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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4-05-26 (일) 10:55
분 류 마가복음
첨부#1 2024년_마가복음_제11강-1.hwp (148KB) (Down: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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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제11강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
2024년 마가복음 제11강                                                             최동진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
말씀/ 마가복음 7:1-37
요절/ 마가복음 7:20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오늘 말씀에서는 종교지도자들의 외식과 예수님을 감동시킨 이방인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이 대조되어 나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는 것으로 정결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하였습니다. 손 씻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손을 열심히 씻는다고 마음까지 깨끗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외식을 책망하시며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에서 멀어졌다고 하셨습니다. 반면에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여기던 이방여인의 믿음의 말을 기뻐하시고 정결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주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 앞에서 내 안에 있는 더러운 죄를 깨끗이 씻고 믿음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로워지기를 기도합니다.

I.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1-23)
  1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모여들었습니다. 이들은 백성들 사이에서 치솟고 있는 예수님의 인기에 위기감을 느끼고 이를 일거에 무너뜨릴 꼬투리를 찾고자 하였습니다. 때마침 예수님의 제자 중 몇 사람이 손을 씻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는 것이 그들의 눈에 띄었습니다. 음식을 먹을 때 손을 사용하는 중동 지방에서는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습관이고 율법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손을 씻는 일은 위생적인 측면보다 종교적 의식의 측면이 더 강했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어 손을 잘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아니하며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물을 뿌리지 않고서는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장로들의 전통이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성문 율법(토라)과 구전 율법을 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구전 율법은 모세, 아론을 거쳐 자손들에게 구두로 전승되었고 바리새인들이 이를 전수하였습니다. 바벨론 포로기 이후 서기관들에 의해 법적인 권위가 높여졌고 ‘구전율법’이라 불리며 성문화된 율법과 맞먹는 권위를 갖게 되었습니다. A.D.200년에 1차 집대성이 이루어졌고 이 작업은 A.D.800년까지 이어졌는데 이것이 탈무드입니다. 성문율법은 원칙론적인 내용들을 다루고 있는데 반해 장로들의 전통은 생활밀착형 교훈과 원칙을 제시하였고 율법보다 더 큰 권위와 구속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전통에 의하면 밥을 먹기 전에는 반드시 손을 씻어야 했습니다. 개역한글판 성경에는 ‘손을 부진런히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부지런히’란 말은 주먹을 꼭 쥔 상태로 팔뚝까지 깨끗이 씻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더러운 손으로 먹으면 그 사람까지 더럽게 한다고 여겼습니다. 손을 씻는 것은 본래는 성전에서 희생제사를 드리기 전에 제사장들에게 요구되는 행동이었습니다.(출30:18-21)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일반인들에게도 적용하였습니다. 시장에서 돌아와서 물을 뿌리는 이유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혼잡한 곳에서 부지중에 부정한 사람들과 접촉하여 불결해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는 이유는 이런 도구들이 주로 이방인들에게서 구입했기 때문에 정결하게 하는 예식이 요구되었습니다. 레위기에서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말씀하셨습니다.(레11:45b) 시체와 접촉하든지, 피를 흘리는 자와 접촉 하든지, 나병환자와 접촉하든지, 유출병자와 접촉하면 부정하다 말씀하셨습니다.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정결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선한 의도로 전통을 지켰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을 옭아매는 법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손을 씻지 않으면 손만 더러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아 영혼이 더러워지는 죄문제로 보았습니다. 이런 바리새인들의 눈으로 볼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씻지 않은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음으로 부정하게 되었고,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았음을 비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어떻게 깨우치셨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장로들의 전통을 가지고 율법의 잣대로 사람을 판단하는 종교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은 이사야서 29장13절 말씀을 인용하여 이들 내면 문제를 지적하셨습니다. 이들은 현재 외식하는 자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입술로는 공경하는데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B.C. 7세기경 이사야가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적 위선과 외식 때문에 바벨론에게 멸망할 것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사야 선지자의 경고를 듣지 않다가 바벨론에게 멸망당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의 예언이 지금 바리새인들에게 성취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종교지도자들의 상태가 바벨론 심판을 앞두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타락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의 전통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사람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렸습니다.(9)
  예수님은 구체적인 예를 들어 그들의 위선을 지적하셨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십계명의 다섯 번째 계명으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셨습니다.(출20:12) 그리고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고 하셨습니다.(출21:17, 레20:9) 그런데 그들은 ‘고르반’ 전통을 만들어서 부모봉양의 계명을 교묘하게 피해갔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그들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드려야 할 것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라는 뜻으로 ‘고르반’이라고 하며 부모공경의 계명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고르반’이란 ‘하나님께 드린 선물’이란 의미입니다. ‘고르반’은 일종의 맹세문의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맹세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율법을 근거로 다른 용도로 쓸 수 없었습니다.(민30:2) 심지어 채권자도 고르반 맹세를 한 돈은 가져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전에 반드시 바쳐야 하는 강제규정은 없었기 때문에 일부만 성전에 헌납하거나 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실상 고르반 전통으로 계명을 어겼고 그들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했다’(ἀκυρόω,아쿠로오)고 하셨습니다. “또 이 같은 일을 많이 행한다”는 말씀은 그들의 위선적이고 거짓된 행태가 부모공경에 관한 계명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통을 앞세워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일이 이들 삶 전반에 걸쳐서 행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사람의 전통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고 헤아려 지킴으로 하나님의 뜻에 가까워지도록 도와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생명처럼 지키며 이를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과 권위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는 자신들이 정결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지 않고 겉으로 드러나는 의식에만 집중할 때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백성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사람일수록 이런 위험에 빠지기 쉽습니다. 우리도 신앙생활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임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14-16절을 보십시오. “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 예수님은 사람이 부정하게 되는 근본 원인이 무엇인가를 깨우치십니다. 바리새인들이 생각하는 부정하다는 개념을 완전히 바꿔주셨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이 먹으면 부정하게 되는 음식을 규정하고 있습니다.(레11장) 하지만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어떤 것도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며 더 이상 먹는 음식이 사람을 정결하고 부정하게 만드는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비유의 의미를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책망하셨습니다.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왜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합니까? 이는 음식은 마음으로 들어가지 않고 소화되어 몸 밖으로 나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더러워진다는 것은 마음이 더러워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엇이 사람을 더럽게 합니까? 20-23절을 보십시오.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예수님은 사람 안에서 나오는 죄가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레미야 17장9절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앞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생명처럼 여기는 ‘장로들의 전통’을 ‘사람의 계명’, ‘사람의 전통’, ‘너희 전통’이라고 하심으로(7,8,9,13) ‘사람’과 ‘하나님’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이는 사람을 더럽게 하는 근원이 사람 속에 있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깨달아야 하는 이치입니다. 더 이상 전통이나 음식처럼 바깥에 있는 것으로 더럽고 깨끗한 것의 기준 삼아 다른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종교적인 전통을 잘 지키는 것으로 깨끗하다고 착각해서도 안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깨끗해질 수 있습니까? 코로나 이후 외부의 오염물질로부터 깨끗케 되고자 요즈음에는 어디를 가든지 공기청정기가 있고 물도 정수기 물로 마시고, 소독 약으로 수시로 손을 깨끗이 씻고 위생관리를 철저히 합니다. 이런 노력들이 질병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고 건강을 지키는 데에는 매우 유용합니다. 그러나 이런 노력이 마음까지 깨끗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겉만 신경쓰다보면 마음을 지키지 못하여 악한 이 시대의 영향을 받아 음란과 탐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의 죄에 빠지기 쉽습니다. 잠언 말씀에서는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잠4:23)”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외적인 정결보다 내적인 정결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특히 영적 지도자로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더욱 경각심을 가지고 투쟁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런 죄로부터 마음을 지킬 수 있습니까? 시편119편9절은 말합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오직 주의 말씀을 따라 지킬 때 깨끗하게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힘이 있어 나를 죄의 유혹으로부터 지켜주고 우리의 마음을 깨끗케 해주십니다. 요엘선지자는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하였습니다.(욜2:13) 우리가 날마다 말씀 앞에서 자기를 돌아보고 진실되게 회개함으로 내면을 깨끗하게 하기에 힘쓰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II. 이 말을 하였으니(24-37)
  2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예수님은 갈릴리 게네사렛 지역을 떠나 북쪽 이방인 지역인 두로로 가셨습니다. 두로는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도시로서 베니게(페니키아)의 수도였습니다. 요세푸스는 두로 사람을 ‘우리의 악명 높고 가장 지독한 적’으로 묘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했지만 숨길 수 없었습니다. 이미 두로와 시돈에서 왔던 많은 무리가 예수님이 하신 큰 일을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3:8)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한 여인이 찾아왔습니다. 25,26절을 보십시오.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그 여인은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었습니다. 헬라인이란 용어는 이방인임을 나타내는데(롬1:14) 거기다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함으로 이방인임을 이중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여인이었습니다. 앞에서 열두 해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자는 자신의 부정 때문에 공개적으로 예수님 앞에 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녀는 오직 어린 딸을 구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헬라인으로서의 자부심과 민족적 적대감을 모두 버리고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제 딸에게서 귀신을 내쫓아 주십시오. 제발 우리 딸을 좀 살려주세요” 여인의 기도는 참으로 처절하고 간절했습니다. 앞에서의 바리새인과 완전히 대조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 같은 이 여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바로 고쳐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2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예수님의 대답은 상당히 모욕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자녀’는 유대인을 가리키며 ‘개’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경멸할 때 사용하는 용어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무시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15절을 보면 개들과 점술가, 음행하는 자들, 살인자들, 우상 숭배자들,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와 동격으로 취급했습니다. 이것이 당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 대해 가지고 있던 전형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유대인들을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우선순위에 두고 역사를 섬기셨습니다. 마태복음 15장24절에 이런 원칙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아무리 그래도 세상 만민의 구주가 되시는 예수님이 어떻게 이런 극단적인 인종차별적인 단어를 사용하실 수 있는 것입니까? 이 여인은 예수님의 사랑과 긍휼을 믿고 나왔다가 가혹한 말에 상처만 받고 실망과 분노와 적대감을 가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여인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28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영접했습니다. “Yes, Lord!” “주여 옳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자기들의 생각과 전통을 내세워 예수님을 판단하고 ‘어찌하여’를 연발하며 따지고 반발하던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이방인인 이 여인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자신이 개와 같이 비천하고 은혜 받을 자격이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상 아래 개’들도 자녀들이 먹다 흘린 부스러기 정도는 먹을 수 있는 것처럼 자기에게도 부스러기 은혜는 주실 수 있지 않으신가를 청했습니다. 예수님의 모욕적인 말씀이 어떻게 여자의 귀에는 옳은 소리로 들린 것입니까? 여인에게는 예수님께 대한 깊은 신뢰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과 사랑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이란 어떤 경우에도 주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그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듣지 않았습니다. “No”라는 대답 속에서도 “Yes”라는 감정을 읽었습니다. 여자는 예수님의 대답 중 ‘먼저’라는 단어에서 여자의 요청을 거절한 것이 아님을 알아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안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순서에 차이를 두신 것이었습니다. 이 여자에게는 들을 귀가 있었습니다.
  여인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29,3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예수님은 여인의 ‘이 말’에 크게 감동을 받으시고 곧 그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이 말’은 겸손하게 은혜만을 간구한 믿음과 지혜의 말입니다. 마태복음 15:28절에서는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자의 ‘믿음의 말’을 기뻐하시고 ‘능력의 말씀’으로 응답하셨습니다. 사람을 직접 보지도 않으시고 비대면으로 여인의 딸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귀신을 쫓아내주신 그 이상의 은혜가 있습니다. 부스러기 은혜가 아니라 자녀들에게 주시는 것과 동일한 완전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개로 취급받던 이방인 여자를 정식 가족으로 ‘자녀’로 받아주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한 이방인 여자를 정결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주신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백부장도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장로들을 통해 자신의 종을 구원해주시도록 예수님께 간청했습니다. 그는 지배국의 장교였지만 예수님을 ‘주(Lord)’라 부름으로 예수님을 자신의 영적인 왕이요 총 사령관으로 영접했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초라하고 비천한 죄인인가 자아발견하였을 때 예수님이 몸소 자신의 집에 오시는 것 조차 황송하게 생각했습니다. 말씀 한마디만 하셔도 하인이 나을 것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를 절대적으로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그의 믿음에 감탄하시고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셨다며 크게 칭찬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배우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방여인이었지만 예수님을 신뢰하고 믿고 의지할 때 크게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기에 열심을 내는 종교지도자들은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고 헛되이 경배한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오히려 이들은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저버린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며 믿음의 말을 함으로 하나님께 인정받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더러운 영에 사로잡혀 멸망의 길로 치닫고 있는 캠퍼스 양들에 대한 진실된 사랑과 상한 목자의 심정을 덧입고 예수님 앞에 엎드려 간절히 기도함으로 귀신이 쫓겨나고 생명이 살아나는 은혜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풍성히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3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다시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셨습니다. 이때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귀가 먹어서 제대로 듣지도 못하고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으니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예수님은 그 사람을 어떻게 도와주셨습니까? 33,3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예수님은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가서 손가락을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셨습니다. 이는 듣지도 못하고 말을 제대로 못하는 그와 소통하시는 예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아픔과 고통에 깊이 공감하시며 탄식하셨습니다. 동시에 영적으로 귀와 입이 막힌 종교지도자들과 제자들의 영적 상태 때문이기도 하였습니다. 만일 듣지 못하고 말도 어눌한 자녀를 둔 부모가 있다면 그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탄식이 절로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녀 삼으신 이스라엘 백성과 예수님이 가족 삼으신 제자들의 상태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이방인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고 믿음을 가졌는데 정작 깨끗하다고 자부하며 하나님의 자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듣지도 깨닫지도 못하는 이 병자와 같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귀먹은 자와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들을 고쳐주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에바다”하시자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풀려서 또렷하게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의 말씀도 들을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도 전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영적으로 막힌 귀와 입을 여는 권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임할 때 새로운 세계가 열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경계하시며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경계하실수록 그들이 더욱 널리 전파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심히 놀라 이르되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37)” 예수님은 영적으로 귀 먹고 말 못하는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 모두에게 새로운 창조역사를 이루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영적인 귀가 열리고 혀가 풀리는 것만큼 심히 좋은 일은 없습니다. 이로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사35:5,6)”

 하나님은 과거 헬라인과 같이 의대생이라는 자부심과 자기 성실과 열심으로 똘똘 뭉쳐 은혜 받을 수 없던 자를 찾아오셔서 죄인으로서 자아발견하게 하시고 일방적인 은혜로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 받는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장로들의 전통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중요시 하는 바리새인들과 다를 바 없는 저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날마다 새벽기도와 일용할 양식으로 하루를 출발하고 GBS와 일대일역사를 섬기고 요즈음에는 주말에 한 번씩 캠퍼스 피싱도 하고 틈틈이 성경다독도 하면서 겉으로 보기에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습니다. 그리고 전국 학사 목자 수양회 역사를 실행팀이 되어 섬기면서 하나님 역사의 중심에서 쓰임 받는다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볼 때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감사하기보다 여전히 세상욕심과 사람들의 인정을 구하는 마음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교만과 자기자랑하기 좋아하며, 다른 사람들에 대한 무시와 판단과 정죄하는 마음 등 내면은 온갖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몸은 주로 센타에 있지만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었습니다. 그럴  때 캠퍼스 피싱도 양들에 대한 상한 목자의 심정 없이 나가서 땅만 밟고 돌아올 때가 많았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채 겉만 번드르한 종교생활을 하고 있던 자임을 고백하고 회개합니다. 제가 날마다 말씀 앞에 나아가 회개함으로 내면의 더러운 죄를 씻어내고 말씀으로 채우고 믿음의 고백을 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세상의 더러운 죄와 사탄의 세력에 잡혀 하나님께 나오지 못하는 영혼들을 아비의 심정으로 섬겨서 깨끗함을 덧입고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성령의 역사를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새로운 기준을 제시해주셨습니다. 장로들의 전통을 잘 지킨다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희가 날마다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내면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함으로 마음을 깨끗하게 하여 하나님의 정결한 백성으로서 주신 축복을 감당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꽉 막힌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믿음의 말, 감사의 말을 하며 하나님의 말씀전파에 귀하게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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