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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0-08-16 (일) 13:21
분 류 마태복음
첨부#1 2020년_마태복음_제23강-1.hwp (29KB) (Down: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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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제23강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
2020년 마태복음 제 23 강
말씀 / 마태복음 15:1-28
요절 / 마태복음 15:19,20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오늘 말씀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대조되어 나옵니다. 종교지도자들과 가나안 여인이죠. 손을 열심히 씻고 겉은 깨끗하게 하지만 속이 더러워진 종교지도자들과 겉은 귀신 들린 딸로 인해 지저분해 보이지만 속은 깨끗하고 겸손한 가나안 여인입니다.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의 외식을 책망하시고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크게 칭찬하셨습니다. 겉보다는 속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날은 외모지상주의 눈에 보이는 것으로 평가하는 시대입니다. 신자들 가운데도 이 시대의 영향을 받아 신앙이 형식적이 되고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 인정하는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 종교지도자들의 외식 (1-20)
1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님께 왔습니다. 예루살렘의 산헤드린 공회에서 예수님을 감시하기 위해 꼬투리를 잡기 위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파견 한 것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당신들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먹을 때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훈련받느라 늘 배가 고팠고 처음에는 손 씻는 사람이 더러 있었으나 손 안 씻고 먼저 먹어 버리는 어떤 사람들 때문에 손 안 씻고 먹는 것이 이들의 전통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이런 제자들을 자유롭게 키우셨습니다. 반면에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모세오경에 버금가는 것으로 중요시하고 절대적으로 지켰습니다. 장로들의 전통에 의하면 식사 전에 반드시 손을 씻음으로 정결케 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손을 씻지 않으면 부정한 자로 여겼습니다. 제자들이 이를 어긴 것이니 큰 문제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누가 봐도 큰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손을 씻는 것은 위생에 좋습니다. 제가 이번에 코로나 사태로 손을 열심히 씻다보니 병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전에는 감기 환자를 많이 보다 보면 저도 영락없이 감기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손을 씻은 후로는 감기에 걸리지 않았어요. 손 씻는 것 하나로 많은 병을 예방하니 손 씻는 것이 유익한 것입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제자들로 인해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이 어려운 상황을 잘 넘겨야 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가짜뉴스라며 증거를 대라며 우길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들에게 정면으로 도전 하셨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이들의 문제는 장로들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출애굽기 20장 12절에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 출애굽기 20장 17절에서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이 계명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반드시 지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앞세워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였습니다. 장로들의 전통에서는 부모님보다도 하나님이 더 크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고르반’ 하기만 하면 부모나 사람들에게 아무 것도 드리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고르반은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런 전통을 악용하여 부모님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섬긴 것도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의 배만 채운 것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이들을 ‘외식하는 자들아!’ 하며 책망하셨습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처럼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말씀에 합당한 심각한 죄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왜 이렇게 된 것입니까? 하나님을 잘 믿고 잘 섬기기 위해 전통을 만든 것입니다. 처음에는 전통을 지키면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갔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형식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형식만 남다 보니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입으로 신앙생활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전통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신앙생활 잘하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위선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데는 명수이지만 자신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웠습니다. 소위 내로남불의 원조였던 것이죠. 우리도 이런 우를 범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신앙의 좋은 전통이 있습니다. 이를 잘 따라 하다 보면 신앙생활 잘하고 있는 것으로 스스로 여기에 되지요. 그런데 형식적으로, 습관적으로,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잘 깨닫지 못해요. 스스로 진단을 잘 내려야 하죠. 예배드리고 십일조 내고 말씀 공부도 하고 심지어 소감도 씁니다. 심지어 양을 치기도 해요. 그런데 일은 열심히 하지만 왠지 피곤하고 은혜가 없고 감사가 없으면 내 마음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문제가 있는 것이죠. 1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본받기 쉬운 무리들을 부르시고 이 중요한 진리를 듣고 깨달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말씀을 더 하셨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않습니다. 무슨 음식을 먹든지 위 속으로 들어가면 위 속에 강한 산인 소화액에 의해 소화되고 깨끗해집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은 소화되어 영양분은 흡수되고 찌꺼기는 배설되어 버립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우리 몸이 전혀 더럽혀지지 않죠.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게 하는 것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서로 의논해 보았을 것입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고 입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게 한다. 이게 무슨 뜻이지? 아 그래. 무슨 음식이든지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면 더럽지 않지만 토해서 입으로 나오면 얼마나 더럽니 바리새인들 보아 토 나오잖아. 제자들은 바리새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책망이 심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 바리새인들이 화가 난 것을 아십니까? 이들이 복수할까봐 염려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태연하게 그냥 두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심으신 것은 뽑히지 않습니다. 무럭무럭 자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심지 않으신 것 장로들의 유전은 결국 다 뽑힌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겉모습만 보는 이들은 영적으로 맹인이라는 것입니다. 외식하는 이들은 맹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영적 맹인들이 지도자가 되어서 또 다른 맹인들인 양떼들을 인도하니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베드로가 대표로 예수님께 나아가 이 비유의 뜻을 물었습니다. 16 17절을 보십시오.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예수님은 깨달음이 둔한 이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고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데 이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야.”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음식이요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말과 생각입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 간음 음란 도둑질과 거짓증언 비방인데 이는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 말씀 안에 다 들어있습니다. 십계명중 살인은 제6 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간음과 음란은 제 7 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도둑질은 제 8계명 거짓 증언은 제9계명을 어기는 것이고 비방은 모든 인간관계를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근본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에 이 부패한 마음에서 모든 악한 것이 나온다고 보셨습니다. 아담 타락 이후 죄가 들어왔고 인간의 마음은 부패했고 더러운 피가 흐르게 되었습니다. 예레미야서 7장 9절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3장 10절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악하고 더러워진 마음을 깨끗하게 할 수 있을까요? 첫째,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를 덧입어야 합니다. 죄로 더러워지고 부패한 인간의 마음은 그 어떤 것으로도 정결케 될 수 없습니다. 그 어떤 사상이나 철학으로 되지 않습니다. 명상이나 착한 행위로도 되지 않습니다. 오직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만이 우리를 정결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더러운 피가 예수님의 거룩한 피로 교환 수혈 될 때 비로소 깨끗케 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장 7절은 말합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의 은혜로 거듭나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 깨끗하게 되었다고 영원히 깨끗한 것은 아닙니다. 죄악된 세상에 살면서 또 다시 더럽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주님 앞에 나아가 깨끗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 예수님의 정결한 피로 내 몸과 마음이 깨끗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빈 마음에 말씀을 채워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빈 항아리와 같습니다. 말씀을 채우지 않으면 세상의 그 무엇으로 채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 욕심과 탐욕으로 채워지면 이기적인 세리가 되고 정욕과 쾌락으로 채워지면 타락한 사마리아여자가 됩니다. 허무주의 운명주의로 채워지면 허무주의자 운명주의자가 됩니다. 시편 기자는 청년의 때에 어떻게 청년의 정욕을 이기고 깨끗한 삶을 살 수 있을까 고민 하였습니다. 시편 119편 9절에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입니다.” 빈 마음에 말씀으로 채울 때만이 깨끗하게 될 수 있음을 역설 했습니다. 베드로는 밤이 새도록 수고 하였지만 빈 그물이었습니다. 몸과 마음이 지쳤고 오늘은 틀렸다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꽉 찼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물을 배 오른편으로 던지라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쉬어야 한다는 자기 생각을 부인하고 지금은 안 된다는 자기 생각을 부인하고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말씀에 기초하여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럴 때 그물이 찢어지도록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예수님을 체험했습니다. 영적인 세계에 첫 발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입에서 복음이 흘러나오기 위해서는 마음에 말씀을 채워야 합니다. 말씀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말씀이 내 안에서 역사 하며 더러운 나를 깨끗케 연약한 나를 강하게 차가운 나를 뜨겁게 하는 것입니다. 셋째, 규칙적인 기도로 주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내 힘과 의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고백하며 물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함으로 성령의 능력을 덧입으면 주님께서 친히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십니다. 내 안에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해주십니다. 하루 첫 시간과 마지막 시간 무릎 꿇고 기도할 때 주님은 나의 하루를 온전히 책임져 주십니다. 우리는 코로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비 대면이 일상화되는 시대에는 중보 기도가 더욱 필요합니다. 형제를 위하여 중보기도 할 때 하나님께서 그 형제의 마음을 깨끗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2. 가나안 여인의 믿음(21-28)
2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역을 떠나 북쪽의 이방 땅인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부자동네였지만 우상숭배가 만연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곳에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그녀는 지성인이라 할 수 있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 서기관들과 치열하게 싸우신 후에 그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조용한 시간을 갖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시끄러운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가나안 여인이 뒤에서 계속해서 소리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귀신들린 딸을 둔 이 여인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엄마에게 딸은 어떤 존재입니까? 어려서는 귀염둥이요 성장하면 친구요 엄마가 늙으면 의지할 대상이요 병원에서는 보호자가 됩니다. 한마디로 엄마에게 딸은 보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딸이 한창 예쁘고 귀여운 나이에 흉악하게 귀신들려 날뛰니 이런 딸을 둔 어머니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용한 의원이나 용 한의원 등 용하다는 곳은 다 찾아가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같이 진단을 내릴 때까지는 잘 되었지만 치료가 안 되었습니다. 가나안에서 가장 불쌍한 모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병든 자들 귀신들린 자들을 고쳐 주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예수님이 이곳에 오신다니 그녀의 심장은 매우 빨리 뛰고 있었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외치는 것을 보면 예수님이 약속된 메시아이심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 나가는 것은 기도입니다. 누가 간절히 기도합니까? 누가 예수님께 나아갑니까? 절박한 인생 문제가 있을 때 영적으로 가난할 때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번 수양회 인생소감 발표한 분들 보면 하나같이 인생 문제 어려움이 있었죠. 학업문제 경제문제 가정문제 질병문제 등이 있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주님께 나가고 주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장하는 것입니다. 물론 문제가 있어도 주님께 나아가지 않는 사람도 있어요. 이런 사람들은 정말 소망이 없죠. 가나안 여인이 딸의 건강문제를 들고 주님께 나아갔습니다. 영적 간절함이 절박함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예수님이 이럴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나오는 자를 한 번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부담스러운 나병 환자도 만져 주시며 고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왜 이번에는 침묵 하셨을까요. 매너 없이 큰소리로 외쳤기 때문에 기분이 상하셨던 것일까요? 유대 땅에서는 많은 이적과 가르침을 주셨지만 정작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깨닫지 못하고 관심도 없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사사건건 예수님을 대적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방 땅에서 이방 여인으로부터 다윗의 자손이라는 핵심을 찌르는 호칭을 들음으로 상당히 놀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속으로 도대체 이 여인이 이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부른 것일까 궁금하셨을 것입니다. 여인의 믿음의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침묵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때로 우리가 어떤 문제로 간절히 기도할 때 침묵하실 때가 있습니다. 주께로부터 아무런 대답이 없을 때 신앙이 회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침묵하시는 것은 나의 영적 상태를 살펴보고 믿음을 키우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때 기도를 중단하면 안 되죠. 더 간절히 주님께 매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23절 보십시오. 이 여인이 쉬지 않고 소리치자 제자들이 와서 청하였습니다. 이 여인이 너무 시끄럽고 귀찮게 하니 부탁을 들어주자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분명히 여인의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24절 보십시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이방 여인의 믿음을 시험해 보려고 하신 것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사실이기도 했습니다. 복음 역사의 원칙 즉 하나님의 백성들 우선이라는 것이죠.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위해 책들을 사다 놓고 읽기를 바라는데 정작 자녀는 책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게임만 합니다. 그런데 자녀의 친구가 놀러 왔다가 이 좋은 책들을 읽으며 독서삼매경에 빠진다면 부모는 속상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지금은 비록 영적 소경이지만 영적 눈을 뜨고 좀 더 많은 은혜를 받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뒤에서 소리치던 이 여인은 이번에는 아예 예수님의 앞으로 나아와 절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 필사적으로 간구했습니다. 죽든지 살든지 자신은 예수님을 떠나지 않겠다는 간구인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이 여인이 시험에 들 수도 있는 엄청난 말씀을 하셨습니다. 26절 보십시오.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기서 자녀는 선민 이스라엘 개는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개 취급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을 개 취급하는 것은 큰 모욕입니다. 사실 개들은 좀 억울합니다. 개는 동물 중에 사람과 가장 가깝고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는 동물입니다. 주인이 구박을 하고 때려도 주인이 오면 반갑게 꼬리치며 머리를 조아립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개를 천대 하며 무시합니다. 욕을 할 때도 개라고 하죠. 이쯤 되면 자존심 강한 가나안 수로보니게 여인이 분노의 뚜껑이 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뭐시라 나더러 개라 고라, 이 몸이 개라면 당신들은 돼지여.” 미친개처럼 달려들어 싸울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개판이 되는 거죠. 그러나 이 여인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27절 보십시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와우 놀라워라. 이 얼마나 재치 있는 대답입니까? 우선 예수님을 주여 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이 주권자라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네 주님 그렇습니다. 제가 개 맞습니다. 개중에서도 수로보니게 랍니다. 지금 이어지는 대화는 상당히 심각하죠. 그런데 어디서 이런 여유와 재치가 나오는 것일까요? 여인은 지금 심각한 인생 문제가 있는데도 믿음의 여유가 있었습니다. 이 여인이 갖고 있는 큰 믿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님의 주권을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아쉬울 때는 주여 라고 주님을 부릅니다. 그러나 주님이 침묵하시거나 거절당하면 반발합니다. 주님과 논쟁 합니다. 주여 어찌하여! 를 외치다가 결국 회의에 빠지거나 신앙이 냉소적으로 변합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주여 옳소이다 라고 했습니다. 자신은 이방인으로서 아직 주님의 축복을 받을 순서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은혜 베풀어 주지 않는다 해도 주님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여전히 주님을 믿고 신뢰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의심치 않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신뢰했습니다. 어떤 순간에도 한 번도 주님의 사랑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어떤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치 않는 것이 큰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여전히 믿고 신뢰하는 것이 큰 믿음입니다. 이 여인의 믿음은 구약의 욥의 신앙과 필적 합니다. 욥이 극한 고난 가운데 서도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니 여호와 이름이 찬송 받으실 지이다.” 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주님의 주권을 전폭적으로 믿고 신뢰했습니다. 둘째, 부스러기 은혜를 붙드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27절을 다시 보십시오. “주여 옳소이다 마는.” 옳소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옳소이다 마는. “마는” 이 중요합니다.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부스러기 은혜라도 주십시오. 부스러기 은혜라도 먹도록 허락하소서. 주님 저는 개입니다. 개 맞습니다. 하지만 개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주님 아니십니까? 많은 관심과 돌봄은 아니어도 좋습니다.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그것은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은혜라도 족하오니 부스러기 은혜를 주십시오. 부디 저를 내 치지만 말아 주소서.“ 겸손하게 자기 자신을 낮추며 집요하게 부스러기 은혜를 구하였습니다. 우리는 작은 것 부스러기를 무시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부스러기 은혜를 구하고 부스러기 은혜를 붙잡아야 합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촛불을 구하면 등불을 주시고 등불을 구하면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구하면 햇빛을 주신다. 우리가 주님께 작아 보이지만 꼭 필요한 것 한 사람의 영적 생명을 구하면 하나님은 그 형제를 살려 주십니다. 더 나아가 우리에게 더 큰 축복으로 채워주십니다. 여인의 재치 있고 믿음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크게 감동 받으셨습니다. 28절 보십시오. “여자여 네 믿음 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예수님은 이 여인의 믿음이 큰 믿음이라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딸을 고쳐주셨습니다.

저주받은 가나안 후손, 주님의 말씀을 직접 들어본 적 도 없던 천대받던 여인, 그녀가 믿음 때문에 주님께 칭찬 받는 자가 되었습니다. 주 안에서 위대한 자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실패와 절망과 낙심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자들에게 큰 위로와 소망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본문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모습이 저의 모습임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주님께 헌신 할 만큼 했고 지금도 주님께 드릴 것은 드리고 각종 모임에 바쁘게 참석 하고 있으니 아주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무난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언제부턴가 영적으로 게을러져서 말씀을 잘 받질 못했습니다. 말씀을 붙드는 생활을 잘하지 못했습니다. 그럴 때 저의 영성은 말라가고 안일함과 세상적인 욕심이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저의 빈 마음에 말씀을 채우고 회개함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깨끗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간절히 주님께 매달리는 목자의 삶을 회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오늘 말씀에서는 바리새인들의 외식과 가나안여인의 믿음이 잘 대조되어 나옵니다. 형식주의와 외식을 배격하고 말씀 앞에 회개하고 마음을 정결하게 할 때 하나님이 쓰시는 깨끗한 그릇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지성인들은 믿음을 배우려면 겸손해야 합니다. 다 안다는 식으로 교만하면 믿음을 배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영적으로 좀 부족해도 내면에 절대적인 믿음이 있을 때 기뻐하시고 그의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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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5 마태복음 [2020년 마태복음 제29강]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관리자 2020-09-26 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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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3 마태복음 [2020년 마태복음 제27강]용서하라 관리자 2020-09-12 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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