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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3-02-10 (일) 12:22
분 류 로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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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로마서 제12강] 하나님의 주권과 긍휼

2013년 로마서 제 12 강                                                          최바울

하나님의 주권과 긍휼

말씀/ 로마서 9:1-33
요절/ 로마서 9: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사도 바울은 로마서의 전반부인 1-8장에서는 개인의 구원에 관한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후반부에서는 9-11장에서 선민 이스라엘의 구원 문제와 더 나아가 전 인류의 구원의 문제를 다루고, 12장부터는 신자의 윤리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살펴 볼 9장은 사도 바울이 동족 유대인들의 구원 문제로 고통하던 중에 깨달은 진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만민 구원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방법과, 긍휼을 기초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시간에 저희가 하나님의 주권과 긍휼을 믿고 영접하여 하나님의 만민 구원역사에 쓰임 받는 종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Ⅰ. 약속의 자녀(1-13)
  8장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고 이에 감격하여 승리의 찬가를 부르던 바울이 9:1,2절에서는 다시 비통에 잠겨 신음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무엇 때문에 이토록 큰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것입니까? 이는 개인적인 건강 문제나 불투명한 장래 문제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져 버린, 사랑하는 이스라엘 동족의 구원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바울은 정통 이스라엘 족속으로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습니다. 율법에 남다른 열심을 지닌 바리새인이었고, 유대교에 충성한 민족주의자였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는 데 앞장을 섰던 그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회심하였을 때 완전히 변하여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구원의 은혜를 받았고, 동시에 모든 이방세계를 복음화 하는 사도의 직분을 받았습니다.(롬1:5) 그는 이후로 이방세계를 복음화하기 위해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그를 민족의 배반자요 배교자로 취급했습니다. 심지어 바울 처단 결사대를 조직하여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고 하는 자들까지 생겨났습니다(행23:12). 이 때문에 바울은 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런 동족들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변함없이 사랑하여 구원받지 못한 그들로 인해 마음 아파했습니다. 그의 동족에 대한 목자의 심정은 그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그들이 구원을 받기를 원할 정도로 간절했습니다.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바울은 예수님을 쫓기 위해 세상과의 연줄을 끊었습니다. 열심히 복음역사를 섬기고 양들을 섬기다보니 세상친구들, 가말리에 문하 동기들과도 끊어지고 심지어 가족들과도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이제 그리스도 뿐인데 그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다는 것은 세상에서도, 하나님께도 버림받고 혼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단순히 관계성만 끊어지는 것이 아니고 이는 ‘저주’이기 때문에 심판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온 천하를 다 얻어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판국에 그의 영혼이 영원히 타오르는 불과 유황의 지옥에서 고통당해야 한다면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입니까?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양보할 수 있더라도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된 내 이름만큼은, 나의 영적 생명만큼은 결코 양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신이 혼자가 되더라도, 자신이 심판을 받더라도 동족의 구원을 간절히 원했습니다.그가 어떻게 이런 사랑의 마음을 품을 수 있었을까요? 인간적으로 이런 마음을 품기란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나한테 한 짓을 생각하면 미워하지 않는 것만 해도 성인군자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바울에게서 동족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보게 됩니다. 이는 오직 죄인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신 선한 목자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때만이 가능합니다.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선한 목자였습니다(마23:37, 눅19:41).
  그러면 바울이 구원을 위해 그토록 애태우는 유대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어떤 사람들이기에 바울이 자신의 생명을 걸고 그들의 구원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입니까? 4,5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짐승이 짐승처럼 산다고 해서 목자의 심정이 생기지는 않습니다. 사람이 짐승처럼 사는 것을 볼 때 목자의 심정이 생깁니다. 지성인이 지성인답게, 택한 백성이 택한 백성답게, 구원받은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답게 살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목자의 심정이 듭니다. 바울이 볼 때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축복과 특권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첫째로, 그들은 애굽의 노예로 살다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출4:22). 둘째로, 그들 앞에 하나님께서 친히 나타나셔서 하나님이 살아계심과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셨습니다.(출24:17, 40:34). 셋째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관계성을 맺는 언약을 주셨습니다(창17:2, 출19:4-6). 넷째로, 율법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율법을 통해 규모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연단을 받게 하셨습니다. 또한 죄를 죄로 깨닫게 하시고, 죄 사함을 받기 위해 가장 먼저 그리스도 앞에 나아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다섯째로, 예배드리게 하셨습니다. 예배를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 말씀을 들음으로 영혼을 새롭게 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다른 민족들이 헛된 우상을 숭배하며 인생을 허비하거나 멸망의 길을 가고 있을 때 이스라엘만큼은 참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하셨습니다. 여섯째로, 약속들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는 보배롭고 신령한 약속의 말씀들을 주셨습니다. 일곱째로, 믿음의 조상들을 주셨습니다. 후손들은 원하던 원치 않던 조상들의 본을 받기 마련입니다. 우리 2세들이 사춘기 시절에 많이 방황하다가도 결국 다시 그리스도의 품으로 돌아와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께 헌신하는 것은 부모님들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헌신의 본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위대한 믿음의 조상들이 다 이스라엘에서 나왔을 뿐 아니라 심지어 그리스도께서도 그들에게서 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런 축복을 주신 목적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이는 그들로 하여금 만민 구원역사를 섬기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복주시며 그들에게 세상 만백성을 품고 기도하는 목자요, 말씀을 가르치는 성경선생이요, 제사장 나라가 되라는 위대한 사명을 주셨습니다(출19:5,6). 그러나 그들은 이 사명을 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리스도를 배척함으로써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심판을 자초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영적인 현실을 볼 때 ‘이제 이스라엘은 영영 소망이 없는 것인가? 그동안 하나님께서 때마다 주신 약속의 말씀들은 폐하여 진 것인가?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을 버리신 것인가?’ 생각이 들고 그 때마다 바울은 큰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구약 성경에서 이에 대한 해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겉으로 볼 때는 이스라엘이 사명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배척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두신 뜻은 실패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폐하여진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창세기 말씀을 통해 참 이스라엘이 누구인지 알게 됨으로 하나님께서는 결코 실패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7,8절을 보십시오.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아브라함의 자녀 중 이스마엘과 이삭이 있었습니다. 전통적으로 하면 이스마엘이 맏아들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후사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마엘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약속의 자녀가 아니요, 아브라함이 인간적으로 후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종에게서 낳은 육신의 자녀였기 때문에 후사가 될 수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육신의 혈통으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요한복음 1:12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비록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은 이스라엘이 사명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배척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처럼 보일지라도, 약속을 기초로 구원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구원받은 약속의 자녀들을 참 이스라엘로 삼으시고 이들을 통해 구원역사를 이루어 나가십니다.
  이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주권적인 선택을 통해서 만민 구원역사를 이루어 나가십니다. 10-13절을 보십시오. 이는 하나님께서 이삭의 두 아들 중에서 장자인 에서를 택하지 않고 둘째 아들인 야곱을 택하신 데서 잘 나타납니다. 이삭과 리브가는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믿음의 결혼을 하였지만 오랫동안 자식이 없다가 마침내 리브가가 쌍둥이를 잉태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리브가에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곱과 에서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고 무슨 악이나 선을 행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절대주권으로 야곱을 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신 것입니까? 이는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행위에 따라 좌우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로 말미암아 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택하심이 조금이라도 인간의 행위에 따라 결정된다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악하고 연약하여 행위로 구원을 얻을 육체가 하나도 없기 때문에 구속역사 자체가 이루어 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야곱을 하나님의 절대주권으로 택하신 것은 그를 통해서라도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이루어 가시겠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와 구속역사는 생각지 않고, 이 사건을 기초로 구원받을 자와 버림받을 자가 미리 정해져 있다는 예정론으로 논쟁을 벌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해 만세 전에 예정하시고 주권적으로 미리 택하셨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 아닌가? 구원하기로 예정되어 있다면 우리의 전도나 선교는 필요 없는 것이 아닌가? 어서 한번 대답해 보라고 합니다.그러나 이는 교만한 인간들이 성경이 말하는 것 그이상의 것을 생각하는 데서 오는 혼란입니다. 영국의 신학자 제임스 던은 구원과 심판에 관한 교리에 있어서 인간은 그 어떤 것도 결정할 권리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구원받기로 예정된 야곱과 버림받기로 예정된 에서가 있다고 해서 누군가를 놓고 그가 야곱 같은 사람인지 혹 에서 같은 사람인지를 우리 인간이 결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왜 에서는 택하지 않으셨는가’가 아니고, ‘왜 절대주권으로 야곱을 택하시고, 또 나를 택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악된 인생들을 향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벧후3:9b). 문제는 하나님께서 이 구원역사에 쓰실만한 사람이 너무 적다는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의 은혜를 저버리고 사명을 저버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멸망 길로 가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사람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절대주권으로 나를 택하시고 부르신 것은 바로 복음을 듣지 못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익한 신학논쟁을 할 것이 아니라, 복음을 모르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가만히 앉아서 ‘에서가 왜 버림을 받았는가?’ 생각할 시간에 에서와 같이 버림받은 인생을 사는 지성인들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함으로 그들을 구원의 길로 돌이키는, 실제적인 수고를 감당하는 한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Ⅱ. 토기장이와 진흙(14-33)
  14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하나님께서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도 전에 야곱을 택하신 것을 볼 때 하나님이 불의하지 않는가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자격시험을 치루든지 하다못해 가위바위보라도 해야지 기회도 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택하신다면 에서에게는 너무 불공평하지 않는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을 선택하셔서 구원역사에 쓰시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왜 누구는 선택하시고 누구는 선택하지 않으십니까?’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 죄를 범하여 타락했기 때문에 선택받을 조건을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다 자격이 있는데 누구는 택하고 누구는 택하지 않았다면 하나님께 이의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 자격이 없는데 하나님이 몇 사람을 구제하셨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따질 일이 아니라 그 몇 사람이라도 구원해 주신 것에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마치 불이 난 건물에 소방관이 목숨을 걸고 뛰어 들어가 어떤 사람을 구출해 나왔다고 해서 소방관에게 왜 하필 그 사람만 구해줬냐고 원망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구원 받은 그 사람이 은혜를 받은 것뿐이지 그 사람조차 구출해주지 않았어도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는 마치 불이 난 건물에 갇혀서 죽어가던 그런 자들과 같았습니다. 아무리 발버둥을 치고 애를 써도 스스로는 그 불구덩이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그런 자들과 같았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10)”,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다(12)”,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23)” 죄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부패했고, 전적으로 타락해 있던 인간이 어떻게 택함을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까?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오직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택함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100% 하나님의 주권과 100%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를 영접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원하는 자, 달음박질 하는 자는 그래도 나에게 영적인 소원도 있고, 하나님께 대한 열심도 있어서 택함을 받고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16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이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중에 제 발로 말씀공부하겠다고 찾아온 사람 별로 없습니다. 혹시 좀 소원이 있어 제 발로 왔다고 해도 스스로 소감 쓰고 회개하고 결단하고 영적인 투쟁해서 이 자리에 계신 분, 제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우리는 죄를 회개하고 결단하고 하나님의 자녀요 사명인으로 살 생각이 전혀 조금도 없었습니다. 어떤 분은 축구에만 관심 있었지, 말씀에 대한 소원은 전무했던 분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도 성경공부 안하겠다고, 성경공부는 해주지만 수양회만큼은 안 간다고, 수양회는 가지만 소감은 안 쓰겠다고, 소감은 쓰지만 목자로는 안 살겠다고, 목자로는 살겠는데 믿음의 결혼만큼은 안하겠다고 버티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가 변화되어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캠퍼스 지성인들의 목자가 되고, 믿음의 가정을 이루고, 말씀도 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누구로 말미암아 된 것입니까? 이는 내가 원해서 된 것도 아니요 내가 열심히 달음박질해서 된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간절히 원하더라도, 아무리 달음박질하고 노력하더라도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을 베풀지 않으신다면 조그마한 변화의 역사도, 아무런 구원 역사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소원이나 기도나 노력이나 투쟁이 하나님으로하여금 긍휼히 여기게 하시는 꼬투리는 될 수 있지만, 그 자체로 구원을 이루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소원과 열심에 대해서 ‘의’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겸손히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할 수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택하시고 구원하여 주신 긍휼의 하나님을 감사, 찬양합니다.
  그럼 교만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는 어떻게 하십니까? 1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바로를 세우신 것은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시고 하나님의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교만하여 하나님을 대적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행하시는 수많은 이적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시고 그에게 여러 가지 재앙을 내리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절대주권자로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누군가를 완악하게 하시고, 그를 심판하신다면 하나님께 따지고 싶은 반발심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완악하게 하고자 하시는데 누가 그 뜻을 대적할 수 있겠는가? 반문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이에 바울은 토기장이와 진흙의 예를 들어 우리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따지고 대들 수 없음을 말합니다. 20,21절을 보십시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토기장이는 진흙으로 자기 원하는 대로 만들 권리가 있습니다. 그가 진흙을 반죽하여 예쁜 머그컵을 만들든, 고려청자를 만들든, 화장실 변기를 만들든 그것은 그의 주권이지 결코 지음 받은 물건이 따질 일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주로서의 절대주권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주권행사에 대해 결코 이의를 제기하고 따질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다행히도 하나님께서는 이 절대주권을 절대로 인간을 괴롭히고 멸하는 데 사용치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주권을 사용하시되 인류를, 나 한 사람을 구원코자 하시는 선한 방향으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절대적이면서 동시에 절대적으로 선합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십니다. 이는 혹시라도 회개하고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하고자 함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영광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는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실로 인애와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인간은 진흙과 달리 생각이 있고 감정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하면서 때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방법이 내 마음에 들지 않아서 하나님께 불만을 품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자기의 뜻에 맞추고자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이란 내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내 뜻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것입니다(고후10:5). 하나님의 주권을 기초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게 되면 자기중심적인 인본적인 신앙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이렇게 되면 자기 죄를 회개하기보다 툭하면 반발심이 생겨서 하나님께 따지고 대들게됩니다.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시면 웃으며 감사하지만, 하나님께서 쓰실만한 사람으로 빚고자 훈련을 주시면 불평하게 됩니다. 이런 자들을 하나님께서 결코 쓰실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치 아니할 때 결국 유대인들과 같이 넘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는 주권신앙을 가진 자들은 매사에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자기 뜻을 고집하기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합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기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애를 씁니다. 또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데 전심전력합니다. 이런 자들은 매사에 감사와 은혜가 충만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통해 만민 구속역사를 이루어 나가십니다.
  30-33절을 보십시오. 왜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고,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의에 이르지 못하였습니까? 이는 이방인들은 겸손하게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었기 때문이요,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행위를 의지하다가 부딪칠 돌에 부딪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걸림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시고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걸림돌과 거치는 반석은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에게 구원과 심판의 시금석이 되십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되지만, 믿지 않는 자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걸려 넘어지게 됩니다.

  저는 제자양성의 열매 하나 없었던 저의 풀타임 시절이나, 잠간의 고난을 인내하지 못하고 선교지를 떠난 선교사 시절이나, 먹고 살기 바빠 복음역사와 무관하게 살고 있는 지금의 평신도의 삶을 볼 때 하나님께서 저와 저희 가정에 주신 ‘너는 복이 될지라’라는 약속의 말씀은 폐하여지고, 저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은 실패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말씀을 준비하며 하나님께서 과거 무기력한 중풍병자로 진노의 그릇에 불과했던 저를 깨뜨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리스도와 생명의 말씀을 담아 귀히 쓸 그릇으로 빚어주심은 저의 영적인 상태나 소원이나 열심과 무관한 오로지 하나님의 일방적인 부르심, 일방적인 주권이요 긍휼의 역사임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저와 같이 영적인 소원이 없는 자, 게으르고 자기중심적이어서 달음박질 하지 않는 자라도 택하셔서 어찌하든 구원역사를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소원과 열심을 영접하게 하셨습니다. 제가 2013년 새해에 이 하나님의 소망을 깊이 영접하고 사도바울의 목자의 심정을 배워 캠퍼스 지성인들을 담아가는 긍휼의 그릇으로 쓰임받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절대주권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주권을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데 선하게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죄 많은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을 기초로 구원역사를 이루어 나가십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절대주권과 긍휼을 기초로 만민 구원역사를 이루어 나가시는 그의 구속역사에 불러주셨습니다. 우리가 다 겸손히 하나님의 주권을 영접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만민 구원역사에 긍휼의 그릇으로 귀히 쓰임 받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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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6 사도행전 [2016년 사도행전 제6강]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관리자 2016-04-24 2783
505 창세기 [2013년 창세기 제23강] 꿈꾸는 요셉 2 관리자 2013-10-13 2783
504 고린도후서 [2017년 고린도후서 제9강] 약한 것을 자랑하는 바울 관리자 2017-12-03 2775
503 누가복음 [2017년 누가복음 제23강]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관리자 2017-07-09 2773
502 누가복음 [2011년 여름수양회 제6강]하나님의 그리스도-문대범 리스닝 2011-08-17 2771
501 창세기 [2013년 창세기 제21강]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관리자 2013-09-29 2766
500 이사야 [2011년 이사야서 제17강]하나님과 결혼한 시온 관리자 2011-02-20 2765
499 누가복음 [2011년 누가복음 제21강] 요나보다 더 큰 이 관리자 2011-09-11 2762
498 신명기 [2015년 신명기 제11강] 평생에 옆에 두고 읽어라 관리자 2015-01-25 2758
497 누가복음 [2017년 누가복음 제22강]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관리자 2017-07-02 2757
496 디모데전서 [2017년 신년 제2강]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관리자 2017-01-08 2755
495 누가복음 [2017년 누가복음 제28강]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 관리자 2017-08-13 2754
494 시편 [2018년 추수감사예배] 주의 은택을 감사하나이다 관리자 2018-11-18 2750
493 누가복음 [2014년 성탄 제1강]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자 관리자 2014-12-07 2750
492 누가복음 [2011년 여름바이블캠프준비특강(1)]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 리스닝 2011-08-01 2749
491 이사야 [2015년 성탄 제1강]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관리자 2015-12-06 2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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