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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4-12-21 (일) 14:22
분 류 누가복음
첨부#1 2014_성탄3강-1(최베드로).hwp (27KB) (Down: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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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성탄 제3강]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

2014년 성탄 제3강                                                                           최베드로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

말씀 / 누가복음 2:1-20
요절 / 누가복음 2: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Merry Christmas! 구주 탄생을 찬양합니다! 오늘 이렇게 한자리에 모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요! 예수님이 아니면 이렇게 모일 수 있겠습니까! 생각해보면 예수님 때문에 우리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지금쯤 우리는 어디에 서 있을까요? 예수님 때문에 죄악의 길로 달려가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 목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요회를 이루고 팀을 이루고 이렇게 연합하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도 이렇게 찬양하겠지요! 우리의 구주로 오신 예수님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고 평화를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가이사 아구스도가 천하로 다 호적하라 명령을 내렸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는 시저의 양아들로서 시저 사후 삼두정치의 권력다툼을 종식시키고 정치적 안정을 가져온 인물입니다. 그는 전쟁을 지양하고 내치에 힘을 썼습니다. 도로를 정비하고 국경선을 분명히 함으로써 ‘팍스 로마나, 로마의 평화’를 실현했습니다. 그는 원로원으로부터 ‘신이 보낸 구원자, 전 인류의 평화를 가져온 인물’ ‘존엄자-아구스도’라는 칭호를 받습니다. 그는 로마를 합리적으로 다스리고자 호적명령을 내립니다. 황제의 명령 한마디에 모든 사람들이 호적하러 고향으로 돌아갑니다.(2,3)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 고로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갔습니다.(4) 그때 정혼한 마리아가 요셉과 함께 호적하러 올라갔는데, 마리아는 이미 잉태되었습니다.(5) 황제는 명령 하나로 시골 촌구석에 묻혀 사는 사람, 임산부까지 움직이게 하는 힘을 가졌습니다. ‘세상의 역사는 누가 움직이는가?’ 가이사처럼 권력과 부를 가진 자들이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이사의 말, 가이사의 명령에 민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누가의 눈은 가이사 아구스도의 역사를 가볍게 지나쳐서 베들레헴으로 향합니다. 6,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 때에 해산할 기한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여 구유에 뉘였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유대지방 여관은 1층에 말을 묶어 parking하고 2층에서 머무는 구조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2층에 자리를 얻지 못했습니다. 호적특수로 인해 터무니없는 전세대란이 몰아친 것일까요? 요셉이 아무리 통사정을 해도 2층 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치솟은 방세를 따라가기에는 요셉과 마리아, 너무 가난했습니다. 결국 1층 주차장 한 구석에 자리를 펴고 거기에서 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였습니다.(7) ‘구유’란 가축의 먹이통을 말합니다. 우리중 가축의 먹이통에서 태어나신 분이 있습니까? 어찌 이리도 가슴아픈 이야기가 있을까요? 도대체 요셉은 그동안 무엇을 했길래 방하나 잡을 능력도 없는 것일까요! ‘사관에 있을 곳이 없다!’ 이는 요셉의 무능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시대의 빛과 어둠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겉으로는 ‘팍스 로마나’ 빛나는 시대였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같은 탁월한 정치가, 잘 정비된 제도와 시스템, 최강의 군대를 가졌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날이 갈수록 메마르고 팍팍했습니다. 경쟁은 치열해지고 양극화는 심해지고 청년들은 아무리 스펙을 쌓아도 ‘미생’으로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나라는 점점 발전하는데 사람은 점점 위축되었습니다. ‘아프니까 청춘’이 아니라 ‘아프니까 서러운’ 세상이었습니다. ‘떡집’이라는 별명으로 인심 좋은 마을이라 소문났던 베들레헴도 그러했습니다. ‘그리스도가 태어나리라’는 약속을 받은 선민들이 돈 욕심에 사로잡혀 임산부 한 사람 배려할만한 여유가 없을 정도로 각박해졌습니다. 아무리 권력이 센 가이사 아구스도라도 인간의 내면까지 바꾸어줄 수 없었습니다. 로마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든 사람들이 욕심과 이기심의 죄 아래 있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주의 사자가 이들을 심방하여 그들 곁에 서서 주의 영광의 빛을 그들에게 비추었습니다.(9)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할 사람들로서 목자들을 찾은 것입니다. 왜 예루살렘 성전의 빛나는 제사장들을 찾지 아니하고 천민계층에 속하는 목자들을 찾았을까요? 8절을 보면 목자들은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고 있다고 했습니다. 실은 ‘자기 양떼’가 아닙니다. 이들은 마을 사람들의 양떼를 대신 맡아 지키는 ‘알바’들이었습니다. 당연히 자기 양 떼가 아닌 ‘사장님 양떼’였습니다. 그런데도 자기 양처럼 지켰습니다. 삯군이 아니라 진짜 목자였습니다. 보통 힘든 현실에 빠지면 자기 처지를 원망하며 말 못하는 양들에게 화풀이하기 쉽습니다. 텐트에 들어가서 퍼질러 자거나 인터넷 검색으로 시간을 죽이며 수당만 챙기면 된다는 식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들은 밤에 잠을 자지 않고 자기 양떼처럼 지켰습니다. 그들의 겉모습은 비천했으나 그들의 속사람은 진실하고 깨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보나 안보나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맡은 바 사명에 충성하며 순종했습니다.
그리스도를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탄생하실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그리스도가 어디서 태어나겠습니까?’라는 질문에 정답을 제시했습니다. 성경박사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베들레헴의 ‘베들’ 근처에도 가지 않았습니다. 소식을 몰라서 못가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구주 탄생의 소식을 들어도 전혀 반응하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그리스도의 탄생과 나와 무슨 상관인가? 그리스도 나셨다고 해서 경제가 좋아지냐? 인생문제가 해결되냐!’ 그러나 본문의 목자들은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셔서 칠흑같이 캄캄한 이스라엘의 어둠을 걷어주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셔서 장래 염려와 정욕에 붙들린 청년들을 변화시켜 새사람되게 하실 것을 소망했습니다. 욕심과 위선의 굴레에 갇힌 지도자들을 회개시켜서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해주실 소망을 붙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어둠과 사망의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죄사함과 생명의 빛을 비추어주시기를 소망했습니다. ‘곧 오소서 임마누엘! 오 구하소서 이스라엘! 그 포로생활 고달파 메시야 기다립니다!’ 하나님은 기다리는 자들에게 구주 탄생의 소식을 주십니다.

천사는 그들에게 놀라운 소식을 전합니다. 10절을 천사의 스피릿으로 읽어보겠습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천사가 되어 옆사람에게 전해봅시다. “무서워하지 마세요. 제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당신에게 전합니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 얼마나 간절히 바라는 소식입니까!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위해 기쁨이 필요합니다. 한 해가 저무는 연말이면 더더욱 기쁨이 필요합니다. 기쁨이 없으면 우울증에 빠집니다. 기쁨을 얻기 위해 연극, 영화, 공연을 보러 가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경희대 평화의 전당은 며칠 걸러 콘서트를 열어 많은 사람들을 모읍니다. 음악으로 안 되는 사람은 사람을 만나고 맛있는 것을 찾아다닙니다. 술을 마시고 연애를 함으로 기쁨을 얻고자 합니다. 잠시의 기쁨입니다. 때로는 더 큰 공허함에 빠지거나 쓰린 속과 아픈 상처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때때로 누구네 딸이 좋은 대학에 합격했다라는 기쁜 소식이 날라 올 때가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말하지요 ‘누구네 집은 참 좋겠다’ 엄마와 아들이 말합니다. ‘누구네 집은 참 좋겠다?’ ‘그래서 어쩌라구!’ 누구네 센타에 결혼 역사가 있고 양들이 몰려온다는 기쁜 소식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말합니다. ‘누구네 센타는 참 좋겠다’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어디에 있을까요? 1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구주가 나셨다!’는 소식이야말로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암환자에게 가장 기쁜 소식이 무엇입니까! ‘이제 더 이상 암을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완치 판정의 소식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와 죽음의 불치병에 걸려있습니다. 죄로 인해 교만하고 시기하며 절망하고 열등감과 분노에 빠지고 음란과 미혹에 빠져듭니다. 풍족한 환경이 풍성한 인생을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잖아요! ‘땅콩리턴’사건이나 대통령 주변 인물들의 권력다툼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있으면 있는 대로 교만과 탐욕에 빠집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비교하고 시기하며 원망합니다. 끊임없이 공격하고 자기유익을 구하며 아름답게 살고 싶어 하면서도 더럽고 추한 정욕에 빠집니다. 감사보다 불평이, 사랑보다 미움이 더 앞서 나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준비하지 않은 날에 죽음을 맞이합니다. 죽음은 멀리 있는 것 같으나 인간의 삶 주위를 떠돌고 있다가 어느 순간 찾아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히9:27)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 죽음은 절망과 공포입니다. 죄와 죽음의 불치병으로부터 구원받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모든 사람을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해줄 구원자가 왔다면, 그것은 온 백성에게 미치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로마황제를 ‘구원자’로 불렀습니다. 황제와 가까울수록 풍요와 안정을 누리고 황제와 멀어질수록 배고픔과 상처를 받기 때문입니다. 물론 황제는 세상의 겉모습을 바꾸어줄 수 있습니다. 초가집에 살던 사람을 아파트에 살게 하고 라면을 먹던 사람에게 파스타를 먹여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초가집에 살아도 탐욕스럽고 아파트에 살아도 탐욕스럽습니다. 누더기를 걸치든지 최고급 명품 브랜드를 걸치든지 정욕과 시기심에 사로잡힙니다. 황제는 세상의 배경을 바꿀 수는 있으나 사람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빵을 먹여줄 수 있으나 영혼을 살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만이 죄와 죽음에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3:16절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그리스도만이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해줄 수 있고 영원한 심판으로부터 구원해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범죄한 그 순간부터 구원자를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 인간은 아담의 타락이후 끊임없이 반역의 길을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을 열 가지 기적으로 출애굽을 시키고 홍해를 건너게 하였으나 저들은 광야에서 죄를 지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축복을 받았으나  정욕과 욕심을 좇아 우상숭배의 길로 가버렸습니다. 훈련을 받으면 훈련을 받은 대로 원망하고 축복을 받으면 축복에 빠져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은 끊임없이 선지자들을 보내어 그리스도를 보내어주실 것을 약속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을 때에도 그러하셨습니다. 인간은 불성실했으나 하나님은 미쁘셨습니다. 때가 되자 하나님은 약속대로 다윗의 동네에 구주를 보내셨습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11) 누가는 ‘오늘’이라고 했습니다. 구원은 그리스도 주님을 영접하는 오늘 - 바로 지금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리스도 예수님을 영접하는 구원은 오래전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오늘까지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님을 영접했기 때문에 오늘 새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면 우리는 조상의 망령된 행실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며 여전히 정욕과 교만과 운명과 비교의식을 좇아 살다가 결국 심판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고 있습니다. 술에 취해 살던 사람이 오늘 성령에 취한 사람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세상 욕심을 좇아 살았던 사람이 오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목자로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일 때 오늘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동네에 구주로 나신 소식이야말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오늘 구주로 나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우리의 삶은 날마다 달라질 것이며 슬픔 많은 세상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구주로 나신 예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라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1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보통 중요하고 큰 일을 하는 사람일수록 그 표시 또한 크고 화려합니다. 비싸고 좋은 차가 주자창에 서 있으면 ‘귀한 분이 왔는가보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빌 게이츠는 지하철 반 칸 정도의 큰 차, 방탄유리로 된 차를 타고 다닌다고 합니다. 큰 일군, 큰 사발입니다. 그런데 온 세상의 구주로 나셨다는 아기는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여 있습니다. 너무 unbalance합니다. 가장 힘없고 가장 운명적인 모습으로 태어난 아기가 어떻게 온 세상 만민의 구주가 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천사는 그것을 표적이라 했습니다. ‘표적’이란 메시지를 담은 기적입니다. ‘강보에 쌓여 구유에 누여있는 아기’, 이것이 그리스도임을 증거하는 기적입니다. 희생의 기적입니다. 하나님 사랑의 기적입니다. 겸손의 기적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이 무엇입니까? 공부하는 것입니까? 자기를 비우고 낮추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이 무엇입니까? 만수르처럼 돈을 많이 버는 것입니까? 다른 사람을 높이기 위해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교황이 한국을 방문하여 기아차 소울을 타고 다니자, 많은 사람들이 열광했었습니다. 세계적인 리더가 어떻게 ‘기아차 소울’ 따위를 타고 다닐 수 있을까! 작은 겸손인데도 크게 감동했습니다. 생명구원역사는 자기 비움과 희생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부와 권력으로 죄인들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낮아짐과 희생으로 죄인들을 구원합니다. 시카고의 안요셉 선교사는 대학생시절에 Mother 사라 배리 선교사의 초대를 받고 놀랐다고 했습니다. 본인은 영어공부 욕심 때문에 갔는데, 달동네에서 연탄불을 갈고 김치를 먹으며 커피를 대접하는 모습을 보며 큰 충격을 먹었다고 했습니다. 미시시피의 예쁜 공주가 달동네에서 김치 먹고 연탄불 갈며 후진국 대학생들을 섬기며 자기 인생을 소모하는 거기에서 큰 희망을 보았습니다. 그때 안요셉 선교사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경성센타 복음역사도 그러하지 않습니까! 서제임스 목자님 가정이 교수의 권위를 내세우지 아니하고 돈과 명예를 좇지 아니하고 양들을 살리기 위해 전심전력하였을 때, 성령께서 축복하신 역사입니다. 거기에서 감동을 받고 목자들이 나오고 선교사들이 나왔습니다. 누군가 낮아지고 희생하고 섬기는 거기에서 구원과 변화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낮아짐과 희생이 크면 클수록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더 힘 있고 더 강하게 일어납니다.
그런데 세상의 어떤 희생과 겸손이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이보다 크고 놀라운 희생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보다 위대한 겸손, 이보다 위대한 섬김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강보에 싸여 구유에 태어난 것은 완전한 희생, 완전한 섬김의 표적입니다. 어떤  위대한 성인이나 탁월한 천재들도 구유에 나신 예수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태어날 때에만 낮아지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일생 병자들을 섬기고 죄인들을 섬기고 제자들을 섬기셨습니다.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어주셨습니다. 사람들은 구유에 오신 예수님의 위대함을 몰랐습니다. 오히려 외면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매달리셨을 때, 사람들은 무능력하다고 비난했습니다.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세상은 자기 비움과 희생을 전혀 아름답게 봐주지 않았습니다. 그럴지라도 예수님은 끝내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처음부터 끝까지, 죽기까지 낮아지고 섬기는 길을 가셨습니다. 구유에 누인 아기에게서 하나님의 겸손과 사랑을 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희생을 봅니다. 대속의 비밀을 봅니다. 구유에 누인 아기에게서 표적을 보는 사람은 모든 불평과 원망, 교만과 운명에서 벗어납니다. 불평과 쓴 뿌리의 독에서 해방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어떤 형편에서든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13)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세상을 이기는 자들로 살게 됩니다. 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구유에 오심으로 구원의 표적이 되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구원의 표적으로 보는 자에게 어떤 축복이 임합니까? 1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고자 애를 쓰다가 갈등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손해의식이나 분노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부모로서, 목자로서, 동역자로서 어디까지 섬겨야 하는가?’ 그때 믿음의 여정을 멈추고 주저앉아 머뭇거리며 고민하게 됩니다. ‘어디까지 자기를 비우고 희생해야 하는가?’ 그때 높은 곳을 향하던 눈을 내려 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면 마음에 평화가 임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수 있는 용기가 생깁니다. 오래전 학생 시절에 센타를 짓기 위해 ‘쵸코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에게는 성탄절이 제일 부담스러웠습니다. 쵸코바이트를 하러 나갈 때면 ‘도대체 언제까지 이것을 해야 하는가?’ 무거운 발걸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리 깨지고 저리 깨지면서 예수님을 붙들었을 때, 돌아오는 저의 입에서는 찬송이 나오고 다시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복음역사를 위해 고난받는 자신이 자랑스럽고 지친 몸에 알 수 없는 평강이 임했습니다. 이제는 옛날처럼 건축을 위해 가슴 졸일 이유도 없고 작지만 엘리베이터가 있는 센타까지 생겼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그때 그 시절보다 훨씬 스피릿을 잃고 평강을 빼앗기는 모습을 봅니다. 참된 평안은 상황이나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구유에 오신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는 거기에 있음을 다시금 배웁니다. 돈이나 건물에 평화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구유에 오신 아기 예수님을 따라가는 거기에 있음을 배웁니다. 저와 우리 모임이 예수님을 따라 구유의 표적을 가진 사람, 구유의 표적을 붙드는 모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목자들은 구유에 나신 아기 예수님을 보고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천사의 메시지를 영접하며 놀랐고 있는 그대로 전했습니다.(16-19) 20절을 보십시오. 목자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찬송하며 돌아갔습니다. 구유에 오신 아기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이 예수님과 함께 남은 한해를 잘 마무리하고 새 해를 새 출발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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