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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4-03-09 (일) 12:40
분 류 마태복음
첨부#1 2014_마태6강-1(오정훈).hwp (30KB) (Down: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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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마태복음 제6강]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2014 마태복음 6강                                                                             오정훈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말씀/마5:17-48
요절/마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아버지는 자식이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하길 간절히 기대하고 소망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수준에 미치거나 그 이상의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할 때 말할 수 없는 기쁨과 보람을 느낍니다. 육신의 아버지도 그러한데 하늘의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하실까요? 하나님도 그 자녀된 우리가 아버지를 따라 온전함에 이르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아버지의 온전하심이 어떠한지 배우고 우리 내면이 하나님의 자녀다운 성숙한 사람들로 자라나게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첫째, 율법을 완전하게 하러 오신 예수님(17-20)
  17절을 보십시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당시 사람들이 볼 때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 곧 구약 말씀을 폐기하러 온 분처럼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고 죄인들과 같이 식사하시며 일주일에 두 번 금씩 하라는 규례를 지키지 않으시고 제자들과 함께 혼인집 돌잔치 집 등에서 식사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예수님의 모습에서 구약말씀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닌가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 오셨습니다. 완전하게 한다는 것은 꽉 차도록 채운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궁극적인 목표 곧 지금까지는 이만큼만 지켰다면 예수님 안에서는 이제는 완전하게 그 의미와 목표까지 다 지키게 하겠다는 것을 말합니다. 행위로서만 율법을 지키던 데서 이제는 마음으로서 온전히 율법을 지킴으로 완전하게 하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완전하게 하심은 하나님의 온전하심에 이르는 시작이요 마침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하나님의 의를 완성하셨습니다. 불완전하고 연약한 우리 인생이 완전하여 지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 안에서만 가능할 뿐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일점은 히브리어에서 가장 작은 문자인 ‘요드’를 말하고 일획은 히브리어 글자에서 내리긋는 갈고리모양을 가리킵니다. 결국 일점일획은 성경의 아주 작은 부분을 가리키는 것으로 예수님은 이 소홀히 하기 쉬운 부분까지도 간과하지 않고 다 이루실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를 믿는 자는 이것을 때고 붙여서 나름대로 지켜서는 안되고, 있는 그대로 지켜야 됩니다. 대개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말씀은 일점일획도 떨어뜨리지 않지만 부담스러운 말씀, 불편한 말씀은 일점일획을 떨어뜨려 자기 나름대로 지키고자 합니다. 이는 율법을 자기편에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킬 수 있을까 없을까, 나에게 유익이 될까 손해가 될까 계산합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게 될 것이고 누구든지 이를 행하여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게 될 것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보통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당시 경건의 아이콘들로서 모세 오경을 암송하고 일주일에 두 번 금씩하며 하루에 세 번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한 끼만 굶어도 힘든데 그들은 매주 두 번씩 금식하는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의 의가 그들의 의보다 더 낫지 않으면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들의 의는 어떤 의입니까? 그들의 의는 겉으로는 대단하나 실제는 사람 앞에서의 의이며 율법 조문에 매인 의였습니다. 행위 그 자체를 한 것으로 전부로 삼았습니다. 십일조를 드리고 기도를 한 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의는 행동을 넘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행위에 담긴 의는 지극히 적습니다. 부분적입니다. 하나님께서 행위를 규정해 놓으신 것은 그것을 통해 새로운 관계성을 맺도록 하심이었습니다. 우리가 소감을 쓰는 것도 그런 목적 때문입니다. 그것이 완전한 의입니다. 결국 완전하다, 더 낫다는 의미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얼마나 견고하고 깊어졌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겉으로 드러난 행동보다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중심에 믿음이 비뚤어지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은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사랑하고, 일점일획이라도 귀히 여기며 두렵고 떨림으로 순종하고자 애를 씁니다. 이런 점에서 신앙생활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수준에 머물러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완전하고도 더 나은 세계로 나가게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둘째, 살인하지 말라(22-26)
  구약 시대에는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습니다. 그 살인은 실제로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 이는 다분히 실정법 중심의 계명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계명을 어떻게 해야 진정으로 지킬 수 있는지 말씀해 주십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라가는 아람어로 ‘레카’라는 단어로서 ‘골빈 놈’, ‘멍청한 놈’이란 뜻입니다. 미련한 놈이란 몸과 감각이 떨어져 빨리빨리 좇아가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비어입니다. 사실 이런 욕은 요즘에는 욕의 축에도 끼지도 못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도 노하면 심판받고 라가라고 하면 공회의 심판을 받고 미련한 놈이라 하면 지옥불에 들어가게 된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살인이 형제에 대한 분노와 그 표현에서 시작됨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말로 표현 안할 뿐이지 이런 분노의 감정, 살인의 감정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속으로 ‘한번만 더 걸리면 죽여버린다’, ‘저 인간 죽었으면 좋겠네’ 생각합니다. 영화제목도 ‘복수는 나의 것’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특히 인터넷 댓글은 사람을 죽이는 언어폭력의 장으로 이용된 지 오래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아시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마음의 분노, 살인감정 여기서부터 실제로 살인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감정과 언어폭력을 회개하고 다스릴 때 진정으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는 것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23,24절을 보십시오. 예물을 드리러 가다가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면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그 형제와 화목하고 나서 예물을 드리라 하십니다. 유대 사회에서 예물을 드리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는데 예수님은 그것보다 형제와 화목하는 것 이 더 중요하다고 하십니다. 형제를 화나게 하고 관계가 틀어져 있는데 예물을 드린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런 예물을 받으실 리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화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25,26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은 고대 세계의 법적 관행을 빌려온 비유적 표현으로 당시 어떤 사람이 소송에 걸리면 법정에 도착하기 전에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고 합니다. 이는 법정에서는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고 오직 형의 선고만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살인하면 어떻게 됩니까? 감옥에 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에 살인의 감정, 분노를 품고 있으면 결국 재판관이신 하나님께 넘겨져 심판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재판관에게 넘겨지기 전 곧 심판대 앞에 서기 전에 분노와 미움의 감정을 해결해야 합니다. 그것이 구원의 길이고 생명의 길입니다. 우리는 마음에서부터 누군가를 미워하고 증오하며 살인의 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는지요? 우리가 살인의 동기가 되는 분노와 미움을 버리고 형제와 화목하므로 사람을 죽이는 대신 사람을 살리는 역사에 쓰임 받게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셋째, 간음하지 말라(27-32)
  27,28절을 보십시오. 법적으로 정상적인 부부가 아닌 남녀간의 성관계를 간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다고 하십니다. 음욕을 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음란한 마음으로 여자(남자)를 보는 것을 말합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이런 위험을 알고 클린턴 여사의 초청을 정중히 거절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미모의 여인과 단 둘이 식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음욕은 단지 남자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요즘은 여자들의 유혹도 많다고 합니다. 이 시대는 참으로 음란한 시대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중매체는 우리를 음란으로 인도하는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 하다가 클릭 한번만 잘못하면 음란의 바다에 빠지게 되고 스마트폰을 통한 죄악된 동영상이 넘쳐납니다. TV에서도 불륜과 이혼을 주된 소재로 하는 막장 드라마가 욕을 먹으면서도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한 성범죄가 넘쳐나고 있는데 이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범죄는 결과일 뿐 그 원인은 마음에 따로 있습니다. 마음을 자극하는 눈에, 육체의 느낌을 달콤하게 전달하는 손에 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눈을 빼어 버리고 손을 찍어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29,30절을 다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암이나 당뇨병에 걸려서 합병증이 심하면 잘라서라도 살고자 합니다. 썩은 것, 병든 것들 다 잘라내어 버립니다. 이 땅에서 살기 위해서도 그렇게 하는데 빼어내고 찍어버려서라도 가야할 곳이 천국이라면 더욱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는 그런 절박한 마음으로 죄와 싸워야 함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31,32절을 보십시오. 모세는 남자가 아내와 갈라설 때 이혼증서를 써줌으로써 연약한 여인이 보호받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남편들이 이것을 합법적인 이혼 수단으로 악용하였습니다. 이렇게 한 것 또한 간음이 그 동기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는 것도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버림받은 여인에게 장가드는 것도 그러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혼하는 사람들을 보면 성격차이 등 여러 가지 이유를 대지만 99%가 정욕의 죄 때문입니다. 간음은 이처럼 한 사람의 인격을 파괴할 뿐 아니라 가정을 파괴하고 사회와 국가를 무너뜨립니다. 간음은 마음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으로 마음에서부터 철저하게 막아야 합니다. 마음에서부터 막지 않으면 정욕의 노예가 되어 무서운 죄를 짓고 심판에 이르게 됩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빠져 은근히 음욕을 즐기며 겉으로만 고상한 척하는 위선자가 되기 쉽습니다. 우리가 이를 어떻게 극복하고 이길 수 있습니까? 시편119:9절은 말씀합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내면에 있으면 거룩한 소원이 생겨 육신의 소욕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때를 따라 성경말씀을 묵상하므로 거룩한 소원을 덧입어 죄의 소욕을 이기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음란한 시대를 핑계하여 은근히 죄를 즐기지 않고 그의 피를 힘입어 피 흘리기까지 싸우므로 거룩한 주의 백성들로 서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넷째, 맹세하지 말라(33-36)
  33절을 보십시오. 옛 사람은 말하기를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습니다. 어렸을 때 국기에 대한 맹세, 나의 맹세 등등 여러 가지 맹세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여러 가지 맹세를 하는 것은 맹세를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신뢰감을 주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불신이 클수록 맹세의 강도가 커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으면 더 세게 맹세를 합니다. ‘내가 손에 장을 지진다’든지 ‘내가 사람이 아니다’라고까지 합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의 말을 믿어주길 바랍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놓고 맹세를 지킨 사람은 별로 없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아예 맹세하지 말라 하십니다. 34-36절을 보십시오. 하늘로도 하지 말고 땅으로도 하지 말고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그것들이 하나님의 보좌요 발등상이며 큰 임금의 성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자기 머리로는 더욱 맹세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 머리터럭 하나도 스스로는 희고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맹세하는 대신에 믿음만한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예이면 예 아니면 아니오 하는 분명하고도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상대방이 맹세하지 않아도 그 사람을 믿어줄 것입니다. 이에서 지나가는 것은 다 악으로 나오는 것으로 곧 과장되게 말해서라도 상대방을 믿게 하려는 악한 의도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보복하지 말라(38-42)
  구약에서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으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보복에 대한 하나님이 정하신 기준입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는다는 것은 부당하게 보복하지 말라는 것이지 이 정도로 보복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울러 감정을 개입시키지 말고 공정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상대방에게 피해를 입었을 때 감정이 개입되기 쉽습니다. 눈 하나 상했는데 상대방의 눈 두 개를 다 뽑아버리고 싶어지고 앞니 한 개가 부러졌는데 상대방의 어금니까지 다 부러뜨리고 싶어집니다. ‘복수는 나의 것’이란 영화를 보면 장기 밀매단에게 사기를 당해 자신의 콩팥과 천만원을 잃은 주인공 류는 잔인하고도 무서울 정도로 그들에게 보복해 버립니다. 이런 보복은 결국 보복이 보복을 부르는 악순환을 만들어 내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를 아시고 새로운 계명을 주십니다. 39절을 다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우리는 악한 자를 보면 일벌백계해서 본때를 보여주어야 공의가 서고 속이 시원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하십니다. 오히려 오른 뺨을 때리거든 왼뺨도 돌려대라 하십니다. 오른손잡이가 오른뺨을 때리려면 손등으로 쳐야 하는데 이는 유대사회에서 가장 모욕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왼뺨을 돌려댄다는 것은 보복을 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상대방의 의사에 완전히 자신을 내맡기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그치지 않으시고 나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고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고자 하는 자와 십리를 동행하며 구하는 자에게 꾸어주고 거절하지 말라 하십니다. 솔직히 이는 우리 인간의 본성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하라고 하시는 것은 눈뜨고 억울하게 당하라는 뜻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말씀입니다. 신자에게는 비범한 자세와 하나님의 공의를 믿는 참된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원수 갚은 것이 내게 있으니 네가 갚으리라(신32:25)’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갚으셔야 제대로 갚는 것이지 내가 갚는다고 제대로 갚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믿음으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이삭은 이런 믿음으로 우물을 양보함으로써 결국은 자신을 괴롭히던 아비멜렉에게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악이 승하고 선이 짓눌려도 선은 반드시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절대 선이신 하나님께서 그 선한 주권을 믿고 선을 행하는 자에게 최후의 승리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이 하나님을 믿고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이겨서 참된 승리를 체험하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여섯째, 원수를 사랑하라(43-48)
  예수님은 제자들의 사랑이 어느 수준까지 이르러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43,44절을 다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이웃에게는 사랑을, 원수에게는 미움을’이라는 구호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것이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사실 사람이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사랑할 사람, 미워할 사람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 몸의 세포하나하나에 새겨진 생존의 법칙, 본성의 법칙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우리 본성을 거슬러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하십니다. 이는 참으로 어려운 말씀이고 어떻게 보면 불가능해 보이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포기하고 본성대로 행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 하심으로 원수라는 목록을 우리 마음에서 지워버리도록 하십니다. 사람이 남을 미워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마음에 미워하는 사람의 리스트가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곧 이 사람은 사랑할 수 없는 사람, 반드시 미워해야 하는 사람이라고 마음에 정해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리스트를 지워야 합니다. 45-47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고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동일하게 내려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는 미워할 자, 사랑해야 할 자라는 리스트가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악인이나 의인에게 동일한 은혜를 베푸시고 동일한 사랑을 나타내십니다. 우리가 만일 나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한다면 아무런 상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는 세리도 하는 것이고 이방인들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더 수준 높은 마음을 가지고 고차원적인 사랑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우리 본성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반드시 배워야 합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시작되었고 독생자를 보내심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 자체가 원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만 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원수마저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으로부터 원수사랑, 주는 사랑, 내게 없는 사랑을 배우라고 하십니다. 그로 말미암아 제자들에게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보다 더 나은 의를 가지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과연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원수같이 구는 사람, 우리를 대적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본성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원수 같은 나를 사랑하신 십자가의 사랑을 덧입을 때 그 사랑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반발심과 완악함으로 원수같이 행하던 나를 감당해주신 십자가의 은혜를 날마다 덧입으므로 남을 미워하고 저주하는데서 긍휼히 여기고 기도해 주는 사랑의 사람들로 변화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예수님은 신자가 어느 정도 수준에까지 이르러야 하는지 결론적으로 말씀하여 주십니다. 다 같이 48절을 읽어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 같이’ 이 말씀은 우리 신자의 정체성을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이 있어야 세상 속에서 완전한 의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온전하라는 것은 영어로 perfect인데 이는 도덕적인 면에서 완벽한 사람이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그 사랑과 의에서 완전해지라는 의미입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물고기나 잡던 제자들, 예수님의 첫째 자리에 앉기 위해서 유치하게 싸움이나 하던 제자들에게 이런  비전을 두셨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나의 인생에도 이런 수준 높은 비전을 두고 계십니다. 우리를 그냥 그저 그렇게 하루하루 먹고 마시고 인생을 즐기는 것이 다 인 존재로 여기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존의 문제, 먹고 사는 문제에 올인하여 살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내게 두신 목표, 더 나은 의, 더 온전한 삶을 향해 나아가야겠습니다. 우리가 생존경쟁이 치열한 세상에서 먹고 사는 일에 매여 겨우 율법지키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십자가의 은혜를 힘입어 하나님의 온전하심에 이르는 주의 백성들이 되게 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저는 대단하지는 않지만 애들이 저만큼 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많았습니다. 밥도 저만큼 잘 먹고 운동도 저만큼 좋아하고 특히 수학을 저만큼 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도대체 누굴 닮았는지 수학공부 하는 것이 다들 신통치가 않았습니다. 그나마 막내애가 요즘 탁구를 배우며 날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게 되어 기쁨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며 애들 흉볼 일이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아야 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온전하심을 좇아 온전함에 이르도록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하는데 저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몇 가지 자기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만족하는 바리새인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에는 사랑과 은혜 대신 좋아할 사람, 미워할 사람을 정해놓고 지냈습니다. 한번 마음이 돌아서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쳐다보지 않았는데 치과에서 환자들에게도 그러하였습니다. 이는 타고난 성정이라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원수같이 대적하고 반발하던 죄인을 오래 참으시고 감당하여 주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을 생각할 때 제가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음을 깨닫고 회개하게 됩니다. 제가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힘입어 감히 원수도 사랑하는 사랑의 사람의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이를 통해 미움과 증오로 사람을 죽이는 험악한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으로 생명을 살리는 역사 가운데 쓰임 받을 수 있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그 온전하심 같이 우리가 온전해지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심은 그 거룩하심과 원수까지도 사랑하시는 사랑에 있습니다. 우리가 행위의 의로 만족하는 바리새인의 수준에 머물지 않고 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완전한 사랑에 이르는 완전한 의를 추구하길 기도합니다. 이를 통해 음란한 시대를 이기고 거룩함과 하나님의 사랑으로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는 역사에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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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7 고린도전서 [2012년 가을학기준비특강 제3강]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관리자 2012-09-16 3042
716 요한계시록 [2009년요한계시록제8강]회개를 거부한 사람들 관리자 2009-10-25 3032
715 누가복음 [2012년 성탄예배] 큰 기쁨의 좋은 소식 관리자 2012-12-23 3031
714 로마서 [2012년 로마서 제2강]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세상 관리자 2012-10-14 3031
713 누가복음 [2012년 여름수양회 주제1강] 잃은 자를 찾으러 오신 예수님 휴화산 2012-07-18 3030
712 창세기 [창세기 영어예배 2강] 리스닝 2010-02-11 3030
711 마가복음 [2012년 가을학기특강]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관리자 2012-09-30 3029
710 마태복음 [2010년 성탄 3강]아기께 경배하세 관리자 2010-12-19 3028
709 마태복음 [2014년 마태복음 제6강]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관리자 2014-03-09 3027
708 골로새서 [2013년 골로새서 제3강] 위의 것을 찾으라 관리자 2013-09-08 3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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