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OME | 세계선교 | 각부모임 | 경성소모임 | 성경연구 | 사진자료실 | 영상자료실 | 경성쉼터 | JBF/EBF/CBF | 기타 |

회원등록 비번분실

  Bible Study  
주일예배메시지
성경공부문제지
수양회강의
특강
구약강의자료실
신약강의자료실
강의안책자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리스닝
작성일 2010-05-30 (일) 16:06
분 류 요한복음
첨부#1 2010요한복음_13-1.hwp (56KB) (Down:250)
ㆍ추천: 0  ㆍ조회: 2679      
IP: 61.xxx.74
[2010년요한복음제13강]부활과 생명

2010년 요한복음 제 13 강

부활과 생명

말씀 요한복음 11:1-44
요절 요한복음 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오늘 말씀은 요한복음의 일곱 표적 중에 마지막 표적으로 죽음과 부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복음 사역에 분기점이 되었으며 예수님도 나사로를 살리신 후 구체적으로 십자가의 길을 향하여 나아가셨습니다. 그러면 이 사건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말씀을 통해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만나야 하겠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 모두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1-16)
  1절을 보십시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마을로 마리아와 마르다와 그 오라버니 나사로가 살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을 정도로 예수님을 사랑하였습니다. 마르다와 나사로도 예수님께 대한 사랑은 마리아에게 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예수님도 이런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오시면 꼭 그들의 집에 들으시어 그들과 교제하셨습니다.(눅 10:38-42) 주위 사람들이 보기에도 예수님과 그들 사이는 특별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라버니 나사로가 병들었습니다. 환절기라 일교차가 심해 단순한 감기인줄 알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날이 갈수록 더욱 나빠졌습니다. 이름 있는 의원들도 모두 이상하다 고개만 갸우뚱 하였습니다. 갑작스런 병으로 당황한 그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하는 수 없이 누이들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이 사실을 알리었습니다.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시면 당연히 곧 오셔서 고쳐 주실 것이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생각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나사로의 소식을 들으시고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은 나사로의 병이 죽음으로 끝나는 병이 아니다 하셨습니다. 죽음으로만 끝난다면 이별, 아픔, 허무, 무의미, 안타까움 등의 단어만이 연상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을 것이다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영광, 믿음, 소망과 아주 자연스럽게 연결시키셨습니다. 이는 죽음을 보는 예수님의 관점과 사람들의 관점의 차이를 분명히 보여 줍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히 나사로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이미 나사로가 죽었음을 아셨습니다. 죽음은 인류가 극복하지 못한 가장 어려운 문제입니다. 죽음 앞에 사람들은 무기력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절망하고 포기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보입니다. 누구나 인생에서 죽음을 맞이하지만, 죽지 않은 사람이 없지만,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인다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입니다. 더구나 젊은 날의 죽음은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문제를 그렇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좋은 기회로 삼으셨습니다. 또한 제자들에게는 살아 있는 믿음을 가르치시고자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긍정적인 사고나 낙천적인 사고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 사건을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그러한 계기가 되게 하시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물론 우리가 같은 상황을 만났을 때 예수님처럼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명의 주관자이신 예수님을 믿을 때, 택하신 자들에게 선으로 역사하시며 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을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도 믿음으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단순히 '잘 될거야'라는 자기 암시적 긍정의 말이 아닌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고백을 할 때 분명 우리는 믿음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입니다.
  5,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그 계시던 요단강 저편에서 이틀을 더 머무셨습니다.(10:40)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이렇게 하심은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와 나사로를 사랑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저자는 이를 강조하여 말하였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이틀을 더 유하신다' 이는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 말입니다. 유행가 가사도 아니고 생과 사가 달린 현실문제였습니다. 그동안 관계성을 생각한다면 죽음의 고통으로 슬퍼하고 있을 마르다와 마리아를 생각하여 최소한 빨리 가셔서 위로라도 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슬픔은 함께 나눌 때 반감된다고 하였습니다. 인생의 힘든 순간 사랑하는 사람, 평소 의지하던 사람이 큰 힘이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행동은 사람들의 오해를 사기에 충분하였습니다.(36,37) 유대인들이 사랑하는 자를 그냥 이렇게 내 버려두실 수 있는가 생각하는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많은 병자를 치유하시며, 눈 먼 자를 보게 하였는데 나사로의 병 하나 고치지 못하는가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찌된 일이신지 그들을 사랑하시기에 더 머무셨습니다. 사랑하는 자녀이기에 부모님은 때로 매를 드십니다. 자신의 자녀에게 회초리를 대시며 뒤에서는 자녀보다 마음이 더 아파 우시기도 하십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자녀를 올바르게 교육하기 위해서입니다. 당장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다 하며 떡 하나 더 주며 적당히 넘어갈 때 자녀는 무엇이 옳은 것인지 분별력과 지혜를 배우지 못합니다. 마음 가는 데로 자신이 좋아하는 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힘들다며 말씀에 순종하고 진리를 따르려 하지 않게 됩니다. 잘못하면 인생을 망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자녀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주기 위해 때로 매를 드시는 부모님처럼 당장에는 아픔이 있지만 이를 참으셨습니다. 원망의 소리, 비판의 소리를 인내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때로 사랑하는 자들이 아픔에 있을 때 이를 외면하시는 것처럼 보이실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여도 곧바로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실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럴 때 하나님의 사랑을 불신하며 원망하기도 합니다. 어찌 그러실 수 있는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분명 나사로가 병에 걸려 죽기도 하듯이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라도 죽을 수도 있고 병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다고 인생에 있어 어떠한 어려움이나 아픔도 만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다른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이 인생에서 다양한 문제를 만나고 사고나 질병으로 깊은 인생의 골짜기를 지날 때도 있습니다. 다만 다른 것은 그러한 문제를 '어떠한 자세로 대처하는가', '어떻게 살아가는가'가 다를 뿐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과 다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차원 높은 사랑입니다. 우리는 때로 그 사랑의 깊이를 측량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황이 악화 되더라도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말고 더 깊은 사랑, 차원 높은 사랑을 베풀어 주실 것을 기대하고 믿어야 하겠습니다. 더 좋은 것을 주실 것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이는 이론적으로는 배울 수 없습니다. 실제 사건에서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현재 부딪히고 있는 문제가 이렇게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기를 이 시간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이틀을 유하시고 제자들에게 다시 유대로 가자 하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이 놀라며 말하였습니다.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10:32)?"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생각하니 예수님을 신성 모독죄로 돌로 치려는 유대인들이 생각났습니다. 이는 그들 앞에 있는 엄연한 현실이었습니다. 눈을 감아도 돌을 든 유대인들이 아른거렸고 꿈에도 나타나 괴롭혔습니다. 거기에 갔다가는 앞날이 창창한 젊은 날에 큰일을 당할 것 같았습니다. 제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생명을 주관하시며,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믿음이 없을 때 제자들에게 죽음은 실패요, 끝일 뿐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꿈도 펼쳐보기 전에 죽을 수 없었습니다. 거꾸로 매달려 살아도 유대인들을 피해 살아남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처럼 걱정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문제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현재는 때가 낮이기에 빛을 봄으로 실족하지 않습니다. 밤이 되면 빛이 없으므로 실족할 수 있지만 현재는 낮이기에 실족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주관자이십니다. 사명이 있는 자들은 결코 생명을 거두시지 않으십니다. 사명을 마치기까지 함께 하사 보호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현재는 한참 일할 낮이기에 열심히 사명을 감당하면 됩니다. 내면에 빛이 없을 때 실족하게 됩니다. 그러나 빛이 있을 때 어디를 가도 어떠한 위험 앞에서도 실족하지 않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죽음에 대한 믿는 자들의 자세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예수님은 나사로가 잠들었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깨우러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는 죽음은 잠이라는 사실입니다. 잠은 다시 깨어나기 전까지 편히 쉬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찌하든지 시간만 나면 잠을 자려합니다. 예수님은 믿는 자들은 예수님께서 다시 이 땅에 오실 때 잠에서 깨어 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자들은 죽음을 죽음으로 여겨서는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죽음은 잠시 자는 것에 불과합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각자의 이름을 호명할 때 죽었던 자들이 큰 소리로 ‘예’하며 먼저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영적으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말씀하신 것인데 제자들은 정말 나사로가 단순히 잠자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다시 한번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계시지 않으신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 알게 되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광이 들어나게 될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죽음에 대한 예수님과 성경의 가르침을 믿게 될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장차 복음 역사를 계승해야 했습니다. 그들 앞에는 수많은 죽음 문제들이 다가올 것입니다. 이 죽음 문제 앞에서 나사로의 부활은 그들에게 위대한 믿음을 심어 줄 것이었습니다. 죽음의 한계를 벗어나는 놀라운 믿음의 세계로 나아가게 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어린 제자들이었지만 부르실 때부터 큰 소망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런 제자들에게 믿음을 가르치고 믿음을 심을 기회를 가지셨을 때마다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현재 우리에게도 원대한 비전을 두시고 계십니다. 앞으로 UBF 100년 역사를 향하여 21세기 복음 역사의 주인공으로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만 받고, 자신이 원하는 것만 주시기를 바라는 어린 신앙에 머물러 있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어려움에 도전하여 극복해 나가며, 새 역사를 창조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도 이 소망에 부응하여야 하겠습니다. 우리 앞에 당면한 문제에 매여 한계적인 생각, 어두운 생각에 빠지지 말고 힘든 순간일수록 믿음을 배우고자 하는 자세로 문제와 맞서야 하겠습니다. 때로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나 도전하며 생명 구원 역사의 주역들로 쓰임 받을 수 있는 믿음의 용사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모습은 아직 예수님의 기대와 소망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그래도 제자들은 인간적인 최선의 도리는 다하고자 하였습니다.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제자들은 유대인들의 돌에 맞아 죽을 것을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아직 죽기에는 젊은 나이인데 죽을 위험 속으로 가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시니 하는 수없이 이를 악물고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도마는 죽을 각오를 하고 비장하게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죽음에 대한 믿음의 자세가 없는 그로서는 최선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자신의 관을 바꾸지 않으면 예수님을 끝까지 따를 수 없습니다. 무리지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어도 결정적인 순간, 개인 신앙이 필요할 때 실족하게 됩니다.

Ⅱ.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17-44)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는 이미 나사로가 무덤에 있는지 나흘이었습니다. 무더운 날씨에 이미 육신은 부패되어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은 이미 그 무엇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기정사실이었고 남은 누이들에게는 더 이상의 소망이 없었습니다. 이미 나사로의 죽음을 위문하러 많은 유대인들이 마르다와 마리아를 찾아왔습니다. 마르다는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힘을 내어 예수님 일행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예수님을 마중 나왔지만 마음에는 예수님께 대한 서운함으로 가득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자 마자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계셨다면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이다 원망하며 말하였습니다. ‘식사 초대 때에는 제자들과 함께 시간을 칼같이 지키시더니…’ 속으로 생각하면서 섭섭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마르다는 자신의 감정이 드러난 것으로 인해 예수님께 실 수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대한 신뢰는 변함이 없음을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나님께서 주실 것을 안다고 하였습니다. 그녀의 이 말은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실 수 있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르다가 이렇게 말했지만 그녀는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전혀 생각해 보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리라 말씀하셨는데도 장차 부활의 때 살아난다는 것을 안다고 대답할 뿐이었습니다. 마르다는 장차 있을 미래의 부활만을 지식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마르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5, 26절을 보십시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이론적인 믿음뿐인 마르다에게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제까지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선한 목자다’ 하시면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이제 나사로의 죽음을 앞에 두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여기서 먼저 한 가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주인으로서 생명을 주시기도 하시고 거두기도 하시는 생명의 주관자라고 하셔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다’를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죽음을 염두에 두신 말씀이었습니다. 곧 예수님은 아담의 범죄로 인해 죽음이 인간들을 사로잡고 있었는데, 이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죽음이 인간들을 붙잡고 있을 수 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곧 ‘나는 부활이요’라고 말씀하심은 예수님이 죽음을 정복하셨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죽음을 이기시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기에 예수님은 부활이셨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예수님 안에서는 죽음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물론 이 말씀이 육체적으로 영원히 산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시 산 나사로도 죽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을 때 그 사람은 더 이상 죽음의 요소에 지배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죽음의 요소에 지배당하지 않는 삶은 어떤 삶일까요? 그것은 부활의 생명력으로 충만한 삶을 살게 됨을 뜻합니다. 크고 작은 어려움을 만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믿음으로 맞서 최선을 다해 싸워 나갑니다. 때로 최선을 다했는데 실패하여도, 패배하여도 낙담하지 않고 하나님의 선한 뜻을 찾아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거나 자신의 인생을 슬퍼하지 않습니다. 다시 일어나 앞으로 나아갑니다. 부활의 생명력은 어둡고 슬펐던 모습은 사라지게 하고 얼굴을 밝고 환하게 만듭니다. 부활의 생명력은 사람을 모두 꽃미남, 꽃미녀가 되게 합니다. 한계 상황을 극복하는 불굴의 도전 정신을 갖게 하며 미래를 개척하려는 개척 정신으로 충만하게 합니다. 하루하루 부활의 주님과 함께 아픔이 있더라도 소망 가운데 인내하며 최선을 다해 기쁨으로 맡은 일을 감당하며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러한 믿음, 부활의 믿음을 갖기를 원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마르다가 이러한 믿음을 갖도록 도전하셨습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의 말씀에 마르다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마르다는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신앙 고백하였습니다. 마르다는 말씀의 위엄 앞에 ‘못 믿겠네요’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고백은 이론적인 믿음이었습니다. 마르다에게는 실제 삶의 현장에서 단련된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죽음이 현장에서 돌을 옮겨 놓아야 했습니다.
  28-38절을 보십시오. 이윽고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으로 슬퍼하는 마리아를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하는 유대인들을 보시고 비통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어두움에 싸여 있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나사로의 무덤에 가셨습니다. 무덤은 유대인들의 풍습대로 돌로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3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돌을 옮겨 놓으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마르다와 마리아를 비롯한 사람들에게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부활의 믿음을 주시고자 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마르다는 놀라 나사로가 이미 죽어 나흘이 지나 육신이 썩어 냄새가 난다고 하였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부활이심을 고백하였지만 아무리 예수님이라도 죽은지 나흘이 되어 냄새나는 사람은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방금 죽은 사람은 혹 다시 깨어날 수 있으나 나사로의 육신은 부패하여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어찌 살아나는가 도저히 믿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마르다에게 분명히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40절을 보십시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믿으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게 됩니다. 불신하면 예수님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나지 않습니다. 오직 믿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마르다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그녀는 자신의 불신을 회개하고 믿음으로 돌을 옮겨 놓았습니다. 우리도 삶의 다양한 문제 앞에서, 현실 문제라는 어두움 속에 있는 양들 앞에서, 이것만은 안된다는 신 운명주의 돌, 불신의 돌을 회개하고 옮겨 놓아야 합니다. 돌을 옮겨 놓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성공 속에서도, 때로 실패 속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믿음을 체험하게 됩니다. 단련된 믿음, 성숙한 믿음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4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시며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끝까지 부활의 주님을 믿지 못하는 자들을 믿게 하기 위해서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예수님의 말씀은 천둥소리와 같이 퍼져 나갔습니다. 무덤 안에까지 메아리쳤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왔습니다. 그 얼굴은 수건으로 싸여있었습니다. 죽기 전 모습 그대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완전히 죽은 줄로 만 알고 있었는데 다시 살아나리라는 생각은 추호도 할 수 없었는데 나사로는 다시 살아나 마르다와 마리아 누이 앞에 예수님을 비웃던 유대인들 앞에 서 있었습니다.
  죽음은 우리를 분명 슬프게 합니다. 죽음은 사랑하는 사람과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게 합니다. 따뜻하게 이름을 불러 주던 목소리도 더 이상 들을 수 없습니다. 손을 맞잡고 기도할 수도 없습니다. 함께 맛있는 밥을 먹을 수도 없습니다. 기억 속에서만 간신히 아련한 추억을 되새길 뿐입니다. 그러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선포하신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에게 있던 슬픔은 더 이상 슬픔으로 존재 하지 않게 됩니다. 쓰라린 고통은 사라집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죽음은 잠시 자는 것에 불과합니다. 다가올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다시 부활하여 그동안 잠을 자 만날 수 없었던 사랑하는 사람들과 만나 기쁨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보다 더욱 뜨겁게 사랑하며 노래하며 즐거워할 것입니다. '부활이시오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죽음이 주는 어두움에 사로잡혀 있지 않게 됩니다. 죽음을 정복하신 주님 안에서 영생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우리는 누구나 이 땅에서 잠시 하나님께서 정해 놓은 시간만큼 살아갈 뿐입니다. 주님께서 부르시면 우리는 언제든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삶을 함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주님 나라에 영광스럽게 들어가기 위해 이 땅에서 하나님을 온 맘과 열심을 다해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다. 부활의 믿음으로 사는 자는 이 땅에서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생명력이 넘치며 인생의 어두움을 극복하며 힘차게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우리 안에 혹시 죽어 있는 나사로는 도저히 살아나지 않을 것이다  불신을 하는 마르다와 같이 불신의 문제, 해결되지 않는 고질적인 문제가 있지는 않으십니까? 아무리해도 할 수 없어, 난 안돼 하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믿음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반복되는 실패 속에서 믿음을 잃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불신의 돌을 치우라고 하십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빛으로 나아오라 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체험하라 하십니다. 죽음의 한계에 갇혀 울고 있는 사람들을 보시고 비통히 여기신 주님께서는 죽음 속에 갇혀 있는 우리에게도 명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영진아 나오라" 우리 모두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내면의 고질적인 불신을 회개하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정복하신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우리가 부활이며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고백하여야 하겠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물론 우리가 믿음으로 고백하여도 다시 죽은 나사로가 또 다시 살아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살리신 나사로는 현재 다시 죽어 잠자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음을 정복하신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향한 믿음은 결코 변해서는 안됩니다. 믿음으로 우리 내면의 모든 죽음의 요소, 어두움을 몰아내고 예수님의 빛 가운데로 행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앞에 힘든 제자 양성 문제, 복음을 전해야 할 수 많은 양들, 캠퍼스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 앞에 힘들다 하는 부정적인 생각, 비 복음적인 생각을 몰아내고 믿음으로 끝까지 도전하여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이루시는 복음 역사의 현장에서 각자에게 맡기신 한 가지 십자가에 충성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시대나 믿는 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오셨습니다. 예수님도 12제자를 택하시고 훈련하시어 복음 역사의 기초를 놓으셨습니다. 우리도 생명 구원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과 동역하여 한 명의 양을 먹이고 키우는 성경 선생이요 제자 양성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2041년까지 1만 명의 제자들이 전 세계에 서는 비젼을 주신 주님의 뜻에 믿음으로 순종하여 나 한 사람이 부활의 믿음 위에 굳게 서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2010년 여름 수양회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는 수양회를 앞두고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까? 어떤 꿈을 꾸고 있습니까? 요즘 한 영화가 개봉되어 상영 중에 있습니다. 그 영화는 56개국에 상영되었고 계속 관객들의 발걸음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미국의 메이저 영화사에서 만든 영화가 아닙니다. 미국의 한 작은 교회의 500여명 신자들의 헌신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문화가 점점 밀려나고 있는 현실에서, 청소년들이 교회에 오지 않는 현실에 문제의식을 갖고 교회가 직접 문화를 만들어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비전에서 영화제작을 시작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영화에 나오는 대사대로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일을 행하사 작은 교회가 만든 영화가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습니다. 영화제목처럼 거인과 같은 세상에 맞서 승리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는 여름 수양회를 준비하며 하나님께서 행하실 놀라운 일을 꿈꾸며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을 체험하고자 하는 소망을 덧입어야 하겠습니다. 기대가 없으면 이루어지는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새롭게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며 주어진 십자가에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을 믿습니다. 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승리의 인생을 사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이것을 네가 믿느냐?”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0
3500
번호     글 제 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587 시편 [2011년 추수감사절] 여호와께 감사하라 관리자 2011-11-27 2690
586 누가복음 [2011년 누가복음 제13강]죄사함과 사랑 관리자 2011-06-26 2690
585 시편 [2013년 추수감사절] 새 노래를 내 입에 두셨으니 관리자 2013-12-01 2689
584 창세기 [2013년 창세기 제11강]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관리자 2013-06-02 2686
583 누가복음 [2011년 누가복음 제 2강]비천함을 돌보신 주님 관리자 2011-03-20 2686
582 갈라디아서 [2011년 신년수양회 제2강]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관리자 2011-01-02 2686
581 신명기 [2014년 신명기 제1강] 올라가서 차지하라 관리자 2014-09-14 2685
580 마가복음 [2012년 마가복음 제7강] 군대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님 관리자 2012-04-29 2685
579 누가복음 [2011년 누가복음 제24강] 다만 그의 나라를 구하라 관리자 2011-10-02 2679
578 요한복음 [2010년요한복음제13강]부활과 생명 리스닝 2010-05-30 2679
577 요한복음 [2010년요한복음제12강]참 목자 리스닝 2010-05-30 2679
576 야고보서 [2012년 야고보서 제5강] 길이 참으라 관리자 2012-02-19 2675
575 이사야 [2011년 이사야서 제13강]메시아의 잔치 1 관리자 2011-01-23 2673
574 이사야 [2010년 이사야서 제6강]새 포도원의 노래 관리자 2010-10-17 2665
573 누가복음 [2011년 누가복음 제 1강]내 부끄러움을 없애신 주님_고영훈 관리자 2011-03-13 2653
572 히브리서 [2013년 히브리서 제4강] 승리하는 믿음 관리자 2013-11-24 2639
571 마태복음 [2014년 마태복음 제3강]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관리자 2014-02-02 2638
570 요한복음 [2009가을학기준비특강-1] 오천명을 먹이신 예수님 관리자 2009-08-16 2638
569 요한계시록 [2009년요한계시록제3강]굳게 잡으라 관리자 2009-09-20 2628
568 요한복음 [2010 요한복음1강]육신이 되신 말씀 리스닝 2010-02-28 2622
1,,,11121314151617181920,,,40
서울 동대문구 이문2동 264-231
Tel:070-7119-3521,02-968-4586
Fax:02-965-8594
서제임스목자님메일:Suhjt@hitel.net
[UBF한국본부] [유럽UBF] [UBF국제본부] [UBF TV] [시카고UBF] [Mother Barry's Homepage]
[뉴욕UBF] [워싱턴UBF] [노스웨스턴UBF] [콜롬비아UBF] [코스타리카UBF] [프랑크푸르트UBF]
[키에프UBF] [상파울루UB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