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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Worship Message
주일예배메시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9-07-28 (일) 15:26
분 류 요한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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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여름수양회 주제3강]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2019년 여름수양회 주제3강                                                     함바나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말씀/요한복음 21:1-25                                            
요절/요한복음 21: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예수님이 갈릴리 바닷가에 나타나신 것은 부활 후 세 번째 출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지만 현실은 여전히 살벌하고 힘들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제자들까지 싸그리 붙잡아 죽이려는 분위기입니다. 이에 힘든 예루살렘을 떠나 물고기를 잡으러 갑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찾아오셔서 그들을 향한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 보여주셨고, 양들을 먹이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갈릴리 바닷가의 만남은 제자들의 일생에 있어서 잊혀지지 않는 회복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이 시간 변함없는 예수님의 사랑을 영접하고 또 양을 먹이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영접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1장. 와서 조반을 먹으라 (1-14)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물고기를 잡고 있을 때, 해변에서 숯불을 피워 놓고 떡과 생선을 굽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밤이 맞도록 물고기를 잡았지만 고기잡이에 실패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라 그러면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말씀하셨고 과연 그 말에 순종했더니 많은 고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베드로에게 누가복음 5장에서 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말씀하시며 자기를 불러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신 사건의 데자뷰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심을 깨닫고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막상 뵙자 그들은 예수님을 더 가까이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속에 어떤 기억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배신하며 도망간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뻘쭘하게 서 있는 제자들의 무안함을 덜어주시기 위함인지 너희에게 잡은 생선이 있느냐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직접 생선과 떡을 구워놓으셨고 그것으로 부족하다며 제자들이 잡은 생선을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전혀 정죄하는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에 활력이 생겼습니다. “예수님 그럼 제가 아주 씨알이 굵은 놈으로 몇 마리 가져오겠습니다.” 그렇게 달려갔다가 물고기를 세어보니 153마리였습니다. 그물이 찢어지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였습니다. 팔딱팔딱 뛰어오르는 물고기를 쥐어 잡으며 쪼그라들었던 제자들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습니다. 방금 잡은 자연산 물고기를 숯불 위에 올려놓자, 구수한 생선 기름냄새가 피어올랐고 차가운 새벽공기를 밀어내고 제자들 가슴속으로 파고들었습니다. 뜨근뜨근한 숯불의 열기와 노릇노릇 익어가는 구수한 떡 냄새는 제자들의 안식처가 되어주었습니다. 며칠 전 그렇게 끔찍한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이십니다. 보통 죽음 같은 고난을 받다가 돌아온 분들은 비장합니다. ‘일사각오 - 죽을 각오로 덤비면 죽음도 이긴다 복창!’ 외치며 정신무장을 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즐겁게 비치파티를 여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운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렇게 배식하셨습니다. “예수님, 떡 정말 맛있어요!” “그래 많이 구워놓았으니까 갈 때 조금씩 싸가!” “생선도 맛있어요!” “이제 제가 구울 테니 예수님 여기 앉아서 드세요!” 예수님이 구웠다가 베드로가 굽고 다시 요한이 구으며... 그렇게 돌아가며 원없이 구워 먹었습니다. 냠냠 쩝쩝 호호 히히... 아무리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았습니다. 디베랴 바다 위로 어느새 웃음꽃이 피어올랐습니다. 숯불처럼 뜨거운 사랑이었고 아무런 말이 필요 없었습니다. 죄송하다는 말도,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도 필요 없었습니다. 숯불 같은 예수님의 사랑은 제자들의 연약함과 허물과 죄악을 다 녹여버렸습니다. 세상에 대한 두려움, 절망과 부담감은 눈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조반을 먹으라’ 이것은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전이나 부활 후에나 변함없이 제자들을 격려하고 힘을 불어넣기에 힘쓰셨습니다. 험악한 세상을 보기보다, 부족한 제자들을 보기보다 하나님을 믿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자들과 함께 하사 지키시고 키우실 것을 믿으셨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이런 사랑을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제자들에게 조반을 먹이신 것처럼 예수님은 성령으로 함께 하사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 문제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먹여주시고 입혀주십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이 제자들을 먹이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다시금 일어설 수 있습니다. 때로는 두려움에 짓눌리고 빈 그물로 낙심할지라도 다시금 제자로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인하여 감사찬송 드립니다.

제2장. 내 양을 먹이라(15-25)
예수님은 조반 먹은 후에 베드로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라고 부르셨습니다. 4복음서를 모두 찾아봐도 요한의 아들 시몬아 라고 부르시는 곳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본문의 요한복음 21장 말고 딱 한군데에서 더 나오는데 그것은 바로 마태복음 16장 17절에 베드로가 불후의 신앙고백을 했을 때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부르실 때 바로 그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께 신앙고백한 것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시몬이라는 이름을 제하시고 베드로 반석이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실 것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베드로라는 이름을 제하시고 친근하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라고 불러주고 계십니다. 이렇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라고 불러주신 것은 수제자이기 전에, 또 교회의 수장이기 전에, 있는 모습 그대로의 시몬을 받아주시는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살면서 하나님이 나에게 가지시는 기대보다 사람들이 내게 갖는 기대에 더 많은 마음을 씁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기대를 만족시키면 자기도 모르게 우쭐하여 교만하여지고, 거기에 미치지 못하면 부끄러워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지 않을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가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는 분이십니다. 베드로는 배반자였던 자기를 용서하고 다시 회복시켜 주신 이 은혜의 경험 때문에 시련의 먹구름 핍박의 폭풍이 불어올 때, 아시아에 흩어져 있는 교회를 향해 불 시험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기뻐하라고 외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이 은혜로 회복시켜 주셨기 때문에 오히려 더 강하고 담대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를 있는 그대로 불러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를 새로운 사람이 되게 했던 것입니다. 어떤 처지에 있든지 있는 모습 그대로 부르시는 그분 앞에 나아와 회복의 은혜를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15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으시겠습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예수님은 세 번이나 반복하여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을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지나간 과오나 앞으로의 각오에 대해서, “앞으로 배반하지 않을 거지?” “물고기 잡으러 안 갈 거지?” 이렇게 묻지 않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존경하느냐?” “내 명령에 절대 복종하겠느냐?” 묻지도 않으셨습니다. 오직 지금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물으셨습니다. 이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네가 지금 살아있고 앞으로 살아가는 이유가 예수에 대한 사랑인지를 물으셨던 것입니다. 얼마 전 베드로는 예수님보다 자기 목숨을 더 사랑했기 때문에 저주하면서 까지 예수와 나는 상관없다며 부인했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주님은 베드로에게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베드로의 본 마음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임을 아신 것입니다. 잠시 두려움에 붙잡혀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을 뿐이지, 베드로의 마음은 주님 사랑으로 가득했음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주님 사랑이 배반자 베드로를 교회의 반석으로 살게 할 것을 확신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는 베드로가 예루살렘 교회를 맡아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자격이 필요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모든 자격에 대한 질문을 밀쳐놓으시고 오직 한 가지만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 인생의 핵심문제는 실패가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주님 사랑을 놓치지 않으면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합니다. 두려움이 변하여 기도가 되고, 한숨이 변하여 찬송이 됩니다. 실패하면 실패한 그 자리에서 주님 사랑을 깊이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번의 실패가 인생의 끝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쩌면 지금보다 더 많은 고난의 파도를 넘고 더 쓰라리고 가슴 아픈 일을 만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경우에도 어떤 실패 속에서도 예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며 실패한 제자들을 위해 정성껏 식탁을 차리시는 그 마음으로 우리를 위해 말씀의 식탁을 차려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넘어진 자를 다시 일으키시고, 실패한 자가 미끄러질 때에 다시 붙들어 주셔서 우리 주님이 미끄러질 때에 나를 붙드셨다고 기억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또 반복하여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과 양을 먹이는 것이 불가분의 관계임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양을 먹이고 양을 먹이면서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는 선순환이 일어납니다. 양을 말씀으로 먹이면 그 말씀이 또 내게 역사하여 내 영혼을 먹입니다. 목자가 양을 사랑할수록 목자 예수님의 사랑을 실제적으로 체험하게 됩니다. 세상의 유혹과 두려움에 붙잡힌 영혼과 씨름하면서 나를 붙드시고 씨름해주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거기서 세상을 이길 힘과 용기를 얻습니다. 목자의 심정과 인내와 지혜를 알게 되고 기도를 배웁니다. 결국 양을 먹이는 것이 나를 먹이고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비결입니다. 자기와 자기에게 속한 것만을 챙기는 사람은 안전하고 지혜로운 것 같으나 예수님에게서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아무리 구원의 은혜가 크고 세상의 성공을 거둘지라도 양을 먹이지 않으면 점점 형식주의와 자기 한계 속에 갇혀 버립니다. 베드로가 양을 먹이지만, 아울러 양들도 베드로의 영혼을 먹이는 것입니다. 목자가 양을 먹이는 것이 예수님과 하나 되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우리도 수양회에서 은혜받은 것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예수님의 양을 먹이는 사람들로 살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이제 베드로의 미래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제 늙어서는 그가 팔을 벌리면 남이 띠를 띠우고 원치 않는 곳으로 다닙니다. 자신의 뜻대로 살 수 없고 다른 사람의 의지에 의해서 따라가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죽을 것을 아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순교를 예언하셨습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베드로는 로마의 핍박을 피해 도망을 가다가 예수님이 맞은편에서 오시는 것을 만났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꾸오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는 유명한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네가 버리고 온 로마를 위해 나는 다시 못 박히러 들어가노라 대답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거기서 돌이켜 로마로 돌아가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20절에서 23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그 제자 요한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요한은 어떻게 될 것인가 물었습니다. 나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는데 요한은 안 죽느냐고 물었습니다. 자신이 죽으면 요한도 함께 죽어야 위로가 될 것 같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데 비교의식이 생기면 따르기가 어렵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바라볼 때는 마음이 뜨거웠습니다. 그러나 요한을 보자 이내 그 마음이 식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이 비교의식입니다. 내가 못 살아서 힘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더 잘 살아서 힘이 듭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서 헌신해서 피해의식이 드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보다 덜 희생하니까 피해의식이 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는 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각 사람 마다 가야 할 길이 있고 자기 십자가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재림할 때까지 그를 살게 할지라도 무슨 상관이냐 말씀하셨습니다. 쉽게 말하면 요한에 대해서 신경을 끄라는 것입니다. 너나 잘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데는 다른 사람을 상관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나의 길을 가면 됩니다. 한 달란트를 받았으면 한 달란트를 가지고 충성하고, 다섯 달란트 받았으면 다섯 달란트 받은 대로 충성하고, 열 달란트 받았으면 열 달란트로 충성하면 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은 그분께 맡기고 나는 나의 일에 충성하면 됩니다.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 신입생 때부터 허리가 아파 건강문제를 계기로 성경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인기 절정의 그룹 015B의 마지막 앨범 farewell to the world에서의 종말론적 세계관에 깊이 심취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일대일 목자님을 통해 누가복음 21장 11절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말씀과 또 다니엘 12장 4절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말씀을 주셨습니다. 당시 제가 살던 동네에서도 약하기는 했지만 공부하고 있던 학교 건물이 아주 잠깐 흔들리는 경험이 있었습니다. 정말 현재 제가 살고있는 이 시대를 향해 예고하시는 말씀으로 와 닿았습니다. 그 후에도 마태복음 7장 24-27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요한복음 4장 13,1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말씀을 제 심령에 주셨습니다. 이렇게 많은 말씀을 주셨지만 저는 방학만 하면 고향으로 내려가서 산과 들과 바다로 다니며 지친 심신을 달랠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기말고사 생물학에서 F 학점을 받아 방학 기간 꼼짝없이 서울에 남아 계절학기를 수강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계절학기가 끝나는 바로 다음 날이 여름 수양회가 시작하는 날이어서 마치 누군가가 잘 짜놓은 시간표대로 제 인생이 흘러가는 것 같은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만약 그 누군가가 진정 하나님이시라면 왜 자꾸 나를 귀찮게 하시는지 수양회에 가서 꼭 만나보고 싶다고 기도 아닌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어주시고 제가 믿음으로 드리는 죄의 고백을 들으시고 저의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시고 저의 그리스도가 되어 주셨습니다. 세상 정욕으로 가득 차 있던 제게 말씀을 주시고 훈련도 주시고 자격이 없지만, 양도 보내주셔서 주님의 양을 먹이는 목자의 자리를 계속해서 지킬 수 있게 인도해주셨습니다. 주님 안에서 믿음의 가정도 이루게 하시고 토끼 같은 세 아들도 주셨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섬겨도 영육 간에 아무런 열매가 없어 보이는 제 신앙에 회의가 들어서인지 저는 마음을 잡지 못하고 힐링을 한다며 틈만 나면 가족을 데리고 가까운 근교로 나가 자연을 벗 삼아 다니기를 즐겼습니다. 그러다가 터질 것이 터지게 되었습니다. 2013년 하반기부터 슬슬 아프기 시작하던 허리가 도무지 앉아서 예배를 드리기 힘들 정도로 통증이 커지게 되었습니다. 진통제를 달고 살았지만, 새벽마다 허리가 아파 깨기 일쑤였고, 진통제로도 통증이 잡히지 않아 응급실에 들락거리는 것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이 한창일 때, 다른 사람들이 대한민국의 경기를 보기 위해 새벽에 깨었지만, 저는 허리가 아파 깼습니다. 허리가 몹시 아파 수술 외에는 다른 해법이 보이지 않았지만, 수술은 또다시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처자식도 먹여 살려야 하는데 저는 절망의 끝에서 기도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만일 죄인의 허리를 고쳐 주시면 열심히 피싱하고 양들과 성경공부 하겠습니다라고 서원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한 때 저를 치료한 경험이 있는 선생님과 극적으로 연락이 닿게 하셨고, 저의 허리는 점점 좋아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 저는 일주일 중 하루를 쉬면서 건강도 챙기고 캠퍼스 역사에도 좀 더 열심을 드리려 했습니다. 쉬면서 등산도 가고, 주와 복음역사를 섬기며 캠퍼스도 오르고 수입은 좀 줄었지만,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느 순간 주객이 전도되어, 점점 등산이 캠퍼스 심방을 압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스스로 띠를 띠고 다니며, 먼저 한국에 있는 모든 국립공원을 모조리 탐방하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북한산, 도봉산, 치악산, 한라산, 설악산, 오대산, 하나씩 정상을 정복하며 짜릿한 쾌감을 맛보았습니다. 이제 남은 12개 국립공원 정복도 머지않아 보였습니다.
그러나 허리 치료를 담당하던 선생님이 뇌종양이 생기면서 치료가 무기한 중단되었고, 도무지 다른 치료의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허리는 또다시 점점 안 좋아지고 이제는 무릎마저 탈이 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2016년 12월 저는 베드로후서 3장 12절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말씀을 통해 과연 내가 간절히 사모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었고, 제가 사모하는 것은 하나님의 날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아직 오지 않은 바로 나의 쨍하고 해 뜰 날임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죄인에게 이 세상 소망이 가득하였을 때, 저는 이런 작은 건강문제 때문에 절망하고 주저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울러 죄인에게 건강문제를 통해 이 세상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찬송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제 마흔이 넘어서 처음 일대일 목자님을 만났을 때 목자님의 나이보다 조금 더 많고, 처음 GBS를 담당하셨던 목자님의 나이보다는 훨씬 더 많습니다. 나이는 들지만, 마음은 20대라는 말은 사실입니다. 나이는 불혹이지만 20대 때처럼 여전히 유혹에 넘어가기를 잘하고 부족한 점도 많은데 괜히 대놓고 이런 말을 하면 추해 보이고 나잇값을 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학생들에게 예전처럼 스스럼없이 다가서기도 애매하고, 괜히 뭐라 하면 꼰대라는 소리를 듣기 때문에 조심스럽습니다. 예전에는 몇몇 목자님들의 눈치만 보면 되었는데, 이제는 후배 학생 동역자님들께 모범을 보여야 한다 생각하니 훨씬 더 부담스러운 것으로 여겨집니다. 선배 목자님들보다 후배 목자님들이 더 무서웠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눈에 보이는 후배 동역자님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양을 치기가 쉬웠습니다. 죄인은 어느 순간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보다 모범을 보여야 하기 때문에 신앙생활하는 사람으로 전락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하나님을 사랑해서 양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저 사이에 그 누구도 무엇도 끼어드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족도, 자녀도 예수님이 그렇게 먹이고자 하시는 양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죄인이 사람들 앞에서 살지 말고 있는 모습 그대로 부르시는 예수님 앞에 나아가 다시금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고 예수님을 사랑해서 양을 먹이는 자리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에게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언제나 요란한 행사나 복잡한 결심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도 고요한 시간 갈릴리 바다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우리에게는 아무도 없는 골방에 혼자 무릎을 꿇고 앉은 시간이 그 시간일 수도 있고, 아무도 없는 고요한 밤 시간에 성경을 펴고 말씀을 읽는 시간이 새벽 그 갈릴리 바다일 수 있습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가난한 마음으로 우리 주님 이외에 내가 갈수 있는 곳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예수님께로 돌아와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서고 엎드러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주님을 향해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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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9 창세기 [2019년 창세기 제9강] 아브람을 부르신 하나님 관리자 2019-05-12 961
588 누가복음 [2019년 부활절 수양회 제2강] 청년아 일어나라 관리자 2019-05-05 1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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