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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9-02-24 (일) 12:25
분 류 요한일서
첨부#1 2019년_요한1서4강-1(오정훈).hwp (64KB) (Down: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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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요한일서 제4강]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2019년 요한1서 제4강                                                                   오정훈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말씀/요한1서 4:1-21
요절/요한1서 4:7,8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오늘 말씀에는 사랑이란 단어가 31번이나 나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에 이어 제2의 사랑장이라 불립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이 사랑의 특성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면 오늘 말씀은 사랑의 기원과 의미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어디로부터 와서 어떻게 우리에게 임한 것입니까? 이 시간은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가 배우고 서로 사랑하기에 힘쓰므로 세상유혹을 이기고 생명을 살리는 역사에 쓰임 받는 종들이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1. 하나님의 영 적그리스도의 영(1-6)
1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여기서 ‘영’은 하나님께로부터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 또 그가 받은 영적인 실체를 가리킵니다. 예로부터 자신이 특별한 영을 하나님께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어 왔습니다. 계룡산에서 계시를 받았다는 둥, 천사를 보고 방언을 하게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당시 영지주의자들도 환상 중에 지극히 높은 하늘에 올라가서 자신들만 볼 수 있는 신비한 체험을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영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을 전부다 믿어서는 결코 안됩니다. 왜냐하면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는지 분별해야 합니다. 분별하다는 말은 도키마제테(δοκιμαζετε)로서 본래 연금술사가 금화의 진위연부를 가려낼 때 쓰는 단어입니다. 한마디로 진짜인지 가짜인지 가려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점점 더 정교해지는, 벤자민 프랭클린 얼굴이 그려진 100달러 위조지폐를 감별하기 위해 많은 장비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구분이 되지 않으면 우리나라 위조지폐 감별의 권위자에게 가져온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분이 가짜라고 판정하면 FBI, 미국연방은행에서도 그렇게 처리한다고 합니다. 미국지폐를 한국 사람이 최종판별 한다? 이해가 안가시겠지만 이 분이 하는 일은 하루 종일 벤자민 프랭클린 얼굴을 쳐다보며 진짜 100달러짜리 지폐의 모습을 완벽하게 파악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지폐에 있는 작은 글씨, 미세한 표시 하나도 놓치지 않고 완벽하게 인지하므로 아무리 정밀하게 만들어진 위조지폐도 감별할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도 거짓 선지자, 거짓 영들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진짜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진짜를 알 때 가짜를 가려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진짜는 무엇입니까? 2,3절을 다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사도요한은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하는 단 한 기준은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가 하지 않는가 라고 말씀합니다. 시인하는 영은 하나님께 속한 영이요 시인하지 않는 영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거짓 영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말씀으로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우리와 동고동락하며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감당하여 주시므로 인생들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그런데도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경건하게 살고자 투쟁하는 성도들을 율법적이라고 비난하였습니다. 이는 겉으로 고상한 영적 지식을 말했지만 영과 육을 분리함으로서 육체의 욕망을 즐기는 자신들의 죄를 합리화하고자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인정하게 되면 그리스도의 낮아지심, 희생을 영접해야 하고 그러면 그들도 이 땅에서 그런 삶을 살아야 했기 때문에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 예수의 몸에 잠깐 깃들어 계시다가 떠나셨다고 주장함으로서 육은 소멸하는 것으로 얼마든지 즐겨도 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런 거짓 선지자들의 주장은 교회 나올 때만 신앙생활하고 밖에서는 육체의 욕망을 즐기고 싶어 하는 자들에게 자유를 주기에 딱 맞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자들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거스르고 인생들을 멸망으로 이끄는 적그리스도들입니다. 이런 자들이 오리라 하였는데 벌써 세상에 가득하였습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 ‘도를 믿습니까?’ 하는 사람들이 전철역 주변에 많았습니다. 어떤 도인이 저를 보고 ‘조상의 모든 정기를 타고난 아주 기가 센 눈빛’이라며 저의 교만을 부추기는 바람에 건대 앞에까지 따라가서 무슨 의식을 치루고 주문을 외우다가 정신이 혼미해져서 나온 적이 있었습니다. 정말 세상에 이단들로 가득합니다. 통일교 JMS가 활개 치다가 요즘은 신천지가 교회에 침투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대학에 왔는데 있을 곳이 없는 사람에게 공동생활 할 공간을 제공한다며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어떤 이단은 대학생들의 로망인 해외영어연수를 공짜로 1년 동안 시켜준다고 대학생을 끌어 모으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머니 하나님을 주장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딱딱하고 엄한 아버지보다는 부담 없고 정이 많은 어머니 하나님이 더 좋지 않은가요? 접근합니다. 사람들은 어머니 하면 마음이 약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 인생들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게 하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 위에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편하고 쉬운 길을 제시하며 현실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거짓 선지자들에게 속지 말고 성육신의 진리를 따라 주님이 가신 자기부인 자기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합니다. 거기에 생명이 있고 구원이 있습니다.
  4절도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세상은 악하기 그지없고 우리 자신은 연약하고 부족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거기다가 힘든 현실 문제로 마음이 어두워져 쉽고 편한 길, 문제를 해결해줄 만한 곳을 찾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또 내가 여러 유혹을 이기고 끝까지 믿음의 길을 갈 수 있을까 염려가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근본 하나님께 속하였고 이 하나님은 마귀와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크고 강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악한 자와의 싸움에서 이미 넉넉히 이기었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b)"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5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영적인 척, 구원의 진리를 아는 척 하지만 근본 세상에 속한 자들로서 세상에 속한 말을 합니다. 세상에 속한 말은 세상의 관점으로 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공하고 출세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에 너무 시간과 물질을 쓰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런 그들에게 낮아지고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무기치할 뿐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돈 버는 이야기, 쾌락을 즐기고 어떻게 하면 경쟁에서 앞서가는 아이들로 키울 수 있을까 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SKY캐슬을 열심히 봅니다. 이런 그들에게 ‘당신은 죄인입니다. 죽음 후에 심판이 있습니다!’라고 하면 ‘내가 왜 죄인이에요?’, ‘어차피 한번 죽는 것 이판사판’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의 말을 듣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혹하는 영이 난무하는 세상에 우리의 말을 듣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우리의 희망입니다. 우리가 이 소망 가운데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증거하므로 하나님께 속한 자들을 구원하는 역사 섬겨나갈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2.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7-21)
7,8절을 다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고 권면합니다. 성도는 하나님께 사랑받은 자들로서 서로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서로 사랑할 것 같은데 생각과 가치관이 달라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그냥 무관심하게 지내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무관심으로 끝나지 않고 마귀가 역사하게 됩니다. 마귀는 처음에는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합니다. 화를 안내는 것만 해도 어디냐 하며 무관심해지도록 합니다. 그러나 무관심은 결국 ‘저 사람은 나를 싫어하나 봐’ 갈등과 다툼, 미움으로 번지게 됩니다. 에베소 교회의 문제도 힘든 현실과 핍박보다 성도간의 사랑이 식어가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이를 극복하는 길은 서로 힘써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세상유혹과 거짓선지자의 미혹을 이기고 교회를 세우는 가장 강력한 힘이 됩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또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것은 사랑하는 자만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사랑은 지극히 이기적이고 감정적이며 자기중심적입니다. 주고받기식 사랑입니다. 그래서 이익이 없는 곳에는 사람들이 모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고도 자기희생의 거룩한 사랑입니다. 독생자를 내어주신 완전한 사랑입니다. 이것이 진짜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진짜 사랑을 해야 합니다. 이익이 없더라도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진실되고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이 사랑이시구나, 하나님이 이렇게 나를 사랑하셨구나 깨닫게 됩니다. 반면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런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지게 됩니다. 메마르고 열매 없는 인생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좀 부족하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 서로 뜨겁게 사랑하는 사랑의 사람들이 될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합니까? 첫째로 가장 귀한 것을 주시는 사랑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귀한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독생자는 하나님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가장 귀한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화목제물로 내어주셨습니다. 독생자도 아끼지 않고 주신 하나님은 다른 그 어떤 것도 아끼지 않고 우리에게 주십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여 왕자의 표시인 칼과 띠를 내어 주었습니다. 오 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는 소설을 보면 아내 델라는 자신의 황금물결 같은 귀한 머리카락을 잘라 남편이 가장 아끼는 금시계를 위해 시계줄을 삽니다. 또 남편 짐은 자신의 가장 귀한 시계를 팔아 아내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머리를 빗는 빗을 삽니다. 이처럼 가장 귀한 것, 목숨과도 같은 것을 내어 주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사랑은 죽어 심판 받을 자를 살리는 사랑입니다. 9b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우리를 살리기 위함이십니다. 우리 인간은 죄로 인해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독생자를 보내사 우리 대신 피흘려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사랑은 이처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생명을 살립니다. 마음이 깊이 패이고 어두운 자,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자, 쾌락과 정욕으로 물들어 소망이 없는 자 이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살아나게 됩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사람을 병들이고 죽게 하는 사랑이 많습니다. 인간적인 사랑, 달콤한 사랑, 주고받기 사랑은 사람을 병들이고 죽게 합니다. 의존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창세기의 요셉은 아버지의 집에 있다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데 하나님은 그가 노예가 되게 하고 죄수가 되게 하시므로 그를 훈련하셨습니다. 이 사랑을 통해 요셉은 살아났고 다른 사람을 살리는 구원역사에 쓰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의 사랑이 이해가 되지 않아 원망과 불신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나를 살리시기 위한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를 믿음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잘 받으므로 내가 살아나고 다른 사람을 살리는 역사에 쓰임 받게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사랑은 먼저 하는 사랑입니다. 10절을 다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라는 말씀은 이것이 사랑이다, 이것이 사랑의 본질이라는 말입니다. 그 본질은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사랑을 알고 형제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흔히 말하는 내리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샘터요 뿌리가 되십니다. 이 하나님 안에 거하면 우리 마음속에서 사랑이 솟아나게 됩니다. 그러데 사람들은 먼저 사랑하는 것을 힘들어 합니다. 자존심 상하고 손해 본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먼저 인사하고 먼저 말 거는 것을 어려워합니다. 남이 나에게 관심을 보이고 말을 걸고 인사할 때 나도 겨우 반응을 보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먼저 하는 것입니다. 먼저 적극적으로 행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내 안에 사랑의 샘이 터져 나오게 됩니다. 넷째로, 하나님의 사랑은 죄문제를 돕는 것입니다.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심각한 것은 죄문제입니다. ‘친절한 금자씨’란 영화는 이런 인간의 죄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어린 아이를 유괴하여 죽인 백선생이 나옵니다. 그는 자신의 제자 금자씨의 아기를 볼모로 삼아 금자씨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웁니다. 금자씨와 유괴당한 부모들은 모여서 백선생에게 복수합니다. 그러나 백선생에게 복수한 금자씨도 죄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금자씨는 입양한 자신의 딸에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합니다. 이때 영어로 atonement라고 말하는데 이것이 속죄 곧 죄값을 치루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금자씨가 감옥에서 나오자 한 전도사가 두부를 주며 이제 속죄하고 깨끗하게 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금자씨는 두부를 엎으며 그 유명한 대사를 말합니다. “너나 잘하세요!” 하지만 결말에 가서 금자씨는 다시 두부처럼 하얗게 살고 싶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두부처럼 하얗게 살려면 우리의 속죄제물 되신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두부처럼 하얗게 살라고 속죄제물이 되셨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정도로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마땅하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이유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이유를 묻지 말고 따지지도 말고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2절을 다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이제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는 사랑도 하면 할수록 세력이 커지고 온전해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마치 운동을 하면 근육이 커지고 힘이 세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 가운데 배병준 형제님은 벤치프레스(누워서 역기 드는 것)로 자그마치 120Kg까지 든다고 합니다. 이 분이 이렇게 무거운 역기를 들 수 있는 것은 배태일 이계희 교수님 두 분이 천하장사 DNA를 물려주셨기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꾸준히 연습해서 무게를 늘려갔기 때문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의 넓이와 대상 깊이를 늘려갈 때 그 사랑은 커지고 깊어지고 넓어지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무관심으로 사랑이 식어버리게 되면 운동하지 않는 근육이 위축되고 작아지듯이 점점 쇠퇴해져버려 결국 자기 속으로 들어가 버리게 되고 맙니다. 사랑은 쇠퇴하든지 온전히 성장하든지 양자일 뿐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사랑을 키워야(build up) 합니다. 그 출발은 작은 관심에서 시작됩니다. 관심가지고 먼저 인사하고 안부를 물어야 합니다. 함바나바 목자님에게서 보듯이 밝고 공손하게 인사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이 은혜를 받게 됩니다. 가끔 보면 인사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나는 당신에게 관심 없어’ 하는 아주 무서운 태도입니다. 사랑하는 우리는 서로 같이 식사도 하면서 고민도 들어주고 필요하면 말씀도 주고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기도제목을 알고 중보 기도하는 것만큼 좋은 사랑의 교제가 없습니다. 중보기도 하게 되면 본국에 있는 동역자들 뿐 아니라 이역만리에 있는 선교사님들과도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됩니다. 선교사님들도 우리가 여기서 열심히 기도하면 그것을 다 느낀다고 합니다. 빈말이 아닌 게 사랑은 통하기 때문이고 그것은 멀리서도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요즘 홍일기 목자님이 열심히 세계 각지의 기도제목을 알아내서 선교사님들의 사정을 더 자세히 알게 되어 감사드리게 됩니다. 우리가 내 안에만 머물러 자기중심적으로 오그라들지 않고 가까이 있는 형제자매들과 동역자들을 힘써 사랑하고 더 나아가서는 선교사님들에까지 관심가지고 중보기도하므로 우리의 사랑이 더욱 커지고 온전해지게 되길 기도합니다. 이처럼 가장 강력한 성령의 역사는 사랑하는 곳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뜨거운 사랑이 있을 때 양들이 변화되고 살아나는 역사가 있습니다. 사랑이 넘치면 화려한 건물이 없어도, 라면 한 젓가락 먹고도 은혜를 받지만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멋진 건물에 맛있는 피자가 있어도 은혜 받지 못합니다. 세상이 어렵고 힘들다 말하지만 사랑이 없고 사랑이 식어버린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형제자매에 대한 무관심, 자기중심적인 사랑을 회개하고 하나님이 보여주신 사랑으로 형제 자매를 뜨겁게 서로 사랑하길 기도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이곳에 나오는 사람은 이 사랑에 은혜 받고 살아나는 역사가 우리 가운데 충만하게 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13-16절을 보십시오. 이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하게 되면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심을 깨닫게 됩니다. 성령께서 친히 이를 증거하여 주시고 요한 자신이 아들을 보고 증언하였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께서 그 안에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됩니다. 그래서 미움과 증오심 질투와 시기심으로 가득 찼던 우리 마음이 따뜻해지고 아름답게 변화됩니다. 17절을 다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이 말씀은 공동번역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살게 되었으니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된 것이 분명합니다. 이제 우리는 자신을 가지고 심판 날을 맞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미움과 거리끼는 것이 있으면 심판 날에 주 앞에 서는 것이 두렵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져 거리낌이 없으면 담대하게 주 앞에 설 수 있습니다. 사랑이 심판을 이기고 승리하게 하는 것입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사랑을 하면서도 손해 볼 것 같은 두려움, 상처받을 것 같은 두려움으로 온전한 사랑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온전한 사랑을 하지 못하면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하나님은 항상 배반하는 인생들로 인해 많은 상처를 받으셨지만 항상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 변함없으신 사랑이 우리를 살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먼저 손을 내밀고 먼저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20절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자가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구나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21절을 다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계명을 받았다는 것은 할 수 있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할 것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자꾸 부담스러워 피하게 되면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순종하는 마음으로 어찌하든지 사랑하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 사랑할 마음과 힘을 주십니다. 우리가 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듯 형제와 자매를 뜨겁게 사랑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그래서 갈수록 냉랭해지는 세상에서 사랑에 굶주린 영혼들이 이 사랑으로 은혜 받고 살아나는 역사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게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저는 타고난 성정이 싫은 것을 좋아하는 척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저다운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저의 사랑하시는 자들은 알뜰하게 챙기며 같이 식사하고 얘기 들어주고 기도해주었습니다. 이런 스스로 나름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왔다가 간 시애틀 송사라 선교사님과 대화하면서 저의 사랑이 굉장히 자기중심적임을 깨닫고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송사라 선교사님은 전에 제가 2세 송이삭 형제와 창세기 특공대 한 것을 알고 그 때 얼마나 했는지 은혜를 받았는지 꼬치꼬치 캐물었습니다. 저는 제가 무슨 큰 잘못이라도 한 줄 알고 잔뜩 긴장했는데 실은 이삭이가 말씀공부를 하지 않아서 아주 걱정이라며 저에게 말씀공부를 다시 할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 부탁한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선교사님 자녀들에 대해 무관심하였는데 이제껏 이렇게까지 간절히 기도를 부탁하는 분을 본 적이 없어서 마음이 몹시 쓰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기도할 때마다 기도하였고 같이 말씀공부 하는 형제들에게도 기도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 목자님 통해서 새벽기도제목을 업데이트 하라는 말씀을 듣고 선교사님들 가정의 기도제목에 관심 갖게 되었습니다. 이 분들은 이역만리에 있고 특히 비행기 공포증이 있는 저에게는 도저히 가까이 갈 수 없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매주 기도제목을 수정하면서 전보다 더 관심 갖고 기도하며 챙기게 되었습니다. 또 본국에서도 건강과 취업 사랑과 회복이 필요한 사람들 위해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관심가지고 기도할 때 제 안에 사랑이 조금씩 피어나고 적극적인 마음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저에게 몇 몇 사람을 섬길 수 있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저는 이를 통해 세상에 많은 문제들이 있지만 제 안이 사랑이 식고 메말라 버린 것이 문제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살아나게 하고 변화시키는 것은 결국 사랑의 힘입니다. 사랑만 있으면 누구에게든지 관심가지고 다가갈 수 있고 기도해줄 수 있고 마음을 다해 섬길 수 있습니다. 제가 120kg의 역기는 들 수 없지만 저의 사랑이 이보다 무거워지고 깊어져서 삭막한 세상에서 생명의 씨앗을 키우는 역사에 쓰임받게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세상에 그 어떤 것보다 강력한 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죽음보다 더 강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사랑에 힘입어 형제를 뜨겁게 서로 사랑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그래서 사랑에 목마른 영혼들이 이 사랑에 은혜 받고 살아나는 역사가 충만케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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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2 창세기 [2019년 창세기 제3강] 에덴동산을 창설하신 하나님 관리자 2019-03-24 1152
581 창세기 [2019년 창세기 제2강]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 관리자 2019-03-17 835
580 창세기 [2019년 창세기 제1강]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관리자 2019-03-10 903
579 요한일서 [2019년 요한일서 제5강] 세상을 이기는 믿음 관리자 2019-03-03 1091
578 요한일서 [2019년 요한일서 제4강]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관리자 2019-02-24 700
577 요한일서 [2019년 요한일서 제3강]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자 관리자 2019-02-17 1402
576 요한일서 [2019년 요한일서 제2강]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 관리자 2019-02-10 677
575 요한일서 [2019년 요한일서 제1강] 우리의 사귐 서삼문 2019-02-03 771
574 열왕기상 [2019년 열왕기상 제10강]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 관리자 2019-01-27 878
573 열왕기상 [2019년 열왕기상 제9강] 하나님의 세미한 소리 관리자 2019-01-20 918
572 예레미야 [2019년 신년말씀 제3강]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관리자 2019-01-13 828
571 기타 [2019년 신년말씀 제2강] 성전을 건축하라 관리자 2019-01-06 654
570 요한복음 [2019년 신년말씀 제1강]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관리자 2018-12-30 745
569 누가복음 [2018년 성탄말씀 제3강]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느니라 관리자 2018-12-23 678
568 누가복음 [2018년 성탄말씀 제2강] 구원의 뿔 돋는 해되신 예수님 관리자 2018-12-16 963
567 누가복음 [2018년 성탄말씀 제1강] 영원한 왕 예수님 관리자 2018-12-09 720
566 열왕기상 [2018년 열왕기상 제8강] 바알에게 도전한 엘리야 관리자 2018-12-02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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