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OME | 세계선교 | 각부모임 | 경성소모임 | 성경연구 | 사진자료실 | 영상자료실 | 경성쉼터 | JBF/EBF/CBF | 기타 |

회원등록 비번분실

  Bible Study  
주일예배메시지
성경공부문제지
수양회강의
특강
구약강의자료실
신약강의자료실
강의안책자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3-03-12 (일) 10:52
분 류 사도행전
첨부#1 2023년_사도행전_제3강-1.hwp (205KB) (Down:46)
ㆍ추천: 0  ㆍ조회: 182      
IP: 211.xxx.102
[2023년 사도행전 제3강]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2023년 사도행전 제 3 강                                                        오정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말씀 / 사도행전 3:1-26
요절 / 사도행전 3: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늘 말씀은 날 때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 권세로 일어나 걷게 되는 사건과 이를 바탕으로 베드로가 솔로몬 행각에서 전한 메시지입니다. 앉은뱅이를 일어나 걷게 한 사건은 4장까지 연결될만큼 그 상징하는 바가 큰 것으로 이는 부활승천하신 예수님의 통치가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이름 권세를 의지할 때 우리 삶에 어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지 배우고 우리도 예수님의 이름 권세를 힘입어 영적으로 주저앉아 있는 자들을 일으켜 세우는 역사에 귀하게 쓰임 받게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1.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1-10)
1절을 보십시오.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구 시’는 오후 3시로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은 오전 9시, 정오, 오후 3시 하루에 세 번씩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던가, 성전을 향해서 기도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기도 시간에 맞추어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뒤에서 몰래 졸던 자들이었는데 이제는 깨어서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또 서로 큰 자가 되고자 하는 야심 때문에 치열하게 경쟁하던 사이였는데 성령이 임하자 서로의 허물과 약점을 감당하고 동역하는 성숙한 하나님의 종들이 된 것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성전 미문(美門)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이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을 메고 와서 미문 앞에 두었습니다. 이는 성전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동정심에 의지하여 구걸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시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은 10개 정도였는데, 그 가운데서 미문이 가장 아름다워서 사람들은 이 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선호했다고 합니다. 요세푸스 기록에 의하면 미문은 황동으로 입혀져서 반짝였고 높이가 23m나 되어서 웅장하고 장엄했다고 합니다. 미문 앞은 예루살렘에서 구걸하기에 가장 좋은 프리미엄이 붙은 자리로서 수입이 꽤 짭잘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매일 적지 않은 수입을 얻는다고 해서 이 사람은 과연 행복했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고 평생 구걸하며 살아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 닉 부이치치처럼 슬프고 절망스러웠을 것입니다. 재벌 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면 온갖 재활치료를 받으며 여유롭게 살았을 텐데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걷지도 못하는데 구걸하는 삶을 살아야 하다니 인생을 한탄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신을 이렇게 낳아준 부모를 원망했을 것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돈이 많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한푼만 줍쇼’ 구걸했습니다. 4절입니다.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은 구걸하는 이 사람을 주목했습니다. ‘주목했다’는 것은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았다는 뜻입니다. 이는 마치 세관에 앉아서 고뇌하던 세리 레위를 예수님이 주목하여 보신 것과 같습니다. ‘우리를 보라’는 말씀은 우리 가운데 계시는 예수님을 보라는 의미입니다. 절망적이고 한계적인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도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말씀했습니다.(히12:2a) 요한복음 9장에서 제자들은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고 처량하고 운명적인 생각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베드로와 요한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권세를 믿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운명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믿음으로 바라보고 돕고자 하였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시선을 피하여 갔는데 ‘우리를 보라’ 말한 사람은 이들이 처음이어서 ‘뭐 돈 좀 있나? 금화 한 닢이라도 주려고 그러나?’ 잔뜩 기대하며 바라보았습니다. 이런 그에게 베드로는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다 같이 6절을 읽어보시겠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은과 금을 가지고 있을 만큼 부유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은과 금은 없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내 그럴 줄 알았다. 쥐뿔도 없이 생긴 것들이 괜히 헛물만 켜게 하고 이게 뭐야! 에이 재수없어”하기 쉬웠습니다. 이런 그에게 베드로는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말씀합니다. 원문에는 “내게 있는 이것”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내게 있는 이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권세를 가리킵니다. 베드로와 요한에게는 은과 금은 없었지만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 권세가 있었습니다. 이름에는 그 사람의 인격과 그 이름이 지닌 권세가 나타납니다. 대통령이란 이름에 엄청난 권세가 있듯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에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로 인해서 절망적인 인생을 살아가던 수많은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시는 이름이 되십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지만 사흘 만에 죽음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권능의 이름이 되십니다. 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베드로는 이 예수님의 이름 권세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 말했습니다.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8절을 보십시오.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베드로는 그 사람이 믿음으로 일어날 수 있도록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한번도 걷지 못해 완전히 위축되어 있던 그의 발과 발목의 힘이 생겨서 벌떡 일어나 걷고 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앉아서 보던 세상과 달리 서서 보는 세상은 너무나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그는 너무 기쁘고 신나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 지금까지 성전 미문 앞에서 구걸을 했지만, 장애가 있어 한 번도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는데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권세로 인생 문제를 해결함 받고 성전 안으로 들어가는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흥분되고 감동되어 자신에게 새로운 삶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걸었네 뛰었네 찬양했네! 그는 걸었네 뛰었네 찬양했네” 9,10절을 보십시오.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사람들은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던 바로 그 사람이 일어나 걸어 다니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보고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가?’ 놀랐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람을 바르게 돕는 길이 무엇인가 배우게 됩니다. 구걸하던 이 사람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은과 금이었습니다. 사람들도 그것을 알고 몇 푼의 돈을 주므로 그의 고달픔이나마 달래주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은과 금은 잠시 현실의 고달픔을 해결해 주지만, 그의 인생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지는 못합니다. 만일 베드로와 요한이 이 사람에게 돈을 주었다면 잠시 배부르게 해줄 수는 있었을지 모르지만 거지생활에서 벗어나게 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이게 바로 은과 금이 가진 한계입니다. 그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은과 금이 아니라 자립적으로 일어나 걸어가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실 때 네 다리가 아닌 두 다리를 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의지해서 자립적으로 걸어가는 인생을 살도록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아담의 범죄 이후 인간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고 죄로 인해서 무기력하고 의존적인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의 인생 문제를 잘 아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개척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는 자립적인 인생을 살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불신과 원망 가운데 40년 동안이나 걷지 못하는 이 사람에게 예수님의 이름 권세에 대한 믿음을 심어 일어나 걸어가는 인생을 살도록 도와준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면에서 은과 금을 주기보다는 예수님의 이름 권세에 대한 믿음을 심어 자립적인 인생을 살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학과공부 잘하고 취직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것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권세에 대한 믿음을 갖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한국 부모들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대단해서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불사합니다. 자식을 유학시키기 위해서 가정부 생활을 하는 엄마들도 있습니다. 이처럼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은과 금을 아낌없이 쏟아 붓습니다. 어찌하든지 많은 재산을 물려주고자 합니다. 그런데 물려준 은과 금이 오히려 자식들을 망치고 무기력하고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영적인 앉은뱅이가 되게 하고 맙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은과 금보다는 신앙을 물려주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권세를 믿고 자립적으로 살아가도록 도와줍니다. 김진홍 목사님은 거리의 부랑자들, 거지들, 흉악범들을 모아서 활빈(活貧)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곳에 오는 사람들을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었습니다. 헌신적으로 돌봐주었지만 사람들의 내면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예전과 같이 서로 싸우고 헌금을 훔치고 술 마시고 행패를 부렸습니다. 그래서 은과 금으로는 사람을 바르게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신앙적으로 돕기 시작했고 그때서부터 사람들은 조금씩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은과 금은 사람들에게 일시적으로 도움만 줄 뿐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권세만이 무기력하고 의존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을 일어나 걷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ㄷ에 사람들은 은과 금이 없어서 인생을 살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남보다 못한 학벌과 집안 배경 때문에 그냥 이렇게 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비교의식 열등감 패배주의로 본문의 거지처럼 일어나 걷지 못하고 주저앉아 살아가고 있는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이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좋은 학벌 좋은 직장 넉넉한 물질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권세를 믿음으로 일어나 걷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실의 한계로 주저앉아 무기력한 인생을 살지 않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권세를 의지하여 일어나 걷는 삶 살 수 있길 기도합니다. 이 믿음으로 비교의식과 열등감 패배주의로 주저앉아 있는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는 역사에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2. 회개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이릅니다.(11-26)
11절을 보십시오.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불리우는 행각에 모이거늘” 성전 미문에서 날마다 구걸하던 그 사람이 일어나 걸어다니자 사람들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어떻게 된 건지 알고 싶어서 솔로몬 행각으로 몰려들었습니다. 너무 기쁘고 신난 나머지 성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던 그 사람은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자 자신의 어떻게 나았는지, 누구에 의해서 나았는지 해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베드로와 요한을 붙들었습니다. 이로 인해 이제 모든 시선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쏠리게 되었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12절을 다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이 말씀은 이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 권세로 일어나 걷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을 일어나 걷게 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전 같았으면 자기 자랑하기에 바빴을 텐데 이제는 백성들의 관심을 예수님께 돌리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증언하기 시작합니다.
13절부터는 베드로의 2차 설교로서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3-16절은 유대인들이 거룩하고 의로우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살려 영화롭게 하신 예수님이 이 사람을 치유하셨다는 선언이고 17-26절은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그 분을 믿으라고 설득하는 부분입니다. 13-15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그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여기서는 너희’와 ‘하나님’이 반복 대조되고 있습니다. “너희가 그를 넘겨주고”,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생명의 구주를 죽였도다” 이처럼 베드로는 말씀을 듣고 있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죽음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주기로 결의하였지만 유대인들이 빌라도의 제안을 거절하고 살인자 바라바를 놓아주라고 요구했습니다. 생명의 주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고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이런 일이 불과 몇 주 전에 일어났던 것으로 먼 과거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이 배척하고 죽인 거룩하고 의로우신 예수님을 하나님이 다시 살리셔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이 일에 우리가 증인이라고 하고 또한 이 사람이 일어나 걷게 된 것이 이 일에 대한 분명한 증거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16절을 다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여기서 베드로는 ‘그 이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곧 자신의 권능이나 경건이 아니라 ‘그 이름을 믿음으로 그 이름’이 이 사람을 낫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능력의 원천은 그 이름이요 그 권능이 믿음이란 통로를 통해서 역사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눈 먼의 자의 눈을 뜨게 하며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믿고 그 이름을 붙들어야 합니다.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 부르다가 내가 지칠 그런 헛된 이름을 불러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열왕기상18장을 보면 갈멜산에 모인 바알 선지자 450명은 아침부터 저녁 해질 때까지 바알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소리 지르고 칼과 창으로 자기 몸을 상하게까지 하였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왕상18:29) 그러나 엘리야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 이름을 의지해 기도했을 때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 제단 위의 모든 제물을 순식간에 불태워버렸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 이름을 믿고 그 이름을 부르는 자를 외면치 않으시고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권능의 주가 되십니다. 여기서 ‘그 이름’을 믿는 주체는 베드로와 앉은뱅이입니다. 베드로뿐만 아니라 앉은뱅이도 예수님의 이름 권세를 믿었습니다. 이처럼 남이 아니라 내가 믿을 때 능력의 역사, 권능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은 나의 의지도 중요하지만 근본 내 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앉은뱅이를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로서 우리 믿음의 원천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믿음을 주시도록 겸손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이 어린 사람들의 믿음이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항상 간구해야 합니다.
17,18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러한 줄 아노라.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베드로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은 알지 못해서 그리한 것임을 이해한다고 하였습니다. 동시에 예수님이 고난 받고 죽으신 사건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언하신 일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무지한 상태에서 행한 일들이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구원 계획을 성취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19절을 다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해야 할 유일한 일은 회개하고 돌이켜 죄 없이 함을 받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생명의 주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일에 가담한 죄를 인정하고 진실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주요 그리스도로 영접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새롭게 되는 날이 이르게 됩니다. ‘새롭게 된다’는 것은 ‘상쾌하게 된다’, ‘신선하게 된다’, ‘원기를 회복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으면 체한 것처럼 심령이 답답하고 괴롭게 됩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고, 즐겁게 놀고, 좋은 집에서 편안히 있어도 불안과 두려움이 끊이지 않게 됩니다. 반면에 자신의 죄를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살면, 마음의 불안과 두려움과 허무함이 사라집니다. 오래된 체증이 내려가듯 마음이 상쾌하고 힘이 생겨서 삶의 의욕이 넘치게 됩니다. 20, 21절을 보십시오.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예정하신 그리스도는 재림 때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지금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 임하셔서 모든 구원역사를 완성하시므로 만물을 회복하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도 강하고 신령하고 거룩한 부활의 몸을 덧입고 영원토록 주와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믿는 자들의 참된 소망입니다.
22절 말씀은 신명기 18장15절 말씀을 인용한 것으로 모세는 주 하나님이 자신과 같은 선지자를 세울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모든 말을 들으라고 하셨고 누구든지 그의 말을 듣지 않는 자는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그 선지자가 바로 예수님으로서 사무엘 때부터 말한 모든 선지자들도 예수님의 때를 가리켜 말씀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25,26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땅의 족속이 너의 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서 ‘씨’는 단수로 되어 있는데 이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이 약속된 축복을 유대인들이 먼저 받을 수 있도록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을 주시려고 그의 종 예수님을 보내셨기 때문에 각각 회개하고 돌이켜서 그 악함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들에게 복을 주기 위해서 죄에서 돌이키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메시지 결론입니다. 사람들은 회개하라는 말을 부담스러워합니다. 삶의 기쁨과 흥을 깨기 위해서 회개하라고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탄이 주는 잘못된 생각으로, 참된 복은 진실하게 회개한 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죄가 있다면 진실하게 회개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섬기는 인생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준비하신 놀라운 복이 충만히 임하게 될 것을 믿습니다.  
과거 저는 원치 않은 대학과 소심한 성격, 육신의 질고로 무기력한 삶을 살았습니다. 오전 수업은 친구에게 대출을 부탁하여 때웠고 오후나 되어서 학교에 등교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성적은 늘 위태위태하였고 삶에 아무런 기쁨도 없었습니다. 원하는 대학에 두 번이나 떨어져서 이제 학벌도 별로고 은과 금도 없으니 그저 그런 인생이 되었다며 절망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저를 90년 부활절 수양회에 초청하시고 ‘주께서 과연 살아나셨다’ 말씀을 주시므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하여 주셨습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이 생기자 모든 허무와 어둠이 사라지고 부활의 생명력이 제 안에 역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늘 대출로 때우던 수업도 하나도 빠지지 않고 듣게 되었고 성적도 올라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장학금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주와 복음역사에 헌신할 때 감사와 기쁨이 넘쳐서 여름수양회 때는 3중4중5중의 십자가를 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과거 저처럼 인생의 질고 앞에 드러누워 무기력한 삶을 살던 천수원 목자님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도록 도울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저는 이를 통해 조건과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믿음이 문제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 믿음으로 맡기신 영혼들을 섬기고자 하였지만 요즘 양들은 쉽사리 변화가 되지 않아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바뀌어서 이제는 믿음만으로는 안되고 은과 금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돌아볼 때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줄 은과 금이 없었습니다. 대단한 인맥도 학맥도 없어 누구 하나 취업을 시켜줄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다정다감하여 사람들에게 싹싹하게 대하는 것도 아니고 어딜 가도 꿔다놓은 보릿자루 같아서 사람을 돕는데 늘 한계를 느낄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은과 금이 없더라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얼마든지 주저앉아 있는 사람들을 일으켜 세울 수 있음을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이름에 사람을 일으키는 능력과 권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은과 금이 없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한계적인 생각으로 무기력하게  있던 불신의 죄를 회개하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도전하므로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는 역사에 봄학기 헌신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은과 금은 우리에게 없지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믿음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이 이름을 믿음으로 운명과 한계로 인한 어두움과 무기력에서 일어나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힘찬 삶을 살 수 있길 기도합니다. 또 캠퍼스 가운데 주저앉아 무기력한 삶을 살아가는 영혼들을 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으켜 세우는 역사에 귀하게 쓰임 받게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0
3500
번호     글 제 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34 누가복음 [2022년 누가복음 제35강]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 관리자 2022-11-27 303
33 사도행전 [2023년 신년 제 2강]마음을 같이하여 모이기를 힘쓰고 관리자 2023-01-08 293
32 누가복음 [2022년 누가복음 제36강]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관리자 2022-12-04 290
31 누가복음 [2022년 누가복음 제31강]영생을 얻는 길 관리자 2022-10-16 288
30 누가복음 [2022년 누가복음 제33강]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관리자 2022-10-30 265
29 로마서 [2022년 가을 제자 수양회 제1강]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관리자 2022-11-05 258
28 시편 [2022년 추수감사절 말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관리자 2022-11-20 245
27 이사야 [2022년 가을 제자 수양회 제2강]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관리자 2022-11-06 239
26 누가복음 [2022년 누가복음 제40강]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관리자 2023-01-22 237
25 베드로전서 [2023년 베드로전서 제2강]왕 같은 제사장 관리자 2023-02-05 234
24 베드로전서 [2023년 베드로전서 제1강]산 소망 관리자 2023-01-29 226
23 누가복음 [2022년 성탄 1강]구원의 뿔 돋는 해 관리자 2022-12-18 224
22 로마서 [2022년 가을 제자 수양회 제1강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관리자 2022-11-05 216
21 이사야 [2022년 가을 제자수양회 제2강]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관리자 2022-11-06 213
20 베드로전서 [2023년 베드로전서 제3강]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으라 관리자 2023-02-12 204
19 사도행전 [2023년 사도행전 제1강]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관리자 2023-02-26 197
18 사도행전 [2023년 사도행전 제2강]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관리자 2023-03-05 185
17 사도행전 [2023년 사도행전 제3강]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관리자 2023-03-12 182
16 누가복음 [2022년 성탄 2강]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관리자 2022-12-25 182
15 베드로전서 [2023년 베드로전서 제4강]양 무리의 본이 되라 관리자 2023-02-19 173
1,,,31323334353637383940,,,41
서울 동대문구 이문2동 264-231
Tel:070-7119-3521,02-968-4586
Fax:02-965-8594
서제임스목자님메일:Suhjt@hitel.net
[UBF한국본부] [유럽UBF] [UBF국제본부] [UBF TV] [시카고UBF] [Mother Barry's Homepage]
[뉴욕UBF] [워싱턴UBF] [노스웨스턴UBF] [콜롬비아UBF] [코스타리카UBF] [프랑크푸르트UBF]
[키에프UBF] [상파울루UB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