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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11-08 (일) 12:31
분 류 히브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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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히브리서 제7강]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
2015년 히브리서 제7강                                                                      최동진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

말씀/ 히브리서 8:1-9:22
요절/ 히브리서 8:6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지난 시간에 우리는 예수님이 자격 면에서 레위 계통의 제사장보다 훨씬 뛰어나신 분이심을 배웠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대제사장의 직분과 중보사역 면에서 우월하신 분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새 언약의 중보자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피의 은혜를 새롭게 덧입고 감사와 생명력이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8:1-13)
  1a절을 보십시오.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라.” 저자는 지금까지 예수님이 큰 대제사장이시며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심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리고 저자는 바로 지금 그런 위대하신 대제사장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고 성소와 참 장막에서 섬기고 계십니다. 당시 사람들은 크고 화려한 성전에서 아름다운 옷을 입고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을 영화롭게 보았습니다. 그에 비해 현재 계시지도 않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예수님을 믿고 살면서 고난과 박해를 받고 사는 자신들은 초라하게 보았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이 직분을 수행하던 성소는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하나님의 참된 거처는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상의 성소가 모형으로 삼은 실체가 되며 하나님이 직접 세우신 성소와 참 장막에 거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그 본체가 하나님이시지만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낮아져 오셔서 죄와 사망 권세 아래 신음하는 영혼들을 살리는 구원 역사를 완성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후에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영광과 존귀로 옷 입으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시며 중보의 사역을 계속 감당하고 계십니다. 대제사장은 예물과 제사 드림을 위해 세움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예수님도 대제사장으로서 드릴 예물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은 7장27절에서 이미 말한 것과 같이 자기 몸을 예물로 드리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드리는 제사는 하늘에 있는 장막에서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이 땅에 계셨다면 제사장이 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땅에는 율법을 따라 예물과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이 직분을 수행한 장막은 모형과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참 장막에서 대제사장 직분을 감당하고 계십니다.
  6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구약의 제사장 직분도 아름다운 직분이었습니다. 출애굽기 28장에 보면 대 제사장은 세상에서 가장 영화롭고 아름다운 옷을 입고 제사장 직을 수행했습니다. 그 옷은 모두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엮어져 있었고, 어깨와 가슴에는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진 아름다운 열 두 보석들이 있었습니다. 이는 제사장의 직분이 그만큼 영화롭고 아름다움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보다 훨씬 뛰어나고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습니다.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이는 예수님의 제사장 직분은 하늘에 속한 것이요, 모형이 아니라 원형인 참 장막에서 섬기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일시적이고 물질적인 제사가 아니라 영원하고 신령한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더 좋은 약속으로 세워진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중보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해하는 역할을 맡은 자입니다. 레위 지파의 제사장은 그 인격도 불완전하고 그가 드리는 제물도 불완전하였기 때문에 완전한 제사를 드리는 데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신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오,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시기 때문에 중보자로서 합당합니다. 디모데전서 2:5절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예수님은 그 인격 면에서 완전한 중보자가 되실 뿐만 아니라 제물도 흠 없는 자기 자신을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을 다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7절은 첫 언약에 흠이 있었기 때문에 새 언약을 필요로 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첫 언약이 파기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백성들의 허물 때문이었습니다. 8,9절을 보십시오.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말씀하시되 주께서 이르시되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 또 주께서 이르시기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맺은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들은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였노라.”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렸다고 탄식하였습니다.(렘31:32b)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를 따라간 것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의 죄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은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어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회개를 촉구하였으나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돌아보실 수가 없었습니다. 이로써 첫 언약은 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죄악된 인간들을 포기하실 수밖에 없었지만 크신 긍휼과 변치 않는 사랑으로 더 좋은 새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새 언약은 어떤 점에서 첫 언약보다 더 좋은 언약입니까?
첫째로, 하나님의 법을 생각과 마음에 기록해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10a절을 보십시오.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첫 언약은 하나님의 법을 돌판에 새겨주셨지만 새 언약은 생각과 마음에 새겨주셨습니다. 아무리 단단한 바위라도 오랜 시간에 걸쳐 햇빛과 풍랑에 노출되면서 닳고 부서져 자갈이 되고 결국은 흙과 모래로 변하고 맙니다. 또한 돌판에 새겨 놓는다고 저절로 순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요절 말씀을 정하고 굵은 글씨로 인쇄하여 책상 앞에 붙여 놓고 지키고자 결심합니다. 처음 얼마동안은 말씀을 붙들고 열심히 투쟁하지만 한 달이 지나고 계절이 바뀌고 여름수양회를 다녀오고 나면 요절말씀이 무엇이었는지조차 생각이 나지 않고 반복되는 일상을 좇아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런 연약함을 잘 아시고 더 좋은 새 언약을 사람의 생각에 두고 마음에 새겨주셨습니다. 마음에 새겨진 것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습니다. 마음에 새겼다는 것은 마음으로부터 믿고 순종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마음으로 순종할 때 심령에 기쁨이 충만하게 되고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가 맺혀지게 됩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보편화 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그들이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라.”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가 이스라엘 민족과 그 중에서도 제사장이나 선지자 등 소수의 사람들에 국한되어 있었으며 부분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 아래서는 모든 민족으로 확대되었으며 신분과 계층에 상관없이 큰 자로부터 작은 자에 이르기까지 누구든지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보편화되었음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은 성육신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완전한 모습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나 성경 선생이 될 수 있습니다.
셋째로, 다시는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십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약속은 새 언약 아래 있는 자들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축복이요 특권입니다. 첫 언약 하에서 드린 제사로는 죄의 형벌은 면하기는 했으나 죄 자체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죄를 지을 때마다 제사를 드려 형벌을 면해야 했습니다. 또 죄가 자꾸 생각나서 항상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 하에서는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완전히 사해주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고 나오는 자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시고 죄를 근본적으로 용서해주셨기 때문에 다시는 기억도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상대방의 잘못을 용서한 후에도 상대방의 허물과 실수를 두고두고 기억하고 분노하고 괴로워합니다. 또 과거에 지은 추하고 더러운 죄가 기억이 나서 슬퍼하고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할 때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기억 속에서조차 깨끗이 지워버리십니다. 이것은 말할 수 없는 큰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사죄의 은혜를 온전히 믿을 때 더 이상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고 사죄의 은혜와 기쁨이 넘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넷째로,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맺으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세우기 위함입니다. 10b절을 보십시오.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본래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사랑의 질서 속에서 무한한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파괴되고 그 때부터 불행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사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를 사해 주신 것은 파괴된 영적 질서를 회복하고 그 질서 속에서 행복을 누리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둘째 언약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심으로 첫 번째 언약은 낡은 것이 되었습니다. 낡고 오래된 것은 곧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첫 언약은 완전한 장막이 나타나기 전에 인간들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임시적으로 존재하는 모형에 불과한 것입니다. 아파트가 완공되고 나면 모델하우스는 더 이상 필요 없게 되듯이 새 언약이 왔을 때 첫 언약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날마다 예수님의 피로 맺으신 새 언약을 가슴에 새기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확신있게 믿음의 길을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해주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하늘의 참 장막에서 우리를 위해 끊임없이 중보하시는 영원한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님께 날마다 나아가 기도함으로 사죄의 은혜를 덧입고 그 은혜에 감격하여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섬기는 기쁨을 누리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II. 새 언약의 중보자(9:1-22)
  9장에서는 더 좋은 언약으로 세워진 새 언약이 어떻게 완성되었는가를 보여줍니다. 1절을 보십시오.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습니다. 성소는 성소와 지성소 둘로 나뉘어져 있고 이 사이에는 휘장이 쳐져 있었습니다. 성소에는 등잔대와 상과 진설병이 놓여 있었고, 등대는 금으로 만든 일곱 등잔을 놓아 성소를 밝히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 등잔에는 항상 불이 켜져 있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참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상 위에 있는 진설병은 거룩한 떡으로서 제사장이 매 안식일마다 새 것으로 바꾸어 진설했습니다. 그리고 지성소에는 금향로와 언약궤가 있었습니다. 금향로는 본래 성소에 있는 것인데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씩 지성소에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향로에서 향을 사르는 것은 성도들의 기도를 상징합니다. 언약궤는 사면을 금으로 쌌는데 그 안에는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십계명을 새긴 두 돌판 곧 언약의 돌판들이 있었습니다. 또 만나를 담은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도 있었습니다. 언약궤 위에는 속죄소가 있고, 속죄소 위에는 영광의 그룹들, 천사들이 그 날개를 펴서 속죄소를 덮고 있었습니다. 이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냈는데 하나님이 그룹들 사이에 좌정해 계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출25:17-22) 이 지성소는 죄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첫 언약 아래서는 인간들이 거룩하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너무나 좁고 제한적이었습니다. 백성들은 성전 뜰에서 기다려야 했고 제사장들만이 아침저녁으로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고 등불을 켜야 했습니다.(출30:7,8) 또 매 안식일마다 진설병을 바꾸어야 했습니다.(레24:8) 그러나 이 제사장들도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지성소에는 감히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지성소에는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번 있는 대 속죄일에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날에도 그냥 들어갈 수 없고 자기와 백성들의 죄와 허물을 위해 피를 가지고 들어가야 했습니다. 대제사장은 먼저 자기를 위하여 수송아지의 피를 취하여 손가락으로 속죄소 동편에 뿌리고 또 속죄소 앞에 일곱 번 뿌렸고, 백성의 죄를 위해서는 속죄제 염소의 피를 취하여 동일하게 뿌렸습니다.(레16:14,15) 죄악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렇게 까다롭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구약의 율법의 예식은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하고 좋아 보이지만 율법으로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이처럼 힘든 일이었습니다. 또 문제는 섬기는 자를 양심상 온전케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첫 장막에서 섬기는 예법은 개혁할 때까지 맡겨둔 것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개혁이 the new order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을 통해 새 질서가 서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개혁은 혁명을 의미합니다. 지금까지 구약의 율법에 따라 전통적인 제사형식으로 죄 사함 받는 의식에 익숙한 당시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율법이 서고 예수님을 통해서 만민이 구원받게 되었다는 것은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정권을 뒤집어엎고 새 정권이 들어서는 것만이 혁명이 아닙니다. 진정한 개혁, 진정한 혁명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시므로 우리의 더러워진 양심을 깨끗하게 하고 인간의 본성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놀라운 개혁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인류 역사상 가장 혁명적인 사건입니다.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오, 새 언약의 중보자 되신 예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예물과 제사를 어떻게 개혁하셨습니까? 11,12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이 땅의 대제사장은 첫 장막을 지나 지성소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대제사장은 장막 바깥에서 잡은 짐승의 피를 속죄소에 뿌리고 백성을 위해 간구했습니다. 이러한 예식을 매년 반복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한 제물로서 친히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시고, 오직 ‘자기의 피’로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시고 하늘에 있는 지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사는 완전하여 더 이상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하늘로 올리우심을 반복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피의 효력이 어떻게 나타납니까? 13,14절을 보십시오. 구약의 제사는 염소와 황소의 피와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들에게 뿌리면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 죄악의 피가 흐르고 있는 한 아무리 피로 목욕을 하고 재를 뒤집어쓴다 해도 죄로 더러워진 양심까지 깨끗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한 번 더러워진 양심은 교육이나 도덕적 행위나 봉사활동으로도 깨끗해지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더러워진 양심에 대한 죄의식마저도 점점 무뎌져서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피가 더러우면 병들고 죽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오늘날에는 의술의 발달로 질병으로 더러워진 피는 원인에 따라 한약과 양약을 적절히 사용하면 깨끗하게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로 더러워진 피는 첨단 현대 의술로도 고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는 짐승의 피와 달리 죄를 없이 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염소나 송아지의 피는 짐승의 피이지만 예수님의 피는 하나님의 아들의 피입니다. 또 짐승은 외적으로 흠이 없는 것을 드렸지만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거룩하고 조금도 흠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짐승은 강제로 끌려가서 희생제물이 되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순종과 인간에 대한 극진한 사랑 때문에 자원하여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순종하시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짐승의 피로 드린 제사는 율법을 좇은 것이지만 예수님의 피로 드린 제사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짐승의 피는 땅에 있는 성소와 인간의 육체에 뿌려졌지만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 뿌려지고 양심에 뿌려졌습니다. 아무리 부정한 자라도 암송아지의 재를 뿌리면 정결케 되었거든 하물며 우리 양심에 뿌려진 예수님의 보배 피가 어찌 우리 양심으로 죽은 행실을 깨끗케 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습니까?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케 할 만큼 강한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피로 우리 인간이 치러야 할 죄의 값을 완전히 다 치루시고 우리를 죄와 사탄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의 권세 아래서 신음하다가 어린 양의 피로 말미암아 바로의 권세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보배로운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게 된 것과 같습니다. 죄로 더러워진 우리의 양심을 깨끗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밖에 없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피의 능력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1:18,19)” 예수님의 피는 아무리 더럽고 추한 죄라도 깨끗케 하여 양심을 회복시켜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내 속에 있는 더러운 피가 예수님의 정결한 피로 교환수혈 될 때 우리의 양심이 살아나게 됩니다. 양심이 깨끗하게 될 때 조그만 죄도 예민하게 느끼게 되고, 전에는 죄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도 죄로 깨닫고 애통히 회개하게 됩니다. 그러면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말씀과 같이 사죄의 은혜가 차고 넘치게 됩니다.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덧입을 때 내면에 근본적인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우상을 섬기고 자기만을 위해 살던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고 주와 복음 역사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깨달을 때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주님께 헌신하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주님의 성도들을 박해하던 자였으나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를 깨달았을 때 예수님을 얻기 위해 그가 아끼던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자기 목숨을 드려 헌신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죄로 병들어 죽어 가는 캠퍼스 영혼들을 살릴 수 있는 약은 구약과 신약 밖에는 없습니다.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캠퍼스로 나아가 생명의 복음을 힘써 증거함으로 예수님의 피의 은혜로 말미암아 한 생명이 살아나고 변화되어 주와 복음 역사를 위해 기쁨으로 헌신하는 생명구원 역사가 왕성하게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첫 언약은 대제사장이 중보자가 되어서 짐승의 피로 죄를 속량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새 언약의 중보자로서 자신의 피로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약속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16-22절은 예수님께서 피 흘려 죽으셔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언은 사람이 죽어야 그 효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언약과 유언은 동음이의어(同音異義語)로서 헬라어로 ‘디아데케(diathēkē)’라고 합니다. 이는 언약은 유언적인 성격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언약이 효력을 발생하려면 죽으셔야 했고, 그것도 피를 흘리며 죽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잡히시기 전날 밤 마지막 유월절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22:20)” 예수님은 자신의 고귀한 피를 흘리심으로 새 언약을 인치셨습니다.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세는 율법대로 제물의 피를 두루마리와 백성들에게 뿌리며 피로써 첫 언약을 인쳤습니다. 또한 피를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거의 모든 그릇에 뿌림으로 피로써 정결케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육체의 생명에 피가 있고 피가 죄를 속하기 때문입니다.(레17:11)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를 영원한 파멸에서 구원하시고 영생을 누리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 찬송을 드립니다.
  갈수록 기존의 가치질서가 무너지고 무한 경쟁으로 치닫고 있는 이 시대에 하나님만 의지하고 사는 것이 때로는 현실성이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야무지게 대처하지 않으면 도태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가 들기도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지만 십자가에 대한 부담감에 눌려 의무감으로 신앙생활을 하기 쉽습니다. 믿음으로 살고자 하지만 영적으로 깨어있지 못해 세상에 쉽게 마음을 빼앗기고 죄의 유혹 앞에 넘어지기를 잘하는 자신을 생각할 때 불의와 절망에 빠지곤 합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완전히 넘어지지 않고 날마다 다시 일어서서 여러 가지 십자가를 능히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지금도 하늘나라 영광의 보좌에서 연약한 저를 위해 중보하시는 예수님의 은혜로 인한 것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현재 하나님을 섬기며 생명구원 역사에 쓰임 받는 삶을 살게 된 것은 예수님의 피 값으로 말미암은 은혜임을 기억할 때 자발적인 소원 가운데 주님 역사에 동참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제가 날마다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덧입고 주와 복음 역사에 기쁨으로 헌신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저의 마음에 새김으로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힘과 능력을 덧입고 양들의 죄와 싸우며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드리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살지 말고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의지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베드로전서 2:9절에 보면 주님은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고 말합니다. 이는 구약의 제사장보다 더 영광스러운 직분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덧입음으로 은혜와 감사와 생명력이 차고 넘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받은 자로서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며 하나님 나라 확장하는 역사에 귀하게 쓰임 받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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