수님은 섬김 받을 수 있는 권리와 특권을 내려놓고, 섬기기로 결단하셨습니다. 섬김 받을 위치, 신분, 자격을 충분히 갖추셨는데도, 이것을 부인하고 도리어 섬기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자들을 섬기셨습니까? 우리는 영적인 소원이 많아서 1대1, 소감, 예배를 신실하게 감당하는 양이면 얼마든지 섬기겠다고 말합니다. 목자의 말을 고분고분 잘 듣는 순종적인 양, 빠릿빠릿한 양, 내 스타일에 맞는 양을 섬기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런 양은 별로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이런 양들만 섬기러 오셨다면 우리 가운데 과연 몇 명이나 목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은 나 같이 연약하고 부족한 자도 섬기러 오셨고, 지금도 변함없는 사랑으로 섬겨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 은혜를 기억하고, 섬기러 오신 예수님을 본받는 생활에 힘쓰므로 어떤 사람도 품고 섬길 수 있는 내면성 있는 자들로 변화되길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섬기는데 대상이나 기준을 정해놓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섬김에는 한계가 없으십니다. 예수님은 12제자들과 하루 24시간 3년간 동고동락하시며 그들의 연약함과 허물을 인내와 사랑으로 섬겨 위대한 제자로 양성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중풍병자, 니고데모, 사마리아 여인, 귀신들린 자 등 각종 죄인들을 섬기셨습니다. 섬긴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상대방의 허물과 약점을 감당해주는 것입니다.(요13:4-15) 우리는 기껏해야 양과 한두 시간 같이 있는 것도 부담스러워 공부 끝나고 빨리 가줬으면 합니다. 또 함께 역사를 섬기기 힘든 특이한 성격의 동역자도 있습니다. 섬기기 힘든 사람은 어디에나 한 두 사람은 꼭 있기 마련입니다. 직장에도 있고, 학교에도 있고, 가족 중에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과는 가능한 엮이지 않으려고 거리를 둡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라면 󰡐도리어 섬기려 하고󰡑하신 예수님을 배우고자 자기부인하고 섬겨야 합니다. 우리가 섬김 받고자 하는 죄악된 자기를 날마다 부인하고, 도리어 섬기는 생활에 힘쓰므로, 예수님을 닮은 성숙한 제자요, 믿음의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목자들로 성장하길 기도합니다.
둘째,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신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고귀한 목숨을 대속물로 지불하시므로, 우리를 죄와 사탄으로부터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은 이제 내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 살던 데서 예수님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정도까지, 언제까지 희생하며 섬겨야 할까요? 예수님의 말씀에 정답이 있습니다.󰡐자기목숨을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즉 ‘목숨을 주기까지, 내 생명이 살아있는 동안’입니다. 말로만 하는 섬김에는 희생이 없으므로 생명을 살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남을 섬겨 살리려면 반드시 무엇인가를 희생해야 합니다. 시간을 희생해야 하고, 물질을 희생해야 하고, 청춘과 인생을 희생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자신을 배반하고 못 박은 자들을 저주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그들을 위해 기도로 섬기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또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를 구원하시고(눅23:43), 슬픔 가운데 있는 어머니를 섬기셨습니다. (요19:27) 이처럼 섬기려고 하면 어떤 상황에서든지, 어떤 방법으로든지 얼마든지 섬길 수 있습니다. 문제는 섬겨야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섬기지 않는 것은 더 이상 희생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안일, 이기심, 교만 등의 부패한 본성대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높은 자리에 앉고자 하고, 섬김 받고, 대접 받고,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에 지배당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대속물로 주기까지 희생하신 예수님을 배우기에 힘써야 합니다. 이 정도 섬겼으면 됐다고 자족하여 예수님의 희생을 배우는 삶을 게을리 하면 영적인 성장이 멈추고,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평생을 배워도 다 배울 수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신 예수님을 배우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 예수님을 배울 수 있을까요? 예를 들면 기도모임, 철야기도, 아카데미, 수양회, 선교보고 등 하나님 역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사실 직장에서 늦게까지 근무한 후 퇴근하면 녹초가 되는데 집에 빨리 가서 쉬고 싶습니다. 주말에는 잠도 푹 자고, 문화생활이나 취미활동을 하며 여가를 즐기고 싶습니다. 물론 이런 생활도 필요하지만 거기에 익숙해지면 점차 모임에 나가는 것이 부담스러워지고, 마음은 서서히 하나님 역사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나 한 사람쯤 빠져도 괜찮겠지’라는 생각으로 안 나가면 다른 사람들도 안 나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분위기가 형성됩니다. 그러면 모임이 잘 이뤄지지 않고 성령의 그릇이 깨지게 됩니다. 본인도 스피릿을 잃고 자연스럽게 소시민적인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를 위해 쓰고 싶은 시간과 생활을 하나님 역사를 이루기 위해 희생하며 드릴 때 자신이 살아납니다. 바쁘고 피곤해도 없는 시간을 쪼개서 역사에 동참하는 자체만으로도 동역자들에게 위로와 힘을 북돋아 주고, 모임을 더욱 풍성하게 만듭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본이 되고 믿음의 좋은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어떤 목자님은 새벽 일찍 센터에 와서 일용할 양식을 먹고 중보기도하고 출근합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죽기까지 섬긴다고 해서 엄청난 희생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더 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상대방과 센터 전체 역사에 관심을 갖고 어떤 모양으로든지 섬기고자 할 때,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기까지 섬기신 예수님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때 내면이 변화되어 주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아름다운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최고의 섬김은 무엇입니까? 섬김의 절정이 무엇일까요? 모든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을 희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귀한 목숨을 대속물로 주셔서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섬김도 단지 남을 섬겨서 고맙다는 말을 듣고, 자기 영광, 자기만족을 위해서 섬겨서는 안 됩니다. 섬긴다고 해서 단순히 음식으로 입을 즐겁게 해주고, 상대방이 듣기 좋은 말로 기분을 좋게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섬김을 통해 회개하고 구원과 영생에 이르도록 더 나아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고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까지 순수하게 돕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꾸준히 기도하고 말씀을 가르쳐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해야 합니다. 사랑으로 함께 하며 격려하고 때로는 책망도 하고 내면의 죄와 싸워야 합니다. 성도 간에도 서로 섬길 때 위로부터 참된 평화가 임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이 충만한 모임으로 변화될 것을 믿습니다.

저는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알지 못해 방황하며 세상 정욕과 쾌락을 좇아 살다가 멸망할 자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죄인을 구원하시고, 1987년 믿음의 결혼으로 축복하사 목자의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아기자기하고 소시민적인 삶을 추구하는 저와 절대적인 믿음과 복음신앙으로 똘똘 뭉친 동역자는 달라도 너무 달랐습니다. 그래서 사명 중심의 삶을 사는 동역자에게 사사건건 태클을 걸고,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을 배우며 성령의 열매를 맺고자 투쟁하기보다 남들에게 좋게 보이고자 외적인 투쟁에 헛심을 쓰느라 영적인 성장이 늦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죄인을 인내와 사랑으로 섬겨주시고, 지난 32년간 의대 요회와 간호대, 동덕여대, 일본, 서울과학기술대, 약대 개척 역사를 섬기는데 사용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동안 주님이 주신 은혜를 감당하고자 조금 섬긴 것 밖에 없는데도, 이 정도 섬겼으면 됐다며 자족하고 이젠 좀 쉬고 싶은 마음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하지만 이번 메시지를 쓰면서 섬기러 오신 예수님의 은혜를 묵상하며 안일하고 소시민적으로 살고자 하는 마음을 회개하고, 인생요절인 사도행전 20장 24절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말씀을 다시 붙들게 되었습니다. 제가 고귀한 목숨을 대속물로 주시기까지 이 죄인을 섬겨주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생명이 다할 때까지 주님이 주신 은혜의 복음 전하는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겠습니다. 날마다 섬기러 오신 예수님을 본받는 생활에 힘쓰며, 생명과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역사에 쓰임 받는 인생 살기를 기도합니다.

46-52절은 예수님이 맹인 거지 바디매오를 섬기신 내용입니다. 여리고에 바디매오라는 사람이 길가에 앉아 있다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메시야이시고, 자신의 눈을 뜨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믿었습니다. 사람들은 바디매오가 예수님께 구걸한다고 생각했는지 꾸짖으며 잠잠하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바디매오는 눈을 뜨기를 원한다는 분명하고도 절박한 기도제목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가로막는 장애물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더욱 큰 소리로 외치며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믿음의 간구에 응답하사 눈을 뜨게 하시고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바디매오와 같은 사람은 쓸모없다고 생각하고 무시하고 천대합니다. 제자들은 위대한 자가 되고 싶었으나 맹인 거지를 하찮은 존재로 여기고 섬길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맹인과 같아서 섬겨야 할 대상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둔 상황에서도 맹인 거지를 섬기시므로, 제자들도 영적인 눈을 떠서 섬기러 오신 예수님을 잘 배워 어떤 자도 품고 섬기는 위대한 자들이 되길 원하셨습니다.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섬김으로 구원받고, 제자로 부르심 받았습니다. 이는 자격 없는 죄인들을 향한 무한한 사랑이요, 일방적인 은혜입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의 섬김의 은혜를 기억하고, 평생 자발적이고 감사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본받아 낮아져 섬기는 삶을 살길 기도합니다. 또한 희생하기 싫어하는 본성을 부인하고, 시간과 물질과 주님이 주신 달란트와 인생을 드려 섬기므로 위대한 제자의 삶을 살 수 있길 기도합니다. 우리 모임이 섬김의 은혜와 사랑이 충만하여 생명 구원역사에 더욱 귀하게 쓰임 받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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