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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9-04-12 (일) 17:13
홈페이지 http://ksubf.com
분 류 요한복음
첨부#1 2강_나는_부활이요(2)원규연.hwp (38KB) (Down:362)
ㆍ추천: 0  ㆍ조회: 3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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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부활절수양회 2강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원규연
2009년 부활절 주제 2 강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원규연

말씀/요한복음 11:1-44
요절/요한복음 11: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죽은지 4일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십니다. 이는 앞으로 다가올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예표하는 사건입니다. 이를 통해서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의 주가 되심을 드러내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시간 이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죽음 권세를 이기고 능력 있는 삶, 영광스러운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1-16)
 1절을 보십시오. 감람산 동쪽에 있는 작은 마을 베다니에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 삼남매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 중 마리아는 예수님께 향유를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겨드렸던 진심이 많은 자매님이었고 마르다는 예수님을 초청해서 맛있는 식사로 섬겨드리던 자요 나사로도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자였습니다. 이들 삼남매는 일찍 부모님을 여의었으나 예수님께서 그들의 목자요 아비가 되어 주심으로 그들은 밝고 소망찬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사로가 시름시름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앓아 눕게 되었습니다. 그 병은 심상치 않았습니다. 하루하루 병세가 심해지더니 호흡부전 증세까지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원인 모를 병으로 죽어가는 오빠를 보며 두 동생들은 애가 탔습니다. 그 누이들은 곧 예수님의 도움을 받고자 사람을 예수님이 계신 곳에 보내었습니다. 그리고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두 자매는 위급한 상황만 알려도 예수님께서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오실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후 나사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곧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거짓말을 하신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는 나사로의 병이 죽음으로 끝나는 병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무언가 다른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나사로의 죽음이 하나님의 영광과 연결된다니 참으로 심오한 말씀입니다. 영화에서 보면 반전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큰 반전이 기대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십니다. 우리가 3차원 세계에 산다면 예수님은 4차원 이상에 사십니다. 시공간을 초월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때로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일희일비합니다. 우리가 아는 지식과 경험의 한계에서 판단하고 절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자신의 처음과 끝을 모두 알고 우리를 가장 선하게 인도하십니다.
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셨습니다. 사랑하셨다는 것을 계속 강조하십니다. 오해의 소지가 있을까봐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이틀을 더 머무셨습니다. 이는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고생좀 해봐라 이렇게 놔두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하시기 때문에 가장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하심입니다. 가장 좋은 것 그게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부활의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마르다와 마리아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부활에 대한 믿음을 심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단지 병에서 나음을 받는 문제가 아니라 그런 문제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해결책을 보여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전에 부활을 암시하는 말씀을 자주 하셨지만 제자들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도무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실제적인 사건을 통해서 부활의 믿음을 심으실 때가 되었음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때때로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고자 이틀을 유하시기도 하십니다. 내 생각에는 지금 당장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기도하지만 응답을 쉽게 받지 못할 때 답답하고 어두운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조급해 합니다. 그러나 이때 인내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뜻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누구보다도 나를 사랑하시고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예비하고 계시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성숙한 신자는 구름만 보고 절망하지 않고 구름 뒤에 찬란히 빛난는 태양을 바라봅니다.
이틀 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유대로 다시 가자"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얼마 전 예루살렘에서 당신과 하나님이 하나이라고 하자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모독했다며 예수님을 돌로 치고자 하였습니다. (10:30,31). 예수님께서 그런 유대인들이 있는 곳으로 다시 가자고 하시니 제자들 눈에는 유대인들이 던진 짱돌이 눈에 어른거리고 오금이 저려왔습니다. 제자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도 부활의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 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여기서 '세상의 빛' 은 생명의 주관자이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만물의 창조주요 만물을 그 뜻대로 주관하시는 주권자이십니다. 참새 한 마리도 이 예수님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는데 하물며 제자들의 생명이겠습니까? 제자들의 생명은 유대인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세상의 상황을 바라봤기 때문에 두려움과 어두움에 빠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곁에 있어도 믿음이 없으면 예수님의 빛의 인도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어두움의 권세자 사단의 종이 되어서 결국에 실족하고 멸망의 길을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빛되신 예수님은 우리와 말씀으로 함께 하시고 기도로 동행하십니다. 이 예수님을 붙들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실족케 할 수 없습니다. 다윗은 노래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11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합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잠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하고 밝히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관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신자가 가져야 할 죽음관이기도 합니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 아닙니다. 새로운 시작을 하기 위해서 에너지를 충전하는 잠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는 것을 사모하지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레지던트 생활을 해야 할 김태영 목자님이 가장 사모할 것은 아마 잠일 것입니다.
신자들에게 죽음은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로 가는 통로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관점에서 죽음을 바라보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특히 사명인 에게 있어서 죽음은 결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사명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마치고 푹 쉬는 것입니다. 우리 평신도 목자님들은 주일예배 후 3층 형제 도서실에서 꿀 같은 잠을 주무시는 분이 많으십니다. 이렇게 한숨 자고 나야 소감도 쓰고 다시금 말씀도 받고 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래도 죽음이 두려우십니까? 예 솔직히 아직도 두렵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다 같이 읽어 보시겠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과 사람들이 부활의 믿음을 가질 것을 보시고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하였습니다. 그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비장한 각오로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였습니다. 그의 의리와 충성심은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부활믿음이 없는 그는 큰소리는 쳤으나 여전히 떨고 있었습니다.

Ⅱ.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17-27)
 1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살고 있는 베다니 마을에 가셨을 때 나사로는 죽어 무덤에 넣어진 지 벌써 나흘이나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들은 마르다는 얼른 일어나 예수님을 맞이하러 동구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울며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흑흑흑"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 안 계셨던 것이 너무 안타깝고 그 운명이 야속해서 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하였습니다. 그녀는 오라버니가 죽어서 모든 것이 끝난 상황이지만 예수님은 지금이라도 뭔가를 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마르다의 말을 듣고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는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에 마르다는 다시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대답합니다. 이를 통해서 볼 때 마르다의 문제가 드러납니다. 그녀는 계속 안다고 말하고 있지만 실은 아는 것이 없습니다. 어떻게 부활의 세계를 알 수 있겠습니까? 부활은 재창조입니다. 피조물중의 하나인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알 수 있겠습니까? 히브리서에 보면 하나님의 창조를 아는 것은 믿음으로 안다고 되어 있습니다. 믿을때 비로소 알수 있는 것이지 처음부터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끔 ‘알아야 믿지’ 라고 우기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 분은 결코 믿음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마르다에게 말씀하십니다. 25,2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마르다가 믿음을 가지도록 도우십니다. 예수님은 현재형을 써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라 하심은 예수님 안에 부활과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생명은 죽음을 이긴 참 생명을 의미합니다.
아담 이후 죽음은 세상의 모든 사람을 지배해 왔습니다. 세상에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죽음 앞에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말도 있습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할 것 없이 언젠가는 죽게 됩니다. 또 올때는 순서가 있었지만 갈때는 순서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죽음 앞에서 벌벌 떨며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죽음은 살아 있는 사람도 지배하여 무기력한 삶을 살게 만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라고 선포하십니다. 이는 인간의 가장 큰 두려움의 대상이요 사단의 공격무기인 무기인 죽음을 박살내시고 새 역사를 창조하신다는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선전포고이십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누리게 될 부활후의 생명은 어떠한 것입니까? 그것은 완전하고 영원한 생명입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생명은 유한하고 불완전합니다. 약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하고 기력도 쇠하게 됩니다. 흰머리와 뱃살과 주름살이 늘고 눈은 침침해지고 이도 빠지고 기억력도 나빠집니다. 감기만 걸려도 골골댑니다. 정신적으로도 많은 스트레스에 시달립니다. 근심과 염려와 두려움 속에서 사는 날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활후의 생명은 다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는 부활후의 모습에 대해서 말합니다.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우리에게 부활의 생명에 대한 참 소망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은 우리 인생들에게 놀라운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다시 살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네가 이것을 믿느냐" 우리가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으면 죽어도 살게 됩니다. 또 살아서 믿는 자는 영생을 얻기 때문에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네가 이것을 믿느냐?" 고 질문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이것을 아느냐? 묻지 않으시고 믿느냐? 질문하십니다. 이는 지식에 관한 것이 아니요 믿음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세계는 이해하고 알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알수 있는 세계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이요 생명이지만 이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부활과 생명이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예수님 안에 있는 부활의 생명력이 나에게도 생기게 됩니다. 부활의 영광과 소망이 나의 참 소망이 됩니다. 세상의 거짓된 소망을 버리고 참 소망을 붙들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자신이 현재 부활이요 생명이신 것을 말씀하시자 마르다는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하고 예수님께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녀는 고백이 ‘아나이다’ 에서 ‘믿나이다’로 바뀌었습니다. 그녀는 이제 부활의 믿음을 덧입고자 하는 소원이 생겼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부활의 믿음에 대해서 바라고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3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 앞에 울음바다가 펼쳐졌습니다. 이때 예수님도 눈물을 흘리셨습니다(35). 그러나 예수님의 눈물은 사람들의 눈물과는 다른 의미였습니다. 죽음의 권세에 눌려 있는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눈물이었습니다. 어떤 유대인들은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나사로는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는가?" 하며 예수님의 능력을 의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이렇게 불신의 말을 하는 자들을 보실 때 또 다시 심령에 통분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나사로가 묻혀 있는 무덤으로 가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묘는 산이나 언덕 같은 곳에 굴을 만들어서 시신을 넣어두고 입구를 큰 돌로 막아두었습니다. 39절을 보십시오. 나사로의 무덤에 가신 예수님은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죽음 권세에 도전해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죽음권세와 정면으로 싸우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마르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그녀는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하고 예수님을 만류하였습니다.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다는 것은 완전한 죽음을 말합니다. 법의학적으로 볼 때 더운 나라에서 시체가 4일이 되었다면 이미 시체의 부패가 일어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4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예수님께서 이렇게 그의 불신을 책망하시고 믿음을 갖도록 도우셨습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믿는다는 것은 나의 경험의 세계, 이성의 세계를 뛰어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험해 보지 못한 차원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믿는 다는 것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 마르다에게 필요한 것은 돌을 옮기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불신앙을 책망 받은 후 마르다는 무덤의 돌을 옮겨 놓았습니다(41a). 그녀가 돌을 옮겨놓은 것은 내면의 불신의 돌을 옮겨 놓은 것이요, 부활의 권능자이신 예수님의 능력을 믿고 사망권세에 도전한 것이었습니다. 그녀가 이렇게 믿음의 순종을 드리자 예수님은 그 순종을 받으시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하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무덤 속을 향해서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덤 속에서 잠자고 있는 나사로를 깨우듯이 큰 소리로 그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44절을 보십시오. 죽었던 나사로가 시신을 쌌던 베로 동여진 채 살아 나왔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은 나사로에게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죽음권세를 파하시고 사망에 삼키웠던 그를 구원해주셨습니다. 이로서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의 주가 되심을 세상에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지금은 전세계적인 경기 불황으로 여기저기 힘들고 죽겠다는 소식이 끊이지 않습니다. 청년들은 취업전쟁을 하고 직장인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상사들의 눈치를 봅니다. 사람들은 영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고 캠퍼스 지성인들을 섬기는 우리모임도 이제는 학생 양 한 사람보기 힘든 지경이 되었습니다. 저도 어느덧 ‘해도 안된다. 양 없는게 속편하다’. 만성 무기력증과 패배주의에 빠져 있게 되었습니다. ‘저 양은 저래서 안되고 이양은 이래서 안되고 그 양은 그래서 안돼’ 하며 판단하였습니다. 양 앞에 있는 돌을 치워서 예수님을 만나게 하기는커녕 나오기 싫으면 관두라고 해 하며 양들을 방치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병원 생활이 피곤하고 힘들다며 영적으로 나태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저도 저만의 무덤속에 들어가고 싶을 때가 많았습니다. 부활의 믿음이 없는 저의 내면은 두려움과 어두움속에 있었습니다. 미국에 가는 비행기를 타고서도 난기류에 비행기가 심하게 흔들릴 때 죽음의 공포가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현미경으로 암세포를 보면서 내 몸 어디에서도 저런게 자라고 있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 하였습니다. 얼마전 어머니가 어지러움 증으로 응급실에 오셨는데 저는 혹시 중풍이 아닌가 두려움으로 마음을 졸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저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주님은 제가 부활의 믿음을 덧입도록 도와주십니다. 세상 세력에 도전하게 하십니다. 제 마음의 불신의 돌을
부활의 믿음도 없이 믿음이 있는 척 살고 있는 제게, 하나님보다도 사람을 두려워하는 제게 말씀하십니다. 제가 고백합니다. 주님은 현재 저의 부활이요 생명 되심을 믿습니다. 저는 마르다와 같이 고백을 하지만 실제 삶 가운데, 문제 가운데 부딪히면 또다시 망설일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주님의 말씀을 새겨 듣고 현실의 문제 앞에서 돌을 치우는 자가 되겠습니다. 그리하여서 실제적으로 부활을 체험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믿음을 갖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은 죽음 권세에 갇혀 사는 모든 인생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자기 이름을 넣어서 한번 소리쳐 보시겠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부활의 생명과 영광, 죽음을 이기는 권능을 줄 테니, 영광스럽고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해 줄 터이니 그 무덤을 박차고 나오라고 하십니다.
캠퍼스 목자로 부르심 받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고 무덤의 돌을 옮기는 것입니다. 양들의 문 앞에 있는 돌을 치워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돌을 옮기는 것이 목자의 믿음과 힘이 많이 드는 일입니다. 때로는 그 양들 앞에 있는 돌이 태산만하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덤 속에 있는 자는 결코 스스로 자신의 돌을 옮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목자의 존재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 어떤 양도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면 살아날 수 있음을 믿고 하나님을 믿고 돌을 옮겨야 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현재 부활이요 생명이 되십니다. 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부활의 생명력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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