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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9-04-07 (일) 12:42
분 류 창세기
첨부#1 2019년_창세기5강-1(고영훈).hwp (33KB) (Down: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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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창세기 제5강] 가인에게 표를 주신 하나님

  2019년 창세기 제 5 강                                                               고영훈

가인에게 표를 주신 하나님

말씀/ 창세기 4:1-5:32
요절/ 창세기 4: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지난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고 범죄 했습니다. 인간 세상에 죄가 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죄는 점 점 더 심해져 갔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형이 동생을 죽이는 살인죄가 발생합니다. 하나님이 이 사건을 보고 얼마나 안타까워 하셨겠습니까? 하나님은 인간의 죄 문제를 어떻게 다루셨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포기치 않는 사랑을 영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가인과 아벨 (4:1-8)
1절을 보십시오.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여 가인을 낳았습니다. 이 때 하와는 잉태의 고통 중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고 소감 발표하였습니다. 그가 또 얼마 후에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양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그들은 각각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습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각 각 제사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가 있고, 받지 않으시는 제사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받고 안 받고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문제이지만 하나님은 분명한 기준에 따라 그 주권을 행사하십니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제사는 어떤 제사입니까? 가인과 아벨 두 사람이 드린 제물에 무슨 차이가 있었을까요? 신약의 히브리서 저자는 이 사건을 두고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히11:4).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 가인과 그의 제물이라고 하신 것을 보면 제물을 드리는 사람 자체가 문제임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그들이 드린 제물을 통해 그들이 어떤 자세로 드렸는가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벨이 드린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이라는 말 속에 ‘God first'의 믿음과 ’God is best' 의 믿음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벨은 땀 흘려 얻은 것들을 먼저 하나님께 제물로 구별하여 드렸습니다. 비록 농사지을만한 땅이 없어 기껏 절벽 같은 곳을 돌아다니며 양 몇 마리 키우는 가난한 목자의 삶을 살고 있었지만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만큼은 자기가 가진 것 중에서 가장 귀한 것을 따로 구별해서 드리고 싶은 간절한 심정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또한 아벨의 제물에는 피 흘림이 있습니다. 아벨은 먹고 살게 해 주신 데 대한 감사 뿐 아니라 자기 죄에 대해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피 흘림이 있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드렸습니다. 그는 의례적으로 하나님께 세금 바치듯이 형식적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런 가인과 그의 제물은 거절하셨습니다. 우리는 아벨의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어떤 자세로 제사를 드려야 하는지 잘 배울 수가 있습니다. 로마서 12:1절을 보면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하고 말씀합니다. 신앙생활은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영적 예배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인과 같이 감사하는 마음이 없이, 상하고 통회하는 심정이 없이 의무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드린다면 하나님이 받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형식적인 제사라도 슬쩍 받아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 가운데 하나님을 최우선시하여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God first' 'God best'의 절대적인 믿음을 원하십니다.
  제사를 거절당한 가인은 하나님께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그는 심히 분하여 안색이 굳어지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습니다. 그는 마음의 분을 참지 못하고 하나님께 핏대를 세우며 씩씩거렸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지 않으셨을 때 그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고 회개하기보다 하나님께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대들었습니다. 그의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치 않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고 자기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런 가인에게 여호와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6,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은 제물 한번 잘못 바쳐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가 평소에 선을 행치 않는 죄 때문이라고 분명히 깨우쳐 주셨습니다. 선을 행치 않을 때 죄가 문에 엎드리게 됩니다. 이는 굶주린 사자가 숨어 있다가 문만 열면 삼키려는 것 같이 선을 행치 않는 사람을 죄가 삼키려고 노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이 말씀은 범죄 한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첫 번째 명령입니다. 이는 죄가 심각하고 무서운 것임을 말해줍니다. 죄를 다스리지 않을 때 죄가 그 사람을 삼켜 죄의 종이 되게 합니다. 세상은 거대한 죄의 세력으로 가득합니다. 이 세력이 우리를 삼키려 합니다. 또한 우리 속에는 죄의 소원이 있습니다. 젊은이들에게 정욕은 가장 강력한 사탄의 미끼입니다. 선을 행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정욕의 죄를 다스리지 못하고 정욕의 노예가 되어 지금까지 쌓아온 인생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리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이 선을 행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안일의 죄가 문 열고 들어와 영적 중풍병자가 되고, 이기심, 욕심의 죄가 문 열고 들어와 자기중심적인 세리가 되게 합니다. 이런 죄의 심각성을 인식할 때 멸망치 않으려면 죄를 다스려야만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런 죄를 다스릴 수 있습니까? 사람의 마음에는 선을 행하고자 하는 영적 소원과 죄를 짓고자 하는 죄의 소욕이 있습니다. 이 둘은 서로 대치하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영적 소원이 강하면 죄의 소욕이 힘을 잃게 되고, 죄의 소욕이 강하면 영적 소원이 힘을 잃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5:16,17절은 죄의 소욕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 줍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소욕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로마서 6:12,13절도 분명한 영적 방향을 잡게 해 줍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또한 우리가 범죄 하였을 때 그것을 합리화 하거나 핑계대지 말고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들고 나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사함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미쁘시사 우리가 진실 되게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기만 하면 과거를 묻지 않으시고 죄 사함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이제 가인은 기로에 섰습니다. ‘죄를 다스릴 것인가’ 아니면 ‘죄의 다스림을 받을 것인가’ ‘반발심과 시기심을 다스릴 것인가’ 아니면 ‘그것에게 말려들 것인가’ 가인은 아우 아벨에 대한 시기심의 죄를 진실 되게 회개함으로 죄를 철저하게 다스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죄를 다스리지 못한 가인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8절을 보십시오. 그는 동생 아벨을 가만히 들로 불러내 돌로 쳐 죽였습니다. 하나님이 경고하신 것처럼 죄가 가인을 삼켜버렸습니다. 이로 인해 인류 최초의 살인자와 최초의 순교자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II. 가인에게 표를 주신 하나님(4:9-15)
  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범죄 한 아담을 먼저 찾아가셨던 것처럼 이번에도 가인에게 먼저 찾아와 물으셨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이 말씀은 그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사랑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이런 하나님의 물음에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하며 반발하였습니다. 그는 살인죄를 은폐하고자 거짓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질문에 아담은 숨기고 책임전가를 했지만 가인은 더 나아가 속이고 반항하고 있습니다. 사실 가인은 형으로서 동생 아벨을 지켜주어야 했습니다. 아벨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지금 그의 고민과 아픔은 무엇인지, 그의 기도제목이 무엇인지 관심 갖고 알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동생을 지키기는커녕 그의 생명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죄를 다스리지 않았을 때 마땅히 지켜주고 사랑해야 할 동생의 생명을 죽이는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회개치 않는 가인에게 벌을 내리십니다. 10-12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이제 가인이 농사를 지어도 땅이 더 이상 효력을 내지 않게 됩니다. 또한 그는 쉼이 없는 방랑자가 되어 지구상에 어디를 가도 안식을 누릴 수 없게 됩니다. 유리방황하는 삶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와 같이 멋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일정한 좌표나 목적도 없이 방황하는 인생을 산다는 것은 저주스러운 것입니다. 그의 마음은 늘 불안과 두려움과 악령에 시달리고 평강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죽음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죽이지 않을까’하는 두려움 때문에 편히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를 범하면 반드시 벌이 있다는 것을 배웁니다. 우리가 죄 짓기를 두려워해야 하는 이유도 죄를 짓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죄에는 반드시 벌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 벌은 외적인 것보다도 내면의 고통이 더 무서운 것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그는 죄에 대한 중압감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의 죄를 회개하기 보다는 벌이 너무 무겁다고 원망하였습니다. 그리고 주의 낯을 뵙지 못하여 주님의 보호와 도우심을 받지 못하므로 만나는 사람들이 자기를 죽일 것이라는 죽음에 대한 공포심에 시달렸습니다. 그는 벌을 받으면서도 회개치 않고 완악한 마음으로 불평만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가인을 어떻게 도와주십니까? 15절을 보십시오. 다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하나님은 죄로 인해 절망에 빠진 가인을 도와주시면서 인간의 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주시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표를 주셨습니다. 이 표는 주홍글씨와 같은 죄인의 표가 아닙니다. 아무도 그를 정죄하거나 죽이지 못하도록 생명을 보장해 주는 생명의 표입니다. 다른 사람이 그를 죽이면 벌을 7배나 받게 한다고 선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죄는 미워하시지만 죄인은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십니다. 가인은 분명히 죄를 범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과 긍휼의 표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무분별하게 가인을 위해서 면죄부를 남발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 구원의 표를 주시는 대신 하나님 자신이 그 댓가를 지불하셨습니다. 가인의 표는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예표입니다. 요한 계시록 7:4절에 보면 이마에 인침을 받은 144000명이 심판을 받지 않고 구원을 받는다고 약속하십니다. 구원함을 받은 큰 무리들이 이렇게 찬송합니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계7:10). 하나님은 죄 많은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어린 양, 속죄 제물로 보내 주셨습니다. 출애굽 사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르면 그 피를 보고 죽음의 사자가 넘어갔습니다. 그 피가 구원의 표가 되었듯이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믿으면 우리가 구원을 받습니다. 로마서 3:25,26절은 말씀합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모두 죄 때문에 심판을 받아야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내 죄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죽으시고, 피를 흘리신 그 보혈을 내가 믿으면 그 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일방적이고 전폭적인 사랑입니다.
  사도 바울은 과거 유대교의 율법주의 신앙에 갇혀 예수님을 통한 새로운 복음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초대 교회 성도들을 이단으로 규정하여 무자비하게 박해를 가했습니다. 그는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데 가담하였고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이방 지역까지 쫓아가서 성도들을 이 잡듯이 잡아들이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런 바울을 만나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 중의 괴수인 바울도 당장에 심판하지 않으시고 사랑과 긍휼로 그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장차 이방인의 사도로 쓰시고자 하셨습니다. 바울은 이 구원의 은혜와 부르심의 은혜가 너무도 커서 일평생 주와 복음역사에 헌신하며 조금도 자기를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로마서 8:1,2절에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는 항상 자신의 몸 안에 있는 예수님의 흔적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표를 기억하며 살았습니다. 이 십자가의 표가 그를 살리고 위대한 사명인의 인생을 살게 하였습니다. 우리도 아무 공로 없지만 오직 이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해서 주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보좌는 은혜의 보좌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믿음으로 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 우리 죄를 회개하고 사죄의 은혜를 덧입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 시간 죄인들을 향한 주님의 일방적인 사랑과 긍휼을 감사 찬송 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과 같이 죄로 인해 유리방황하며 살던 저에게도 캠퍼스 시절 친히 찾아와 주셨습니다. 저는 제주도 고씨 가문에 불신자 집안의 장손으로 태어나 조상 제사와 우상 숭배의 죄악 된 분위기에서 자라났습니다. 하나님을 몰라 영적으로 전혀 무지하였던 저는 세상의 죄악 된 가치관대로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1982년 경희대 치대에 입학하여 치과대학의 잘 먹고 잘 노는 분위기에 편승하여 대학의 낭만을 마음껏 구가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과 1년을 허랑방탕하게 죄를 지으며 대학생활에 깊은 절망감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저의 인생에 관심 갖고 도와주는 자가 없었습니다. 예과 2학년 1학기 어느 봄날 하나님께서는 캠퍼스에 있는 저에게 일방적으로 찾아와 주셨습니다. 그리고 목자님과 창세기 말씀을 공부하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해 여름에 단양 팔경 여름 수양회에 극적으로 참석하여 요한복음 4장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신 예수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저의 추한 죄를 다 고백하고 죄 사함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주님의 제자로 살고자 방향을 잡고 치과대학시절, 수련의, 군의관, 치과의원 원장으로 지금까지 37년 동안 변함없이 사명인의 삶을 살아오고 있습니다. 제가 죄악 된 세상에서 믿음으로 산다고 하였지만 때마다 연약하여 죄를 짓고 괴로워 할 때도 하나님은 제 안에 예수님의 표를 바라보게 하시고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저의 죄를 사하여 주사 계속하여 믿음의 인생을 살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이런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저는 날마다 새벽기도를 절대적으로 감당하며 하루의 시작을 예수님이 저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심을 깊이 묵상하고 가슴에 깊이 새기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표를 기억하며 회개와 감사기도를 드리고 하루를 시작할 때 심령으로부터 감사가 충만하게 되고 죄악 된 세상에서도 능히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 살게 됨을 깨닫습니다. 제가 날마다 제 안에 새겨진 예수 그리스도의 표를 바라보고 사랑의 하나님께 감사 찬양 드리며 거룩한 사명인의 삶을 능히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III. 가인의 후예, 셋의 후예(4:16-5:32)
  하나님에게서 표를 받은 가인은 어디에 가서 살고 있습니까? 16절을 보십시오.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그는 여호와 앞을 떠나 에덴 동쪽 놋 땅에 거하였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떠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입니까? 표를 주셔서 생명을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서 제단을 쌓았습니까? 17절을 보십시오. 그는 감사의 단을 쌓는 대신 자기를 위한 성을 쌓았습니다. 성을 쌓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표를 믿지 못하고 자기의 힘과 노력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방어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성을 높이 쌓는다 해도 하나님 없이 살면 그 마음이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많은 돈으로, 안정된 직장으로, 학벌과 자격증으로, 화려한 인맥으로 무너지지 않는 자기만의 성을 높이 쌓아 험한 세상에서 자기를 지키고자 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쌓은 성은 결코 자신을 지켜주지 못합니다. 저희가 자기 힘으로 자신을 지켜줄 성을 쌓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표인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써 예수님을 진정한 피난처로 삼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가인의 후예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그들이 낳은 자녀들의 이름을 보면 잘 알 수가 있습니다. 가인이 에녹을 낳고 에녹이 이랏을 낳았습니다. ‘이랏’이란 ‘과시하는 자’란 뜻을 갖고 있습니다. 곧 자기를 과시하고 드러내고자 하였습니다.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았는데 이 이름은 ‘하나님께서 흔적도 없이 쓸어버린 자’란 뜻입니다. 곧 하나님에게 불행의 원인을 돌리고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피해의식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았는데 이는 ‘지옥의 사람’이란 뜻입니다. 이 지옥의 사람 므드사엘이 유명한 라멕을 낳았는데 ‘라멕’은 ‘힘센 자’란 뜻입니다. 이처럼 가인의 후손들의 이름에는 모두 하나님께 대한 적대감과 원망, 그리고 자기 과시와 교만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19-22절을 보십시오. 가인의 후손 중 라멕이라는 사람은 인류 최초로 두 아내를 취하므로 하나님이 제정하신 결혼의 질서를 깨뜨렸습니다. 특히 그의 두 아내의 이름을 살펴보면 첫 아내는 ‘아다’요, 둘째는 ‘씰라’입니다. ‘아다’는 ‘꾸민 자’라는 뜻이고, ‘씰라’는 ‘딸랑거리다’라는 뜻입니다. 라멕은 정숙한 믿음의 여인을 아내로 얻지 않고 자기 사치를 위해 맨 날 꾸미기만 하고, 딸랑거리는 여자들과 결혼하였습니다. 첫 부인 아다는 야발과 유발을 낳았고,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습니다. 야발은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두발가인은 구리와 쇠로 여러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가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은 기업 형 목축업을 했다는 의미입니다. 또 수금과 퉁소 잡는 자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은 취미로 악기를 연주했다기보다 상당히 높은 수준의 음악과 예술을 발전시켰다는 것입니다. 쇠와 구리로 날카로운 기계를 만들었다는 것은 과학과 기술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켜 삶의 풍요를 가져왔다는 것이요 나아가서 강력한 전쟁 무기가 생산되어 사람을 해치고 살상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를 볼 때 가인의 후손들은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누리고, 아름다운 음악을 유행시키고, 여러 신기한 기계와 무기를 만들어 편리하고 재미있고 그러면서 신변의 안전이 보장된 수준 높은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룩한 문명과 과학과 기술에 비해 그들의 내면과 도덕성은 어떠합니까? 23,24절을 보십시오. 이는 살인자 가인의 5대손인 라멕이 무자비한 살인을 저지른 후 그의 아내들에게 바친 인류 첫 오페라 ‘칼의 노래’ 일명 ‘살인의 추억’ 입니다.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 배이리로다” 그는 두 아내에게 자신이 얼마나 잔인한 피의 보복을 했는가 노래하며 자신의 무자비함과 폭력과 살인을 자랑했습니다. 그는 작은 상처를 인하여 사람을 죽였고 소년을 죽였습니다. 길가다가 어깨 좀 부딪쳤다고, 째려본다고 아들 두발가인이 만든 무기로 사람을 죽여 버렸습니다. 그는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배이리로다’ 노래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며 조롱하였습니다. 이처럼 에덴 동쪽 사람들은 물질과 예술과 문명은 발달시켰지만 영적으로는 끔찍하고 흉악할 정도로 강포하고 음란하고 악해져갔습니다. 가인에게서 시작된 작은 죄의 불씨가 자라고 커져서 온 세상이 죄의 불길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이상에서 가인의 후예들의 족보와 삶을 살펴 볼 때 세상은 정말 소망이 없어 보입니다. 아벨은 하나님을 믿고 의롭게 살다가 가인에게 무참하게 살해당했고 가인은 하나님을 떠나 성을 쌓고 그 속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악 된 문화를 이루며 살고 있습니다. 세상은 가인의 후손들로 번성하였고 그들은 죄를 지으면서 살아도 벌을 받아 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라멕 같은 엽기적인 인간이 매스컴에 나와 엽기적인 노래를 불렀고 또 그런 노래가 사람들을 열광시키고 인기를 끌었습니다. 가인의 후손들로 가득 찬 세상은 온통 어두움과 절망과 파멸을 향해 치닫는 것만 같습니다. 이런 죄악 된 세상을 볼 때 과연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가? 잠시 졸거나 주무시고 계시는 것은 아닌가 회의가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그 시대에 무엇을 하셨습니까?
  25절을 보십시오. 다 같이 읽겠습니다.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하와는 셋에 대해서, 하나님이 아벨 대신에 주신 ‘다른 씨’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벨과 같은 순종과 희생의 역사가 다시 시작될 희망을 보았습니다. 그런 셋의 아들은 에노스였는데 그 때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몇 가지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친히 구속역사를 주권적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하나님은 아벨을 대신하여 아담과 그 아내 사이에 셋이라는 아들을 주셨습니다. 사탄은 가인을 통해 믿음의 씨가 될 아벨을 죽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영원히 갈라놓고자 했지만 하나님은 죽은 아벨 대신에 셋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후손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믿음의 사람들을 이어가셨습니다. 이를 볼 때 아무리 사탄이 믿음의 사람들을 박해하고 때론 죽이기까지 하여도 하나님께서 친히 구속 역사를 주권적으로 이루어 가신 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대마다 셋과 같은 거룩한 그루터기들을 예비해 두시고 이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캠퍼스도 시대 분위기에 따라 점점 물질적이고 세속적이고 육신적으로 변해가서 도무지 누가 성경말씀을 공부하며 예수님의 제자의 인생을 살 것인가 회의가 들 때가 많습니다. 잘 자라던 아벨과 같은 소원 있는 양이 어느 날 사탄의 미혹에 넘어가 센터를 떠나갈 때 절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가운데서도 셋의 후손들을 남겨두시고 믿음의 역사를 계승해 나가고 계십니다.
둘째,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세상을 이기는 길입니다. 5장은 하나님이 죽은 아벨 대신 허락하신 셋의 후손들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에 보면 그들이 어떤 문명을 만들고 어떤 기술을 발전시켰는지, 또 어떤 업적을 이루었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내용이 그냥 자녀들을 낳고 살다가 몇 살에 죽었다는 이야기의 단순한 반복입니다. 셋의 후손인 이 사람들은 그 긴 긴 세월동안 도대체 뭐하고 살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들 자손 중에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이 있고, 나중에 세상을 구원한 의인 노아가 나옵니다. 이들은 약 100년에 한 명씩, 자주 낳은 것도 아니고 100년에 한 명 정도 믿음의 자녀를 낳은 것 외에는 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이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 믿음의 계보가 면면이 이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한쪽에서는 가인의 후예들이 하나님 없는 문명을 발전시키며 화려하고 편리하고 한편으로는 강포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중에도 하나님은 조용히 셋의 후손들을 통해 그들과는 다른 믿음의 역사를 신실하게 이루어 가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은 화려한 가인의 후손들을 주목하고 그들이 이룩한 문명과 문화와 업적을 동경하며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목하시고 쓰시는 사람들은 셋의 후손들입니다. 그럼 셋의 후손들에게서 어떻게 믿음의 사람들이 계속 이어져 올 수 있었을까요? 4:26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가인의 후손들은 찬란한 문명과 문화는 꽃 피웠지만 그들의 삶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없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없는 영적으로 죽은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셋의 후손들은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들은 성을 쌓고 가축을 치고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일 보다 영적인 일에 먼저 마음을 들였습니다. 가인의 후손들이 죄를 짓고 칼의 노래를 부를 때 셋의 후손들은 여호와를 의지하여 죄와 싸우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가인의 후손들이 날카로운 기계로 서로 빼앗고 복수할 때 셋의 후손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서로 사랑하고 섬겼습니다. 이런 셋의 후손가운데서 에녹이 나오고 노아가 나오고 아브라함이 나오며 다윗으로 이어지고 마침내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게 됩니다. 이를 볼 때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출세를 하거나, 탁월한 업적을 세우는 것 보다 더 귀하고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하는 삶인 것을 배우게 됩니다. 이런 자들을 하나님은 주목하시고 지금도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귀하게 사용하여 주실 것을 믿습니다.

결론적으로, 아담에서 시작된 죄는 후손으로 갈수록 점 점 더 심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생 아벨을 죽인 살인자 가인에게도 표를 주셔서 그를 보호해 주셨습니다. 죽은 아벨 대신에 셋을 허락하셔서 믿음의 혈통을 이어가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죄인들을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을 감사 찬송 드립니다. 우리가 이 시간 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심령에 깊이 영접해야 하겠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새 삶을 사는 우리가 이제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베풀어야 하겠습니다. 죄를 범하고 가인처럼 유리방황하는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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