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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3-05-07 (일) 10:40
분 류 사도행전
첨부#1 2023년_사도행전_제9강-1.hwp (89KB) (Down: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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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사도행전 제9강]택한 나의 그릇이라
2023년 사도행전 제9강                                               김베드로
택한 나의 그릇이라
말씀/사도행전 9:1-31
요절/사도행전 9: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사도 바울은 기독교 2000년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선교사요 로마서 및 바울 서신등 13권의 신약 성경을 기록한 빼어난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바울의 발길이 머무는 그곳, 그곳이 어느 마을이든 도시든 그 순간부터 그 도시와 그 마을은 바울의 영향권을 피할 수가 없었다. 바울이 로마에 끌려서 들어오던 그 날 로마의 하늘에는 복음의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바울만큼 세계 역사의 운명을 바꿔 놓은 사람은 없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그도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에는 기독교 박해에 앞장서던 흉악한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울(히브리식, 바울-헬라식)을 변화시켜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신 사울의 회심(Conversion) 사건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울 한 사람의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과 그의 회심은 기독교 및 세계 역사에 지대한 영향과 유익을 가져왔습니다. 복음의 원수였던 사울은 어떻게 변화되어 하나님의 선교역사에 위대하게 쓰임 받을 수 있었을까요? 오늘 사울의 회심 사건을 통하여 그 해답을 찾고 우리들도 하나님의 택한 그릇으로 더욱 귀하게 쓰임 받는 축복된 역사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I. 사울의 회심(1-5)
1절을 보십시오.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사울은 자신이 신봉하던 유대교에 대한 특별한 열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교를 혼란에 빠뜨리는 나사렛 예수를 이단의 괴수로 생각하고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잔멸하고자 위협과 살기의 기운을 내뿜고 있었습니다. 사울은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데 한패가 되었고 예루살렘 집집마다 수색하여 예수님을 따르던 남자와 여자를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초대교회에 큰 시련과 환란이 불어 닥쳤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그래도 성이 차지 않았는지 사울은 다메섹에까지 원정 박해를 계획 하고 예수 믿는 성도들을 체포하고자 대제사장에게 가서 압수수색영장과 체포영장을(소개장과 위임장) 발부받았습니다. 박해를 피해서 다메섹으로 피난 간 성도들이 그곳에서도 나사렛 예수의 도를 전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일단의 체포조를 이끌고 예루살렘에서 250 km나 되는 거리를 밤낮으로 달려 다메섹 가까이 이르렀습니다. 무지한 열심으로 사나운 맹수처럼 날뛰는 사울로 말미암아 초대교회는 풍전등화의 위기 앞에 놓이게 된 것이었습니다.

사실, 어떤 분야에서든지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남다른 열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하고 안 미치면 못 미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울 또한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을 배운 바리새인으로서 하나님께 대한 열심, 유대교에 대한 열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은 열심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올바른 성경적, 영적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기차가 기관실에 그 아무리 대단한 파워를 지닌 엔진을 장착하고 질주한다 할지라도 올바른 선로를 따라 가지 않으면 탈선하거나 아니면 목표했던 최종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는 이치와 같습니다. 올바른 성경적 지식이 없는 열심은 결국에는 하나님의 역사와 자신의 인생에 큰 해악을 끼치게 됩니다. 오늘날 신천지나 JMS등의 해악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열심을 갖고 행하되 또한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올바른 지식에서 자라나야 합니다. 사울은 무지한 열심을 가지고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를 크게 박해하는 훼방자요 죄인중의 괴수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울을 부활하신 주님은 어떻게 만나 주십니까? 3절에서 5절을 보십시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사울이 살기와 위협으로 가쁜 쉼을 내쉬며 예수 믿는 자들을 체포하고자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습니다.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다는 것은 부활 하신 예수님이 사울의 발걸음을 옴짝달싹 못하게 포승줄로 묶어 체포해 버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자 사울은 땅에 그대로 엎드러졌습니다. 그때 한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사울은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지만 누구이신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여 누구십니까?”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사울은 이 말씀을 듣고 뭔가로부터 얻어 맞은 듯한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사울은 예수님에 관해서 사람들이 전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스데반이 순교를 하면서 전하는 메시지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울은 나사렛 예수가 죽은 줄로만 알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을 체포하고 핍박 하였습니다. 모든 것들이 사람들이 꾸며낸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헛된 말로 유대인들을 현혹시키지 못하도록 잔인하게 박해 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후에야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가 진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열심히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였지만 자신의 무지한 열심으로 한 일이라고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주님을 대적하는 일뿐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때의 경험을 딤전 1장 13절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이 사실을 알게 된 사울은 밤낮을 눈물로 통회하며 자신의 죄악과 악행을 부활하신 주님 앞에서 엎드려 회개 했을 것입니다. 8절과 9절을 보십시오.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사울은 다메섹에 들어가서 사흘 동안 어둠 속에서 식음을 전폐하며 금식 기도했습니다(11). 이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은 친히 빛으로 임하셔서 사울을 만나주시고 그의 영적 무지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비록 그가 주님을 대적하고 성도들을 핍박하며 주님의 몸된 교회를 잔멸해 버리고자 하는 복음의 원수였지만 무지한 열심 때문에 한 것을 알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두가지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은 그 어떠한 몹쓸자라도 포기하거나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그 인생을 추적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사울은 자신의 학식과 유대교에 대한 신념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열심히 있다는 자기 의로움이 가득하여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체포하고자 추적하는 추적자의 인생을 사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예수님께서 도망하는 사울을 추적하고 계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구원의 유일한 하나님의 의가 되시는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로 끈질긴 사랑의 추적자의 모습으로 자기 의로 가득찬 사울의 삶을 찾아 오신 것입니다. 마침내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가 핍박자 사울의 삶을 완전히 체포하고 무릎 꿇게 해버린  것입니다.  완전한 자기항복의 역사를 이루신 것입니다. 왜, 삶을 살다보면 꼴도 보기 싫은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 배은망덕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은 보기도 싫고 말하기도 싫습니다. 더구나 내 사랑하는 자녀들이나 또는 아끼는 사람들을 그토록 학대하고 옥에 가두고 심지어 죽이는데 앞장서는 놈이 있다면 어떻게 이러한 자를 찾아가 용서하고 대화하고 구원할 수가 있겠습니까? 몽둥이로 패대고 물어 뜯어도 시원치 않을 놈이라 여기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사랑 받을 수 없는 잔인무도한 자인 사울의 인생이라 할지라도 먼저 그의 인생 가운데 찾아 오셨습니다. 무지한 자기 열심으로 참된 진리를 모른체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떨어져 죄악에 빠진 한 인간을 중동의 뜨거운 햇볕 가운데 찾아 오셔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말씀으로 사울을 부르십니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였습니다. 사울이 자신의 구원에 있어서 예수님의 포로 된 것 외에는 한 일이라곤 없었습니다. 후에 바울은 이렇게 자신의 인생을 추적하셔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외칩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음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딤전 1:15-16절)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도 이 하나님의 포기치 않고 추적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닮아가는 삶이 아닐까요! 이 세상의 사랑의 원리는 주고 받는 Give & Take의 원리가 적용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사랑의 원리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주면 기대가 생기고 받으면 부담이 됩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러한 사랑도 고갈된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얼마나 많고 다양한 관계성의 파괴 문제가 일어납니까? 이는 우리가 사랑의 본체가 아닌 까닭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발광체가 아닙니다. 사랑 자체가 아니라 그저 사랑 받아야 사랑 줄줄 아는 반사체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본체가 사랑이시자 사랑의 발광체가 되시는 하나님의 아가페적 사랑 위에 세워진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이 다하는 날까지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반사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편지”요, “그리스도의 향기”요, “그리스도의 대사”로서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를 축복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요 1:12, Sonship)”요 “왕같은 제사장(벧전 2:9, Kingship)”이요 “복음의 제사장 직무”(롬 15:16-목자, Servantship)를 맡은 자로서의 ‘SKS의 삶’ 즉, SKS의 영원히 빛나는 마크를 우리의 삶에 새기고 천사도 부러워하는 3중 축복의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울에게 임한 은혜요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특권이요 영광입니다. 사울이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기존의 라이프 스타일에서 SKS의 삶으로의 대전환, 이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에 눈이 띄어졌을 때 정죄하고 핍박하는 서슬퍼런 삶에서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 온유하며...무례히 행치 아니하며..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고전 13) 사랑의 목자요 사명자로서의 변화된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은 자신을 성도들과 동일시 하셨다는 것입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그동안 사울은 성도들을 박해하였고 교회를 잔멸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사울이 예수님 자신을 박해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교회를 박해하는 것은 예수님을 박해하는 일이요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은 예수님 자신이 받는 고난으로 여기십니다. 성도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몸이자 지체입니다.(엡5:23). 바늘로 손가락을 찌르면 손가락만 아픈 것이 아니라 온몸이 아픕니다. 이처럼 성도들이 고통을 당할 때 주님도 함께 아파하십니다. 주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의 슬픔과 연약함과 고통에 동참하십니다. 그리고 이를 이겨낼 수 있도록 담대한 믿음과 용기를 덧입혀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어떠한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아멘. 핍박자 사울을 아가페적 십자가의 사랑으로 추적하셔서 그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열망은 사울을 또한 복음 전도자로서의 위대한 열망을 지닌 사명자로 거듭나게 합니다. 예수님은 사울에게 어떤 사명자로서의 뜻을 두고 그를 부르셨습니까?

II. 택한 나의 그릇이라(6-31)
6절을 보십시오.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예수님은 사울에게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하십니다. 그러면 그에게 행할 사명을 알려줄 자가 있을 것이라 하십니다. 다메섹에는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주님은 아나니아를 환상 중에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기도하고 있는 사울을 찾아가 안수하고 그의 눈을 보게하도록 하라 명하십니다.(10-12절)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들은 아나니아는 가기를 주저합니다. 다메섹에도 사울의 악행에 대한 소문이 이미 퍼져 있었기 때문입니다.(13,14절)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아나니아를 사울의 목자요 영적인 멘토로 쓰셨습니다. 15,16절을 읽겠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인가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주님은 대적하던 사울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기 위해서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릇이란 물건을 담는 용도로 쓰이는데 ‘택한 나의 그릇’이란 ‘택한 나의 도구’라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쓰임 받는 도구라는 뜻입니다. 즉, 이방 선교를 위한 사도요 선교사로 사울을 선택하시고 사명자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지금까지 복음 역사는 열두 사도를 중심으로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 땅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간절한 소망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즉,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세계 선교를 섬길 수 있는 일군을 찾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핍박자 사울에게서 세계선교를 위한 사도로서의  모습을 발견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역설입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역사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사울은 헬라파 유대인입니다. 당시의 국제어인 헬라 말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언어 및 문화 장벽 없이 다가설 수 있습니다. 로마 시민권자이니 로마 제국의 통치권이 미치는 수많은 나라를 다니며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비록 무지한 열심 때문에 성도들을 박해하고 있었지만 변화되기만 하면 탁월한 복음의 일군이 될 것을 아셨습니다.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한 학자이니 임금들과 고관들에게도 변론할 수 있고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특별한 열심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핍박자였으니 핍박 받아도 입이 열 개라도 어찌보면 할 말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처럼 사울은 변화되기만 하면 이방인의 사도로 크게 쓰임 받을 수 있는 그릇이었습니다. 그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 한 번도 나타나지 않으셨던 예수님께서 친히 빛 가운데 나타나셔서 그를 만나주시고 이방인을 위한 사도요 선교사로 부르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역설적인 역사입니까? 이렇게 사명자로서의 부르심을 받은 사울 즉, 사도 바울은 이제 복음을 담은 그릇으로 귀하게 쓰임 받습니다. 하나님의 선택된 그릇으로서 그 안에 복음을 담았을 때 그의 인생은 박해자요 행악자의 인생에서 빼어난 복음 전도자로서 4차에 걸친 세계선교 여행을 통하여 많은 교회를 개척하고 수많은 사람을 복음으로 구원하는 일에 사도요 선교사로 쓰임 받습니다. 로마서를 비롯하여 13권의 성경의 저자로 기독교 역사 및 인류 역사에 찬란하게 빛나는 위대한 하나님의 택한 그릇으로 쓰임 받습니다.

“택한 나의 그릇이라” 사도 바울은 자신이 주님께 받은 이 은혜와 사명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하여 이렇게 권면합니다. “큰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그릇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딤후 2:20, 21절) 이처럼 그릇은 다양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바울만이 탁월한 그릇이 아니요, 아나니아도 그리고 바나바도 각기 역할은 다르지만 귀한 그릇들로 쓰임 받고 있습니다.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형제로 영접하고 사울의 목자가 되어준 아니니아, 모두들 배척하는 분위기에서 변화된 사울을 넓은 가슴으로 품고 신앙 공동체의 일원이 되도록 배려하는 바나바도 하나님이 귀하게 쓰시는 그릇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다 달란트가 다른 그릇들입니다. 주님의 선택된 그릇이 아닌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그 쓰임에 따라 용도와 모양이 다를 뿐입니다. 바울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들도 다 주님의 택하신 다양한 그릇들이라는 것을 마음으로 영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누구든지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하게 쓰는 그릇으로 사용하겠다 하십니다. 즉, 깨끗이 비워져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라는 그릇이 세속적이고 더럽고 불의하고 추한 것들로 채워져 있다면 배설물로 여기고 깨끗이 청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우고 깨끗이 하면 주님은 그안에 하늘의 온갖 신령하고 좋은 것들로 채워 주신 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택한 그릇으로서 주님께 받은 각자의 사명들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들은 캠퍼스 복음화 및 제자양성을 위한 사명을 받았고 ‘성서한국’과 ‘세계선교’라는 고귀한 공통의 소명을 받았습니다. 이를 위한 깨끗한 그릇으로 쓰임 받기 위하여 우리는 기도의 노동, 양식과 소감을 감당하는 훈련 그리고 전도와 일대일을 통한 제자양성, 세계선교 지원등 날마다 몸부림을 하며 기꺼이 주님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의 본성과 쉽게 쉽게 살고자 하는 마음을 부인하고 이를 힘써 감당하는 것은 파고 들기 쉬운 불순물과 달라붙기 쉬운 영적인 기름기들을 제거하고 깨끗한 그릇으로 날마다 나를 준비 시키기 위함입니다. 나의 인생을 하나님께서 쓰실만한 택한 그릇으로 드려 빼어난 성경선생이요, 목자요 또는 제자 양성가나 선교사로서 주님의 역사에 쓰임 받고자 하는 열망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우리 UBF가 캠퍼스 복음화 및 제자양성을 통한 성서한국과 세계선교에 쓰임 받게 된 것도 이러한 열망을 하나님께서 축복한 것임을 믿습니다. 한국 전쟁후 그 혼란한 시기에 한국의 전쟁 고아들을 돕겠다고 미국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처녀의 몸으로 긴 항해 끝에 한국에 오신 사라 베리 선교사님, 낙동강 전투에서 동족간에 총부리를 겨눠야 하는 그 비극 앞에 허공을 향하여 총을 쏘며 울부짖어야만 하셨던 사무엘 리 선교사님을 택한 그릇으로 구별하셔서 하나님은 수많은 주의 종들을 젊은 대학생들의 목자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역사상 꿈꾸기 어려웠던 세계 선교의 환상을 주셔서 가난과 운명으로 눈물짓던 한국의 젊은이들을 세계 각곳에 선교사로 파송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캠퍼스 제자양성과 이방인들을 위한 택한 그릇으로 쓰임 받는 것을 가장 영광스러운 삶으로 여기고 ‘천사도 흠모하는 목자요, 선교사의 삶’을 외치며 교수나 교사직도, 의사나 간호사직도 심지어는 검사나 외교관직도 받은 사명을 위하여 기꺼이 바치고 헌신 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세계선교에 쓰임 받고자 유학생 선교사는 호사스러운 것이요 한국의 유명한 대학 출신들이 재봉공이나 또는 닭잡는 도계공으로 나가는 것도 영광스럽게 여기고 선교 일선에 나갔습니다. 사라 선교사와 저도 부족한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선교 사명에 사용하여 주시는 것만으로도 영광으로 알고 선진국으로의 수속을 취소하고 미지의 북방 선교를 위하여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로 나갔습니다. 동토의 땅에서 맨땅에 헤딩하는 개척자의 삶을 살면서도 감사와 기쁨으로 주어진 모든 고난을 감당 하였습니다. 우리 경성의 목자님들과 선교사님들은 이러한 점에서 가장 본이 되는 삶을 사셨음은 우리 모두 늘 감사하게 생각하는 고귀한 일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이러한 순수한 복음에 대한 열정과 전도와 선교의 마음이 식어져 감을 애통해 하며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한국이 잘살게 되고 선진국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이 이러한 수많은 헌신과 기도를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것임을 알아 ‘잘살게 되니 선교 열정도 없고 선교사로 나가고자 하지도 않는다’ ‘한국이 좋은데 누가 외국으로 선교사로 가고자 하겠는가?’ 이런 부패하고 기름때 가득한 불순물과 생각들을 오늘 말씀을 기회로 깨끗이 회개하고 청소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고 일생을 헌신하며 전하는 복음과 사명이 조금 잘살게 되었다고, 조금 안락한 삶을 누리게 되었다고 변해 버리고 또는 포기할 수도 있는 것이라면 이 어찌 우리의 가슴과 땅을 치며 통곡하고 애통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하다면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신 아름다운 이 땅이 온갖 더럽고 흉악한 이단들과 돈과 쾌락이라는 바알과 아세라 우상의 놀이터가 되어가는 것을 어찌 막을 수 있겠습니까? 제 자신부터가 애통한 마음으로 이러한 풍속에 물들어 가는 것을 회개해야 하겠습니다. 저는 험한 선교지에서 30년이 넘는 세월을 섬기며 연금도 의료보험도 저축한 돈도 없이 살아 왔으니 이제는 노후대비를 위하여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선교 역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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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사도행전 [2023년 사도행전 제11강] 안디옥 교회 관리자 2023-05-21 283
26 사도행전 [2023년 사도행전 제10강]일어나 잡아먹어라 관리자 2023-05-14 276
25 요한복음 [2023년 여름수양회 특강]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관리자 2023-07-30 273
24 누가복음 [2023년 여름수양회 주제4강]말씀대로 살아나신 예수님 관리자 2023-07-23 270
23 사도행전 [2023년 사도행전 제 16강]이제는 다 회개하라 하였으니 관리자 2023-06-25 255
22 사도행전 [2023년 사도행전 제14강]예루살렘 공회 관리자 2023-06-11 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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