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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2-11-13 (일) 14:12
분 류 누가복음
첨부#1 2022년_누가복음_제34강-1.hwp (36KB) (Down: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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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34강]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
2022년 누가복음 제34강                                                        최동진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
말씀 / 누가복음 19:28–20:18
요절 / 누가복음 19:38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어린 나귀를 끌고 오게 하는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의 왕권을 나타내십니다. 백성들은 나귀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고 열렬히 환영합니다. 반면에 종교지도자들은 성전을 청결하게 하시고 말씀을 가르치시는 예수님에게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따져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통해서 주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백성들이 어떻게 되는지 말씀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인생의 주인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의 권위를 깊이 영접하기를 기도합니다.

I.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 (19:28–40)
  2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지난 강의에서 예수님은 열 므나 비유를 통해 장차 왕위를 받아가지고 다시 오실 것에 대해 말씀하신 후에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셨습니다. 그곳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대게 영광의 길에는 서로 앞장서려고 하지만 고난의 길에는 슬금슬금 뒤로 빼면서 앞장서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고난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굳게 결심하시고 적극적으로 그 길을 가셨습니다. 2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 일행은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이르렀습니다. 두 마을은 예루살렘에서 약 2.5km 떨어진 거리에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30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는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는 나귀 새끼를 가리킵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께 바쳐진 짐승은 온전하여 흠이 없고 멍에를 매어보지 않은 것이라야 했습니다.(민19:2) 사람들이 사용하던 짐승은 하나님께 바칠 수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쓰시고자 하는 나귀 새끼도 사람들이 사용하지 않은 거룩한 것이어야 했습니다. 우리 인생도 어릴 때부터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구별된 상태로 준비되어서 주님께 쓰임받는 인생이 귀하고 아름답습니다. 31절을 보십시오.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당시 나귀는 값비싼 짐승으로서 주인에게는 자가용과 같이 매우 소중한 재산이었습니다. 한 번도 타보지 않은 새 차를 내어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주가 쓰시겠다고 하신 것은 예수님이 그 나귀 새끼의 주인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천지만물을 지으신 창조주로서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요한복음 1:3절은 말합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절대주권자가 되십니다. 나귀새끼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이 주님께 속했습니다. 우리의 생명과 시간과 물질도 다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것을 맡아서 관리하는 청지기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을 언제든지 기쁨으로 주님께 내어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쓰임받은 종들은 한결같이 주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라는 분명한 주권신앙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욥은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잃어버렸을 때에도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1b)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성모로 부름 받았을 때에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1:38)” 응답하였습니다. 주권 신앙이 없는 사람은 자기가 인생의 주인이기 때문에 자기를 중심으로  한 삶을 삽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뜻을 성취하는 데에 삶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주권신앙이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애를 씁니다. 주님이 가라하시면 가고 멈추라 하시면 멈춥니다. 기도할 때에도 자신이 바라는 것보다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의 왕이요 선한 목자가 되셔서 가장 좋은 것을 주시고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영접하고 주가 쓰시겠다 하실 때에 나의 모든 것을 기꺼이 내어드림으로 주님의 역사에 귀하게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건너편 마을로 갔습니다. 그곳에는 과연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어있었습니다. 제자들은 그 나귀 새끼를 풀어서 끌고 오고자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임자들이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물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다가 졸지에 도둑으로 몰릴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예수님이 일러주신대로 “주가 쓰시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두 말 하지 않고 기꺼이 자신의 나귀 새끼를 내어주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했을 때 그들의 이해를 초월하는 능력을 체험하고 믿음의 비밀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 주인은 예수님을 잘 알고 예수님께서 원하시면 언제든지 자신의 것을 내어드릴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된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모양으로든지 주님께 쓰임 받는 것을 큰 은혜요 영광으로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마지막 훈련을 통해 제자들이 예수님을 세상 만물의 주인으로 영접하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제자들도 단순히 순종함으로 그들의 믿음이 많이 성장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에게나 나귀 새끼를 달라고 하지는 않으십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기꺼이 자신을 내어드리고자 하는 사람의 것을 사용하십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원하실 때에 기쁨으로 순종하는 성숙한 믿음의 사람들로 빚어지기를 기도합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님을 태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레드 카펫 대신에 겉옷을 펼쳐 놓았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왕위 즉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행동입니다.(왕하9:13) 그런데 예수님은 왜 굳이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신 것입니까? 이는 스가랴 9장9절 말씀을 성취하시기 위함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3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감람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셨을 때 제자의 온 무리들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능력의 역사들을 기억하고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38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란 하나님께서 보내신 왕 곧 그리스도라는 뜻입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을 다스려줄 왕으로 영접하고 찬양하였습니다.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이는 예수님이 가져오시는 평화는 하늘에서 마련되어진 평화이며 이 일은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앉은뱅이를 걷게 하시고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시고 관에 누워 있던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무엇보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이를 통해서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로 믿게 되었습니다. 이런 능력 많으신 예수님이라면 로마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 해방시키고 강력한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하실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이런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큰 소리로 예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실제 모습은 어떠합니까? 평범한 옷을 입고 어린 나귀를 타고 뒤뚱거리는 모습이 세상 왕과는 확연하게 다릅니다. 새끼 나귀타고 입성하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로 겸손의 왕이십니다. 세상 왕들은 백마를 타고 군대를 거느리고 위엄있는 모습으로 입성합니다. 이는 자신의 막강한 권력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백성들은 이런 왕을 두려워하고 권세에 굴복하여 복종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작은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시오 만주의 주이시지만 낮은 자세로 다스리십니다.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마굿간에서 태어나 말구유에 뉘이셨습니다. 목수의 아들로서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가난한 자들, 병든 자들, 소외된 자들의 친구가 되시고 제자들의 냄새나는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나중에는 온 인류의 죄 값을 대신 치르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겸손한 성품과 섬김의 자세가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는 모습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둘째로, 평화의 왕이십니다. 말은 전쟁을 상징하고 나귀는 평화를 상징합니다. 세상 왕들은 말을 타고 싸워서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고 다스립니다. 로마제국은 ‘Pax Romana’를 통치 이념으로 내세웠습니다. 이는 ‘온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주는 로마’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무력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로마에 저항하는 나라는 철저하게 응징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력으로 세상을 통치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방법으로, 십자가의 사랑으로 세상을 통치하십니다.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을 때 온 세상에는 참된 평화가 찾아옵니다. 이사야 11장 6-9절은 메시아가 통치하는 나라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이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세상은 정글과 같습니다.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강한 자만이 살아남습니다. 양과 염소와 송아지는 이리와 표범과 사자에게 잡혀 먹힙니다. 어린 아이처럼 순진한 사람은 독사와 같이 교활한 사람들로 인해 큰 피해를 당합니다. 이런 세상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고 예수님의 통치가 이루어질 때 참 평화가 찾아옵니다. 갈등과 대립과 다툼이 사라지고 모든 사람이 한 형제 자매로서 서로 아끼고 사랑하고 섬기게 됩니다. 공평과 자비와 겸손과 배려와 섬김이 강물처럼 흘러넘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희망하는 메시아가 다스리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셋째로, 구원의 왕이십니다. 선지자 스가랴의 예언처럼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목적은 구원을 베풀고자 하심입니다. 사람들에게 많은 여러 가지 문제가 있는 것 같지만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죄와 사망 문제입니다. 누가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구원해 줄 수 있습니까? 오직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39절을 보십시오.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말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인생들로부터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심을 말해줍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41절을 보십시오. 성에 가까이 오셨을 때 예수님은 성을 보시고 우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42)  예수님이 왜 우신 것입니까? ‘예루살렘’은 ‘평화의 성’이란 뜻이 있지만 그곳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평화가 임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교만으로 인해 영적이 눈이 감겨져서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거부하였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지는 평화의 역사를 거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장차 받게 될 심판에 대해 예언하셨습니다. 43,44절을 보십시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이 예언은 40년 후에 성취되었습니다. A.D.66년 유대인들은 로마의 압제에 항거하여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3년 후 베스파시안 황제의 아들 디도는 반역을 진압하기 위해 로마 군대를 끌고 와서 예루살렘성을 한동안 포위하다가 약해진 틈을 타서 성을 정복하고 불을 질렀습니다. 이때 60만명의 유대인들이 학살당하고 많은 이들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장차 예수님의 재림 때에 예수님을 배척한 사람들에게 임할 심판을 나타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일 년에 세 번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에 성전에 와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본래는 각자 기르던 짐승을 가져와서 희생제물로 드려야 했습니다.(신12:5-7) 하지만 이들의 편의를 위해 감람산 4곳에 시장을 개설하여 제물에 사용할 짐승을 살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 가야바는 성전 뜰에서도 장사를 하도록 하락하였습니다. 장사하는 자들은 종교지도자들과 결탁하여 터무니없이 많은 돈을 받았습니다. 이방인의 뜰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이 와서 예배 드릴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는데 장사하는 사람들로 인해 예배를 드릴 수 없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사죄의 은혜를 덧입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는 곳입니다. 무엇보다도 만민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집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은 외형적으로는 화려하고 경건하게 보였지만 그 중심은 썩어있었습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으로 변해버렸습니다. 대제사장들은 긴 옷을 입고 경건한 척 하였으나 양들의 영혼 문제에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장사하고 정치하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양들보다 물질을 더 사랑했습니다. 성전이 이처럼 부패했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중심이 썩었다는 의미입니다. 썩은 것은 도려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46) 예수님은 며칠 후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셔야만 하지만 날마다 성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영적으로 무지한 백성들에게 구원의 길을 가르쳐주시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심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눈 앞에 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의 뜻을 섬기시며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 애를 쓰셨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지도자들은 이런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다 예수님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침을 찾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겸손의 왕이요, 평화의 왕이요, 구원의 왕이 되십니다. 이 시간 우리의 교만의 옷, 정욕의 옷, 안일의 옷을 벗고 대신에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의의 옷을 입고 주님께 모든 찬양과 영광을 돌려드리기를 기도합니다.

II. 포도원 농부의 비유 (20:1-18)
  20장 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성전에서 열심히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와서 물었습니다.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당시 예루살렘 지역은 로마총독 빌라도가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산헤드린 공회가 유대인에 대한 모든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성전은 대제사장의 관할구역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대제사장의 허락도 없이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쫓아내시고 임의적으로 백성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가르치는 내용도 종교지도자들이 볼 때 기존의 전통과 질서를 깨뜨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대제사장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로 비춰졌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역으로 질문하셨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들로부터냐(4)”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의 메시지를 듣고 많은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메시야로 영접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의 권위를 인정하면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권위도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또한 세례요한이 살아있을 때 자신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말한 것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세례요한의 권위를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 대부분이 세례 요한을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로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례요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면 백성들의 저항에 부딪칠 것입니다. 그래서 어디로부터인지 알지 못한다며 대답을 회피했습니다. 예수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말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미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온 것같이 자신의 권위도 하늘로부터 온 것임을 이들에게 증거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는데 있어서 권위문제로 문제를 삼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캠퍼스에서 자격을 문제삼으며 전도를 못하게 하는 이들을 만나서 험한 말을 들으면 화가 나면서도 위축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권위는 눈에 보이는 타이틀이나 자격증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영적 권위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복음 전파의 사명을 힘써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고 예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종교지도자들에게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가르치심으로 그들의 실체를 드러내셨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그가 또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시니라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이사야서 5장 1,2절을 보면 포도원 주인은 심히 기름진 산에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으로 떠났습니다. 여기서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 농부는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때가 이르러 포도원 주인은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기 위해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냈습니다. 포도나무는 심은 지 3년이 지나면 열매가 맺힙니다. 때가 되어 주인은 약속한 대로 소출 얼마를 받고자 종을 포도원으로 보냈습니다. 당시 소작료는 소출의 1/4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본문의 주인은 1/10만 바치도록 하였습니다. 이는 아름다운 포도원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한 주인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십일조도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예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없는 것을 무리해서 바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어떤 분은 물질 뿐만 아니라 시간의 십일조까지 드려 복음역사를 섬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내가 가진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심을 알고 하나님께서 내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감사히 여길 때 나의 물질 뿐만 아니라 시간과 모든 것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으며 나아가 삶 전체를 하나님께 기쁨으로 드릴 수 있습니다.
  농부들은 주인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인이 보낸 종들을 극진히 대접해야 마땅했습니다. 하지만 농부들은 소작료를 바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보낸 종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냈습니다. 이는 주인에 대한 모욕이었습니다. 주인은 못된 농부들을 당장에 포도원에서 쫓아내는 것이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주인은 농부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들의 어그러진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 보다 겸손하고 성숙한 종을 다시 보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은 이번에도 몹시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냈습니다. 주인은 또다시 큰 모욕을 받았지만 참고 세 번째로 다른 종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농부들은 세 번 째 종도 상하게 하고 내쫓아버렸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포도원 주인이 이르되 어찌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어찌할까’ 이는 회개하지 않고 멸망의 길을 재촉하는 농부들에 대한 주인의 안타까운 심정을 나타냅니다. 고민 끝에 주인은 아들을 보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주인은 농부들이 얼마나 악한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아들을 보낸다는 것은 큰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주인은 만일 농부들이 예우를 갖추어 아들을 영접하기만 하면 모든 죄를 용서해주고자 하였습니다. 주인은 도저히 소망 둘 수 없는 농부들에 대한 소망을 끊지 않았습니다. 이는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농부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14,15a절을 보십시오.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악한 농부들은 오히려 상속자인 아들을 죽이면 포도원이 자기들의 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아들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여버렸습니다. 주인은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농부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주인의 권한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농부들은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마땅히 주인을 공경하고 열매가 맺히면 정한 세를 바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포도원을 열심히 가꾸고 일하다보니 포도원이 마치 자신들의 것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자신들이 청지기란 사실을 잊어버렸습니다. 주인의식이 지나쳐 분수에 넘는 교만한 생각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수고를 많이 하고 세월이 흘러도 청지기가 주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인간의 가장 큰 죄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로, 감사치 않는 마음입니다. 농부들은 본래 자신들의 소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의 은혜를 덧입어 아름다운 포도원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농부들도 처음에는 아무 자격 없는 자신들에게 좋은 환경에서 좋은 조건으로 일하게 해준 것을 생각하면 감사가 넘쳤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감사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이를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탁월해서 포도원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신7:7, 9:4,5) 받은 은혜를 잊어버리고 감사하는 마음이 사라지자 죄악된 생각들이 잡초처럼 자라나게 되었습니다.
셋째로 탐욕입니다. 포도는 다른 것들에 비해 농부들의 손이 가장 많이 갑니다. 열매가 맺히기까지 농부들은 많은 수고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모든 수고는 자신들이 했는데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는 주인에게 소작료를 바치는 것이 아까웠습니다. 수고를 많이 한 만큼 열매에 대한 애착이 너무나 강해졌습니다. 그들의 욕심은 눈덩이와 같이 커지고 마침내는 아들까지 죽여 포도원을 자신들의 소유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게 됩니다.(약1:15)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노예로 살다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구원 받고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살면서 수없이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과 긍휼이 없었다면 그들은 진작에 진멸당했을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을 비롯한 유대인들은 포도원 농부들처럼 자신들이 받은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공의로움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그들의 완악함을 깨우쳐주고자 하셨지만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보내신 종들을 배척하고 때리고 죽였습니다. 하나님은 최후의 방법으로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지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영접하기만 하면 모든 죄를 용서해 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 마저도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버렸습니다. 이로써 그들은 용서 받을 수 없는 심각한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17,18절을 보십시오.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건축자는 종교지도자들과 유대인들, 버린 돌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모퉁이의 머릿돌은 집을 지을 때 기준이 되는 돌로서 이를 중심으로 새 건물이 지어집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버림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으시고 그 위에 새로운 이스라엘 공동체를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새 이스라엘 공동체를 이루는 신령한 돌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데에 쓰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는 예수님이 심판의 돌이 되십니다. 이 말씀은 1차적으로는 종교지도자들을 비롯한 유대인들에게 주시는 경고의 말씀이며 나아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주는 경고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세워진 구원의 복음을 마음으로 영접하고 말씀에 순종함으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에 쓰임 받는 삶 살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과거 자기만을 위해 살다가 멸망에 이를 자를 구원하시고 캠퍼스 포도원에서 일하게 하셨습니다. 나를 불러주신 은혜에 감사하여 나의 시간과 물질과 진심 나의 모든 삶을 투자하여 맡기신 사명에 충성하게 하시고 열매 맺는 기쁨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겸손과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참 평강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치열한 생존 경쟁만이 있는 세상에서 나의 힘과 도움이 되어주시고 때마다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주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지금까지의 나의 삶을 돌아볼 때 젊은 날 하나님의 역사에 부르심 받고 주님께 쓰임 받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 큰 은혜임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동안 주님 역사에 많이 드렸다는 자기 의가 생기고 목자로서 적당히 체면유지할 정도로 하나님의 역사를 섬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청지기의 자세를 잃어버리고 내가 나의 삶의 주인이 되어 스스로 내 인생을 책임지려는 마음이 들어왔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보다 세상일에 마음을 빼앗겨  마음이 복잡해지고 사소한 일에도 짜증이 나고 평강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들이 버겁게 느껴지고 삶이 피곤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제가 하나님과의 깊은 사랑의 관계성 속에서 하나님이 주신 풍성한 은혜를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이시며 내 인생의 주인이 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서 세상 역사를 주관하고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으로서 모든 인생들의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비천한 저를 살리기 위해 이 땅에 낮아져 오셔서 십자가에서 생명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함으로 나의 삶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림으로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귀하게 쓰임 받는 삶 살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십니다. 겸손의 왕이요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음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강을 누리며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나의 인생의 주인 되심을 깊이 영접하고 기쁨으로 나의 삶을 하나님께 드려 구원 역사에 귀하게 쓰임 받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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