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OME | 세계선교 | 각부모임 | 경성소모임 | 성경연구 | 사진자료실 | 영상자료실 | 경성쉼터 | JBF/EBF/CBF | 기타 |

회원등록 비번분실

  Bible Study  
주일예배메시지
성경공부문제지
수양회강의
특강
구약강의자료실
신약강의자료실
강의안책자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0-07-05 (일) 12:52
분 류 마태복음
첨부#1 2020년_마태복음_제18강-1.hwp (30KB) (Down:28)
ㆍ추천: 0  ㆍ조회: 394      
IP: 61.xxx.145
[2020년 마태복음 제18강]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2020년 마태복음 제 18강  
말씀 / 마태복음 12:1-21절
요절 / 마태복음 12:20절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11,12장은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세상의 반응입니다. 11장에서 세례 요한이 회의에 빠졌고, 갈릴리 사람들은 반응이 없었습니다. 12장에 오면 더 심해지는데, 예수님을 죽이려고 할 정도로 분위기가 악화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부족한 제자들을 보호하시고 사람을 회복시키는 거기에 최고의 가치를 두십니다. 이 시간 예수님을 통해 위로받고 새 힘 얻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면 배고픈 제자들이 사고칩니다.(1) 안식일인데도 밀이삭을 잘라먹은 것입니다. 제자들은 무리들의 주목받는 자리에 있었지만, 실제 현실은 무척이나 궁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의 아픈 현실에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에게 따졌습니다.(2)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저질렀습니다.” ‘하지 못할 일’이란 안식일 법을 어긴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철저히 지켜야만 유대사회를 건강하게 할 수 있다고 믿고 39개의 세부 조항을 만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마른 무화과 열매 두 개 이상의 무게를 들지 말도록 했고, 거울을 보며 흰머리를 뽑는 것도 금했습니다. 안식일에는 요리도 하지 말고 화장하느라 시간 소모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에게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을 보면 별것 아닌 사소한 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버리고 정작 중요한 것들을 놓쳐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한 인간의 본성을 생각하여 안식일에는 영적 세계에 집중할 수 있도록 세부 규칙을 만든 것입니다. 분명한 규칙이 있어야 자기중심적으로 원칙을 마구 흔들어버리는 손길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이를 깨버린 것입니다. 아무리 배가 고플지라도 ‘그래도 안식일이지’라는 생각을 했어야 하는데, ‘그래도 먹어야 산다’는 생각에 끌려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때다 싶어 예수님에게 제자교육을 똑바로 시키라며 공격해 들어왔습니다.

예수님은 유감을 표명하고 제자들을 호되게 책망해야 할 것 같습니다. “40일 금식기도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까짓 배고픔도 못 견디면 제자로 살 생각하지 마!”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을 책망하기는 커녕 다윗이야기를 꺼내어 변호하십니다.(3) 사무엘상 21장을 보면, 다윗이 사울의 박해를 피해 급하게 도망치느라 아무 것도 챙기지 못해 며칠을 굶다가 놉이란 곳에 도착했습니다. 기진맥진한 다윗은 놉의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먹을 것을 요청했는데, 제사장은 제사에 드려진 빵을 다윗에게 주었습니다. 제사장 외에는 먹을 수 없는 진설병이었는데, 다윗은 그것을 먹고도 죽지 않았습니다.(4)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주었고, 하나님이 거기에 대해 자비를 베푸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윗이야기를 하는 것은 제자들을 다윗의 레벨로 인정하신 것입니다. 다윗에게 율법을 뛰어넘는 자비가 적용되었듯이, 제자들 또한 율법을 뛰어넘는 자비가 적용되어야 할 사람들이라는 말씀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목숨을 걸고 골리앗과 싸웠듯이, 제자들도 인생을 걸고 예수님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성전의 제사장들이 안식일법에서 예외였던 것처럼, 제자들 또한 안식일법에 얽매일 필요가 없는 사람들로 말씀하십니다.(5) 성전보다 크신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6)
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니라.” ‘너희가 알았더라면’, 예수님은 호세아 6:6절 말씀의 뜻을 알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제사가 필요 없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자비가 빠져버린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은 자비입니다. 본래 제사는 죄 지은 자, 병든 자들이 하나님의 용서와 치유를 체험케 하는 자비의 상징이었습니다. 제사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자비 실천의 수단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자비를 잃어버리고 율법 자체만 고집하는 형식주의에 빠져버렸습니다. 형식으로 사람을 제어하는 거기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근본정신을 놓쳐버린 법이나 제도는 생명을 주기는커녕 생명을 해치는 도구로 악용될 수 있습니다. 성전이 하나님보다 클 수 없듯이, 어떠한 신앙전통이라도 하나님의 자비를 행하는 것보다 클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자비의 관점으로 제자들을 보았다면,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는 개념 없는 인간이 아니라, 죄인과 병자들을 섬기다가 지치고 탈진한 영혼이 보였을 것입니다. 만약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다면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먹어야 할 정도로 가난의 고통에 직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 물고기 잡으며 그럭저럭 보통 사람으로 살았을 것이며, 세리였던 마태는 맛집을 돌아다니며 다이어트를 걱정하며 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다 보니 안식일을 맞이할 준비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불안정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병든 자, 귀신들린 자들을 돕다가 정작 자신들을 돌아볼 여유 없이 살고 있습니다. 본래 바리새인들이 해야 할 그 일을 제자들이 대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바라보면, 제자들은 규칙을 어긴 천박한 자들이 아니라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눈으로 믿음의 동역자들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집니다. 가까이에 있는 사람일수록 이런 허물, 저런 약점을 발견하다보면, 오히려 멀리 있는 사람보다 판단하고 정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어떠합니까! 목자들을 보십시오. 나와 함께 믿음의 길에 서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들입니까! 일대일을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신앙의 전통을 지키고 못 지키고를 떠나 주와 복음역사를 위해 수고하는 사람들입니다. 양들을 돕기 싫어서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도와줄 양이 없어서 힘들어하는 사람들입니다. 음란하고 물질적인 세상에 끌려가지 않고자 매순간 회개하고 믿음의 방패를 붙드고자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양들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사는 것이 다 이해되지 않을지라도 목자를 신뢰하고 부모님을 존중하여 성장하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목자와 일대일을 해주어 목자를 살아있게 하고 가끔씩 문제를 일으켜 예수님을 배우게 하는 통로가 되어줍니다. 자비의 마음으로 바라보면 허물과 약점이 그리 문제되지 않습니다.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넘치면 넘치는 대로 감사하고 격려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자비를 배우는 거기에서 풍성한 기쁨과 생명력이 나옵니다. 규칙을 앞세우고 옳고 그름만 따지다 보면 생명이 없고 메마름과 고갈만 남게 됩니다. 우리는 자비의 마음으로 양들을 보고 동역자들을 보고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는 것이며 신앙의 본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8) 우리 각 사람에게 이 믿음을 따라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시길 기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메시지는 바리새인들에게 전혀 먹혀들지 않았습니다.(9) 10절을 보면 예수님이 들어가신 회당에 한 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6장을 보면 오른손 마른 사람이었으며, 외경을 보면 석공이었다고 합니다.(10) 손으로 먹고 사는 사람인데, 그 손이 말라버렸으니 인생이 얼마나 막막하겠습니까! 거대한 절망과 우울증이 한 손 마른 사람을 짓눌렀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사람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고발하고자 질문합니다.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병으로 고통하고 있는 사람을 옆에 두고도 어찌 이리 잔인한 질문을 할 수 있을까요! 한 손 마른 자의 고통을 가볍게 생각했으며, 오로지 유대사회의 틀을 유지하는 거기에만 목표를 두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저들의 의도를 가진 질문에 노코멘트로 피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침묵하지 않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탈무드에는 구덩이에 빠진 양이 응급상황이면 안식일이라도 당장 꺼내도록 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풀만 넣어주고 다음날 꺼내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다음날까지 기다려서 꺼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혹시라도 양이 구덩이에서 뒤집어지면 위에 가스가 차서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양을 끌어내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자기 양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양이 아니라면 굳이 안식일을 어기면서까지 꺼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손 마른 사람은 인생 구덩이에 빠진 하나님의 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한 손 마른 사람의 고통에 대해서는 감각이 없었습니다. 자기 문제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 손 마른 사람이 자기 동생이거나 자기 자식이었으면, 자기에게 속한 사람이었으면 딴 나라 이야기하듯 무심하게 말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1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병을 고치는 것이 옳으냐’는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고 답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반드시 선을 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돈벌이를 위해 안식일에 병을 고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병을 고치든 무엇을 하든 선을 행하는 것이 안식일을 올바로 지키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것은 사람을 구원하여 믿음으로 살도록 돕는 것, 한마디로 살리는 것입니다. 안식일 법을 만든 근본적인 목적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해야 건강한 사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법은 정신을 담을 때 참된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살리는 것인가? 거기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또한 바리새인처럼 형식주의의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도 여러 가지 중요한 전통들이 있습니다. 소감쓰기나 믿음의 결혼 같은 전통은 아름다운 정신을 기초로 만들어진 훌륭한 전통들입니다. 하지만 전통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전통을 통해 살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통을 통해 살릴 수 없고 다른 것을 통해 살릴 수 있다면, 그것이 전통을 지키는 것보다 앞서는 것입니다.

살벌한 분위기를 생각하면, 예수님은 한 손 마른 자를 은밀히 불러내거나 다음 날 조용히 고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한 손 마른 자도 고치고 충돌도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1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공개적으로 손을 내밀라고 하십니다. 한 손 마른 자를 고치면서 아울러 바리새인들을 고쳐주기 위해서입니다. 율법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았느냐, 그것만 따지고 있지 말고 적극적으로 자비의 손, 도움의 손, 섬김의 손을 내밀라는 것입니다. 율법만 따지는 사람은 절대로 사람을 살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1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도전은 바리새인들에게 감동을 주기는커녕 열받게 했습니다.(14) ‘예수가 우리 법을 완전히 무시하네! 어떻게 죽여버리지?’ 의논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저들의 생각을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셨습니다.(15) 그런데 예수님은 여전히 병자들을 고치십니다. 선한 일을 했는데도 미움 받으면 다시 선을 행하고 싶은 의욕을 상실할 수 있습니다. ‘이런 더러운 꼴 보기 싫어서라도 이젠 아무도 돕지 않을거야!’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기대하며 선을 행하였다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선을 행하였기에 흔들림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세상에 알리지 말라고 엄히 명령하시며 변함없이 자기의 길을 가십니다.(16)

마태는 그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떠올렸습니다.(17) 세상은 예수님을 오해하고 죽이려는 분위기로 가득한데, 마태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택함받은 종, 하나님이 기뻐하고 사랑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감격합니다. 18,1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성령을 한없이 부어주고 계심을 마태는 보았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이방인들을 영혼 없는 자들이라 무시했습니다.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알고 영화롭게 하는 그런 일들은 결코 일어날 수 없을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예수님을 통해 이방 세계 곳곳에 교회가 세워지고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울려 퍼질 비전을 보았습니다. 마태의 비전대로 우리 이방인들이 오늘 이렇게 모여 여호와를 찬양하며 예배하는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은 총이나 칼 같은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19절을 보면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여 아무도 그가 하시는 일을 듣지 못할 정도로 조용히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가 오시기는 한거야?’ 세상은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다투고 들레는 것은 소리 지르며 요란 떨며 행차하는 고대 왕들의 모습입니다. ‘훠이! 저리 비켜라! 왕이 나가신다’ 왕은 군대를 동원하여 강력한 힘을 과시하여 세상을 움직이고 있음을 폼나게 드러내고자 합니다. 하지만 만왕의 왕, 만유의 주 예수님은 그러한 모습으로 일하지 않습니다. 상한 자들, 고갈되어 죽어가는 자들을 찾아 한 사람 한 사람 회복시키는 거기에 첫 번째 가치를 두십니다. 한 손 마른 자를 고쳐주기 위해 모든 공격도 기꺼이 받으시고, 비난받는 제자들 편에 서서 용감하게 변호해 주십니다. 마태는 예수님을 통해 이사야 예언대로 치유와 회복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고백합니다.

2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당시 사람들은 갈대로 피리를 만들었는데, 상한 갈대는 소리를 내지 못합니다. 온전한 갈대를 고르는데 괜히 헷갈리게 하기에 꺾어 버립니다. 꺼져가는 심지는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을름을 내기에 빨리 꺼버립니다. 이는 문제 많은 특정한 인간들을 가리키는 것보다 모든 인간의 실존을 상징합니다. 인간은 덜 상하고 더 상하고, 덜 꺼져가고 더 꺼져가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상한 갈대이며 꺼져가는 심지입니다.
상한 갈대는 상처문제를, 꺼져가는 심지는 결핍문제를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배고픈 제자들은 결핍 문제를, 한손 마른 자는 상처 문제를 사건적으로 보여줍니다. 건강해보였던 사람이라도 결핍과 상처 문제를 만나면 급작스레 흔들립니다. 돈이 부족하여. 성적이나 인정이 부족하여, 자존감이나 비전이 부족하여 마땅히 지켜야 할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사정없이 무너지기도 합니다. 몸과 마음이 상하여 의욕을 잃고 푯대를 놓쳐버리고 한없는 어둠속으로 침몰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상처와 결핍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예민하면서도 타인의 상처와 결핍 문제에 대해서는 둔감합니다. 내 문제에 대해서는 너그러운 이해를 구하면서도 타인의 상처와 결핍에 대해서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정죄합니다. 마치 구덩이에 빠진 자기 양을 꺼내면서도 한 손 마른 자에 대해서는 안된다고 외치는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높은 목표, 힘있는 공동체를 지향할수록 상한 갈대나 꺼져가는 심지처럼 보이는 자들을 귀찮고 피곤한 자들로 여길 수 있습니다. 세상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연약함을 드러내는 인간을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초인사상을 주장했던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말했습니다. ‘길을 가다가 나이 많거나 병들어 잘 걷지도 못하는 사람을 보면 도와주려고 하지 말고 그를 밀어 넘어뜨려 약자와 병자를 하루 속히 사회에서 없어지게 하라’ 그의 주장은 영국이나 프랑스 혹은 러시아 같은 열강을 누를수 있는 강한 독일에 대한 열망의 표현이었습니다. 독일인들의 그러한 열망이 만들어낸 것이 히틀러이며, 세계 대전의 비극입니다. 니체의 사상은 그런 특별한 역사적 사건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현대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것도 그것과 동일합니다. ‘무한경쟁을 통하여 강한 것, 좋은 것들이 살아남게 하라. 그들이 더 나은 서비스, 더 발전된 세상을 만들 것이다.’ 개인과 개인, 기업과 기업, 나라와 나라가 적자생존을 통해 강한 것을 남기고 약한 것을 도태시킵니다. 나라가, 기업이, 개인이 좀 더 강해지라고 닦달합니다. “왜 그것밖에 하지 못하느냐 그렇게 비리비리해서 어디에 쓰겠는가!” 약한 자가 되지 말라고, 쉬지 않고 달려가는 기관차같이 살라고 채찍질을 합니다. 경쟁에서 밀리면 망할 것처럼, 희망이 없는 것처럼 압박합니다. 그렇게 경쟁에서 이기는 사람, 모임, 나라가 강한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만으로 건강한 사람과 사회를 만들 수 없습니다. 지난주 철인3종 경기 선수가 혹독한 가혹행위를 견딜 수 없어 자살하여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철인 경기를 견딜 정도로 강한 신체를 가진 사람도 죽음 같은 상처로 고통하고 있었습니다. 실은 특별히 약한 사람도 없고 특별히 강한 사람도 없습니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맞으면 고통스럽고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문제로 영혼의 병을 앓습니다. 상처를 받다보면 연약해지고 결핍 문제 앞에 흔들리고 무너질 수 있습니다.  양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믿음의 길을 가는 우리 동역자들도 그러합니다.

인간은 상한 갈대이며 꺼져가는 심지이기에 매순간 예수님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많이 부딪힐수록, 많이 고갈될수록 더욱 간절하고도 절박하게 예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늘의 위로를 받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나를 보고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매주 말씀을 공부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강한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자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도 없고 능력도 많고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가장 강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상한 갈대같은 자들을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같은 자들을 끄지 않으십니다. 아니, 대신 그 몸으로 상처 받는 자리에 서시며, 세상의 죄를 담당하기 위해 자기 생명의 불꽃을 꺼뜨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을 담당하고자 찔림을 당하고 우리의 죄악을 대속하기 위해 상함을 당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고, 우리가 맞아야 할 채찍을 대신 맞음으로 우리에게 나음을 주십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가는데,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 몸으로 담당하십니다.(사53:5,6) 예수님은 자기 상처를 통해 우리에게 나음을 주시고 자기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살 길을 주십니다. 놀라운 하나님 나라의 비밀입니다.

20절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영어성경을 보면 'lead justice to victory‘, ’승리로 인도할 때까지‘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제자들을 승리하기까지 인도하십니다. 지금 본문의 제자들은 배고픔을 참지 못해 안식일법을 지키지 못할 정도로 연약했습니다. 베드로는 그렇게 큰소리를 치고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으며, 부활을 목격하고도 갈릴리 바다로 도망쳤습니다. 세리 마태는 돈맛에 빠져 양심도 팔고 갈때까지 가보다가 절망의 끝자락에서 겨우 돌아온 사람입니다. 이들은 정의로 승리하는 인생과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들 모두 주와 복음역사를 섬기다가 순교했습니다. 배고픔을 참지 못하던 제자들이 죽음의 고통을 견디어 내었고, 세상이 무서워서 도망치던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습니다. 돈맛을 좇아 살던 마태가 예수님을 증거하고자 이방세계에 나아가서 죽기까지 복음을 전합니다.(21) 상한 자를 치료하시고 꺼져가는 자를 불꽃처럼 일으키시는 예수님의 손길입니다. 우리가 주와 복음역사를 위해 헌신하는 것도 그러하지 않습니까! 완벽한 인간이어서 목자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상황이나 사람들만 생각하면 운명적 혹은 부정적인 생각에 빠집니다. 그러나 약한 자들과 성령으로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약한 자들의 하나님이 되셔서 그들을 고치시고 강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예수님을 따라 상한 영혼, 꺼져가는 영혼을 돕기에 힘써야겠습니다. 상처 입은 사람들은 예민하고 결핍되어 있는 사람들은 그을음처럼 힘든 것들을 뿜어냅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는 것 자체가 힘들고 내 영혼의 독이 될 수 있습니다. 비대면을 추구하는 코로나 시대처럼 그냥 멀찍이 떨어져 각자 자기 인생 자기가 알아서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아픔도 없지만 회복도 없고, 결핍을 느끼지 못하지만 충만히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자비를 베풀고 사랑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긍휼의 손, 소망의 손, 기도의 손을 내미는 사람, 그런 모임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소망이 예수님안에 있습니다. 우리 모임이 그러한 소망을 담아내는 영적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번 여름수양회가 예수님의 손길로 말미암아 영혼이 건강하지고 충만히 채워지는 복된 수양회가 될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까지도 예수님을 소망하는 역사가 우리를 통해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21) 주님의 한없는 은혜와 긍휼을 감사 찬송드립니다. 기도합시다.
  0
3500
번호     글 제 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672 하박국 [2020년 추수감사절 특강]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관리자 2020-11-15 367
671 마태복음 [2020년 마태복음 제35강]화 있을진저 관리자 2020-11-08 344
670 마태복음 [2020년 마태복음 제34강]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관리자 2020-10-31 382
669 마태복음 [2020년 마태복음 제33강]임금의 아들의 혼인 잔치 관리자 2020-10-25 323
668 마태복음 [2020년 마태복음 제32강]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관리자 2020-10-18 350
667 마태복음 [2020년 마태복음 제31강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 관리자 2020-10-11 396
666 마태복음 [2020년 마태복음 제30강]섬기러 오신 예수님 관리자 2020-10-04 441
665 마태복음 [2020년 마태복음 제29강]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관리자 2020-09-26 591
664 마태복음 [2020년 마태복음 제28강]영생을 얻으려면 관리자 2020-09-20 349
663 마태복음 [2020년 마태복음 제27강]용서하라 관리자 2020-09-12 372
662 마태복음 [2020년 마태복음 제26강]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 관리자 2020-09-06 562
661 마태복음 [2020년 마태복음 제25강]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관리자 2020-08-30 439
660 마태복음 [2020년 마태복음 제24강]주는 그리스도 관리자 2020-08-22 436
659 마태복음 [2020년 마태복음 제23강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 관리자 2020-08-16 383
658 요한복음 [2020년 여름수양회 주제5강]내 안에 거하라 관리자 2020-08-09 308
657 요한복음 [2020년 여름수양회 주제4강]길, 진리, 생명 관리자 2020-08-08 240
656 요한복음 [2020년 여름수양회 주제3강]다 이루었다 관리자 2020-08-08 250
655 요한복음 [2020년 여름수양회 주제2강]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관리자 2020-08-08 242
654 요한복음 [2020년 여름수양회 주제1강]빛 되신 예수님 관리자 2020-08-08 253
653 마태복음 [2020년 마태복음 제22강]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 관리자 2020-08-02 346
12345678910,,,37
서울 동대문구 이문2동 264-231
Tel:070-7119-3521,02-968-4586
Fax:02-965-8594
서제임스목자님메일:Suhjt@hitel.net
[UBF한국본부] [유럽UBF] [UBF국제본부] [UBF TV] [시카고UBF] [Mother Barry's Homepage]
[뉴욕UBF] [워싱턴UBF] [노스웨스턴UBF] [콜롬비아UBF] [코스타리카UBF] [프랑크푸르트UBF]
[키에프UBF] [상파울루UB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