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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2-09-04 (일) 15:08
분 류 누가복음
첨부#1 2022년_누가복음_제25강-1.hwp (109KB) (Down: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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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25강]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2022년 누가복음 제25강                                                      이 종 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말씀: 누가복음 13:22~35
요절: 누가복음 13: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니라”

여러분은 구원을 받았습니까? 구원받았다고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까? 또 구원받았다면 그 증거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구원에 자신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말씀은 구원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을 가는 것이 구원을 얻는 길이라 하십니다. 그런데 힘쓰라고 하신 것을 볼 때 좁은 문, 좁은 길이 힘든 노정임을 직관적으로 느낍니다. 그러나 구원은 세상 어떤 것과 바꿀 수 없는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주님이 가르쳐 주시는 대로 잘 배워서 믿음을 지키고 좁은 문, 좁은 길, 생명이 있는 길, 구원을 이루는 길을 확신 있게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 1장,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2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각 성 각 마을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이 시기는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6개월 기간으로,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의 고난과 죽음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매우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정 중에 마주치는 성과 마을마다 줄기차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복음을 듣도록 온 힘을 쏟으셨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때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구원을 받는 자가 적은지 질문하였습니다. 그가 왜 이런 질문을 했을까요? 지난 말씀을 보면 당시 로마 통치 아래에서 민중봉기와 각종 사고로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은 그들이 죄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영원한 삶을 얻는 사람들의 수가 많으냐 적으냐에 대해 논쟁이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질문을 한 사람은 예수님을 지혜로운 랍비로 보고 이 화두에 대해 질문을 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어떠합니까? 24절을 보십시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니라” 예수님은 구원받는 자가 적고 많음에 대해서는 직접 말씀하지 않으시고 대신에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를 말씀하십니다. 먼저 예수님은 구원을 받는 것을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에 비유하십니다. 24절 말씀의 평행 구절인 마태복음 7장 13,14절을 보면 좁은 문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좁은 문은 좁은 길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그 문은 생명 즉 구원으로 인도합니다. 여기서 ‘좁은 문’은 예수님을 가리키고, 좁은 길은 예수님이 가신 길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옷은 초라하셨고 머리 둘 곳이 없으셨습니다. 이에 비해 유대지도자들은 화려한 옷을 입고 황금으로 지붕을 씌운 성전에서 업무를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유대지도자들을 따르는 것을 구원의 길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길은 넓고 그럴싸 해보였지만 결국 멸망의 길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예수님은 갈급한 자만 찾는 좁은 문이었습니다. 문을 들어선 후는 가난과 멸시와 핍박을 받으면서 병자를 돌보고 복음을 전하는 수고를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문은 중심을 지키고 따라온 자들에게 구원을 주는 생명의 문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혈통과 할례 받은 것을 자랑하였습니다. 이런 것들이 자신들의 구원을 보장해준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생각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좁은 문 되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들은 종교적 열심으로 하나님이 구원해주실 것이라 믿었지만 그것은 틀린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 말씀은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어떤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택하지 않은 유대인들은 입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였지만 실상은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 되어 자기 멋대로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사기 21장 25절입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우리는 이런 유대인들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좁은 길을 잘 선택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볼 때 좁은 문을 선택하고 그 길을 가는데 힘을 써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힘쓰라’는 헬라어로 ‘아고니조마이(ἀγωνίζομαι)’인데 ‘분투적으로 힘쓰라’라는 뜻입니다. 올림픽에 참가하는 선수는 금메달을 획득하기 위해 진땀을 흘리며 훈련을 합니다. 시합을 잘 하기 위해 식단을 조절하고 특히 사생활을 절제하며 오직 운동과 휴식을 반복합니다. 구원의 생명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이들보다 더 죽기를 각오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땅의 금메달의 영광보다 구원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의문이 생깁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 10:9)”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였는데, 믿음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한가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 이 말씀을 기초로 보면 믿음으로 한번 구원을 얻으면 잃어버릴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말씀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믿음 외에 다른 것이 필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또 열심히 일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방법에 따라서 구원을 붙들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말씀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첫째, 믿음을 지키는데 힘써야 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을 지킨 선진들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히 11:35,36)” 그들은 왜 그렇게 살았습니까?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로마 데키우스 황제 때(AD 249~251년), 제국 전체에 걸쳐 대대적인 박해가 있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신앙을 버리도록 고문, 유형, 공갈협박, 몰수 등이 동원되었고, 끝까지 거절하는 자는 무참하게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많은 성도들이 순교자의 영광을 차지하려고 감옥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때 감옥에서 쓴 한 편지가 있습니다. ‘고문을 당하고 죽음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주라 고백하며, 너덜거리는 육체가 영과 분리되려 할 때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하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는 것보다 더 영광스럽고 축복받는 일이 어디 있으랴!’ 그들이 왜 이렇게 기꺼이 박해를 받았습니까?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좁은 문을 통과하여 좁은 길을 가는 것은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신다는 믿음을 끝까지 붙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믿음을 지키고자 할 때 세상은 우리를 미워합니다. 또 핍박과 환란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끊임없이 우리의 믿음을 흔듭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가운데서도 우리는 믿음의 선진들처럼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하겠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서 승리해야 하겠습니다.
둘째, 날마다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시인하면서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누가복음은 회개의 스토리로 가득합니다. 5장에서 많은 고기를 잡은 기적 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15장의 돌아온 탕자는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하고 회개하였습니다. 또 18장에서 세리는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자신이 죄에 매여 있으면 얼마나 비참한가 깨닫고 애통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또 믿음을 지키지 않으면 임할 무서운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죄악된 습성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을 날마다 붙들어야 합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이렇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우리를 하나님나라로 인도하고자 위함입니다.
셋째, 힘써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부담스러운 삶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먼저 본을 보이셨습니다. 주님은 본래 하나님이 되시지만 사람의 몸으로 오시고 이 땅에 사시는 동안 그 어떤 누구보다 누추하고 가난한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오신 목적대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셨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믿음의 선진들은 주님을 바라보고 모든 일에 개의치 않았습니다. 우리도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구원의 소망 가운데 지금까지 애써서 해온 대로 자기부인,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구원의 문은 열려 있지만 언제까지나 열려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가 되면 닫힙니다. 한 번 문이 닫힌 후에는 다시 열리지 않습니다. 그때 문밖에서 얼쩡거리던 사람들은 문이 닫히는 것을 보고 놀라서 달려올 것입니다. 그러나 문은 이미 닫혔고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문을 두드리며 애절한 목소리로 ‘주여 제발 열어주소서’하며 애걸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집 주인은 그들이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한다’라고 하십니다. 26,27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그들은 예수님과 가까이에서 먹고 마셨습니다. 또 직접 가르침도 받았습니다. 마태복음 7장 22~24절에서는 자신들이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을 쫓아냈으며 많은 권능을 행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하고 무섭게 말씀을 하십니다. 그들이 예수님 앞에서 먹고 마시고 일한 것을 부인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는 말씀은 너희 출신을 모르겠다는 말씀입니다. 즉 너희가 구원받았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나와 함께 먹고 마시고 온갖 종교예식을 행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백성인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 ‘너희는 구원받지 않은 자들이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를 떠나가라’ 하십니다. 한마디로 너희가 그동안 행한 모든 것은 그저 너희가 좋아서 한 것이고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니 이제 떠나라는 무서운 심판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누가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합니까? 28,29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리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들이 하나님나라에 있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 사는 동안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믿고 따랐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늘의 별처럼 많은 후손과 가나안땅을 기업으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지만, 당대에 그 약속을 누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선지자들은 온갖 핍박 속에서도 장차 구원자로 오실 메시아를 맞아들일 준비를 하도록 외치는 직분을 충성스럽게 감당하였습니다. 또 동서남북 각 나라에서 좁은 문을 들어가기를 힘쓴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여합니다.
어느 주일 저녁, 미국 뉴저지 주 콜드웰 거리를 두 명의 젊은이가 걷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휴일을 즐기기 위하여 도박장을 찾아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도박장 바로 옆에 한 작은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들 중 한 명이 교회 입구 게시판에 적혀 있는 설교제목을 보았는데, 거기에는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 때 그는 갑자기 마음속에 죄의식이 생겨 친구에게 “오늘 우리 도박장에 가지 말고 교회에 가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친구는 “한 번 결심을 했으면 가야지 교회는 무슨 교회야”하며 거절을 하였습니다. 결국 한 사람은 교회로 가고, 다른 한 사람은 도박장으로 갔습니다. 그 날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린 젊은이는 경건한 마음으로 설교를 듣고, 이로부터 좁은 인생행로를 택하였습니다. 그리고 30년 뒤 그는 미국 2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미국 1000달러 지폐에 초상화가 새겨진 그로버 클리브랜드(S. G. Cleveland) 대통령입니다. 그가 대통령 취임식을 하기 전날 이를 게재한 신문 보도를 보고 한없이 눈물을 흘리는 한 죄수가 있었는데, 그는 젊은 시절 클리브랜드와 같이 방탕한 곳으로 놀러 가던 그 친구였습니다. 이처럼 젊은 날 어떤 길을 가느냐 하는 것은 이렇게 완전히 다른 길을 가게 하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30절을 보십시오.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유대인들은 가장 먼저 복음을 영접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선민이라는 특권의식을 가지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구원의 축복이 야만인이라 무시하던 이방인에게 주어졌습니다. 이제 예수님과 가까운 관계에 있어야 할 사람들은 예수님과 떨어져 있고, 본래 예수님과 멀리 떨어져 있던 이방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예수님과 매우 가까이 있게 되었습니다. 신앙경륜이 오래 되었다고 천국에 먼저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모태신앙이라고 해서 구원이 보장된 것도 아닙니다. 오직 주님만이 나의 구원자이심을 믿고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주님 앞에 겸손히 회개하는 사람이 천국에 들어갑니다. 이런 삶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길은 겸손과 순종의 길입니다. 많은 희생과 고난이 따르는 길입니다. 그러나 이 길은 생명의 길이요 구원의 길입니다. 우리가 일생 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을 가기를 바랍니다.
 
제 2장, 갈 길을 가야 하리라
31절을 보십시오.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몇몇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한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피신시키려 한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을 예루살렘으로 유인하려 한 것인지 분명치 않으나, 헤롯이나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의 헤롯은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을 다스리던 헤롯 안티파스를 가리킵니다. 그가 관리하던 지역에서는 자칭왕을 주장하는 반란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자리를 뺏길까 늘 불안에 떨었습니다. 그런 중에 백성들의 존경을 받던 세례 요한은 눈 안의 가시와 같았습니다. 그는 요한을 감시하다가 결국 그를 목 베어 죽였습니다. 그 후 흥왕하게 일어나는 예수님의 복음 사역을 듣고 자신이 죽인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닌가 생각하며 두려움에 시달렸습니다(눅9:7). 이제 예수님도 위험인물로 간주하고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32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예수님은 헤롯을 여우라고 하십니다. 유대인에게 여우는 ‘들쥐를 잡기 위해 포도원을 허무는 존재(아 2:15)’, ‘깃털처럼 가벼운 존재(느 4:3)’ 등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즉 헤롯은 모든 것을 허무는 존재로 백성들을 위하는 것처럼 했으나 실제는 힘들게 하고 삶을 파괴하였습니다. 또 심히 가벼운 존재로 눈앞의 이익에만 집착하였습니다. 오로지 정적을 제거하고 로마황제의 인정을 받아 유대전체의 왕이 되고자 하는 욕망으로 가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차하면 아직도 자기 관할 구역에서 다니시는 예수님을 붙잡아 죽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헤롯의 위협에도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으십니다. 흔들림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이루어 가십니다. 오늘과 내일은 계속해서 귀신을 쫓아내며 병든 사람들을 고치십니다. 그리고 ‘제삼일’ 즉 마지막 날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인류 구원 역사를 완성하고자 하십니다. 33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이제 더욱 더 단호하게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예수님은 자신의 길을 가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어떤 시련과 역경이나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이 하나님이 정하신 뜻대로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미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서 고난 받고 죽임 당하신다는 것을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헤롯이나 바리새인이나 그 누구도 예루살렘 밖에서 예수님을 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수님은 탄식 가운데 안타까워서 두 번씩이나 부르십니다. 예루살렘은 선지자들을 죽이고 하나님이 보내신 자들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이제 선지자 중 선지자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조차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자 합니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불순종하였습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은,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이스라엘을 자신의 보호아래 두고자 선지자의 예언을 통해 설득하시고 때로는 이방 군대의 매서운 칼날을 통해 훈련하셨습니다. 예수님도 공생애 기간 내내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을 향해서 그들의 위선을 지적하며 돌이키도록 하셨습니다. 그들이 백성들을 돌보고 먹이며 보호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35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결국 그들은 하나님이 예루살렘에 베푸시는 구원의 기회를 놓쳐버리게 됩니다. 이로 인해 그들은 하나님께 버림받고, 그들의 집은 텅 빈 채 버려집니다. 이 말씀은 이후 세속사에서 철저하게 이루어집니다. AD 70년 로마의 디도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은 함락되고 성전도 완전히 무너져 서쪽의 벽 즉 통곡의 벽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 후 AD 135년 또 한 번의 전쟁 후 유대의 이름은 팔레스타인으로 바뀌게 되었고 모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추방되었습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는 200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은 결과는 무섭습니다. 35절 후반부를 다시 보겠습니다.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마지막 날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심판을 시작하실 때 지금까지 믿지 않던 유대인들이 그때서야 알게 될 것입니다. 즉 이미 너무 늦었을 때 주님이 메시아임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늦기 전에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 쫓겨나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 14~42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를 듣고 자신들이 행한 죄로 인해서 마음이 찔려서 사도들에게 “우리가 어찌할꼬” 물었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하고 선포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이 날에 삼천 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다면 집은 텅 빈 채 버려지게 될 것입니다. 말씀이 풍성한 모임에서 지금까지 받은 은혜를 당연히 여기고 종교생활에 머물러 있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아직도 우리에게 영적 죄책감이 남아있으면 영적으로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심판받아야 할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지금껏 사건 사건마다 함께 하시고 보호자가 되어 주셨으며, 이제는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은혜에 대해 감사하고 그동안 잠시 풀어 두었던 영적 허리띠를 단단히 매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이 어떻게 흘러갈지라도 우리 모임 우리 각자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좇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매일 새벽기도를 몇 년째 하고 있고, 몇 달 전부터는 일용한 양식 말씀을 요절 중심으로 정리하여 가족 카톡방에 올린 후에 하루 일과를 시작하였습니다. 또 그렇게 절제가 되지 않던 유튜브 보는 시간도 드디어 1시간 이내로 줄이는데 성공하였습니다. 매주 토요일은 오후부터 밤까지 GBS를 준비하고 섬기느라 어떤 사적인 약속을 잡지 못하였습니다. 주일 저녁은 잘되지 않는 소감을 쓰느라 끙끙거리며 연구실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분명히 저는 저의 인생 어느 때보다 많은 시간을 영적인 일에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오늘 말씀을 준비하는 저에게 ‘너는 현재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자 힘쓰고 있느냐’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자신 있게 말하기 어려웠습니다. 겉으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나 내면은 편치 않았습니다. 이전에 잘 하지 못할 때는 저의 부족함을 알기에 늘 스트레스를 받고 애를 썼는데 요즘 이상하게도 너무 차분하고 무덤덤하였습니다. 갑갑한 마음에 저에게 진료를 받으러 오신 한 목사님께 말씀 드렸더니 자신도 그런 문제로 많은 고심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누가복음 10장의 율법사와 같은 영적 상태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니 저는 나름 열심히 종교생활만 하고 있었습니다. 마음에 사랑이 없고 판단하는 마음, 용납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고는 교회 문을 나서기가 무섭게 자기 일에 바빴습니다.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라는 말씀으로 며칠 째 고민하고 있었던 저에게 율법사에게 원하셨던 말씀을 주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저의 좁은 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제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믿음의 실제임을 붙들고 날마다 이를 지키고자 애를 써야 하겠습니다. 조금만 방심하면 저의 내면을 차지하는 이기심, 분노, 판단하는 마음을 회개하고 오래 참음과 온유와 절제로 채워야 하겠습니다. 또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이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을 저의 십자가로 붙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가르쳐 주신 이 좁은 문, 좁은 길을 끝까지 잘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도록 하십니다. 그 문은 하나님나라로 이어지는 길의 시작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 가야 길은 협착합니다. 세상 것을 가지고 갈 수 없는 길입니다. 날마다 자기부인 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 사명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길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서 우리 하나님 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버지 집에 도달하면 아버지가 우리의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 이제 이 소망 가운데 지금까지 잘해온 것처럼 기도하는 삶, 양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리는 삶, 계속 잘 감당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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