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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9-12-29 (일) 12:20
분 류 로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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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로마서 제11강]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2019년 로마서 제 11 강
말씀 / 로마서 8:18-39
요절 / 로마서 8:37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어제 결혼예식에서 신랑에게 물었습니다. “신랑은 ,.. 기쁠 때나 역경의 때나 건강할 때나 건강이 좋지 않을 때나 변함없이 사랑하고 살펴주고 함께 동역하고 섬겨주겠습니까?” 신랑이 주저없이 대답했습니다. “아멘!” 세상에서 제일 지키기 어려운 약속중의 하나인대도, 신랑은 왜 겁도 없이 결혼서약을 해버린 것입니까! 우리는 왜 겁도 없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일생 예수님과 함께 하겠다는 믿음의 서약을 해버린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몇가지 분명한 확신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장차 나타날 영광을 확신했습니다. 1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바울이 받았던 현재의 고난은 몇마디 욕먹는 정도의 마음고생이 아니었습니다. 헐벗고 굶주리고 강도를 만나고 박해를 받아 매 맞고 죽음의 위협까지 당하는 고난이었습니다. 바울 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모든 자들에게 고난이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고난인데, 거기에다가 신자로서 받아야 할 고난을 더합니다. 경건하게 살고자 할수록 세상과 섞이지 못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양들을 돕기 위해 시간과 물질의 손해를 보고 자기를 내려놓아야 하는 고난도 있습니다.
현재의 고난만큼 피하고 싶은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럴지라도 믿음의 길에서 떠날 수 없는 이유는 장차 나타날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장차 나타날 영광은 어떠합니까! 가끔씩 천국을 보고 왔다는 분들의 간증을 듣습니다. 어떤 이는 천국의 보도 블럭은 황금으로 되어있으며 각종 보석이 돌멩이처럼 널려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보석이 깔려 있다는 그런 간증을 들어도 별 감동으로 와닿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차라리 모든 이들이 그림같은 전원주택에 살며 아우디 스포츠카를 몰고 다닌다고 하면 훨씬 소망이 될 것 같다고 합니다. 저 또한 장차 나타날 영광을 감히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바울 사도는 비교할 수 없다는 한마디 말씀으로 더 이상의 설명을 거부합니다. 지금 어떠한 고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장차의 영광을 보았을 때, 눈꼽만큼의 손해의식도 갖게 하지 않을, 비교불가의 영광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이라 말씀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는 지금과 장차를 썩을 몸과 썩지 아니할 몸, 욕된 몸과 영광스러운 몸, 약한 몸과 강한 몸, 육의 몸과 신령한 몸으로 설명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나타날 영광의 세계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11:6-9)

장차 나타날 영광을 우리만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피조물 또한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19) 20절을 보면 지금 현 세계에서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라 말씀합니다. ‘허무한 데 굴복한다’는 것은 본래의 창조목적과 다른 목적으로 쓰임받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자연 만물을 다스리는 자로 아담을 세우셨는데, 그런데 지도자 아담이 타락함으로써 자연 만물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본래 목적을 잃어버리고 인간의 이기심과 탐심을 채워주는 대상으로 전락해버렸습니다. 예를 들면 아름드리 나무를 짤라 우상을 만들고 산과 들을 파헤쳐 사람들을 죽이고 환경을 파괴하는 무기를 만들면, 그렇게 쓰임받는 피조물들을 탄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 목자님들이 양들과 함께 삼겹살을 먹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면, 삼겹살을 제공한 돼지들의 희생이 보람되고 의미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 같지도 않은 자들이 자기들의 소중한 삼겹살을 술안주 삼아 허랑방탕하게 먹어댄다면, 돼지들의 죽음이 얼마나 허무한 것이 되어버립니까! 피조물이 바라는 것은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입니다.(21) 그때까지는 피조물들이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의 굴레에 남아있어야 합니다.(22) 자연세계가 평안하고 아름다운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거기에도 치열한 생존경쟁과 약육강식의 법칙이 흐르고 있습니다. 사마귀는 메뚜기를 잡아먹지만, 메뚜기는 어린 사마귀를 잡아먹습니다. 사자는 하이에나를 물어죽이고 하이에나는 어린 사자새끼를 물어죽입니다. 숲으로 우거진 자연이 결코 에덴동산이 아닙니다. 울창한 숲은 나무들이 떼를 지어 정답게 사는 것 같으나 실은 서로 먼저 햇빛을 받으려고 치열하게 목을 빼고 경쟁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경쟁에 밀려 햇볕을 받지 못한 식물은 말라 죽습니다. 투쟁하여 살아남은 자도 결국 탄생과 죽음이라는 썩어짐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자연만물이 ‘불안해서 못살겠다. 너무 치열하여 힘들다’ 소리치고 있습니다.

피조물만 탄식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들도 탄식합니다. 2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며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인 신자들을 말합니다. 믿는 자들이 왜 탄식합니까!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목표한 만큼 성적이 나오지 않을 때, 목표한 만큼 주머니에 돈이 없을 때 탄식합니다. 돈은 있는데 양이 없을 때, 양은 있는데 제자로 자라지 않을 때, 제자는 자라고 있는데 믿음의 가정을 이루지 못할 때 탄식합니다. 한 해를 돌아보니 손에 잡히는 것이 없고 새해를 맞이하는데 뚜렷한 비전이 생기지 않을 때 탄식합니다. 머리로는 어떻게 해야하는지 뻔히 알면서도 머리와 따로 움직이는 몸으로 인해 탄식합니다. 이 모든 탄식의 근원은 우리 몸이 이 땅에 붙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자들의 참된 소망은 몸의 속량, 곧 우리 몸이 예수님처럼 부활하는 것입니다. 운동이면 운동, 공부면 공부, 기도면 기도, 전도면 전도, 무엇이든지 힘차게 달릴 수 있는 강한 몸을 덧입는 그런 날을 소망합니다. 힘들게 소감 쓰지 않아도 그냥 숨 쉬듯이 영적인 생각을 하고 진리에 자연스럽게 순종하는 신령한 몸을 덧입기를 소망합니다. 죄와 죽음의 세력이 박살나고 더 이상 생명을 빼앗기지 않는 썩지 아니할 몸을 덧입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그 영광의 날이 올 것을 압니다. 우리가 바로 그러한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24)
만약 우리의 소망이 이 땅의 것들이라면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우리에게 전혀 감동으로 와 닿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은 보이는 소망, 억대 연봉, 좋은 차와 좋은 집과 맛있는 음식을 위해 아침부터 밤늦도록 수고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이는 소망을 인생목적삼아 달려가는 것이 불나방처럼 파멸을 향해 달리는 것’임을 압니다. 믿는 자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사람들입니다. 2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참음으로 기다린다는 것은 수도원에 들어가서 조용히 시간 보내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영광의 날이 오기까지 현재 받아야 할 고난을 묵묵히 견디며 감당하는 것입니다. 학생의 십자가, 가정의 십자가, 직장의 십자가를 견디는 것입니다. 한 영혼을 감당하는 목자의 십자가를 지고 또 지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현재의 고난은 해산의 고통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엄마들이 해산의 고통을 끔찍하게 생각하면서도 그 길을 가는 것은 고통이 아닌 생명으로 끝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2019년 한해 참음으로써 부르심과 사명을 따라 살도록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2020년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며 인내하는 한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합력하여 선이 이루어질 것을 확신했습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만 참고 기다려야 한다면 얼마나 두렵고 힘든 일입니까! 현재 우리는 연약합니다. 일이 잘되면 하늘을 날다가도 일이 틀어지면 땅속으로 추락하여 어둠에 파묻히는 죄성을 가졌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장차 나타날 영광에 이르기까지 참고 견딜 수 있습니까! 성령께서 우리 연약함을 도와주십니다. 2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주 저 멀리 천국에만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십니다. 우리만 탄식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도 탄식하십니다. 2인3각 경기를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만약 저같이 달리기를 못하는 사람이 우사인 볼트같은 사람과 한조가 되어 달린다면, 볼트가 얼마나 답답하여 탄식하겠습니까! 그와 같이 성령께서 나와 한 팀이 되심으로써 탄식하십니다. 나는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줄 모를 때가 많습니다. 내게 가장 좋은 진로가 무엇인지, 내게 가장 합당한 동역자는 어떤 사람인지 분별하지 못합니다. 때로는 자기에게 안 좋은 길을 고집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로 기도하기도 합니다. 성령은 그런 나를 보시며 답답하며 가슴을 치며 탄식하며 부르짖습니다. ‘베드로, 이 바보야! 그렇게 기도하면 안 돼! 하나님, 베드로의 기도를 듣지 마시고 저의 간구를 들어주옵소서’ 내 양심을 깨우고 내 영혼을 짓누르기도 하시며 하나님의 부르심대로 가도록 일하십니다. 우리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은 성령의 생각을 아십니다.(27) 하나님은 성령의 간구를 들으사 나에게 가장 합당한 코스로 이끄시며 나를 하늘에 속한 신령한 사람으로 연단하십니다.
2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 말씀은 ‘누구든지 자기 마음대로 행동해도 결국에는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다’라는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대전제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이 잘되면 선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다가 일이 어렵게 돌아가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이루시는 선에 도달하기가 어렵습니다. 일이 잘 되든지 못되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은 당장에는 실패처럼 보이는 거기에서 새로운 변화를 시작하시고 당장에는 저주처럼 보이는 결과에서 영광의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창세기의 요셉이 형들의 시기를 받아 애굽의 노예로 팔려갔을 때, 그는 망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거기에서 인정만 받고 살던 철부지 요셉을 섬기는 종으로 빚어가셨습니다. 요셉이 보디발 여사의 유혹을 뿌리침으로 감옥에 갔을 때, 세상의 어둠에 짓눌려 끝장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총리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요셉의 이야기에 반복하여 나오는 말씀이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입니다. 요셉이 얻게 된 최고의 선은 어떤 가운데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어떤 선교사는 선교지에 나갔다가 자녀의 자폐증상을 만나 커다란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는 능력 있는 선교사가 되어 많은 열매를 맺기를 원했는데, 자폐아는 회복될 수 없다는 절망적인 선고를 듣고, ‘내 인생은 끝났다’며 탄식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고통하며 기도하는 그에게 아들을 천하보다 소중히 여기라는 방향을 주셨고 상담학을 공부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어린 소자 하나에게 하는 것이 나에게 하는 것이니라’는 말씀처럼, 선교사의 꿈을 끝장낸 아들을 예수님 섬기듯이 섬겼습니다. 그리했을 때 아들은 점점 좋아져서 컴퓨터 벤처 직장에 다닐 정도로 건강해지게 되었습니다. 아들을 돕는 과정을 통해 온전치 않은 내면을 가진 청소년들을 깊이 이해하는 상담 박사가 되었고, 유명한 상담가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동역자들이나 양들이나 누구를 만나든지 격려하고 활력을 불어넣는 목자로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시는 궁극적인 선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음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고난의 과정을 통해 순수해지고 축복의 과정을 통해 풍성해져서 점점 하나님 형상에 가까워지는 것이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사 맏아들로 삼았다고 말씀하신 이유가 그러합니다.(29) 우리 신앙의 모델, 우리의 큰 형님, 우리의 큰 오빠로 삼으사 그를 본받도록 하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택하여 예수님을 본받게 할 것인지 미리 아시고 미리 정하셨습니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영원 전부터 우리를 아시고 ‘찜’하신 것입니다. 대학생이 되고 싹수를 보이니까, ‘오! 이런 인간이었어?’, 찾아오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미리 아신 자들을 정하시고 미리 정하신 자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자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들을 영화롭게 하십니다.(30) 어쩌다 보니까 우연히 인연이 닿아서 구원해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구원의 잔치, 성화의 잔치에 예약되어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VIP입니다. 선하신 하나님, 완전하신 하나님을 바라봄으로써 두려움 없이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 따라 살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했습니다. 31-35절에서 바울은 4번에 걸쳐 반복하여 물어옵니다.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31), “누가 고발하리요”(33), “누가 정죄하리요”(34), “누가 끊으리요”(35) 대적, 고발, 정죄, 끊음, 모두 공격용어입니다. 4가지 질문처럼 신앙생활에는 끊임없이 대적하고 고발하고 정죄하고 끊어버리고자 공격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로부터 공격받았습니다. 이쪽에서는 유대 율법을 변질시키는 좌빨 진보라 공격을 받고 저쪽에서는 황제숭배를 거부하는 수구 꼴통이라 공격을 받았습니다. 율법에 사로잡히고 우상숭배에 사로잡힌 자들을 복음으로 구원하였음에도 비난받았습니다. 공격하는 세력의 이면에는 사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몸부림을 칠수록, 사탄도 그를 방해하기 위해 몸부림을 칩니다. 사탄은 어제 패하여 돌아갔어도 오늘 다시 심방하여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공격합니다. “너같은 자가 무슨 목자냐! 너 그러다가 망한다! 시간이 흐르기 전에 빨리 그만두는 것이 서로 좋은 것이다.” 희망과 비전이 없으니, 이왕이면 세상에서 마음껏 즐기며 살자며 속삭입니다. 그렇게 고발하고 정죄하며 부르심을 끊고 사명을 끊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도록 도전해옵니다. 우리가 어떻게 독사처럼 날카로운 사탄의 공격을 막아내고 견딜 수 있습니까!
31-35절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편이기 때문입니다.(31)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신 하나님이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은사를 공급해 주십니다.(32) 구원의 은혜뿐만 아니라 능력도 주시고 사람도 주시고 사건도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고 의롭다 하셨습니다.(33)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승리를 위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우리를 위해 끊임없이 중보기도하고 계십니다.(34) 35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바울은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라 할지라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35) 환난, 박해, 기근, 칼, 이런 것들 중에서 한가지만 우리에게 닥쳐와도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아무 것도 아니라며 당당히 외치고 있습니다. ‘고난, 그까이 것 뭐!’이라는 마음으로 외치는 것입니까! 아니면 바울이 아직 제대로 쓴 맛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바울은 누구보다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36절 말씀처럼 마치 도살장에 끌려온 양처럼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수없이 받았습니다.(36) 그럴지라도 결국에는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3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겨우 이기는 것이 아니라 넉넉히 이깁니다. 그렇다면 넉넉히 이기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모든 문제가 깨끗이 사라지는 것을 말합니까! 환난이나 곤고가 있는데도 끝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붙드는 것입니다. 박해나 기근이 있을지라도 부르심의 길, 진리의 길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 있을지라도 양들을 사랑하고 긍휼을 베풀기에 힘쓰는 것입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길에 우뚝 서는 것입니다.
저는 2019년 한 해를 돌아볼 때에 목자생활의 고비고비를 어떻게 넘겼는지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정말 연약한 생각, 마치 숨이 가슴까지 차올라 더 이상 뛸 수 없다며 주저앉고 싶은  육상선수같은 그런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말씀을 주시고 사람과 사건을 통해 길을 내시고 다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생각하지 못했던 곳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통해 정신 차리고 목자로서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2019년 한해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2018년에도 그러했고 2017년에도 그러했고..., 해마다 그러했습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오늘까지 믿음의 길에 서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모든 고난가운데에서도 넉넉히 이기게 됩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을 고난에서 보호하시고 고난가운데 연단하시며 고난을 통해 성숙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고난을 통한 싸움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초대교회가 만났던 박해나 기근이나 칼같은 고난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하지만 점점 세속화되어가는 세상분위기나 좀 더 많은 풍요를 누리고 싶은 욕심이 고난만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게 하는 위협으로 다가옵니다. 고난이 있을 때에는 중심을 잘 지키다가 돈도 생기고 시간의 여유가 생기자 스피릿을 잃어버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습니다. 척박한 광야에서는 단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했는데,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에 들어가서 무너졌습니다. 사탄은 다양한 전략으로 끊임없이 택하신 자들을 공격합니다. 이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하나님의 사랑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38,3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사도 바울은 그 어떤 것으로도 끊을 수 없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좋은 것, 세상의 어떤 나쁜 것으로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어낼 수 없습니다. 우리를 붙들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줄이 너무도 강하고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사랑의 줄을 끊어버리지 않는 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아니, 우리의 힘으로도 하나님의 사랑의 줄을 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소중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된 희망입니다. 누구든지 2020년을 힘차게 맞이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여 말씀을 붙들고 기도제목을 붙잡아야 겠습니다. 고난이 오든지, 축복이 오든지 하나님의 사랑에 더 깊이 뿌리내림으로써 넉넉히 이기는 새해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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