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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3-05-12 (일) 12:19
분 류 창세기
첨부#1 2013창세기8강(오정훈)-1.hwp (56KB) (Down: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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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창세기 제8강] 바벨탑

2013년 창세기 제8강                                                  오정훈

바벨탑

말씀/ 창 9:18-11:26
요절/ 창 11: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현재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어떤 건물인지 아시나요? 제가 어렸을 때만해도 영화 킹콩에 나오는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었습니다. 그러나 세기가 바뀌고 이제는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은 높은 축에도 끼지 못하는 그저 그렇고 그런 빌딩이 되어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요즘 높이 경쟁을 하면서 무려 500m가 넘는 빌딩이 많이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중 두바이에 있는 버즈 칼리파는 영화 미션 임파서블에서 주인공 톰 크루즈가 기어오르던 건물로 유명한데 그 높이가 자그마치 828m나 됩니다. 왜 사람들은 이렇게 높은 빌딩을 지으려고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높이 올라가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 이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인간의 교만한 본성 때문입니다. 그런 인간의 욕망과 교만을 상징하는 것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벨탑입니다. 바벨탑은 하나님을 대적하여 하나님 없는 세상을 만들고자 한 인간의 교만과 불순종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도 사람들은 바벨탑을 쌓아 자신들의 이름을 드러내고 하나님 없는 세상을 만들고자 애를 쓰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 가운데 믿음의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바벨탑을 쌓는 세상 가운데 하나님이 이루시는 소망의 역사가 무엇인지 배우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믿음의 탑, 영적인 탑을 쌓는 종들로 쓰임 받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 벌거벗은 노아(9:18-29)
  하나님은 의인 노아를 통해 새로운 인류역사를 시작하고 계셨는데 여전히 인간의 죄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20,21절을 보십시오.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였습니다(6:9). 그런 노아가 포도주에 취하여 벌거벗고 술주정을 했다니 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당시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그래서 그동안 못해본 것을 해보고 싶은 욕망이 노아에게 생겼는지 모릅니다. 이유야 어쨌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노아에게 영적 긴장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사라져 친구들은 다 죽고 자기만 살아남았을 때 얼마나 많은 충격을 받았을까요? 큰 일을 치루고 허탈할 때, 그리고 작은 성취의 기쁨을 맛보았을 때, 마음이 풀어지고 죄의 낙을 즐겨보고 싶어지게 됩니다. 보편적인 사람들의 마음이 그러합니다. ‘벌거벗었다’ 그가 열이 많은 체질이라서 그런 것일까요? 이는 주체할 수 없는 성적 욕망에 취해 있는 것을 상징합니다. 술취함과 정욕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노아 안에 방탕과 정욕의 욕망이 살아 있어 노아를 취하게 한 것입니다. 술을 마시면 이성을 잃습니다. 술이 웬수입니다. 술과 여자 때문에 망한 자들이 역사적으로 볼 때 한 둘이 아닙니다. 노아도 깨어있을 때 노아이지, 술에 취하면 의인이고 뭐고 없게 됩니다. 성령에 취하지 않은 인간이 다 이렇습니다. 챨스 스펄전은 “만약에 하나님이 5분만 손을 놓고 계신다면 우리 몸은 죄를 만들어내는 공장이 될 것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런 인간의 죄악된 본성을 알고 여러 곳에서 경고하였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경고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술과 세상 정욕에 취할 것이 아니라 성령에 취해야 합니다.
  22,23절에는 이런 아비의 모습을 본 노아의 세 아들들의 반응이 나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가나안의 아비 함은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알렸습니다. 여기서 ‘보았다’는 것은 히브리어에 ‘라아’로서, ‘보고 즐겼다’ 그런 의미입니다. 함은 아버지의 수치를 감상하며 은근히 즐겼습니다. ‘알렸다’는 단어는 ‘나가드’로서 ‘폭로하다’, ‘떠벌리다’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함은 아버지 노아의 허물을 가슴 아파하기보다 흉보는 것을 즐겼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노망나셨구만, 저래 가지고 어떻게 아버지 대접을 받겠어.” 비아냥거렸습니다. 반면 셈과 야벳은 어떠하였습니까? 23절입니다. 그들은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그 아비의 하체를 덮고 그 얼굴을 돌이켜 그 하체를 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아비 노아의 허물을 알았지만 이를 감당해주고 덮어주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들어가지 않고 뒷걸음쳐 들어갔습니다. 남의 허물 특히 아버지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아버지에 대한 기대가 있었을 것이고 그런 기대가 역으로 더 큰 배신감, 분노로 바뀔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비의 허물을 자신의 허물을 생각하고 어찌하든지 덮어주고자 하였습니다. 똑같이 사람의 허물을 발견해도 그것을 대하는 자세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죄인인줄 모르는 사람은 남의 허물을 아주 즐거운 듯이 폭로하고 알리고 또 인터넷에 올리기까지 합니다. “사람들은 알 권리가 있고 나는 알릴 의무가 있다” 하면서 사명감을 가지고 폭로하고자 합니다. 반면에 자신이 죄인인줄 아는 사람은 그 사람 입장에서 그를 깊이 이해하고 동정하고 허물을 감당해 주고자 애를 씁니다. 잠언 17:9절은 말씀하십니다.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24,25절을 보십시오.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이 말씀은 어떻게 보면 모세오경이 쓰여졌을 당시 현재 가나안의 모습에 대한 하나님의 해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래전 조상 함에 대해 노아가 그의 후손들에게 저주하였는데, 그 열매가 오늘날 현재 가나안의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한 사람의 삶의 영향은 당대로 끝나지 않습니다. 시간을 통해, 역사를 통해 영향력을 미칩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 야곱에게 축복을 말씀하실 때 항상 후손을 말씀하신 것도 그와 같습니다. 26,27절을 보십시오.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노아가 이렇게 그 아들 함을 저주 한 것은 함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도 아니요 숙취기운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함의 문제, 곧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성이 없는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고 지적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홍수에서 건짐 받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그들도 어려서부터 악한 죄인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단지 방주 안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셈과 야벳은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있었지만 함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의롭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결국 무서운 홍수사건을 겪고서도 함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새겨지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죄인의 모습을 드러낸 아버지에 대한 정죄로 나타났습니다. 누구의 허물을 감당하는 힘은 자기에게 임한 은혜를 헛되이 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함의 신앙은 후손들의 불신앙의 열매를 맺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 시대는 점점 영적긴장이 풀어져가고 해이해져가고 있는 시대입니다. 우리도 이런 시대에 영적으로 풀어져 노아와 같이 부끄러운 일을 행하지 않고 기도와 말씀으로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므로 감당하여 주므로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은혜를 감당하는 삶을 살 수 있길 기도합니다.  

2. 흩으시는 하나님(10:1-11:26)
  10장에는 노아의 아들들의 족보가 나옵니다. 이 족보 중에 특별한 한 사람이 나오는데 그는 함의 손자 니므롯입니다. 니므롯이란 ‘반역자’란 뜻으로 그가 하나님께 대항한 첫 반역의 주도자임을 나타냅니다. 성경은 이런 그를 첫 용사요,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여호와 앞에서’란 ‘여호와께 대들었다(파님)’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용감한 사냥꾼이란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않고 대담하게 사람을 사냥하는 인간사냥꾼임을 나타냅니다. 고고학적 발굴 자료에 의하면 니므롯은 거의 신으로 추대를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바벨론의 우상인 밀곰과 므로닥은 그의 이름을 차용하여 부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역사가들은 이런 그가 분명히 바벨탑을 쌓는데 관여하였을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조상의 망령된 행실이 그대로 유전되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11:1절을 보십시오.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영어유치원에 가거나 토익점수를 잘 받기 위해 토요일에 시험 보러 갈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냥 글을 쓰고 말만 하면 누구와도 다 통할 수 있었습니다. 소통이 자연스러웠습니다. 사람들은 동방 시날 평지에 정착하여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였습니다. 종이, 화약과 더불어 벽돌의 개발은 인류 역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거대한 건축물, 인간이 원하는 건축물을 만들 수 있는 기초가 놓이게 된 것입니다. 기술이 발달하자 이제 홍수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사람들은 이런 발달된 기술을 하나님을 대적하는데 사용하고자 하였습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하늘에 닿는 높은 탑을 쌓아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흩어짐을 면하고자 한 것은 하나님의 홍수 심판으로 흩어졌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셨지만 그것을 믿지 못하였기 때문에 불신앙가운데 자신들의 힘으로 살아남기 위해 자구책을 마련한 것입니다. 그들은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되는데도 회개하고 싶지 않고 망하고 싶지도 않아서 탑을 쌓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자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 대신 자기들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함이었습니다. 앞으로는 하나님에게 호락호락 당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자신들이 어떤 존재인지 보여주겠다는 인간의 교만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신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흩어져서 개척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는 삶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모여서 성을 쌓고 탑을 높이 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죄악된 행위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바벨탑 사건은 제 2의 선악과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믿음의 단을 쌓은 아브라함의 모습과 대조가 됩니다. 감사와 믿음의 단을 쌓는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만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바벨탑을 쌓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됩니다. 우리 가운데 이번에 메리츠 화재에 입사하게 된 진승민 형제님은 과거 사람들과 논쟁하면서 남의 콧대를 꺾어 자기를 드러내는 것을 인생의 기쁨으로 삼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성경공부를 하며 겸손해져서 이제는 새벽을 깨워 기도하고 말씀을 붙드는 믿음의 선한 투쟁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비우고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께서 은혜주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벨탑 대신 믿음의 단, 감사의 단을 쌓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탑을 쌓아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류의 죄악이 점점 커져갈 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5,6절을 보십시오.“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탑을 쌓는 것을 굉장히 심각한 문제로 보시고 직접 확인하시기 위해 내려오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에 도전하고 대적하는 것을 싫어하시고 엄히 다스리시며 철저히 깨뜨리십니다. 느부갓네살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거대한 신상을 만들었을 때 하나님은 뜨인 돌을 보내사 그 신상을 산산조각 내어 버리셨습니다. 이 땅에 강림하신 하나님은 그들이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을 것을 아셨습니다. 이는 인간의 창조적 능력이 하나님을 반역하는데 쓰이면 하나님도 막을 수 없으실 정도로 상황이 심각해짐을 나타냅니다. 이제 하나님은 물이 아닌 불로써 세상을 태워버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죄인들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지혜가 무엇입니까? 7-9절을 다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첫째로, 하나님은 먼저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사 소통이 단절되게 하셨습니다. 이제까지 말이 같아서 서로 쉽게 소통하며 힘을 합하여 탑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언어를 혼잡케 하시자 서로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소통이 되지 않아 더 이상 같이  일을 할 수 없게 되었고 탑 쌓는 것을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바벨이라 불렀는데 이는 서로 막 떠들면서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상태가 된 것을 가리킵니다. 오늘날 언어적 장벽으로 고생하는데, 같은 언어권 안에서도 소통단절이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부부가 서로 소통하지 못해 견디지 못하고 부모와 자녀가 소통이 안되어 괴로워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교회가 큰 건물을 짓고 외형적인 성장으로만 즐거워하며 자기 이름을 내는 것에만 몰두할 때, 안으로는 대화와 소통이 되지 않습니다. 큰 건물을 지어놓고 나서 내부적으로 다툼과 분열을 겪는 이유가 그러합니다. 큰 건물을 보면서 내가 했다는 생각을 하고 현재 이룬 역사에 대해서 내가 얼마나 수고하고 노력했는데, 그만큼 자기 이름이 나지 않는 것에 불만을 갖습니다. 현대문명의 함정도 그러합니다. 기술 문명이 발달하자, 역설적으로 서로 교류할 일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동네에서 울타리 사이로 다 보였고 그래서 무슨 음식을 만들고 있는지 냄새까지 알 수 있습니다. 이집에 잔치가 있나? 찾아와서 먹고 서로 교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파트가 생기면서 철저히 개인의 사생활이 보호되며 이웃의 도움을 받을 일도 별로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편리해지기는 했는데, 소통이 사라져 삭막하기 그지없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저희 센터도 제기동에 있을 때는 달랑 3층 홀 한 군데서 전부 지내야 했기 때문에 서로 오순도순 살았습니다. 갈데없는 형제들은 항상 탁구장에 모여서 제비새끼마냥 자기차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3층 홀에서 일곱 여덟 팀이 동시에 말씀공부를 하여 때로는 돛대기 시장 같고 다른 목자님의 말씀이 더 크게 들려와도 은혜가 있고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건물이 커지고 각자 방에 들어가 공부하게 되면서 누가 왔다 갔는지 안에서 뭘 먹는지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마나 유일한 소통의 창구인 방문의 유리창마저도 항상 종이로 가려져 있어서 누가 있는지 조차도 모르게 되었습니다. 이런 소통의 부재는 부족하고 모자라던 시절보다 더 인간의 내면을 황량하고 차갑게 만들어버리고 있습니다. 인간의 문명의 교만이 결국 소통부재를 초래하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자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하나 되게 하는 역사를 이루십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롯해서 120명의 초대교회 성도들이 모여서 오로지 기도하기에 힘을 썼습니다. 당시 거대한 로마제국의 아성에 비하면 이 120명의 작은 공동체는 너무나 미약했습니다. 더구나 이들은 대부분 사회적으로 지위가 낮은 하층민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심히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불처럼 임하여서 복음이 전 세계로 퍼져 나가는 폭발적인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바벨탑 사건 때는 하나님이 언어를 흩으셨는데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때는 오히려 언어가 하나로 통일되었습니다. 사도들이 갈릴리 사투리로 복음을 전했는데 전 세계에서 몰려온 유대인들이 자기 나라 말로 알아듣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자기 영광과 자기명예를 위해서 바벨탑을 쌓고자 하면 아무리 머리가 좋고 능력이 많아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기 때문에 흩어버리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을 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면 사람이 좀 부족해도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그들을 모인 곳에서 흩어버리셨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모여서 힘을 합치면 하나님을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흩어버리시니 초개처럼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옛사람의 말에도 ‘사람이 많으면 한 때 하늘을 이길 수 있지만 하늘의 뜻이 정해지면 사람을 무찌르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흩으심의 의미’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문화에서 빠져나가라는 뜻입니다. 바벨탑을 쌓으면 쌓을수록 인간은 파멸에서 돌이킬 수 없게 됩니다. 기술문명의 발달과 인간의 교만은 1차, 2차 대전과 같은 세계전쟁과 자본주의의 한계를 통해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과학기술의 바벨탑, 물질의 바벨탑, 자기영광의 바벨탑, 유토피아의 바벨탑을 쌓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무한경쟁시대에 나의 스펙을 열심히 쌓아서, 내 이름을 내고, 속히 안정되고, 안락한 삶을 구축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캠퍼스에 올라가서 힘들게 개척하고 도전하며, 양들 섬기기보다 편하고 안락한 스위트 홈을 꾸미고 그 안에서 아기자기하게 살고 싶습니다. 6b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세상적인 욕심이 한번 자리를 잡으면 막을 수가 없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듣지 않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치시고 흩으셔야 깨닫고 후회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이 마음에 바벨탑을 쌓고 있는지, 구원의 방주를 예비하고 있는지 다 아십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시련을 무릎 쓰고 열심히 방주를 짓는 사람은 결정적인 순간에 노아와 같이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그러나 자기 영광을 위해 바벨탑을 쌓는 자는 결정적인 순간에 무너지게 하십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위해 줄달음치고 있는지, 무슨 목적을 가지고 달려가고 있는지 진지하게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도 마음에 세속주의, 물질주의, 출세지향주의, 영웅주의의 바벨탑을 쌓고자 하는 어리석음을 회개하고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십자가 길을 따라 살아야 하겠습니다. 캠퍼스에서 전도하고 한 양과 일대일 하는 것은 정말 어렵지만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명의 길임을 믿고 묵묵히 이 길을 끝까지 갈 수 있길 기도합니다.  
  그러면 ‘바벨탑을 쌓는 세상을 돕는 하나님의 방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물로 심판해도 또 다시 대적하는 인간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다시 소망의 역사를 시작하고자 하셨습니다. 11:10-26절에는 셈의 족보가 나오는데 거기에는 눈에 띄는 한 사람 아브람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한 사람이 나오기까지 주목하고 계십니다. 셈에서 아브람으로 이어지는 역사는 니므롯에 의한 바벨탑을 쌓은 역사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집단을 이루고 세력을 형성하여 거대한 문명을 이루는 자들과 비교하면 한 사람을 택하는 것이 얼마나 힘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람 한 사람을 주목하시고 키우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강하고 능력 많은 사람보다 말씀에 순종할 수 있고 말씀을 따라 갈 수 있는 사람을 구원역사의 물줄기로 삼고자 하십니다. 한 사람의 믿음의 사람을 주목하시고 택하시는 것 이것이야말로 신의 한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이 광야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당시 세상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던 애굽이나 가나안을 부러운 눈초리로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벨탑을 쌓지 아니하고 흩어져 나온 자중에 아브람이 있었듯이, 애굽에서 노예로 성을 쌓던 자들 중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하여 광야로 왔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하신 것처럼 그들을 통해 새 역사를 이루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도 현대문명이라는 거대한 바벨탑 문화 속에서 건지셨습니다. 고독과 무의미와 인간갈등과 소통부재로 고통하던 우리를 건지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정말 위대한 새 역사의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거대한 현대문명만 바라보고 자신을 초라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크신 희망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아브람과 같이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을 따라 살며 믿음의 영향력을 끼치는 영적인 탑을 쌓는 위대한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저도 과거 자신만의 바벨탑을 쌓아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고자 몸부림치던 자였습니다. 우습지만 저는 소시적에 배운 무예를 통해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고자 피나는 투쟁을 하였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이소룡의 영화를 반복해서 보며 연구하고 또 연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아무나 될 수 없음을 곧 깨닫고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다음에는 우연히 보게 된 한 영화를 통해 금관악기에 매료되어 트럼펫을 배우게 되었는데 세상에 대가가 많은 것을 알고 꿈에 부풀게 되었습니다. 림사크 코르사코프의 ‘왕벌의 비행’을 연주하는 대가를 보며 열심히 연습하였지만 아무나 그렇게 될 수 없음을 알고 절망하였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자기만의 바벨탑을 쌓아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고 영광을 얻고자 하였지만 실제로 이룬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세상에서는 그저 그런 치과의사요 영적으로도 제자양성의 금자탑을 이룬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나마 최근에 제가 타고 다니는 중고차가 거의 20만km에 가까워 그거 하나 자랑할 만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보며 거대한 바벨탑을 쌓는 세상 가운데 부족한 저 한 사람을 주목하여 보시고 택하신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소망의 역사를 제가 믿음으로 섬겨야 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화려하고 웅장한 세상의 바벨탑에 마음을 빼앗겨 초라한 마음으로 지낸 것을 회개하고 하나님이 이루시는 한 사람을 택하시고 키우시는 소망의 역사를 믿음으로 섬겨나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오늘날은 거대한 문명의 바벨탑을 쌓고 그것을 통해 인간의 위대함을 드러내고자 하는 시대입니다. 그런 죄악된 시대 가운데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저희는 말씀에 순종하고 믿음의 영향력을 끼치는 믿음의 단을 쌓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이를 통해 한 사람을 택하고 키우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소망의 눈으로 바라보고 이를 섬기는 종들로 쓰임 받을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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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글 제 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553 요한복음 [2010년여름수양회제1강]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리스닝 2010-07-25 2974
552 히브리서 [2016년 히브리서 제13강]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님 관리자 2016-01-24 2973
551 마태복음 [2014년 마태복음 제25강]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관리자 2014-08-03 2973
550 요한복음 [2010년요한복음제18강]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리스닝 2010-07-04 2970
549 야고보서 [2012년 야고보서 제3강] 온전한 사람 관리자 2012-02-05 2966
548 히브리서 [2015년 히브리서 제6강] 영원한 대제사장 예수님 관리자 2015-11-01 2963
547 창세기 [2013년 창세기 제8강] 바벨탑 관리자 2013-05-12 2963
546 창세기 [2019년 창세기 제18강] 이삭의 축복을 받은 야곱 관리자 2019-07-14 2961
545 누가복음 [2017년 누가복음 제24강]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관리자 2017-07-16 2959
544 다니엘 [2015년 가을 준비 특강 제2강] 뜻을 정한 다니엘 관리자 2015-08-23 2953
543 이사야 [2014년 신년 제7강] 이방인을 예물로 받으시는 하나님 관리자 2014-02-23 2952
542 이사야 [2011년 이사야서 제12강]이방의 빛으로 삼아 관리자 2011-01-16 2950
541 창세기 [2013년 창세기 제9강] 너는 복이 될지라 관리자 2013-05-19 2947
540 히브리서 [2016년 히브리서 제11강] 세상을 이기는 믿음 관리자 2016-01-10 2938
539 히브리서 [2015년 히브리서 제10강] 믿음을 기뻐하시는 하나님 관리자 2015-12-27 2938
538 마태복음 [2015년 성탄 메시지] 내 백성의 목자가 되리라 관리자 2015-12-20 2930
537 이사야 [2014년 신년 제5강]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 1 관리자 2014-01-26 2926
536 마태복음 [2014년 마태복음 제20강] 마음을 깨끗하게 관리자 2014-06-22 2925
535 누가복음 [2011년 누가복음 제26강]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서삼문 2011-10-16 2923
534 이사야 [2011년 이사야서 제15강]이스라엘의 죄와 하나님의 구원(이사가.. 관리자 2011-02-06 2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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