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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9-02-01 (일) 13:29
홈페이지 http://ksubf.com
분 류 마태복음
첨부#1 2008Matthew37_1.hwp (34KB) (Down: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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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마태복음제37강]새끼 나귀를 탄 왕
2009년 마태복음 제 37강

새끼 나귀를 탄 왕

말씀: 마태복음 21:1-22
요절: 마태복음 21: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지금까지의 예수님의 모습은 섬기는 종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예수님은 본래의 예수님의 모습 ‘왕의 왕’, ‘주의 주’ 만유의 주권자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많은 무리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시며 입성하시고 성전을 깨끗케 하시고, 열매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무섭게 심판하심으로 우리가 예수님이 경외함으로 믿고 경배해야 할 주님이심을 깨우쳐주십니다. 이 시간 우리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새롭게 만나고 그의 다스림을 받는 주의 백성으로서의 자세를 새롭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주가 쓰시겠다 하라(1-9)
  예수님 일행이 예루살렘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님은 두 제자를 시켜 예루살렘 입성 준비를 하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이상한 명령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맞은 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2) 맞은 편 마을에 있는 남의 나귀를 끌고 오라는 순종하기 힘든 명령이었습니다. 그리고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3)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훤히 아시고 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가 쓰시겠다 하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자신을 인자라 하셨는데 여기서는 처음으로 ‘주(the Lord)’라고 자신을 밝히십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 자신이 어떤 분이신가를 계시하셨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세상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은 머리 둘 곳 없이 가난하신 초라한 모습으로, 종의 모습으로 각종 죄인들을 섬기시고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본래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3절은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증거합니다. 예수님은 세상 만물의 창조주시오 주인이십니다. 나귀의 진짜 주인은 주님이시오, 현재 주인은 잠시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생명, 물질, 시간, 가정, 자녀들 모두 진짜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면 나귀 주인과 같이 즉시 기꺼이 주님께 보내야 합니다. 우리는 내가 가진 것을 모두 내 것으로 착각하고 주님께 드리기를 아까워하며, 때로 주님을 위해 드린 것에 대해 손해의식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이것은 지극히 잘 못된 자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날 때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었고 세상을 떠날 때에 가지고 갈 수 있는 것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생명도 주께서 주셨기에 세상에 태어났으며, 주님이 부르시면 언제든지 가야 합니다. 우리가 자신을 연단하고 열심히 실력을 쌓는 것도 주께서 쓰시겠다 하실 때 귀하게 쓰임 받기 위한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주권신앙’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수준이 이에 이르러야 합니다. 주님께로부터 복을 받고 사랑받고 세움 받는 것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주님께서 나를 어떻게 사용하고자 하시는가 살피고 이에 기꺼이 헌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항상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찾고 이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엡5:10) 그는 주권신앙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주권신앙이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을 주님을 주인으로 생각하고 주님께 순종하여 쓰임 받는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실제로 나귀 역사상 이렇게 귀하게 쓰임 받은 나귀가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인간은 하나님이 쓰시기 위해 창조하신 귀한 존재입니다. 한 형제가 목자에게 불평을 쏟아놓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너무 옭아맵니다. 술도 안 된다, 담배도 안 된다, 뭐도 안 된다 금지하는 것이 너무 많고, 대신에 이것 하라, 저것 하라 너무 간섭이 심합니다.” 그러자 목자가 이 형제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천만 원짜리 피아노를 도마로 사용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러면 안 되지요” “그렇다면 최고급 양복으로 신발을 닦는 것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것도 안 되지요” “그럼 비싼 도자기를 술잔으로 사용하는 것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건 바보 같은 짓이지요. 그런데 당연한 것을 왜 묻는 것입니까?” 목자가 답을 했습니다. “사람은 그런 것들보다 더 귀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귀한 몸으로 술항아리나 굴뚝으로 사용하면 어떻게 합니까? 사람은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이 가장 영광스런 것입니다.” 저도 지나온 인생을 되돌아보며 확실하게 고백할 수 있는 한 가지는 내 인생에서 주님의 택함을 받아 복음역사에 쓰임 받았다는 것보다 더 영광스러운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뿐 아니라 자녀들도, 양들도 주님께 쓰임 받도록 돕는 것이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가 쓰시겠다 하실 때 기꺼이 자신을 드릴 수 있는 인생이 되도록 주권신앙을 깊이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새끼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겸손한 주님의 모습을 본 저자 마태는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5) 이 예수님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바로 그 메시야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간절히 기다리던 왕이십니다. 하나님은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온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야가 어떻게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것인지 구체적으로 예언하셨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9:9) 예수님은 왕으로 임하셨지만 새끼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겸손의 왕이십니다. 세상 왕은 금 면류관을 쓰고 백마가 이끄는 쌍두마차를 타고 전후좌우에는 창과 칼로 무장한 경호원의 호위를 받으며 위엄 있게 입성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초라한 나귀 새끼를 타시고 그 주위에는 제자들과 갈급한 무리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따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권세와 영광은 세상 왕과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것이지만 예수님은 겸손하여서 작은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심은 무력과 법으로 다스릴 왕이 아니라 낮아져 겸손히 섬기는 왕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새끼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십니다. 말은 전쟁을 상징하지만 나귀는 평화를 상징합니다. 세상 왕은 백마를 탄 힘 있는 모습으로 와서 처음부터 힘과 무력으로 다스릴 것을 선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과 평화로 다스려주심으로 불안과 염려, 두려움이 사라지고 잔잔한 평화가 임하게 됩니다. 이 평화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믿는 자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사람들은 마음에 평화를 얻기 위해 복잡한 세상을 훌쩍 떠나 멀리 여행을 해보기도 하고, 마인드 컨트롤을 해보고, 세상만사 다 잊고자 잠을 자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 어디에서도 참된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오직 평화의 왕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을 때 비로소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또한 예수님은 공의의 왕, 구원의 왕이 되십니다.
  제자들은 이 예수님을 어떻게 영접하였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그들이 예수님의 명령대로 순종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건너 마을에 나귀가 과연 있을까? 남의 나귀를 끌고 오다가 제자생활 3년 만에 좀도둑으로 몰리는 것은 아닌가? 의심과 회의와 반발심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이해하기 힘든 명령이었지만 주님의 명령이기에 단순히 순종하였을 때 이해를 초월하는 예수님의 신적 능력을 체험하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였을 때 밤새도록 물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하던 그물에 혼자 끌어 올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물고기를 잡는 기적을 체험하고 예수님을 새롭게 만나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우리도 명하신 대로 행하여 말씀을 체험하고, 예수님을 체험하고 만나는 종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안장 대신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고 예수님을 태웠습니다. 무리의 대부분도 자기들의 겉옷과 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폈습니다. 겉옷을 벗는다는 것은 왕께 대한 경외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들은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외쳤습니다.(8,9) ‘다윗의 자손’,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란 모두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란 뜻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로 영접하고 열렬히 환영하였습니다. 그들은 오실 메시야는 다윗 왕과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들을 사랑하는 선한 목자로서 사랑과 평화로 다스려주실 왕으로 믿었습니다. ‘호산나’란 말은 ‘구원하소서(save us)’란 뜻입니다. 이들은 메시야를 통해 구원받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이들은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죽은 나사로도 살리신 그 능력으로 능히 그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해주실 것을 믿고 지상 메시야 왕국이 건설될 부푼 희망 가운데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한 것입니다. 그들의 외침 속에는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그들의 고통과 한이 배어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속에는 죄로 인해 고통하는 인생들의 절규가 숨어 있습니다. 사실 현실문제보다 더 심각한 것은 죄문제입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볼 때 현실의 어려움 때문에 고통하며 탄식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은 해결되지 않은 인생문제와 죄문제로 고통하며 탄식하는 가운데 구원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의 목적과 존재의미를 몰라 방황하며 탄식합니다. 어떤 사람은 운명주의와 허무주의로 자기를 학대하며 구원해주기를 간구합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한 미움과 증오로 자신이 더 괴로워하며 구원해 달라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호산나!’ 이는 구원을 요청하는 인생들의 절규입니다. 인간의 근본문제는 사랑 문제요 죄문제요 또한 통치문제입니다. 그 중에서도 누구의 다스림을 받느냐 하는 것은 인생의 행불행을 좌우할 뿐 아니라 구원이냐 심판이냐를 결정짓는 중대한 문제이기에 사람들은 참된 왕의 다스림 받기를 갈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다스리는 세력은 하나님이냐 사탄이냐 둘 중의 하나입니다. 인생이 불행하게 된 것은 죄로 인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고 사탄의 다스림을 받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사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인생들을 진리와 사랑과 평화로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사탄의 머리를 박살내시고 인생들에게 완전한 구원을 주시고 구원받은 우리를 영원히 다스려주시는 왕의 왕 주의 주가 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는 자는 사탄의 권세에 짓눌려 살지 않습니다. 주님은 다스려주기를 믿음으로 간구하는 자를 은혜와 진리로 다스려주십니다. 이 예수님 앞에 나아가 세상 죄로 더러워진 우리의 겉옷을 벗어 그 앞에 깔고, 예수님의 나귀 안장 위에 얹어놓고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찬양합시다. 우리를 다스려주시도록 기도합시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Ⅱ. 성전을 깨끗케 하신 예수님(10-16)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자 온 성이 소동하였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유월절 명절을 맞이하여 세계 곳곳에서 찾아온 인파들로 가득하였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예수님께 관심을 집중시켰습니다. 예수님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인기를 외면하신 채 먼저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이를 볼 때 예수님은 영적 메시야로 오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성전을 회복하실 뿐 아니라 자신이 온전한 성전이 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람이 어디를 가장 먼저 방문하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평소 관심이 어디에 있으며,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생활인은 가정과 직장을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하루가 시작되면 직장 갈 생각부터 하고, 직장이 끝나면 얼른 집으로 갈 생각부터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은 먼저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생각합니다. 목자는 성전을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성전은 목자의 삶의 터전이요 목자의 존재의미를 부여해주는 곳입니다. 우리 목자님들이 성전을 중심으로 이사를 하고, 하루 일과가 끝나면 먼저 성전을 사모하여 모여드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지나가는 나그네처럼 잠깐 은혜 받기 위해 성전에 오신 것이 아니라 성전의 주인으로서 성전이 어떠한지 살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런데 성전은 어떠하였습니까? 1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 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성전은 말씀공부 하는 소리와 기도와 찬송소리 대신 짐승 우는 소리, 장사하는 소리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성전의 본래 기능은 간데 온데 없고 장사꾼들이 주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를 보신 예수님의 눈에는 분노의 불길이 치솟았습니다. 예수님은 즉시 매매하는 모든 자들을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온유하신 분으로 어떤 죄인의 허물과 실수라도 용서하시고 그 품에 안아주십니다. 그러나 타락한 성전을 보시는 예수님은 무섭게 분노하셨습니다. 이 주님의 분노는 불의에 대한 영적 분노요 하나님의 전을 간절히 사모하는데서 나온 분노였습니다.
  그렇다면 성전의 본래 기능이 무엇이어야 합니까? 13절을 보십시오.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성전은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여기에는 성소와 지성소가 있고 지성소에는 증거궤 곧 하나님의 말씀과 속죄소가 있습니다. 성전은 죄인들이 나아와 죄사함 받음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신성한 곳입니다. 성전은 세상에 대하여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세계선교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성전에 말씀이 없고 회개가 없고 죄사함의 은혜가 없다면 성전이라 할 수 없습니다. 성전이 만민구속역사를 위한 기도가 없다면 성전으로서 중요한 기능을 상실한 곳입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 당시 성전은 강도의 소굴에 불과하였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말씀연구와 기도와 제자양성은 제쳐놓고 종교정치에 바빴고 또 성전을 이용하여 장사함으로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워 있었습니다. 성전이 본래의 사명을 제쳐놓고 인간적인 교제나 나누고 세속주의로 타락할 때 주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게 됩니다. 성전이 부패했다는 것은 곧 그 중심이 썩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더럽게 하는 자들과 장사하는 상과 짐승들을 모두 쫓아내시므로 성전을 깨끗케 하셨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도전이요 대 영적 개혁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종교지도자들의 미움을 받아 십자가에 처형당할 위험을 안고 있는 일이었지만 주님은 성전을 사모하는 열정과 질서를 바로 세우는 공의를 위해 조금도 타협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이 시대에 우리 모임을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택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순수복음신앙을 지키며 캠퍼스 지성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세계선교를 위해 기도를 감당해 왔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일대일 말씀공부가 줄어들고 기도에 전념하지 못하는 타락한 모습으로 변질되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교제는 잘 되고 있는데 영적 교제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저 자신과 우리 모임을 주님께서 어떻게 보실까 생각할 때 심히 두려웠습니다. 우리 모임이 이 시대에 하나님의 성전의 기능을 감당하지 않으면 존재할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두렵고 떨림으로 나아와 중심이 썩어 있음을 애통함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다시금 성전의 본래 기능을 회복하고 일대일 말씀공부와 중보기도를 감당하는 모임으로 개혁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성전의 기능에 대해 가르치신 후 맹인과 저는 자들이 나아왔을 때 이들을 영접하시고 고쳐주셨습니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하고 저는 자를 고쳐주시는 것은 메시야의 대표적인 사역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의 주인으로서 적극적으로 메시야의 사명을 감당하셨습니다. 우리도 성전에 대해 주인의식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곳에 손님으로 오게 되면 잘 섬겨주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부족한 것이 많다고 판단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게 되지만 주인의식을 가지게 되면 문제를 바로 보고 그 문제를 내 탓으로 여기고 적극적으로 해결해 나가는데 참여하게 됩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주인의식을 회복해야 했는데 오히려 더욱 마음이 완악해져서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이상한 일로 보고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또 성전에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며 주님을 찬미하는 어린아이들을 보고 분노하였습니다.(15) 예수님은 이들에게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16) 하시며, 어린아이들의 찬미를 받아주심으로 예수님 자신이 찬미 받으실 왕이심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으로서 모든 인생들이 찬미하고 경배해야 할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우리가 찬양해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린아이들이 찬양할 것이요 이들도 찬양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돌들을 통해서라도 찬미하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생들의 찬미와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왕의 왕, 주의 주가 되심을 고백합니다.

Ⅲ. 제자들에게 믿음의 기도를 가르치신 예수님(17-22)
  성전을 깨끗이 청소하신 후 예수님은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신 후 다음날 이른 아침 다시 성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런데 시장하셔서 길가에 있는 한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얻고자 그리로 가셨습니다. 그러나 그 나무는 잎만 무성할 뿐 아무런 열매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에게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저주하셨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 나무는 곧 말라버렸습니다. 제자들이 이를 보고 이상히 여겨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그들은 지금까지 잎이 무성하였던 그 나무가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에 곧 말라버리는 것을 보고 그런 능력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믿음의 능력에 대해 가르쳐주셨습니다. 21,2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능력의 근원은 믿음이요, 태산 같은 현실문제 앞에서 믿는 자가 하는 구체적인 일은 기도임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사람들은 큰일을 하는 사람은 날 때부터 능력을 타고 난다고 생각합니다. 대신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날 때부터 큰일을 할 수 없는 자로 태어났다고 운명적인 생각을 합니다. 그러다가 어려운 일을 만나 몇 번 시도해보다가 안되면 더욱 더 운명적이 되어 나는 큰일을 할 수 없는 자가 틀림없다고 확신해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믿고 기도하면 누구나 큰일을 할 수 있다고 소망을 심어주셨습니다.(요14:12)
  그런데 믿음으로 큰일을 하고자 할 때 반드시 극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의 의심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라 하심으로 마음의 의심이 걸림돌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셨습니다. 의심이 생기면 태산은 고사하고 손 하나 움직여 한 편의 소감 쓰기도 힘들어할 만큼 무기력하게 됩니다. 우리가 양들을 섬길 때에도 양들의 마음이 태산과 같이 도저히 움직일 것 같지 않게 보일 때가 많습니다. 마음에 의심이 생기면 일대일 양이 조금만 힘든 소리를 해도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고 부정적인 생각이 들어 쉽게 포기해버립니다. 그러나 마음의 의심을 물리치고 하나님을 믿고 도전하면 태산이 바다에 던져지는 능력의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외부에 있지 않고 바로 내 속에 있는 의심과 불신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사탄이 심는 의심을 물리치면 누구나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능력에 대해 말씀하신 다음 기도에 대해 가르쳐 주십니다. 믿음과 기도는 바늘과 실의 관계와 같습니다. 기도는 믿음의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도할 수 없고, 믿는다고 하면서도 기도하지 않는 것은 산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믿음의 기도를 배워 능력 있는 예수님의 제자로 성장하고 하나님의 역사에 귀하게 쓰임 받는 종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셨습니다. 2009년 봄 학기 신입생들을 위한 복음역사가 활발하게 일어나도록 기도합시다. 믿고 기도할 때 우리 가운데 태산이 옮겨지는 능력의 역사가 일어날 것을 믿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죄인된 우리를 평화와 진리로 다스리시고자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우리가 지금도 이 예수님을 기쁨과 즐거움과 경외심을 가지고 열렬히 환영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주님이 쓰시겠다 하실 때 기쁨으로 헌신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는 종들이 되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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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출애굽기 [2009년출애굽기제8강] 하늘에서 양식을 내리리니 관리자 2009-05-31 2593
28 출애굽기 [2009년출애굽기제7강] 홍해에 길을 내신 하나님 관리자 2009-05-24 3099
27 출애굽기 [2009년출애굽기제6강] 그 피가 표적이 될지라 관리자 2009-05-17 3500
26 출애굽기 [2009년출애굽기제5강]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관리자 2009-05-10 3696
25 출애굽기 [2009년출애굽기제4강] 네가 아니라 내가 하리라 관리자 2009-05-03 2948
24 출애굽기 [2009년출애굽기제3강]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리라 -김반석 관리자 2009-04-26 3050
23 출애굽기 [2009년출애굽기제2강] 왕자에서 나그네로 관리자 2009-04-19 2658
22 출애굽기 [2009년출애굽기제1강] 학대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니 관리자 2009-04-14 2694
21 누가복음 2009 부활절수양회 1강<청년아 일어나라>-함바나바 관리자 2009-04-13 2734
20 누가복음 2009 부활절수양회 1강<청년아 일어나라>-천수원 관리자 2009-04-13 2785
19 누가복음 2009 부활절수양회 1강 <청년아 일어나라>-김태영 관리자 2009-04-13 2867
18 요한복음 2009 부활절수양회 2강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장원규 관리자 2009-04-12 2660
17 요한복음 2009 부활절수양회 2강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최바울 관리자 2009-04-12 2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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