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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0-05-24 (일) 12:47
분 류 마태복음
첨부#1 2020년_마태복음_제12강-1.hwp (28KB) (Down: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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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제12강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2020년 마태복음 제 12 강        
말씀 / 마태복음 8:1-17
요절 / 마태복음 8:17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8장부터는 예수님의 행하신 기적이 많이 나오는데, 대부분 사람을 고쳐주신 이야기입니다. 병자들은 질병에 연약하고 죄와 상처에 연약한 인간을 대표합니다. 예수님은 연약한 인간을 고치사 하늘 백성으로 살게 합니다. 말씀을 통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덧입기를 기도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마치고 내려오시자 많은 무리가 따랐습니다.(1) 그 가르침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달랐기 때문입니다.(7:29) 바로 그때 한 나병환자가 예수님에게 나아와 병을 고쳐달라고 간구했습니다.(2) 당시 나병은 저주받은 질병으로 여겨졌고, 나병환자는 사회에서 격리조치 되었습니다. 나병환자가 마을에 들어올 때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어헤치고 입술을 가리며 ‘부정하다, 부정하다’ 소리쳐서 자신과 접촉하지 않도록 경고음을 내어야 했습니다. ‘혹시 전염되지 않을까?’ 사람들은 그런 두려움으로 나병환자에게 돌을 던지며 멀리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나병환자는 용감하게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예수님을 향해 나왔습니다. 마치 코로나 확진환자가 많은 사람이 모인 공공장소에 찾아온 것과 같습니다. ‘더러운 나병환자야, 저리 꺼져!, 네가 올 곳이 아니야!’ 외치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방금 전까지 산상수훈을 통해 은혜 받은 사람들마저도 수군거리며 사나운 눈빛으로 나병환자를 주시했습니다.

그가 이런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을 리 없습니다. 그럴지라도 나올 만큼 간절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제발, 반드시’이 아니라 ‘원하시면’이라고 요청합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간절히 고침 받고 싶어하면서도 ‘원하시면’이라고 요청합니다. 나병환자 내면의 고통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의 정죄와 배척을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얼굴은 흉측하게 문드러지고 몸에서는 진물이 흐르고 주변에 엄청난 부담을 주고 있습니다. ‘나 같은 자가 낫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기는 할까? 차라리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져버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 스스로 정죄당하며 살아온 인생이었습니다. 아울러 예수님에 대한 순전한 믿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원하기만 하면 나병도 깨끗이 낫는다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면 고치지 못할 병은 없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시선을 물리치고 예수님 앞에 나아올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어떻게 도우십니까! 예수님은 말씀만 하셔도 고칠 수 있는 분입니다. “말씀으로 고쳐줄 터이니 더 이상 가까이 오지마, 마스크하고 제발 거기 좀 서 있어” 서둘러 말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그의 몸에 대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손을 내밀어 그 몸에 대신 것은 진정으로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병뿐만 아니라 마음의 상처까지 낫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를 위해 율법과 감염의 장벽을 뛰어넘어 그에게 접촉하셨습니다. 연약한 사람이 온전히 회복되기 위해 희생이 요구될 때가 있습니다. 사람의 허물에 접촉하여 같이 부정한 자가 될 수도 있고 세상의 장벽을 넘기 위해 용기를 가져야 할 때도 있습니다. 오해와 미움을 받을 수 있고 생명같이 소중한 것을 내어놓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죄인과 병자들을 고쳐주실 수 있는 이유입니다. 죄인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을 수 있는 분이기에 우리의 구원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이번에는 가버나움 백부장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당시 하인, 노예는 살아있는 가구라 불리었습니다. 병든 노예는 버려지거나 싼 값에 팔렸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백부장은 중풍병에 걸린 하인을 고쳐주고자 유대 청년 예수님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자기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고개를 숙일 수 있는 인간애를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하인 사랑에 감동하여 직접 가서 고쳐주고자 움직이셨습니다.(7)
그런데 정말 예수님을 놀라게 했던 것은 백부장의 믿음이었습니다. 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백부장의 고백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는 백부장이었고 탁월한 인간애를 가졌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을 초라한 사람, 자격 없는 사람이라 고백합니다. 이는 단순한 자기비하가 아닙니다. 자기는 100명의 부하를 거느린 백부장에 불과하고 예수님은 온 우주를 다스리는 총사령관으로 알고 있는 거기에서 나온 고백입니다. 온전한 믿음은 예수님을 제대로 아는 거기에서 나옵니다. 백부장이 고백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라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군대는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습니다. 물론 당나라군대에서는 그렇지 않지만, 로마군대처럼 강하고 훈련된 군대일수록 지휘관의 말은 절대적입니다. 오래전 제가 논산훈련소에서 훈련받았을 때입니다. 훈련소장이 부대를 시찰하다가 저희 11교육중대 숙소 앞마당이 다듬어지지 않은 것 같다고 지적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체력단련시간에 11중대 전원이 운동장에 흩어져서 자잘한 돌을 줍고 살짝 튀어나온 부분들을 군화로 문질렀던 기억이 납니다. 지휘관의 지위는 말의 권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코로나 방역을 위해 온 국민의 협조를 부탁하는 대통령의 당부의 말씀이 떨어지자, 모든 군인들의 면회, 외박, 휴가가 한동안 금지되었습니다. 그와 같이 ‘우주의 총사령관이신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질병도 떠나가고 하인은 온전해질 것이다’ 그리 믿은 것입니다. 백부장은 삶의 원리를 그대로 믿음세계에 적용한 것입니다.
백부장의 고백은 ‘믿음의 성장이 실제 삶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은 지식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습니다.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내면이 연약하면 반석같은 믿음을 갖기 어렵습니다. 신학교수나 성경박사라 할지라도 믿음이 좋다고 확신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믿음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나의 실제 생활에 적용하여 체험해나갈 때, 그 말씀이 살아있는 믿음으로 다가옵니다. 실생활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그러져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육신의 부모와 어그러져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삐딱선을 타는 경우가 많습니다. 동역자에 대해 쓴뿌리를 품고 의심과 불신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에 대해 전폭적인 신뢰를 하지 못합니다. 반면 부모나 목자의 사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풍성함을 누린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도 열린 마음으로 영접합니다. 순종적인 삶이 말씀에 대한 순종을 가져오고 믿음을 체험하게 합니다. 헐뜯고 공격하고 비방하는 사람은 믿음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말씀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니까 입을 다물고 기도하면서 말씀의 세계를 체험합니다. 나는 부정적인 결론을 내리고 포기하고 싶은데,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도전하면서 믿음을 체험합니다. 오늘의 말씀이 이렇게 오라고 하시니 오늘 이렇게 오고, 내일의 말씀이 저렇게 가라고 하니까 저렇게 가는 사람들이 말씀의 능력을 체험합니다. 혈통이나 환경이 믿음을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훌륭한 부모나 믿음 좋은 목자를 두었을지라도 순종하는 삶이 없다면 믿음은 자라지 않습니다. 보고 들은 것은 많은데 순종하는 삶이 없으면, 머리는 크고 몸은 작은 가분수가 되어버립니다. 하나님은 없고 사람만 남는 피곤한 신앙생활입니다. 백부장처럼 순종하는 생활을 통해 살아있는 믿음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백부장의 고백은 예수님을 놀라게 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놀랐다는 기록은 여기밖에 없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거센 풍랑을 만났을 때, 예수님은 놀라기는커녕 주무셨습니다. 귀신 들린 광인을 만났을 때에는 놀라기는커녕 말씀으로 귀신들을 제압했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의 믿음을 보고 놀라십니다. 그러자 제자들과 유대인들을 향해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11,1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예수님은 이스라엘가운데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백부장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대열에 올리셨습니다. 말씀을 들은 제자들과 유대인들은 얼마나 민망했을까요! 혹은 분노하는 사람들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아니, 어떻게 우리가 이방인보다 못한거야! 백부장은 말 한마디 잘한 것에 불과한 것 아니야? 우리는 할례도 하고 안식일도 지키고 온갖 결단도 했는데 말이야...’ 예수님의 말씀은 유대인들의 자부심에 상처를 주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해서라도 믿음의 중요성을 심고자 했습니다. 믿음이 없다면 아브라함의 혈통이라 할지라도 천국 문에 들어올 수 없으며, 하나님의 나라에서 버림당하여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게 이를 갈게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이방인보다 믿음이 좋아야 할 것 같습니다. 성경도 알고 예수님의 행하시는 모든 역사를 현장에서 라이브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의 등장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가끔씩 우리가운데 백부장같은 사람들을 보내어주실 때가 있습니다. 처음 예배에 나온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결단하고 제자로 출발한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꿀처럼 답니다. 매일 말공하면 좋겠어요!’라는 고백으로 말씀에 무덤덤한 목자를 부끄럽게 만드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정말 힘들게 살고 있음에도 오늘의 감사를 붙들고 주와 복음역사에 충성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한 사람만 있어도 이전에 없던 새 역사가 시작됩니다. 주님은 그들을 통해 우리 믿음을 새롭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자족할 것이 아닙니다. 한 때 믿음이 좋았다는 사실로 위안을 삼을 것도 아닙니다. ‘나는 지금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하고 있는가! 말씀에 대한 믿음이 살아있는가’ 스스로에 되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백부장에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예수님은 믿음대로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신앙스펙으로 자족하지 말고 살아있는 믿음을 준비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믿음이 없어 뒤로 물러서서 침륜에 빠지는 자가 되지 아니하고 말씀을 따라 순종하여 살아야 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십니다. 그때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누워 있었습니다. 당시 유행했던 말라리아나 장티푸스에 걸렸던 것 같습니다. 당시 랍비들은 자기 배우자가 아닌 다른 여인과 접촉하는 것을 금했습니다. 더군다나 열병에 걸린 병자이기에 접촉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열병으로 고통하고 있는 여인을 불쌍히 여기사 그 손을 꼬옥 잡아주었습니다.(15) 그러자 열병이 떠나갔습니다. 장모는 너무 감사하여 즉시 일어나서 맛있는 부대찌개를 끓여 예수님을 대접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귀신들린 자, 온갖 병든 자들을 많이 데리고 왔습니다.(16) 졸지에 베드로의 집은 ‘베드로 의료원’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귀신을 내어 쫓고 병을 내보내며 온전히 낫도록 하셨습니다.

마태는 이런 예수님을 통해 이사야서 53장 4절 말씀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1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담당한다’는 것은 ‘대신 가져간다, 책임을 떠앉는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병이나 악한 영에게 사로잡힌 인생을 연약함의 문제로 보셨습니다. 그리고 연약함의 책임을 사람에게 돌리지 아니하고 하나님 자신이 책임지셨습니다.
이스라엘 사회의 보편적인 시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나병을 연약함으로 보기보다 더러움으로 보았고, 중풍병을 ‘하나님의 저주’로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세리와 죄인들을 연약한 자가 아니라 완악한 자로 본 것입니다. 양심도 없고 돈 밖에 모르는 이기심 덩어리, 사회의 암적인 존재들로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쌍함이 아닌 정죄와 미움으로 대했습니다.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분노하는 대부분의 이유도 연약함이 아닌 다른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책상에 오래 앉아있지 못하는 모습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퍼질러 있는 게으름과 불성실의 죄악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핸드폰을 손에서 내려놓지 못하는 모습이 무절제와 무개념의 모습으로 보일 때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그리 분노하는 것도 실은 연약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나의 하나님, 자녀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약하고 세상에 대한 두려움은 크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인생을 살지 못할까봐, 감당할 수 없을까봐 조급증과 염려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흙으로 지어진 인간은 누구나 연약합니다. 강해보이는 인간들도 실상 한꺼풀 안을 들여다보면 그리 연약할 수 없습니다. 건강하게 살고자 노력해도 병에 걸리고 고상하게 살고 싶어하면서도 죄의 유혹에 약합니다. 사람의 인정에 약하고 말 한마디에 깊은 상처를 입습니다. 사랑하며 살고 싶은데, 사랑할 줄도 모르고 받을 줄도 몰라 결국 상처를 주고받는 것입니다. 마태가 세리가 된 것도 연약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세상이 무서워서, 돈이라도 없으면 행복하지 못할까봐 양심을 버리면서까지 세리의 세계로 기어들어간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연약합니다. 하나님이 그리 보셨기에,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그리스도로 보내사 인생들의 연약함을 담당하게 하셨습니다.  

아이가 엄마의 양육을 통해 어른으로 자라가듯이, 병자가 의사의 진료를 통해 건강함을 회복하듯이, 연약한 영혼이 강건해지기 위해서는 수고와 희생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병이 깊고 연약함이 심할수록 더 많은 수고와 희생이 필요합니다. 중병에 걸린 환자가 낫기까지 간호가 필요하고 수술이 필요하고 재활이 필요하듯이, 한 사람이 믿음위에 굳게 서기까지 위로도 필요하고 씨름도 필요하고 부지런히 가르치는 수고도 필요합니다. 때로는 영적 생명을 위협하는 세력과 치열한 싸움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고치기 위해 같이 부정한 자가 되셨고 감염의 위험을 감내하셨습니다. 백부장의 믿음을 통해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빠진 유대사회에 도전하셨습니다. 열병에 걸린 여인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습니다. 이는 당시 유대사회의 율법과 충돌하는 것이었고 유대인들을 화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에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의 미움과 박해를 불러왔습니다. 아마 마태는 그런 충돌의 중심에 서 있던 인물 중의 하나였을 것입니다. 세리를 민족의 반역자로 여겼던 시대에서 세리 출신을 제자로 데리고 다녔으니 얼마나 이상한 소문들이 돌았겠습니까! “예수가 돈을 좋아하여 세리를 제자로 거두었대!” 온갖 악성 댓글이 이스라엘 사회에서 떠돌았을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예수님은 뒤로 물러서지 않고 마태와 함께 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병든 마태, 연약한 마태를 회복시키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살리고 회복시키는 길이라면 어떠한 비난과 공격도 기꺼이 감내하셨습니다. 그 충돌의 끝이 십자가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로마를 타도할 수 있는 강력한 왕이 되어달라고 요청하는데, 예수님은 인생들의 죄와 허물을 담당하는 그리스도가 되고자 하십니다. 그러자 ‘호산나 호산나!’ 외치며 예수님에게 열광했던 무리들이 한순간에 돌변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라’ 외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셨고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습니다. 죄와 죽음의 그늘에 앉아 심판으로 끌려가는 연약한 인생들을 살리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무절제와 무정과 무자비와 허무와 교만과 이기심과 비교의식과 시기심과 모든 연약함을 담당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를 믿는 자들에게 하늘백성의 건강한 삶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십자가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는 치료의 능력입니다.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영접하면 죄사함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내 영혼의 고질병이 치유받고 상처와 미움이 떠나갑니다. 더러운 죄가 씻겨나가고 자책과 정죄가 녹아나고 두려움과 염려가 물러갑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소망과 하늘 백성으로 살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을 얻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길을 가게 됩니다.

우리는 연약함을 알수록 예수님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연약함이 클수록 낙심하고 절망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간절히 의지해야 합니다. 한 청년이 목표를 정하고도 번번히 이루지 못해 낙심했습니다. 한동안 자신은 실패만 반복하며 여전히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런 과정을 통해 영적으로 연약한 자기를 발견했습니다. 목표를 이루어야겠다는 열망이 약했던 것보다 겸손히 예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연약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하루를 시작할 때마다 일용할 양식 말씀을 붙들었으며 일용할 의지를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현실의 압박이 짓눌러 올 때마다 말씀을 암송하고 붙들었습니다. 하나님은 때마다 보이지 않는 성령의 손길로 도와주셨습니다. 순간순간 사람을 보내어 주시고 사건을 통해 지혜를 공급해주시고 힘과 능력을 공급하사 결국 목표를 이루는 믿음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간다는 것은 점점 완벽해지는 것보다 점점 기도하고 범사에 예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부족함을 깨달을수록 더욱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분의 인도하심에 자기를 맡기는 것입니다. 목자로 사는 것도 그러합니다. 내가 부족하고 나에게도 문제가 많은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 있습니까! 나는 심정도 부족하고 지식도 부족하고 모든 것이 부족할지라도 예수님이 성령으로 감당해주시기 때문입니다. 목자의 연약함을 감당해주고 양의 연약함을 감당해주십니다. 그것을 믿기에 연약한 사람이 연약한 사람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아니, 연약할수록 더욱 더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도록 돕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해주시는 예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큰 희망을 보고 믿음의 길을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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