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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6-05-01 (일) 12:57
분 류 사도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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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사도행전 제7강] 순교자 스데반
 
 2016년 사도행전 제7강                                                                    이인구

순교자 스데반

말씀/ 사도행전 6:8-7:60
요절/ 사도행전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1999년 미국 콜롬바인 고등학교에서 총기난사로 학생 13명이 죽고 23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 학교의 불량서클 단원이었던 2명의 남학생이 히틀러 생일을 축하한다고 학생들을 향하여 총을 난사하고 있었을 때 그곳에 17세의 캐시 버넬이라는 소녀가 있었습니다. 총 든 범인이 그녀에게 총구를 겨누고 물었습니다. “너는 하나님을 믿느냐?” 만약 하나님을 안 믿는다고 했다면 살 수 있었을 상황에서 그녀는 똑바로 그를 쳐다보며 대답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Yes, I believe in God.” 화난 범인은 방아쇠를 당겼고 그녀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 소녀는 그 인생이 꽃 피우기도 전에 허무하게 세상을 떠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 후 미국의 청소년들 사이에 새로운 영적 부흥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많은 학교에서 많은 십대들이 ‘Yes, I believe in God.’ 이라 적힌 티셔츠를 입고 다니며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2500명의 십대들이 감동적인 신앙고백의 집회를 가지며 마약 속에 찌들어 죽어가던 미국 십대들을 일깨우는 살아있는 운동으로 불붙기 시작했습니다. 본래 그녀는 어릴 때부터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마약과 주술에 빠졌던 문제아였습니다. 하지만 부모의 권유로 교회수련회에 가서 예수님을 만난 후 극적으로 변화됐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만난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 다니던 미션스쿨에서 신자가 적은 공립학교인 콜롬바인으로 전학했고 많은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녀가 죽기 1년 전 노트에 쓰여진 말입니다. “나는 나의 하나님을 위해 죽고 싶다. 나는 나의 믿음을 위해 죽을 것이다. 그것은 나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일이다.” 순교는 한순간의 생각이나 감정으로 되는 것이 아닌 지속적인 순교자적인 삶의 결과입니다. 오늘 초대교회의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의 삶과 설교를 통해 진정 가치 있는 인생, 위대한 죽음이 무엇인가 생각하고 배울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스데반은 이방에서 태어난(이방태생) 헬라파 유대인으로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그는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사람들에게 큰 기사와 표적을 행했습니다. 또한 그는 믿음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5,10) 그것은 그가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5,10) 성령이 주시는 믿음과 지혜로 은혜가운데 많은 능력을 행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모든 신자에게 성령이 임하시지만 모든 신자가 성령 충만한 것은 아닙니다. 성령 충만하다는 것은 성령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영접하고 그 분의 다스림 받는 것을 말합니다. 인생의 험한 바다를 항해하는데 내가 잡고 있던 배의 운전대를 성령님께 넘기는 것입니다. 신자가 육신의 본성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성령 충만할 때 육신의 본성을 극복하고 영을 좇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스데반은 예수님의 피를 믿어 구원받은 후 성령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았습니다. 성령 충만할 때 세상가치관으로는 결코 볼 수 없는 세상 너머의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영적세계와 비전을 볼 수 있고 또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이 자유민들의 회당에서 말씀을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로마의 노예로 끌려갔다 해방되어 자유인이 된 자들이 모인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스데반과 논쟁했는데 스데반이 성령이 주시는 지혜로 말하므로 그들이 당할 수 없었습니다. 말로는 스데반과 대적할 수 없음을 깨달은 그들은 음모를 꾸며 산헤드린 공회에 고소했습니다. 그들은 스데반을 이기기 위해 사람들을 매수해 거짓증인으로 세워 고소했습니다. 고소제목은 신성 모독죄로 그들은 스데반이 모세가 전해준 율법을 고치고 거룩한 성전을 허물겠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거짓 증거했습니다. 유대사회에서 신성모독죄는 그 어떤 죄보다 컸고 사실로 드러나면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얼마 전 유대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죄목도 신성모독죄였습니다. 고소당한 스데반은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그들의 음모를 깨달았습니다. 공회에서 많은 거짓증인들 앞에서 궁지에 몰린 스데반은 거짓증인들에 대한 분노와 또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얼굴이 사색이 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았습니다.
  천사는 하나님을 매일 만나고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존재입니다. 출애굽기(34;29)에 보면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십계명을 받아가지고 내려올 때 그 얼굴에서 얼마나 빛나는 광채가 나던지 사람들이 도저히 볼 수 없어서 수건으로 그 얼굴을 가렸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지시기전 제자들과 함께 변화산에 올라가셨을 때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심히 희어졌습니다.(막9장)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만나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할 때 성령 충만함으로 천사 같은 얼굴을 가질 수 있습니다. 캠퍼스를 천사처럼 날아다니며 죽어가는 양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사모님들이 진정 천사의 얼굴입니다. 스데반은 성령 충만함으로 예수님의 부활신앙을 덧입고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죽음 앞에서 담대해진 그는 이 기회를 복음을 증거하는 좋은 기회로 삼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겐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선택받지 못한 이방인들은 결국 자기들의 종이 될 것이라 믿었고 심지어 이방인을 지옥의 연료로 창조하셨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그들과 같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기 위해 먼저 그들을 선택했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에게 하나님께 받은 성전과 율법은 이방인들과 구별시켜주는 특별히 선택받은 자만이 소유할 수 있는 축복이었습니다. 하지만 스데반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외식과 거짓에 찬 성전은 무너질 것이고 율법은 복음을 향한 단계임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복음과 예수님의 몸을 통해 이루신 성전은 유대인의 전유물이 아닌 전 세계 모든 이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축복임을 깨달았습니다. 스데반은 성령 충만 가운데 하나님의 원대한 뜻과 비전을 영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공회에서 많은 이들 앞에서 이 복음의 비밀과 진리를 증거 하고자 했습니다.
  7장 2절에서 53절까지는 죽음 앞에서도 요동치 않고 담대하게 말씀을 전하는 스데반의 설교입니다. 스데반의 설교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설교가운데 사도가 하지 않은 유일한 것이지만 베드로나 바울의 설교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정통성을 변증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거짓증거자들이 고소한, 모세의 율법을 어긴 것과 성전모독에 대한 반박(변증)으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이 가운데 이스라엘의 역사를 서술하며 당시 유대인들이 조상과 같은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회개하도록 돕는 목자 스데반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역사는 현재의 거울이요,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E. H. Karr)라 했습니다. 우리도 성경을 통해 과거 예수님을 거부한 유대인들을 돌아봄으로 현재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게 하는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죄에서 돌이키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스데반의 긴 설교를 네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아브라함의 하나님(2-8)
  2절을 보십시오. 스데반은 모세의 율법을 어긴 것에 대한 반박으로 먼저 이스라엘의 일대 조상인 아브라함부터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모세와 같이 유대인들이 위대한 조상으로 신성시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역사의 시작은 아브라함을 부르신 영광의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본래 아브라함은 우상숭배 지역인 메소보다미아에서 우상을 섬기는 가정에서 자식도 없이 초라하게 늙어가는 아저씨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아브라함의 인생가운데 놀라운 일을 계획하시고, 아브라함에게 먼저 찾아오셔서 약속을 제시하셨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응답하여 선민 이스라엘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15;16) 믿음(신앙)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을 받아드리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자리에 내가 들어가면 타락하게 됩니다. 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약속의 땅으로 부르셨지만 발붙일만한 땅도 주시지 않으시고 다만 그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그와 그의 후손에게 주시겠다는 약속만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광대한 땅에서 큰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살았지만 그가 일생동안 소유한 것은 자식 이삭 한 명과 자신의 무덤자리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넓은 땅과 많은 자손을 주시기 위해 그를 택하고 약속을 주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은 약속을 통해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의 하나님이 되시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인간을 지으신 목적대로 인간들과 영원히 함께 하며 사랑으로 다스리시는 아버지가 되시기 위해서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할례를 행함으로 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을 기초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의 역사요,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스데반은 아브라함의 역사를 통해 율법보다 이전에 있던 하나님의 약속과 믿음을 강조하며 형식적인 율법에 매여 있는 유대인들의 불신을 지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율법준수가 아니라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는 것임을 깨우쳐줍니다.
둘째, 요셉의 하나님(9-17)
  스데반은 희비와 영욕이 엇갈린 요셉의 일생을 말하면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섭리의 하나님을 증거했습니다. 형들이 시기심으로 요셉을 이방인에게 노예로 팔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 하셔서 모든 환난에서 건지시고 애굽의 총리로 세상을 통치하도록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버림받은 노예요 성 희롱자에서 최고의 총리까지 오른 드라마틱한 인간승리 드라마를 만드시고자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에서 승리하게 하시고 병에서 일어나 건강한 몸을 주시고 많은 재물과 높은 자리를 주신 것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더 큰 일을 하도록 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선 총리 요셉을 하나님의 구원역사 속에서 장차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는 죄악된 형들의 연단자요 구원자로 쓰셨습니다. 요셉을 통해 택한 백성들을 흉년에서 구원하시고 약속대로 큰 민족으로 번성하게 하셨습니다.(17) 형들이 총리에 오른 요셉이 복수하지 않을까 두려워할 때 요셉은 자신의 인생가운데 역사하신 하나님을 증거했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50;20) 이처럼 유대종교지도자들의 시기심으로 예수님께서 이방인에게 넘겨져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심으로 유대인뿐 아니라 세상 만민의 구원자로 삼으셨습니다. 스데반은 유대인들이 요셉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받도록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셋째, 모세의 하나님(18-43)
  유대인들은 율법의 전수자요 이스라엘의 출애굽 지도자였던 모세를 지나치게 영웅시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모세를 부르시고 인도하시며 구원역사를 이루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사실 모세는 애굽 왕의 잔인한 명령으로 태어나자마자 나일강에 빠져 죽을 운명이었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운데 바로공주에 의해 건져져 애굽의 왕자로 궁중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모세가 40세 때 그는 바로의 공주로 살고 싶은 본성을 부인하고 압제받는 동족들을 위해 살고자 결단했습니다. 그리고 동족을 억압하는 애굽 병사를 죽이고 동족 편에 섰지만 이스라엘 노예백성들은 모세를 거부했고 결국 모세는 광야로 도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인간적 의지와 계획은 실패했지만 하나님께선 모세를 40년 광야연단 가운데 위대한 영적 지도자로 연단하시고 출애굽 역사에 사용하셨습니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위인의 삶은 본받고 따라야 될 목표가 됩니다. “나도 열심히 노력해 저런 위대한 사람이 될거야!” 하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런 이들에 비해 능력도 부족하고 고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도 부족하고 더구나 중요한 때 운도 따르지 않는 자신을 보면 더욱 절망하게 됩니다. 성경의 역사가 지속적으로 말하는 것은 역사를 이끈 위인들의 위대한 의지와 능력이 아니라 부족한 자를 택하시고 함께 하시고 인도하심으로 위대한 사람으로 만드신 하나님입니다. 아브라함, 요셉, 모세 이 사람들은 모두 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자식하나도 낳을 수 없었고 살아남을 수도 없었던 그런 불행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일방적인 은혜로 택하사 그들을 믿음의 조상 삼으시고 애굽의 통치자로 삼으시고 출애굽의 지도자로 삼으셨습니다. 신자는 구약의 역사를 통해 부족했던 그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돌아봄으로 현재 부족한 나를 택하시고 함께 하시며 인도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조상들에 대한 헛된 자부심도 문제지만 그 보다 더 큰 문제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마저 불순종하고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자 모세의 도움도 거절했을 뿐 아니라 연단 받고 돌아온 지도자 모세의 인도로 출애굽한 후에도 광야생활 중 끊임없이 모세와 하나님께 불평하며 우상숭배의 죄에 빠졌습니다. 특히 모세가 하나님께 율법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 올라간 사이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것이 자신들을 애굽에서 인도한 신이라 경배할 때 그 죄는 극에 달했습니다. 스데반이 이처럼 돌아보기 싫은 이스라엘 조상들의 죄를 언급하는 것은 예수님을 배척한 유대인들의 죄를 지적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모세를 존경하며 율법을 철저히 지킨다고 말했지만 모세가 나와 같은 선지자라고 예언했던(신18;15)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죽였고 또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도들까지 핍박하는 죄를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넷째, 성전을 주신 하나님(44-50)
  스데반은 이제 주제를 바꾸어 성전의 역사에 대해 변증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과 함께 눈에 보이는 성전을 절대시하였습니다. 본래 성전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 광야생활 할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시하신 양식을 따라 만든 증거의 장막에서 시작됩니다. 이 증거의 장막은 조립이동식으로 그 자체는 보잘 것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증거의 장막을 주신 진짜 이유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백성들과 함께 하심을 나타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후 다윗이 이동식이 아닌 성전을 짓고자 소원하였지만 하나님은 이를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 아들 솔로몬 때 성전을 짓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성전은 아무리 웅장하고 멋있게 지어도 사람의 손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지으신 분으로 눈에 보이는 성전에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무소부재하신 분이요 온 우주에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메소포다미아에서 아브라함에게도 나타나셨고 애굽에서  감옥 생활 하던 요셉과도 함께 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날 때에도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성전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친히 성전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참 성전은 눈에 보이는 건물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또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주인으로 삼고 다스림 받는 성령 충만한 모든 신자가 성전이 됩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성전의 참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형식적인 성전예배와 성전 제사를 마치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숭배했습니다. 그러나 성전 예배와 제사는 갈수록 형식적이고 외식적으로 변해 나중엔 성전이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는 장사하는 집이 되었습니다. 오히려 이 땅에 임마누엘하신 하나님, 성전의 본질되신 예수님께서 성전을 모독한다고 죄를 덮어씌우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51절을 보십시오. 조상들의 지내간 역사를 돌아보며 현재 자신들의 참모습을 깨닫도록 한 스데반은 이제 직접적으로 그들의 죄를 책망합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리는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교만하여 하나님의 주신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구원자를 예언했던 선지자들을 죽인 것처럼 이제 유대인들은 성령을 거스르며 인류의 구원자 되신 예수님까지 죽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53) 하나님의 주신 말씀을 경외심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자기가 좋아하는 말씀만을 받아들이며 심지어 자기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며 하나님의 뜻에 거슬렸습니다. 성경공부를 하더라도 말씀을 듣고도 지키지 않는 이는 모래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같습니다. 겉으로는 견고하고 웅장해보여도 인생의 위기의 때 한순간에 무너집니다. 말씀을 듣고 지키지 않을 때 그 말씀이 그 사람의 심판의 기준이 됩니다.
  5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심령을 담은 스데반의 메시지와 책망을 들은 유대인들은 마음이 찔렀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초대교회신자들은 베드로의 메시지를 듣고 마음에 찔려 ‘어찌할꼬’ 가슴을 치며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하지만 현재 이들은 완악하게 성령의 역사를 부인하고 받아드리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거부할 때 자연스럽게 사단이 더 강하게 역사하게 됩니다. 사단의 종이 되어 완악하게 성령을 대적하게 됩니다. 누구나 죄를 지을 수 있고 누구나 넘어질 수 있지만 의도적으로 또 적극적으로 성령을 거스르면 돌이킬 수 없게 됩니다. 그들은 스데반을 향한 분노로 이를 갈았습니다. 예수님을 죽였던 실체를 알 수 없는 분노가 내면의 깊은 어둠속에서 끓어오르며 다시 스데반에게 향했습니다. 이때 스데반은 무엇을 보고 있었습니까? 55, 56절을 보십시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스데반은 분노로 일그러진 그들의 얼굴을 보지 않았습니다. 이제 곧 죽을 수도 있는 자신을 보지 않았습니다.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으로 피를 토하듯이 메시지를 쏟아낸 그는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그때 하늘이 열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영광의 하나님우편에 서서 자신을 주목하고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전 인생과 생명을 바쳐 믿고 증거 했던 복음이 사실이라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았습니다. 진실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위해 보내신 구원자로, 약속대로 십자가의 죽음을 이기고 부활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 받은 자신도 죽음의 문을 넘어 예수님처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그때 유대인들은 스데반의 음성을 듣지 않기 위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었습니다. 그리고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쳤습니다. 그들은 격분하여 공회의 판결도 기다리지 않고 살인마들처럼 변해버렸습니다. 그들이 수없이 던지는 돌에 맞아 피투성이가 된 스데반은 마지막으로 부르짖었습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59,60) 스데반의 기도는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님의 기도와 닮았습니다. 스데반이 일생동안 좇으며 닮기를 간절히 바랬던 바로 그 예수님을 닮은 것입니다. 스데반은 성령 충만한 가운데 내면에 예수님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스데반은 이미 미움과 원망을 넘어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충만했습니다. 사랑을 받은 적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스데반은 예수님께 받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무리들을 위해 자기목숨을 희생했습니다. 무리들이 던진 돌더미 밑에서 스데반은 천사의 얼굴을 하며 깊이 잠들었습니다.
  스데반은 예수님처럼 짧은 생애를 마쳤습니다. 스데반의 순교 후 그리스도인에 대한 핍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초대교회성도들은 핍박을 피해 이방 세계로 흩어지게 됐습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피는 생명의 씨앗이 되어 성도들의 가슴속에서 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방 세계로 흩어진 초대교회 성도들은 핍박 속에서도 스데반을 생각하며 생명을 바쳐 복음을 전했고 복음이 이방 세계로 확산하게 됐습니다. 특히 스데반의 죽음은 복음역사가 유대인의 사도 베드로에서부터 이방인의 사도 바울로 전환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58절을 보십시오. 스데반에게 돌을 던진 이중 사울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스데반에게 돌을 던지며 그의 죽음을 마땅히 여겼지만 스데반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한 말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스데반의 순교의 피는 아벨의 피와 같이 핍박자 사울의 가슴속에서 부르짖었습니다. 결국 스데반의 순교는 완악한 죄인 사울이 거듭나 이방인의 사도가 되는 큰 계기가 되었습니다.
  죽음은 그 사람의 인생의 결산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는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사는가에 달렸습니다. 진지하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진지하게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짧은 생애동안 항상 죽음을 준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신자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천성으로 들어가는 문이 되었습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위해 죽는 것은 인생의 가장 영광스럽고 거룩한 죽음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을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히는 일도 없습니다. 오히려 국회의원들이 표를 얻기 위해 앞 다투어 교회에 나오며 신자들을 위한 공약을 쏟아냅니다. 하지만 이런 시대 속에서 우리는 영적으로 풀려서 사단의 유혹에 넘어지기 쉽습니다. 지금은 스데반 시대와 같이 비난과 핍박의 돌맹이가 아니라 안일과 쾌락주의 물질주의의 솜사탕이 우리를 병들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시대에서 살아남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는 스데반처럼 평소 말씀과 기도로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으로 충만해 있습니까? 순교는 평소에 순교자적인 삶을 사는 이들이 할 수 있습니다. 현재 내가 순교자적인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순교자적인 삶이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기 위해 죄악된 자신의 본성과 피 흘리기까지 싸우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밤이 맟도록 철야기도하거나, 새벽잠을 부인하고 새벽기도에 나오는 것이 순교자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양들에게 돌 맞을 각오를 하고 캠퍼스에 올라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순교자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또 직장에서 믿음의 순결과 중심을 지키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것이 순교자적인 삶입니다. 하나님영광을 위해 죽도록 학과공부를 감당하는 것 또한 순교정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슨 일이든지 죽기를 각오하고 하면 못할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스데반처럼 말씀과 기도로 성령 충만함으로 우리인생을 통해 예수님을 증거하는 순교자들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큰 부담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26년 전 생사의 갈림길에 섰던 교통사고에서 구원받고 새 생명을 얻어 새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구원받은 후 출애굽기 말씀공부를 하면서 모세와 같은 영적지도자로 하나님영광을 위해 살겠다고 마음먹었지만 힘든 인생광야생활가운데 어느새 모세와 하나님을 불신하고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 같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간신히 졸업했지만 가나안 땅 같은 직장생활 중에도 끊임없이 물질과 쾌락의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께 택함 받은 인생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선 죄인에 대한 소망을 끊지 않고 약속의 말씀가운데 저를 한 걸음씩 인도하셨습니다. 부족한 중에서도 꾸준히 받은 말씀가운데 살아 역사하셔서 가정의 목자요 캠퍼스의 목자로 살도록 도와주셨습니다. 하지만 현재 내가 예수님을 위해 죽을 수 있는가 묻는다면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동안 유대인들처럼 UBF라는 성전 안에서 매주 말씀공부하며 성실히 살아왔다는 자기의가 있습니다. 하지만 막상 말씀에 대한 지식은 늘어나지만 말씀에 제대로 순종하지 않았고 또 모임 내에서도 하나님 앞에서가 아닌 사람들 앞에서 외식하며 습관대로 신앙생활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제가 매일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경외함으로 붙들고 순종함으로 성령 충만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말씀과 기도생활가운데 예수님을 따르며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가운데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좁은 길로 나아갈 수 있길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희생으로 새 생명을 얻게 됐습니다. 우리가 한 번뿐인 인생, 예수님께로부터 새로 받은 새 생명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는 순교자적인 인생을 살 수 있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스데반처럼 말씀과 기도 가운데 성령 충만하며 예수님을 닮고자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십자가를 지며 예수님을 따르는 인생살 수 있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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