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OME | 세계선교 | 각부모임 | 경성소모임 | 성경연구 | 사진자료실 | 영상자료실 | 경성쉼터 | JBF/EBF/CBF | 기타 |

회원등록 비번분실

  Bible Study  
주일예배메시지
성경공부문제지
수양회강의
특강
구약강의자료실
신약강의자료실
강의안책자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0-06-07 (일) 12:15
분 류 마태복음
첨부#1 2020년_마태복음_제14강-1.hwp (29KB) (Down:41)
ㆍ추천: 0  ㆍ조회: 387      
IP: 61.xxx.145
[2020년 마태복음 제14강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2020년 마태복음 제 14강  
말씀 : 마태복음 9:1-17절
요절 : 마태복음 9:13절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며칠 전 모 의과대학 온라인 시험에서 집단 부정행위가 이루어졌습니다. 공부에 그리 연단된 사람들도 성적의 유혹에 넘어갈 수 있음을 보았습니다. 제보를 받은 교수들이 자수하면 선처해주겠다고 권유하고 있는데, 추적 불가능한 메신저를 사용한 것을 믿고 버티는 학생들이 많다고 합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오려면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나오는 죄인들을 정죄하지 않으시고 죄사함을 주십니다.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긍휼을 믿는 믿음 덧입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다시 본 동네인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습니다.(2) 침상채 데리고 온 것을 보면 무척이나 심각한 상태였던 것 같습니다. 병자도 힘들고 병자를 데리고 나온 사람들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가장 큰 장애물은 인간장벽입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어서 그 앞으로 데려갈 수 없었습니다. 길게 늘어선 줄을 생각하면 다른 날을 예약해야 이치에 맞는 행동입니다. 침상에 누운 무기력한 모습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아야 하는 것도 부담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병자라면 당연히 간절하고 당연히 겸손할 것처럼 생각합니다. 병에서 나을 수 있는 기회만 주어진다면 체면 따위는 저 멀리 던져버리고 필사적으로 움직일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병에 걸리면 몸도 힘들고 마음까지도 연약해집니다. 사람들의 시선에 더 많이 민감해지고 자포자기하여 어둠으로 더 쉽게 빨려 들어갑니다. 문제의 심각함 자체가 예수님에게 나오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없으면 아무리 절박할지라도 예수님과 자기 문제를 연결시키지 않습니다. 이점에서 중풍병자와 그를 데려온 사람들은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질병이 주는 절망보다 예수님이 주는 희망을 믿었습니다.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보다 예수님의 따스한 시선을 믿고 장애물을 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볼 때, 지금 중풍병자의 가장 큰 고통은 죄 문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중풍병으로 인한 고통보다 죄로 인한 고통이 더 심각했던 것입니까! 우상숭배의 죄를 지었을 수도 있고 남모르게 불륜의 죄를 지었을 수도 있습니다. 욕심과 쾌락을 좇아 밤낮으로 정신없이 일하고 즐기다가 뇌혈관이 터져 중풍병자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그는 죄사함 받기를 간절히 원했고, 예수님은 그의 속마음을 아시고 죄사함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전과 병자들과 다르게 중풍병자에게 죄사함을 선포하신 것은 ‘죄가 그리 심각한 문제인가?’라는 문제의식을 던져줍니다. 세상 대부분의 종교들은 죄 문제보다 고통의 문제에 주목합니다. 번뇌를 끊어내고 마음의 평안을 가져오고 신의 도움을 받아 현실문제를 해결하고 성공의 자리에 오르는 것에 주목합니다. 그를 위해 고행이나 선행이나 종교적 미션을 수행합니다. 반면 죄문제에 대해서는 법적 책임이나 죄의식이나 인간관계의 위기를 가져오지 않는다면,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미워하고 자기 욕심을 꾸리고 정욕을 좇아 사는 것을 본성에 충실한 솔직한 모습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죄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교만과 불순종으로 계명을 어기고 에덴에서 쫓겨나서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의 죄는 가인의 살인으로, 노아시대의 쾌락으로, 바벨탑의 불신으로, 소돔과 고모라의 패역함으로 커졌습니다. 죄가 세상 모든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고,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사 새 역사를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후손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어 율법을 주시고 가나안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어긋나자 선지자들을 보내어 회개하도록 도왔고, 그래도 안되자 바벨론 포로생활로 연단했습니다. 구약성경은 그리스도가 오시지 않는다면 어느 인간, 어느 민족이라도 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당신의 아들을 보내었고, 그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죄사함과 영생을 주십니다. 요한복음 3:16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교만한 인간은 여전히 불순종하고 대적합니다. 바벨탑처럼 높아지는 과학문명을 믿고 자기 보기에 좋은 대로 달려갑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죄에서 돌이키려고 재난과 질병과 전쟁으로 연단하십니다. 그럴지라도 사람들은 회개하기보다 그때만 잠깐 고개를 숙이고 치유 불가능한 혼돈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심판장으로 다시 오십니다. 마귀와 악한 자들과 죄와 죽음을 영원한 불못에 던져버리시고 죄가 없고 사망이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여실 것입니다. 창조 이래 우주의 시작과 끝은 죄 문제 해결에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습니다. 죄사함이라는 말씀에는 우주만한 엄청난 무게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의 포커스는 현실문제 해결에 있기 쉬운데, 하나님은 죄사함과 영생을 얻는 거기에 모든 포커스를 맞추시고 독생자를 보내셨고 다시 재림주로 보내실 것입니다. 누군가 죄사함을 받았다면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최고의 선물을 받은 것입니다. 가장 귀한 선물을 받은 사람들은 믿음으로 항상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그런데 어떤 서기관들은 예수님 말씀에 은혜받기는 커녕 분노했습니다.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 ‘하나님 외에는 죄를 사할 수 없는데, 자신이 하나님이란 말인가?’ 레위기 24장을 보면 신성모독죄는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입니다. 예수님은 저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악하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서기관을 향하여 악한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보통 악한 생각! 하면 누군가를 죽이려거나 가정을 파괴하려는 생각 혹은 사기 쳐서 돈을 떼먹으려는 생각을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생각을 악한 생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왜 무지한 생각이라고 말씀하지 않고 악한 생각으로 정죄하시는 것입니까! 그들은 얼마든지 예수님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고 백부장의 하인을 말씀으로 고쳐주시고 많은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신 것을 보았습니다. 갈릴리 바다의 광풍도 잠잠하게 하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그리스도가 오셔서 새 일을 행하실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잘 아는 서기관들이기에 누구보다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영접하기는커녕 신성을 들먹이며 예수님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를 거부하는 교만을 가볍게 생각했으며, 성령의 역사를 훼방하고 대적하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있습니다.

서기관들은 죄사함을 선포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그저 립서비스로 생각했습니다.(5) 죄사함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 입으로 큰소리를 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죄사함의 권능을 알리기 위해 중풍병자의 병을 치료하십니다.(6) 이를 보면 죄사함의 역사가 메인이며, 병 고침은 옵션입니다. 당장의 현실문제 해결이 건강한 인생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며, 때로는 영적으로는 마이너스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이 땅의 삶은 영원하지 않으며 언젠가 늙고 병들고 죽음으로 끝나게 됩니다. 죄를 용서받고 영생을 얻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거기에 인생의 참된 평안과 확신과 행복이 있습니다. 면역이 떨어지면 병에 걸리듯이, 죄사함의 은혜가 가물가물해지면 불신과 두려움과 내적 고갈과 이런저런 영혼의 병을 앓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죄사함을 알게 하고자 도전하십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그러자 중풍병자가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7) 무리가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8) 예수님 말씀은 하나님의 권능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죄사함 받고 새 인생을 살게 됩니다. 로마서 10:9,10절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우리에게 죄사함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으로서 예수님이 지어주신 신앙명입니다. 그의 본명은 레위였습니다. 아마 헌신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그리 지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레위는 본래 이름과 정반대로 세리가 되었습니다. 그만큼 믿음이 아니라 돈에 굶주렸던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벌면 많은 행복이 굴러 들어올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돈이 없어 궁핍했던 시절들, 돈이 없어 겪었던 눈물겨운 설움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습니다. 돈으로 사람의 인정을 사고 돈으로 아름다운 결혼을 사리라 결심했습니다. 그렇게 달리고 달려서 레위가 원하는 자리에 섰건만, 레위가 기대했던 행복은 없었습니다. 잘못된 인생목적에는 참된 행복이 있을 수 없다는 단순한 진리를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너무나 멀리 와버렸습니다. 뒤돌아간다고 하여 받아줄 세계도 없고, 뒤돌아갈 자신도 없었습니다. 그저 주어진 하루이기에 어쩔 수 없이 그 자리를 지키는 생활을 반복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세리의 내면을 꿰뚫어보시고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지금도 늦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금 회개하고 예수님을 따르면 얼마든지 새 인생을 살 수 있다는 초청입니다. 지나간 과거에 붙잡힐 것도 아니며, 다가올 제자생활을 감당할 수 있을까? 장래 염려에 짓눌릴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구원을 얻고 성령의 열매를 맺고 복된 제자생활을 하게 됩니다. 죄악된 본성을 극복하고 생활의 염려를 넘어서게 됩니다. 갈릴리 어부들을 사람낚는 사도가 되게 하신 것처럼, 세리도 사람의 영혼을 모으는 사도가 되게 하십니다.
마태는 믿음으로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했습니다. ’생각할 시간 좀 주십시오‘ 뒤로 미루지 않았고 즉시 일어나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10절을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리고 동료 세리들과 죄인들을 많이 초청했습니다. ‘내가 제자로 살 수 있다면, 저런 죄인들도 가능하겠다’, 홍세리, 박세리, 최세리 다 불렀습니다. 구원의 은혜를 붙드는 것이 복음전도의 기초입니다. 아마 마태는 동료 세리들을 향해 인생소감을 발표하였을 것이며 예수님이 메시지를 전했을 것입니다. 마태의 집에서 순식간에 여름수양회가 열린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이를 아름답게 보지 않았습니다.(11)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왜 세리와 죄인들에 대해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지 않는가’ 몰려와서 큰소리로 따져 물었습니다. 예수님이 저들의 소리를 듣고 말씀하십니다. 12,1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사람들은 세리를 나쁜 놈,  자기와 돈만 아는 바이러스 같은 인간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도움이 필요한 병자로 보았습니다. 욕심 바이러스에 전염된 병자, 세상이 치여 양심이 부러지고 윤리가 무너져 응급 수술이 필요한 병자로 보셨습니다.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은 근본적으로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에 약하고 유혹에 약하고 두려움에 약하기 때문입니다. 의사는 병자에게 ‘왜 병에 걸려서 주변 사람들을 부담스럽게 하느냐?’ 정죄하지 않습니다. 불쌍히 여기고 어찌하든지 고쳐주고자 사명감으로 달려듭니다. 그와 같이 예수님은 우리 영혼의 의사가 되어 병든 자들을 고치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이 우리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구약성경 호세아서 6:6절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본래 무서운 분이셨는데 예수님 당시에 이르러 갑자기 긍휼의 하나님으로 변신하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처음부터, 제사제도가 있기 전부터 하나님의 긍휼은 한이 없었습니다. 인간을 긍휼히 여기사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아담을 긍휼히 여기셨고 가인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을 긍휼히 여기셨고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구약의 이야기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나버린 인간들을 끊임없이 찾아오사 회복시키시는 긍휼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시고 제사를 가르치신 것은 그들이 다른 민족보다 탁월하고 고상한 민족이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율법이 없으면 죄를 깨달을 수 없고 제사가 없으면 죄사함의 도리를 알 수 없는 연약한 자들이었음을 말씀합니다. 제사와 율법은 죄인들을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도구였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의 최고봉은 세상에 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으셨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예수님의 긍휼을 믿고 나오면 어떤 죄인이든지 죄사함을 받고 새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죄로 병든 자신을 깊이 인정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오는 사람은 하나님의 긍휼을 체험합니다. 사람의 본성은 죄인으로 나아오기를 싫어합니다. 문대범 목자님은 교도소 군의관으로 근무했을 당시 정기적으로 죄수들을 상담했습니다. 그런데 상담하고 도와주기 제일 어려웠던 죄수들은 흉악범보다도 사기, 폭력, 뇌물수수 같은 자잘한 죄목으로 잡혀온 ‘잡범’이라고 했습니다. 전과 9범 10범이 넘는 잡범들이 자기의 죄를 인정하기보다 ‘재수가 없어 잡혀왔다. 나보다 더 나쁜 놈들도 있는데 억울하다’는 마인드를 가졌기 때문에 회개도 없고 따라서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 상대적 우월감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자기의로 내세우는  신앙생활에는 은혜가 없고 생명력이 없습니다. 다른 이들을 비판하고 공격하는데 에너지를 사용하느라 사람을 도울 수 없습니다. 사람을 돕는 근본 에너지는 긍휼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니, 사람은 누구나 긍휼을 덧입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는 우리의 악함을 아시고 우리 대신 하나님의 형벌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는 나같은 죄인을 향한 예수님의 긍휼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게 주어진 놀라운 긍휼을 밝히 기억할 때, 다른 사람을 향해 긍휼을 베풀 수 있습니다. 문제많은 양들이나 자녀들을 보아도 목자의 심정과 용기을 잃지 않고 끝까지 인내할 수 있습니다.
사람안에 지독한 죄성이 있습니다. 교만, 탐욕, 정욕, 절망, 허무, 꼬인 마음의 죄성은 사람의 힘으로 풀어낼 수 없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가까이 접촉하는 사람들을 감염시키는 것처럼, 인간의 죄성은 가까이 접촉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어둠을 전염시키고 에너지를 고갈시킵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돕고자 하는 사람일수록 예수님에게 나아가 끊임없이 긍휼한 심정을 덧입어야 합니다. 조롱당하고 상처받고 죽임당하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 예수님을 더 깊이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죄인들을 도우며 더 강한 영혼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목자로 태어났기에 목자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긍휼로 말미암아 목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긍휼로 말미암아 연약한 사람이 다시 일어서는 것이며, 교만하고 이기적인 사람이 희생과 섬김의 길을 가는 것이며, 의심 많은 사람이 믿음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우리 각 사람이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응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요한의 제자들이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기존 전통대로 금식하지 않는가’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당시 금식은 경건의 척도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빠서 금식하지 못했다. 우리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나름 금식하고 있다.’ 변명이나 합리화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생활을 말씀하십니다.(15) 많은 사람들이 신앙 전통을 지키는 것으로 만족해버리고 예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지, 그렇지 않는지에 그리 주목하지 않습니다. 남들 하는 것만큼 하고 있으니 감사가 없어도 그만, 회개가 없어도 그만으로 생각합니다. 어제 살던 대로 오늘 살고 오늘 살던 대로 내일 살아가는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신앙생활이 점점 메마르고 새로워지지 않는 이유입니다. 감사와 회개가 없는 사람 그로인해 죄사함의 은혜가 사라진 모임은 낡은 옷과 같고 낡은 가죽부대와 같이 언젠가 찢겨지고 터지고 맙니다.
생베조각을 낡은 옷에 기워놓으면 생베조각의 강한 수축력으로 말미암아  낡은 옷을 당겨져서 그 모양을 망치게 됩니다.(16) 새 포도주는 낡은 가죽부대에 담지 않습니다.(17) 새 포도주가 발효되어 부풀어 오를 때, 낡은 가죽부대는 늘어나지 못하여 터져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생베조각은 줄어들고 새 부대는 늘어납니다. 그와 같이 예수님이 이렇게 역사하시면 이렇게 하고 저렇게 역사하시면 저렇게 따라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병자를 고치면 치유의 능력자 예수님을 영접하고 죄사함을 선포하면 죄사함의 능력자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음속 깊은 곳까지 연단하시면 애통히 회개함으로 연단을 받고, 예수님의 축복의 손길에는 기쁨으로 화답하고 풍성히 감사하는 믿음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연단하여도 꿈쩍하지 않고 예수님이 축복하여도 무덤덤한 모습은 낡은 옷, 낡은 가죽부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매일, 매주 반복되는 일상에서 새부대가 되려면 예수님의 긍휼을 붙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나오는 모든 자들에게 좋은 것을 주십니다. 그를 믿고 나아가야 합입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당신의 긍휼하신 손길을 따라 살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하게 하시고 주님의 긍휼을 베푸는 사람으로 살게 하소서” 그런 믿음으로 진실하게 소감을 쓰고 주님앞에 살고자 애쓰기를 기도합니다. 한 영혼을 도우며 죄인을 부르신 예수님을 실제적으로 배워가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부르사 구원의 능력을 드러내시고 성령으로 인도하여 가십니다. 우리에게 이 믿음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0
3500
번호     글 제 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652 마태복음 [2020년 마태복음 제21강]천국은 밭에 감추인 보화 관리자 2020-07-26 414
651 마태복음 [2020년 마태복음 제20강]네 종류의 밭의 비유 관리자 2020-07-19 383
650 마태복음 [2020년 마태복음 제19 강]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관리자 2020-07-12 409
649 마태복음 [2020년 마태복음 제18강]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관리자 2020-07-05 393
648 마태복음 [2020년 마태복음 제17강]쉬게 하리라 관리자 2020-06-28 387
647 마태복음 [2020년 마태복음 제16강]전도 여행 보내신 예수님 관리자 2020-06-21 359
646 마태복음 [2020년 마태복음 제15강] 내가 이 일을 할 줄을 믿느냐 관리자 2020-06-14 359
645 마태복음 [2020년 마태복음 제14강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관리자 2020-06-07 387
644 마태복음 [2020년 마태복음 제13강]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신 예수님 관리자 2020-05-31 429
643 마태복음 [2020년 마태복음 제12강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관리자 2020-05-24 381
642 마태복음 [2020년 마태복음 제11강]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관리자 2020-05-17 399
641 마태복음 [2020년 마태복음 제10강]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 관리자 2020-05-10 461
640 마태복음 [2020년 마태복음 제9강]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관리자 2020-05-03 396
639 마태복음 [2020년 마태복음 제8강]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늘 아버지 관리자 2020-04-26 380
638 마태복음 [2020년 부활절 특강]그가 살아나셨느니라 관리자 2020-04-19 448
637 마태복음 [2020년 마태복음 제7강]너희도 온전하라 휴화산 2020-04-12 407
636 마태복음 [2020년 마태복음 제6강]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휴화산 2020-04-05 495
635 마태복음 [2020년 마태복음 제5강] 큰 빛으로 오신 예수님 관리자 2020-03-29 539
634 마태복음 [2020년 마태복음 제4강]다만 그를 섬기라 관리자 2020-03-22 403
633 마태복음 [2020년 마태복음 제3강]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관리자 2020-03-15 435
12345678910,,,37
서울 동대문구 이문2동 264-231
Tel:070-7119-3521,02-968-4586
Fax:02-965-8594
서제임스목자님메일:Suhjt@hitel.net
[UBF한국본부] [유럽UBF] [UBF국제본부] [UBF TV] [시카고UBF] [Mother Barry's Homepage]
[뉴욕UBF] [워싱턴UBF] [노스웨스턴UBF] [콜롬비아UBF] [코스타리카UBF] [프랑크푸르트UBF]
[키에프UBF] [상파울루UB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